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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거짓말과 질투

rabbitvaseline 2015. 8. 20. 04:12




"맞아, 나 일주일 뒤에 칼버대에 가요."


나른한 아침식사를 먹고 옷을 갈아입으며, 마치 근처로 마실간다는 투로 나타샤는 말했다. 배너가 막 설거지를 끝내고 수건에 손을 닦던 차였다.


"칼버요? 아, 그러고보니 거기서 친환경에너지관련해서 세미나가 열린댔죠. 토니때문이군요."


며칠전 토니 스타크가 강연주제를 뭘로 할지 고심하는 장면을 봤었다. 칼버, 떠난지 10년은 되었건만 그래도 뭔가 그립고도 간지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배너는 칼텍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는 그 곳에서 줄곧 방사능관련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고, 연인과 곧 결혼을 하리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건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지만.


"그러고보니 그 곳이기도 하네요."

"네?"


행여나 전 애인의 이름이 나올까, 배너는 속으로 노심초사하며 나타샤의 말을 기다렸다. 어느새 나타샤는 양말을 신고 외투를 입고 있었다.


"브루스는 모를테지만... 사실 처음으로 그쪽을 본게 거기였어요. 거기서 깽판을 쳤을 때, 정말 위험했었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였지만 그 때라면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상당한 난리통을 친지라 다친 사람도 많았다고 듣고 있었다. 하지만 나타샤는 마치 연인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물론 사실이긴 했지만- 아주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다녀와요."


배너는 조심스레 나타샤의 뒷목에 소리내어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런 스킨쉽에 나타샤의 귓가라 붉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배너는 지금 칼텍에 있는 가장 큰 홀의 무대 뒤켠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새벽에 토니에게 일으켜져서는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칼버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나타샤는 이미 에이프릴로 변장을 마친 상태에서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토니의 옆에 서 있었다. 비행기는 출발한지 약 3시간만에 미국의 서쪽 끝에 도착했다.


"그래서 왜 내가 여기있는지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미스터 스타크?"

"왜 그리 딱딱하게 불러? 모교에 온게 반갑지도 않아? 여기서 강의도 했었다며."


모교는 칼텍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여기서 몇년동안 강의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만약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순탄히 교수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입안에 쓴맛이 어리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토니의 옆에 서 있었다. 이럴 때만 냉청할 보디가드역할이다.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토니, 나는 여기에 있는게 미안하고 있어서도 안돼. 여기서는 좋은 기억은 없고... 오, 그래 왜 날 데려온거야? 단지 그 이유때문만은 아닐텐데. 설마 나를 강단에 세우려는거라면 사양하지. 별로 좋은 반응도 나오지 않을테니까."

"가끔씩 바깥 공기도 쐬어야하고.. 그리고 사실 내 연구에 도움을 줬던건 자네잖아."


배너는 친구의 배려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정말로 많은 빚을 지었고 또 미안해했지만 이런 친절은 왠지 모르게 부담이 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파티는 안돼."

"그 정도는 알아, 에이프릴도 알겠지."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금발의 보디가드도 퉁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라도 말을 해줬으면 좋겠건만, 배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고 그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난 자리에 가 있을게..."


그는 서둘러 VIP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단 맨 첫째줄의 VIP석에는 이미 그가 얼굴에 익고 있었던 칼버대학의 원로들, 여러 학문계에서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주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경악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이런 소란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건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지만 거의 다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옆자리라, 이대로 이 곳을 벗어날까 하고 생각까지 하였다. 그 때 왼쪽 끝자리즈음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천체물리학자, 한때 배너가 사사하기도 한 에릭 셀빅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셀빅과 악수를 하고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이게 몇년만인가."

"몇년만이긴요, 가끔씩 쉴드에 얼굴을 내밀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행이군요, 어디에 앉을지 정말로 걱정을 했었어요."

"다들 표정 봤나? 엄청 재밌어보인던데, 스타크가 이걸 다찍어뒀으면 좋겠군."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할테지만요."


몇분동안 대화가 이어졌을까, 배너의 긴장이 어느정도 풀리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서는 소란의 진원지로 향하자 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소란의 진원지 또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순수한 놀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길다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서는 그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얼굴로 짙은 색의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몇년이었지? 그는 머릿속으로 할렘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거진 4년, 그 이후로 그는 단 한번도 그녀의 모습을 사진이나 기사가 아닌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베티, 베티 로스. 그녀는 그와 셀빅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행여나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까 급하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손에는 식은땀이 어렸다. 심장박동이 너무나도 크게 울려서 행여나 누가 듣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가? 그는 급히 단상위로 고개를 돌렸고, 토니의 옆에서 무심히 서 있던 에이프릴-의 탈을 쓰고 있는 연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배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토니를 서포트하는체 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고 싶었지만, 곧 시작한다는 사회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옆을 흘낏 하고 보았다. 옛 연인도 엄청 긴장을 한 모양인지 평소와는 달리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불편한 공기가 강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솔직히 토니의 강연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자신도 어느정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다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옛 연인이 옆에 앉아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는 입술을 살짝 핥으며 행여나 옆에 앉아있는 셀빅이 눈치챌라 조심스레 수첩을 꺼내어 무언가를 적었다. 그것을 베티에게 건네니 그녀는 흠칫거리며 그것을 받았다.


