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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당신의 페티쉬

rabbitvaseline 2015. 8. 20. 04:13



투둑, 거리는 소리에 배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렀다. 그는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생각자체를 멈춰버렸다. 나타샤가 제 위에 올라타 셔츠단추를 풀거나 아예 찢어버리는 상황이야 가끔씩 겪는 일이기에 익숙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연인이 밀회를 즐기는 침대위에서나, 가끔씩 소파나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서 있는, 어벤져스 타워의 거실에서 당할 일은 아니었다. 토니가 며칠전에 선물로 준 아르마니 셔츠의 단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들 경악에 찬 채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적에 휩싸인 이 상황에서 움직이는 것은 나타샤의 손과 팔 뿐으로, 그녀는 셔츠자락을 잡고 양쪽으로 확 펼쳤다. 갑작스런 바깥공기에 접한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배너의 가슴부분을 유심히 보다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경악에 찬 표정에 질려있는 토니 스타크를 향해 무슨 짓을 했냐고 소리쳤다.

진심으로 헐크로 변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나타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인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나타샤에게 잘 다녀왔냐는 인사도 없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을 목도하게 된 마리아 힐은 사태가 끝나자마자 제정신이냐고 나타샤를 다그쳤다. 확실히, 나타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방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그녀로서도 나름 항변을 하려면야 할 수 있었다. 거진 3개월간의 장기근무를 마치고 간신히 보는 상황이었기에 반쯤 정신줄을 놓고 있었고-물론 배너 한정으로-, 그녀로서는 어떻게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구불거리는 가슴털이 자라있는, 농담으로 테디베어라고 부르곤 했던 그 가슴에. 셔츠단추 2개만 풀어도 아주 살짝 드러나는 가슴털에 얼마나 가슴을 졸여왔던가. 중요한 것은 배너의 머리카락이 짧아졌고 살이 빠져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랑하는 테디베어의 가슴털이 민둥산처럼 사라져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내놓았다가는 캡틴에게마저 혼날 것이라는 걸. 다행히도 스티브는 익숙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성추행에 혼이 빠져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덜덜덜 손을 떨면서 간시히 머그컵을 붙잡고 있었다. 오히려 뭐라 말하는 것은 옆에 앉아있던 재앙의 수염달린 입주둥이였다.


"원래 배너의 가슴털이 챠밍포인트이긴 하지만 미스 로마노프가 거기에 빠져있는줄은 예상치도 못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침대도 아니고 다들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을 하면 말이지.. 그건 남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랄까 정체성에 커다란 손상을 입히는 거야. 브루스였으니 다행이지, 나였다면 곧바로 성추행 소송감이었을걸... 뭐, 최악의 경우라면 헤.어.질.수.도?"


순간 멱살을 잡고 뭐라 말하고싶었지만 마리아와 바튼의 눈초리가 너무나도 강하였다. 너답지 않은 일이었어, 바튼이 조용하게 말하였다. 알고 있었다, 한때 쉴드에서 가장 잘 나가던, 포커페이스의 달인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벌일만한 짓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거야?"

"....사과해야지, 당연히. 미안하다고 빌 수밖에 없잖아."

나타샤는 한층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는 점점 더 잠겨갔다.




"그래서 언제 받아줄거야?"


토니는 배너에게 지렁이젤리 봉투를 건네며 말하였다. 배너는 벌써 일주일동안이나 나타샤의 말을 무시하고 피하고 있었다. 프라이데이를 통해서 나타샤의 동선을 알아차리고나면 귀신같이 그녀를 피하곤 하였다. 천하의 스파이, 나타샤 로마노프로서는 보기 힘든 굴욕이었다.


"고소장 안날아간것 만으로도 일단 안심하라지."


눈은 화면에 고정한 채 지렁이 한마리를 입안에 넣었다. 질깃하면서도 인공적인 산미와 감미가 입안에 퍼졌다. 싸구려젤리 맛이라 살짝 미간을 좁힌 채로 다시금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로마노프는 꽤나 진심이던데. 도대체 그 흑과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솔직히 보는 입장에서는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괴로워. 로마노프가 자네 발을 붙잡는 형세라니, 예전에 적이었던 사람들이라면 비웃고 난리날걸?"

"그정도까지일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토니, 솔직히 지금도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것 만으로도 난 힘들어... 자네도 무슨 기분인지는 대충 알잖아."

"맞아. 만약 둘의 성별이 반대였다면 로마노프는 곧바로 철창행이겠지."

"그러네.. 뭔가 좀 충격이었어. 미안, 돌아가봐야겠어."

"더 하다 가지?"

"오늘도 피곤해서 그래."


