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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토니 _ Moon Light Anthem

rabbitvaseline 2015. 8. 20. 04:15








Moon Light Anthem / 아라이 아키노








그는 순간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을 인정해야했다. 원래부터도 전형적인 금발이라며 자주 놀려대곤 했던 블론드가, 적들의 피로 살짝은 붉은 기까지 보이는 그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렸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손을 대면 곧바로 깨질 것 같이 얇은 조각상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 얼굴과 뺨에는 생채기가 가득했지만 그의 조각같은 얼굴에는 아무런 흠도 되지 않았다. 속눈썹은 왜 저리 빛나고 긴거지? 목선마저 완벽했다.


"토니?"


아.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인정해야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스티브 로저스를 사랑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자신이 호모섹슈얼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손만 대면 여자가 굴러들어오는데다가 자신도 여자의 몸을 사랑했다. 부드러운 살결과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체취를 사랑했고 여성이 내뱉는 목소리마저 좋아했다. 그리고 그 여성들 중 그가 제일 사랑한 것은 페퍼 포츠였다. 아마 세상에 내로라하는 미녀들을 한트럭으로 갖다 바친다 하더라도 페퍼만큼은 못하리라. 그녀의 살짝은 주근깨가 서린 피부도, 살짝 붉은 기운이 보이는 머리카락도, 살짝은 낮은 목소리도, 탄탄해서 복근마저 보일 것 같은 몸도, 그녀의 뛰어난 머리도.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했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속으로만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스티브 로저스, 즉 캡틴 아메리카로 불리는 동료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무심코 깨달았을 때는 당장에라도 리볼버를 제 관자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총을 찾는 와중에도 스티브 로저스가 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또한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수렁은 너무나도 깊었다. 결국 총을 찾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있던 순간에마저 그는 스티브 로저스가 보고 싶었다.


"괜찮아요, 토니?"


심지어 페퍼와 잠자리를 가지려고 했을때에도 조각상은 그의 머릿속에 나타나서는 욕망을 헤집고 다녔다. 페퍼와 키스를 나누면서 스티브 로저스의 입술을 떠올렸고, 그녀의 목에 제 코를 부빌 때에도 스티브 로저스의 목덜미가 생각났다. 급기야 그녀의 계곡에 손을 댈 때에까지 스티브 로저스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스티브에게 키스하고 싶어.'


갑작스레 떠오른 그 생각에 토니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열락에 잠겨 신음을 토해내던 페퍼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그가 얼어붙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괜찮느냐고 물었다.


"미안, 요즘 컨디션이 안좋은것 같아."

"그러길래 야근도 작작 하랬죠. 안되겠어요, 무리하지 말아요 토니."


페퍼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씻어야겠다는 핑계로 욕실로 달려갔다. 몇번의 구역질 끝에 그는 세면대에 스티브 로저스와 함께 먹었던 저녁을 토해냈다. 역하고도 신 냄새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토한 것들을 보다가 그것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흐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마저 그는 스티브 로저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나 바라고 또 바랬건만, 정작 다시 얼굴을 마주했을 때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언제나처럼의 의견충돌은 그날따라 더 심해서, 스티브 로저스는 그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남기고 재빨리 자리에서 사라졌다. 실망했네, 라는 말이 화살처럼 심장에 꽂혔다. 그는 한순간 휘청거리다가 다시금 제정신을 차리고는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농을 던지고는 자신도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젠장!"


실망했다, 라고 경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자신을 모욕하는 스티브 로저스마저 사랑스러웠고 섹시했다. 그는 랩으로 가는 와중에 제 머리를 헤집으며, 드디어 자신이 미쳤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렸다고 경악했다. 사실은 싸우는 와중에도 그 하얀 뺨에 손을 대고 싶었다. 그 파란 눈동자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거칠게 저은 뒤 랩에 들어섰다. 이대로는 무리였다.