[오랜만이야.]


그녀도 가방에서 펜을 꺼내었다. 예전에 배너가 선물했던 만년필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럭저럭]


마치 하버드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둘은 수첩에 필담을 나누었다.


[토니가 날 끌고 왔어. 새벽에 일어났어.]

[네가 올 줄은 몰랐어. 혹시나 했지만, 참석명단에 네 이름은 없었거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이렇게 갑작스레 오는건 생각치도 못했어.]

[오려고 생각은 했어?]

[아니.]


그는 베티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며 이별을 고했었다. 그 이후로도 어딘가로 도피를 떠나거나 이동을 할 때마다 베티에게 간단한 편지를 보냈었지만 답장은 없었다. 이별을 고한 사람 주제에 답장을 바라다니 웃기기도 하지,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고나서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녀를 앞장세웠을 때, 그는 처음으로 나타샤를 만났다.


[교수들은 다 잘 지내지?]

[마이클교수님은 명예퇴직했어. 더글라스는 칼텍으로 옮겼고.]

[나 없는 새에 많이 변했네.]

[10년정도잖아. 안변하는게 더 이상해.]

[그 쪽은? 연구는 잘 되어 가?]

[그럭저럭. 그쪽은 어때?]


브루스 배너의 연구방향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토니의 친환경에너지관련 연구를 돕는 것이 주였고, 나머지 자투리시간에는 그의 몸을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는 연구를 하였다. 비록 제어가 어느정도 가능하다고는 하나, 그에게 여전히 헐크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소코비아에서의 일로 인해 더더욱 그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까지 베티에게 말하기는 싫었다. 그는 더이상 자신이 속해있는, 히어로라고 하는 이 미친세계에 베티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많이 상처입었으며, 자신과 같이는 버티기 힘들테니까.


[나도 그럭저럭.]


배너의 얼굴은 굳어져있었다.


[점심에 약속있어?]


그 메모에 배너는 급히 옆을 쳐다보았다. 베티는 처음으로 배너에게 데이트신청을 했던 때처럼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왼손에 끼워져있는, 은백색의 반지가 눈에 부시었다. 그는 급히 강단 위를 보았다. 어느새 토니의 강연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주인 몰래 사탕을 훔치는 어린 아이처럼, 배너는 급히 수첩에 휘갈겼다.


[좋아.]





오전일정을 마치고 도망치듯 간 곳은 학교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다이너였다. 오늘은 학교 전체에 만찬을 벌였기 때문에 다이너에는 근처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한산한 편이었다. 둘은 데이트를 할 때마다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간단하게 팬케잌과 베이컨을 시켰다. 무언가 배는 출출하지만 그렇게 배고프다고는 생각하지 않을때마다 와서 먹던 메뉴였다. 다이너는 10년전과 비교하면 주인이 약간 늙었다는 것을 제외하는 전혀 변하지 않아 신기했지만, 아쉽게도 주인은 너무 변해버린 단골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저 베티에게 안녕하쇼, 교수님이라고 인사했을 뿐이었다. 뭔가 지나가버린 추억에 입이 썼다.


"잘 지내는거같네."


커피로 간신히 입을 헹구고 꺼내었다는 말이었다. 베티는 안경을 벗어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웨이트리스가 갖다준 핫케이크에서 김과 아주 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그쪽도... 어벤져스 일때문에 많이 바쁘다며?"

"거기는 그냥 도와줄 뿐이고, 지금은 반쯤 손 뗐어. 별로 좋은 기억이 남는건 아니라서 말이야."


배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직도 아주 가끔씩 그 날에 대한 악몽을 꾸곤 했다. 그것을 베티도 알고 있을까? 소코비아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은 그녀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와 긴 시간을 같이 했었던 배너는 알고 있었다.


"요즘도 뉴욕에서 지내? 스타크 타워? 아님 다른 연구실?"

"스타크 타워야. 윗층에 연구실이 있고, 아래층에서 살고 있어. 주로 토니랑 이쪽 분야로 연구를 하고 있어. 그 쪽은? 아직도 방사능 피폭에 관한 연구를 하는건 아니지?"

