CATANDALIEN
스팁토니 _ 벚꽃흘려보내기 본문
페퍼가 건강한 여자아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새벽 3시였다. 새벽에 문자가 오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낯익은 여자가 아주 자그마한 아이를 안고 있었다. 마침 날이 만우절이라 장난이 아닐까 싶어 해피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건강한 딸아이라고 말하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의 피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4월 1일, 오늘은 거짓말같이 토니가 죽은지 3년이 되는 날이었다.
축하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내뱉고나서 다시 잠에 들려는 찰나에 다른 문자메시지가 와서 확인해보았더니 이번에는 냇의 문자였다. 괜찮다면 페퍼의 순산기원과 토니의 3주기를 추도하는 모임을 같이 가지자는 거였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었지만, 스티브는 꿋꿋이 괜찮다고 문자를 찍어보냈다. 벌써 3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걱정도 수그러지고,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간지 오래니 자신만 안된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계속 안에서 차고 올라오는 느낌에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베드 테이블을 내리쳤다. 부서진 나무조각에 손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토니, 그는 점점 약해져가는 목소리로 토니를 불렀다. 토니, 토니, 제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스티브 로저스, 캡틴 아메리카를 표현하는 단어들 중에서 희생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영웅으로 기억된 사람들에게는 어딘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정신이 깃들여져있다고들 했다. 토니 스타크도 그 영웅으로 기억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고, 당연히 그의 '희생'도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로 남아있었다. 치타우리가 침공해왔을때 핵폭탄을 들고 우주로 나갔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희생'했다. 만우절에 흔히 하는 거짓말같은 일이었다. 스티브는 그 소식을 잠에 들려는 찰나 걸려온 전화를 통해 들었다. 페퍼는 흐느끼고 있었다.
토니를 노리던 테러업체에서 그를 향해 생화학테러를 시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목표가 토니뿐만이 아닌 스타크 인더스트리, 더 크게는 뉴욕 전역을 향해있었고 토니는 그것을 막으려 앰플이 깨진 방안으로 들어가 병균들을 제거했다. A타워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다른 아이언맨 수트들을 차마 불러낼 시간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토니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모든 것은 30분만에 일어났고, 모두들 믿고싶지 않은 거짓말같은 일이었다.
스티브는 그 소식을 전해듣고는 몇분동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가 날짜를 확인하고는 거짓말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어째서 토니가 죽었다는 얘기를 하냐고, 질이 정말 나쁜 농담이라고. 믿고싶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허탈했다. 그리고 페퍼의 목소리는 더 허탈했다. 토니가 죽었어요, 죽었어요, 거짓말이 아녜요.
토니로부터의 메세지가 도착한 것은 스티브가 급히 나가려는 찰나였다. 4월 2일로 넘어가는 순간에 전화가 울렸다. 토니 스타크, 라는 이름에 스티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거짓말이었구나. 토니, 하고 저 혼자만 사랑하던 이의 이름을 부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토니, 페퍼가 방금 나에게 나쁜 거짓말을-
-"이제서야 이 말을 전하게 된 것을 용서해주길 바래, 스티브. 단지 내 말들을 거짓말이라 믿게하고 싶지 않았을뿐이야. 이제 한 10분 정도면 난 죽어. 이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짓는 말이지. 아마 온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엄청 괴롭게 죽게되지 않을까 싶어. 예전에 죽을뻔 했을 적에는 정말로 죽는게 미칠듯이 무서웠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평안한건지 몰라. 전화 끊지마, 지금 꼭 들어야 하는거야. 아마 내 시신을 확인하지도 못할거야, 나라도 날 화장시킬테니까."
"토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건 알고 있었어. 사실 난 오늘 당신에게 고백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으니 지금 말할게. 잘 들어, 난 당신이 있어서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해. 나도 너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 아마 이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 되겠지만, 그래도 기억해. 꼭 기억해줘. 토니 스타크라는 인간은 스티브 로저스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랑하고 있었어. 만우절의 나쁜 거짓말이 아냐, 가기 전 당신에게 남겨주는 마지막 선물은 더더욱 아니야. 죽기 전에야 이 말을 하게 된걸 용서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약속해줘, 절대로 괴로워하지 말아줘. 어차피 난 죽을 인간이었고, 그 시간이 잠깐 앞당겨진거뿐이야.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찾아줘. 모두 사랑을 찾을거야, 마지막에는. 당신도 다른 사랑을 찾을테니까. 괜찮아, 이 순간도 빠르게 지나갈테니-"
"싫어, 토니. 그건 싫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거짓말이라고 해줘. 이렇게 장난치지마-"
"만약에라도 괜찮다면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음 좋겠어. 살고싶어. 당신을 지금 당장 만나고 싶어. 스티브, 잊지마. 제발 약속해줘. 잊지마. 절대로, 절대로."