이후 몇번의 고성이 오간 논쟁을 끝내고 토니는 조용히 페퍼와 이별했다. 그는 연인으로서 도저히 페퍼를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페퍼는 처음에 무어라 말하며 항의하려다가 연인의, 서글프다못해 죽어가는 눈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순순히 이별을 받아줄 수 밖에 없었다.


"토니,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서글프게 하죠?"

"미안해."


그는 끝까지 아무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기업인으로서 포커페이스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들킬 염려도 없었다. 평소대로 동료로서 스티브 로저스의 앞에서 논쟁을 하고 회의를 하고 가끔씩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스티브 로저스는 생각보다 편식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군인답게 먹는 시간도 빨랐다. 포크를 들때마다 오른쪽 팔꿈치를 미세하게 떨곤 했다. 먹을 때에는 큰 조각으로 먹는다. 논쟁을 할 때에는 눈썹이 올라가는데 정돈은 잘 되어있지 않다. 신기하게도 속눈썹이 너무나도 길고 짙었는데, 무언가 안풀리는 일이 생기면 그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할 때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뿔테안경을 썼는데, 솔직히 그 안경을 쓴 모습은 귀여웠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는 샤론 카터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토니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다른 자리에서 스티브 로저스에게 여성과의 데이트에 관한 강연을 해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워하는 얼굴, 바보처럼 헤실거리며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동시에 토니의 심장을 갈가리 헤집고는 잘게 찢었다. 차마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며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토니는 스티브 로저스에게 데이트할 때의 옷차림에 대해서 가르쳐주고서는 주문까지 해주었다.


"정말로 고맙네,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오, 아냐아냐. 우리 캡시클나리가 데이트에서 망신을 당하면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 하겠어."


스티브 로저스는 수줍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대상이 나였다면,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스티브 로저스가 사라지자마자 토니는 바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얼음도 없이 미지근하게 마시는 독주는 너무나도 썼지만 오히려 그것이 위로가 되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환상곡풍으로(Quasi una fantasia) 작품번호 27의 2'


데이트 다음날 스티브 로저스가 건넨 것은 낡은 LP였다. 페기의 유품중 물려받게 된 것인데, 데이트를 도와준 답례였다. 다행히도 데이트는 성공리에 마친 모양이었다. 내심 숙취로 아픈 속을 숨기며 잘 나갔느냐고 묻자, 평소 자신의 앞에서는 강압적인 태도까지 보여줬던 스티브 로저스가 눈을 깔며 얼굴을 붉혔다. 평소 그렇게나 입맞추고 싶었던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가 닫혔다. 단 세단어가 흘러나왔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을 헤집기에는 충분했다. 토니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군. 그렇지만 일단 그쪽도 시도는 해봐야되는거 아니겠어? 너무 수줍음만 타도 여자쪽에서는 싫어해."

"역시 그런가?"

"그럼. 나중에 가르쳐줄테니까 꼭 시도해봐. 아, 물론 지금은 안돼. 솔직히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좋았어."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스티브 로저스를 응원했다. 그녀가 나에게 키스했네. 그 세마디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너무나도 괴로워서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수줍게 내뱉은 '목소리'를 그는 지울 수 없었다.




스티브 로저스가 선물한 LP는 아주 유명한 곡이었다. 턴테이블에 LP를 올리고 소파에 몸을 묻었을 때, 아주 유명하고도 잘 알려진 피아노 선율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클래식에 대한 기본지식만 갖고 있던 토니도 무슨 곡인지 알고 있었다. 베토벤이 죽고나서 어느 평론가가 이 아름다운 피아노곡에 풍경에서 딴 별칭을 붙였다. 그날 밤 스티브 로저스의 뒤에서는 커다란 만월이 떠 있었다. 달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딱히 조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달빛은 스티브 로저스의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렸고 토니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다시금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때를 떠올렸다.


"토니, 괜찮나?"