"그 연구는 네가 없으면 할 수가 없어. 다만 부작용쪽에 관해서 연구를 하고 있긴 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널 망친걸까?"


그건, 정말로 아주 갑작스레 나온 말이었다. 배너는 저도 모르게 식은 땀을 흘리며 입을 가렸다. 정말 자신도 생각치조 못한 말이 뱉어나왔다. 그 말에 베티는 놀라는 기색 없이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가 널 망친거야."


그는 베티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자신만의 오만은 아니었다. 그 실험에는 공범이 있었다. 베티는 그 일로 배너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고, 죽을때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분위기가 너무 무겁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배너는 급히 주제를 바꾸었다.


"그 반지, 예쁘네. 약혼자가 준거야?"


나타샤와 사귀고나서부터는 일부러 베티에 대한 정보는 아주 필요한 자료 빼고는 차단하고 있었다. 아마 결혼을 했다면 그 소식은 들어왔을 터였다.


"응, 꽤나 좋은 사람이야. 내가 이미 한번 약혼자를 배신한 적이 있다는걸 알면서도 좋다고 받아주더라고. 프러포즈도 질질 짜면서 했었어. 너무나도 바보같았지만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야."

"다행이네. 언제 한번 소개해줄 수 있을까? 아, 그 사람에게 민폐려나."


어느새 긴장감이 풀리고 배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자신의 반지와 배를 바라보는 베티의 눈은 미소로 풀려있었다. 배너의 농섞인 말에도 베티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당신 팬이야. 아마 맨발로 뛰쳐나와서 좋다고 할걸."

"...다행이네... 몇개월이야?"


베티는 조심스레 아직 불러오지 않은 배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배너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안봐도 뻔하다는 듯, 눈가에 웃음이 서린다.


"아직 2개월이야, 안정기래. 아직 그 사람에게는 말하지도 않았는데, 역시 브루스 배너야."

"네 일이라면 왠만한건 알아차릴 수 있어."

"헤어지기 전에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말에 배너는 작게 웃음을 흘겼다. 어느새 베이컨이 식어 위에 하얀 기름이 굳어져있었다. 그는 웨이트리스에게 팁과 함께 음식을 다시 데워줄 것을 부탁하였고, 웨이트리스는 투덜거리면서도 그 음식들을 다시 주방으로 가져갔다.


"그러는 그쪽은? 스타크씨의 옆에 있던 그 금발 보디가드에게 관심있는거 아냐?"

"오, 그런 사이 아냐."

"그럼 짝사랑? 천하의 브루스 배너가?"

"어딜봐서 천하라는 건지는 몰라도."


그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있어, 다른 사람. 짝사랑도 아냐. 꽤나 진지하게 만나고 있어. 동료야, 몇번 같이 싸운 적이 있어. 강한 사람이야."


그 말에 베티의 눈이 갑작스레 초롱초롱해졌다. 배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디아더가이도 꽤나 마음에 들어하고 있어. 이번 기밀이지만 그 녀석을 진정시킬 수도 있고."


"소중해?"


그 말에 배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랑하고 있어."

"다행이다."


베티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배너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야, 베티의 손이 예전보다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배너는 고맙다고 말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에이프릴이 아무 표정도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오후일정은 각 분과별 발표였다. 어디서 시간을 때울까, 하며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던 토니는 갑작스런 배너의 물음에 이유모를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레 에이프릴은 왜? 옛 애인이랑 회후는 끝났어?"

"질문에 대답하기나 해. 에이프릴은 어딨어?"

"로마노프는 근처를 돌아다니겠대. 어딨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경호원들에게 준 휴대폰이라면 받을거야. 번호 넘겨줄게."


배너는 급히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낯선 전화번호가 띄워져있었다. 급히 통화버튼을 누르며 전화기에 귀를 대자 토니가 다시 말했다.


"잘 해결되었어?"


그 말에 배너는 토니를 쳐다보지도 않고 뭉퉁스레 대답했다.


"덕분에."


나타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에이프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초조함에 안달이 난 나머지 손의 식은땀때문에 스마트폰이 떨어져 배터리가 분리되어버렸다. 그는 대충 배터리를 끼워넣은 다음에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행사가 끝나지 않은 가운데 벌써 가발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을리는 없으니 아마도 계속 에이프릴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터였다. 금발을 높게 묶고 있는, 파란 눈에 강단이 있어보이는 눈매를 가진 여자.

그가 그녀를 찾은 것은 정말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였다. 에이프릴은 한손에 생수병을 들고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아무 문제도 없고 배너가 쉽사리 다가가서 얘기를 걸 수도 있을 터였다.