전화가 끊기고 나는 소리가 이렇게 심장을 치는 줄 알았다면 절대로 그 전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토니의 희생은 세계에 널리 퍼졌고,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뤄졌다. 세계의 유명인사란 유명인사들은 다 모였고 저마다의 추도사를 읊었다. 그 추도사들의 대부분은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의 인품과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줬던 희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들을 조용히 듣던 스티브는 토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너는 살고싶어 했어. 살아서 날 만나고 싶어했어. 토니는 희생을 후회하고 있었을까, 장례식내내 멍한 표정으로 빈관을 쳐다보며 스티브는 과연 진짜로 토니가 스스로 죽기를 원한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모두를 위해 희생했던 때를 생각해냈다. 사실 자신도 비행기를 타고 빙하에 쳐박던 순간 살고 싶었었다. 미친듯이 살아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싶었었다. 토니도 분명 그러했다.
바이크를 타고 밤거리를 지나니, 일본에서 왔다는 분홍빛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허무하게 져가는 꽃잎들이 어쩐지 모르게 토니를 연상시켜서 슬펐다. 스티브는 아직도 토니의 말을 따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토니의 그 잊지마, 라는 말이 그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사랑한다, 라는 말은 얼마나 큰 주박인가. 그것도 허무하게 죽은 이가 내뱉는 그 말이. 토니는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고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생각했지만 그래도 스티브는 그 죽음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저 꽃잎이 지는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토니가 죽은것만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피곤에 쩔어있는 해피가 스티브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만우절 선물인줄 알았겠죠? 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영상을 보여주었다. 온몸이 붉은 갓 태어난 아기가 온갖 인상을 써가며 울고 있었다. 토니가 죽은 날 태어난 아기라니, 스티브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애써 웃음을 지며 아이를 지금 볼 수 있냐고 물었다. 분명 안될거라고 생각하고 한 질문이건만, 해피는 흔쾌히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졸지에 스티브는 해피를 따라 페퍼의 병실에까지 가게 되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CEO가 머무는 병실답게 병실은 꽤나 호화로웠다. 보통은 아기를 떼어놓건만, 페퍼정도 되는 여성의 아기이니 병실 안에 따로 아기를 위한 침대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페퍼는 산고에 지쳐 잠들어있었고, 아기는 언제 인상을 쓰고 울었다는 냥, 똘망똘망한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수건에 온 몸이 감싼채 얼굴만이 보인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징그럽기까지 했지만 그런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스타크씨가 구한거에요."
"응?"
"스타크씨가 구한 아이에요."
만약 그때, 스타크씨가 우리들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태어나지 못했을 거에요. 해피의 말은 가라앉아있었다. 스티브는 토니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난 아기는 좋아, 뭔가 생명력이 느껴지잖아. 스스로 자식은 갖고싶어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아기를 좋아했다. 페퍼가 아이를 낳았다면 분명 토니는 기뻐했을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구한 아이라면 더욱 더. 네가 구한 세상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면 분명, 분명히. 스티브는 고개를 돌리고는 급히 병실문을 열었다. 어딜 가냐는 소리에 애써 눈물을 참으며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는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위험하다, 곧 터져나올 것 같았다.
토니가 보고싶어.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서 그 넓은 등을 안고 싶어서, 잔뜩 굳은살이 박히고 기름범벅인 그 손을 잡고 싶어서, 가끔씩 붉어지는 그 볼에 입을 맞추고 싶어서, 그 의기양양한 모습에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서 당황하게 만들고 싶어서. 어째서일까, 그가 죽었다고 들었을때, 멀리서나마 시신을 확인했을 때,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었을 때에도 그에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지금은 전할 수 없는 것들을 전하고 싶은걸까. 사랑한다고, 원한다고 귓가에 속삭일 수 없는데. 아직까지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토니."
잊지마, 당신의 사랑을 찾아. 스티브는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은 그 말들을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재생하고 다시 재생했다. 잊지마, 토니의 목소리엔 울음이 서려있었다. 울고싶은 것을 꾹 참고 있었을 것이다. 무서웠을 것이다, 슬펐을 것이다. 혼자서 죽음을 받아들였을 그 때엔, 그때의 토니는.
급히 병원을 빠져나갔을 때엔 바람이 더 심하게 불고 있었다. 허무하게 져버린 이국의 꽃들은 바람에 흩날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만약 토니가 보았다면 너무 빠르다고 슬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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