멍하니 서 있던 자신을 향해 스티브 로저스는 손을 내밀었다. 짙은 피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것마저 향기로웠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제 투박한 손을 눈가에 갖다 대었다. 젠장, 다시금 욕이 튀어나오다가 결국은 흐느낌으로 변하였다. 토니는 맹렬하게 흐느끼며 울부짖었지만, 다행히도 울음소리는 만월소나타에 가려져 사그라들었다.




짙은 피냄새는 그가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다시금 회상시켜 주었다. 마스크가 들리며 외부공기를 들이마시고나서야 옆에 스티브 로저스가 주저앉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란색 마스크를 쓰고 있던 스티브 로저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여져 있었고, 자신은 그런 그의 옆에 누워있었다. 그는 재빨리 일어서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니 주려고 했다. 하반신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팔에 힘을 주려고하니, 그제서야 격통이 그의 팔을 꿰뚫었다. 토니! 스티브 로저스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소리쳤다.


"괜찮네, 무리하지마. 움직이지 말게... 토니..."


오른손이 사라져있었다. 무언가에 찢겼는지 단면은 처참했다. 그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제 옆에서 얼어붙은 스티브 로저스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붉은 모습은 처음 보았는데, 오, 그것마저도 아름다웠다. 출혈은 찢겨져나간 오른손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왼쪽 복부에는 깔끔하게 파이프가 꽂혀져있으며, 어차피 감각도 없는 오른다리는 커다란 파편에 깔려있었다. 그 아래에서도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니 아마 뭉개졌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무너져내리는 빌딩속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스티브 로저스를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그는 재빨리 그곳으로 날아가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짝사랑하는 남자의 최후에 걸맞는다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겼다.


"토니, 괜찮을거야. 무리하지 말게.... 제발... 괜찮아, 사람들을 불렀네. 그러니까 괜찮아질거야..."


스티브 로저스의 몸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떠는 캡틴 아메리카라니, 헤드 마스크가 벗겨져 녹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토니, 스티브 로저스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 짙은 자국을 남겼다. 너무나도 완벽해서 바라보기만 했던 손가락이 제 뺨에 닿자 순간 토니는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손가락은 서늘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심장은 피가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세차게 박동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게. 괜찮을거야, 토니."


과다출혈로 인해 생겨난 엔돌핀의 작용때문인지, 아니면 제 뺨을 쓰다듬는 아련한 손짓때문인지는 몰라도 토니는 크나큰 희열을 느꼈다. 사랑하는 이가 저만을 생각해주는 것, 제 앞에서 자신만을 위하여 슬퍼해준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더 중요했다. 어차피 사랑에 빠지고나서 목숨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스티브 로저스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토니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환하게, 정말로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이 일그러질정도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토니, 아냐. 아니네, 토니. 토니... 조금만 더 참으면 의무반이-"

"...스티브."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고 그 말에 스티브가 수긍하자 더욱 더 희열은 커졌다. 점점 머리가 멍해져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리라.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에는...자네의...친구가 되고 싶어."


그러면 자신은 언제라도 친구로서라도 사랑하는 이의 곁에 남을 수 있다. 만약 이 몸이 불타 스러진다 하더라도.


그 말에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소리쳤다.


"자네는 내 친구야! 내... 내 소중한.. 정말로 소중한 친구일세."


마치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기쁨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뺨을 쓰다듬는 손짓이 멈추었다. 토니는 조심스레, 아주 가늘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스티브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점점 시각에서 스티브의 모습이 하얗게 명멸해가고 있었다. 저를 크게 부르짖는 목소리에, 토니 스타크는 다시금 밝게 빛나는 만월 아래 서 있었던 스티브를 떠올렸다. 젠장, 하며 내뱉는 욕지거리에는 웃음과 눈물이 서려있었다.







짝사랑하면 원래는 원작 스팁토니겠지만 원작을 읽은 적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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