배너는 급히 연구내용을 정리했다. 요 일주일동안은 너무나도 피곤한 나날들 뿐이었다.





배너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방문 앞 복도에 인영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발을 높다랗게 묶고 있는 아주 익숙한 어벤져스 제 2의 요원, 에이프릴은 삐딱한 자세로 배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에이프릴을 감시대상에 넣지 않은 자신에 대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꼼수를 쓰다니, 나타샤가 절박하긴 절박했던 모양이었다.


"안녕, 에이프릴.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로마노프는 잘 지내던가요?"

"로마노프는 내일부터 다시 장기근무에요. 이번것은 하이드라 잔당 수색겸 청소이고 유럽쪽으로 간다고 합니다. 한 한달정도 걸린다고 해요."


에이프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하게 출장소식을 알렸다. 하이드라의 잔당을 색출하는 작업은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나타샤의 출장도 점점 잦아져만 갔었다. 하긴, 그 덕에 일주일전에 말도 안되는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던 거지만.

그는 에이프릴의 곁을 지나 지문인식시스템에 엄지손가락을 갖다대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리자 문고리를 잡았다. 돌리기 전, 옆에 서 있던 에이프릴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차 한잔만 마시고 갈래요? 물론 딴 생각은 없어요."

"잠시만이라면요."


그는 문을 크게 열어 에이프릴에게 손짓했다. 에이프릴은 조심스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프릴이 소파에 앉자마자 홍차가 담긴 주황색 머그컵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나타샤가 배너의 방에서 항상 쓰던 물건으로, 배너의 파란색 머그컵과는 커플로 장만한 것이었다. 비록 에이프릴이 어느정도 제 2의 인격정도로 취급하고 있다지만, 배너는 나타샤와 동등한 취급을 하였다. 커플로 장만한 파란색 머그컵을 들고서 배너는 몸 깊숙이 소파에 앉았다.


"당신도 들었겠죠? 나타샤가 말도 안되는 짓을 했다는걸."


질나쁜 플레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도 그녀의 이런 '놀이'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플레이가 둘 관계에서 차마 하기 어려웠던 말들을 꺼내게 하고 있었다.


"들었어요, 그러고 도망을 다니고 있다면서요."

"맞아요, 솔직히 헤어지자고 말하고 싶은데, 거기까지는 좀 애매해서요."

"애매해요?"

"그 때 나타샤의 심경을 대충은 이해하거든요. 나도 갑자기 나타샤가 머리를 민다던가 그러면 놀랐을거에요. 뭐, 그 대상이 가슴털일지는 생각치도 못했지만요."

"사람마다 페티쉬를 갖고 있는 대상은 다르니까요."


에이프릴은 조심히 머그컵에 입을 댔다. 배너는 입술을 슬쩍 혀로 쓸었다가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실은 로마노프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이에요."

"그럼 나타샤에게 전해주세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요. 심전도를 체크하기 위해서는 그... 가슴털들이 상당히 방해였고, 사실 그렇게 말한건 토니가 아니라 헬렌이었다고요. 물론 헬렌과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어느새 차는 식어가고 있었다. 반쯤 비워진 붉은 머그컵에는 희미하게 루즈자국이 묻어있었다. 차 고마웠어요, 라고 말하며 에이프릴 일어서자 배너도 똑같이 일어섰다.


"무언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당신답지 않은 일이잖아요."


배너는 조심스레 에이프릴의 관자놀이에 손을 대었다. 지직거리며 에이프릴의 얼굴부분에 노이즈가 일었고, 그와 동시에 그는 다른 손으로 얼굴에 씌워져있던 얇은 필름을 벗겨내었다. 필름속에서는 얼굴을 붉힌 채로 찌뿌리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주 익숙하고 사랑스럽게안하다는 풀죽은 목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나타샤가 이렇게나 쑥스럽고 약한 모습을 보였던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화 푼건 아니에요. 그걸 당신 앞에서 내색하기 싫었을 뿐이죠.."

"알고 있어요. 당신은 늘 내 앞에서는 화를 내려고 하지 않았죠."

"당신이 한 일은 명백한 성추행이에요. 그때 얼마나 놀랐고 황당했고 부끄러웠는지 알아요?"

"맞아요. 미안해요."


그 말에 배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나타샤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이마에 닿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던 감촉에 나타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 입술이 멀어졌다.


"벌이에요, 다음은 한달 뒤에 하도록 해요."

"브루스, 그건-"

"그 때쯤이면 화도 어지간히 풀려있을거에요. 그리고 그때쯤에는... 조금 여기의 털도 자라나있지...않을까요?"


배너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셔츠자락 너머로 보이는 가슴에는 벌써부터 아주 작은 모근이 송송이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말에 나타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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