그 누군가가 베티여서 문제였다.

에이프릴과 베티는 아주 정답게, 서로 하하호호라고 써도 될 만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타샤는 훌륭한 스파이이니 아마 베티의 관심사중 하나를 끌어들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몇미터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보았다. 아주 비현실적인 장면이라 할 말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베티와, 비록 에이프릴로 분하기는 하였으나 나타샤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몇달전 토니가 보여주었던, 아내와 여친이 연합하여 복수하는 영화가 생각나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다, 나타샤는 자신의 정체를 베티에게 말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나타샤 로마노프란 인간은 이 자리에 없다. 저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타샤가 아니라 에이프릴이고, 그녀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여자였다.


그렇게 생각해야한다고, 에이프릴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생각했었다.


말을 거는 것은 에이프릴이 아니라 베티다, 일단 배너는 그 둘의 대화를 어떻게든 끊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이 상황이 정말로 매우 불쾌했을 뿐이었다. 아마 에이프릴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이 그를 얼마나 초조하게 만들지.


"베티-"


순간 에이프릴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가볍게 목례만 한 후 다시금 베티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프릴은 대화가 즐거웠노라고 말한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




"무슨 생각이었어요?"


나타샤가 탈의실에서 안면인식필름을 떼내고 막 가발을 벗으려는 찰나였다. 그녀는 탈의실의 갑작스런 남자침입자에 대해서 그다지 당황하지 않으며 가발을 벗었다. 동그랗게 묶은 적색 머리카락이 공기로 드러났다.


"무슨 생각이냐뇨, 미스터 배너. 저는 그저 마음에 드는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놀이는 끝났어요, 미스 로마노프. 에이프릴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배너는 난폭하게 나타샤의 손에 들려있던 가발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아까워라, 그래도 몇백불짜리인데, 감정없는 목소리로 나타샤가 중얼거리며 가발을 주워 배너의 앞에서 탁탁 털었다. 그런 태도에 짜증이 일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나타샤!"

"왜 그렇게 짜증을 내는건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브루스, 난 정말로 순수하게 그녀랑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뭐에 대해서요?"

"그건 프라이버시에요. 당신이 닥터 로스와 이야기했던 내용을 내가 굳이 묻지 않는것처럼 말이에요."


그 말에 배너는 실소를 흘리고는 나타샤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나타샤는 그런 배너의 도발에도 괜찮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런 모습의 브루스 배너를 몇번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안에 내재되어있던 무언가가 살짝 고개를 드러냈을 때, 그 때 브루스 배너는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던 테디베어에서 한마리의 흉악한 그리즐리 베어로 변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여기서 그 초록색으로 변하지 않는 점이었다.


"당신이 독순술 할 줄 안다는거 알고 있어요."


오, 이런. 몇달 전 우스개소리로 말한것까지 다 기억할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보이는 이런 천재성을 섹시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보다는 배너를 놀려주고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다, 그녀는 브루스 배너를 놀려주고 싶었다. 그녀도 애인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그 이앤이 전 여자친구와 시시덕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게 볼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살짝 놀려준것 뿐인데, 생각보다 배너의 반응이 격했다.


"그렇게 나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런 일을 했대요?"


"당신이 나타샤로 돌아오면 얘기할 생각이었죠! 에이프릴한테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왜요, 아니면 질투라도 났나요? 내가 전 여자친구와 함께 히히덕거리고 있어서?"


"당신은 히히덕거리지 않았어요."

"그럼 뭐때문에요?"

"당신은 아직도 그 여자 잊지 못하고 있잖아요."

"아니에요, 난 이미 베티와는 정리했어요. 이제 베티 로스와는 아무 연관도 없다고요."


그는 거칠게 안경을 벗고서는 나타샤와 눈을 맞추었다. 아직도 날 못믿겠어요? 예전에 퀸젯에서 나타샤가 했던 말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긴 했지만. 그의 눈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다시금 그리즐리 베어에서 테디베어로 변해가고 있었다.


"당신을 못믿는게 아니에요."


그녀는 조심스레 배너의 뺨을 쓰다듬었다. 바보같은 사람, 약간의 심술마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미안해요."


배너는 조심스레 나타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타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후 일정은 조퇴, 에이프릴도 동행하겠음. 이라고 짧게 적혀진 문자메시지에 토니 스타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살벌을 넘다못해 베로니카를 불러야 하는것이 아닌가, 라는 걱정마저 일게 하였는데 다행히도 그런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직 전용기를 띄웠다는 내용이 없다면... 토니는 급히 프라이데이에게 둘이 갈 호텔을 수배하게 하고는 녹즙을 들이켰다. 꽤나 손이 많이 가는 커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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