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냇배너 _ 우리들이 잠들고 있는 땅에서 본문
시베리아의 겨울에서는 꽃도 금방 얼어버리죠, 붉은 장미꽃다발을 포장하던 꽃집 사장이 눈보라치는 바깥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문가에 서 있었던 손님은 코트로 중무장했음에도 추웠는지 다시금 목도리를 여미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짓붉은 머리카락에 모자를 쓴 손님은 꽤나 아름다워서, 종을 울리며 들어왔을 때엔 사장도 놀라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손님은 점심시간이 마칠 무렵에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붉은 장미꽃다발 2개를 주문했다. 선물용인가요? 라고 사장이 묻자, 그녀는 찹작한 표정을 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그냥 아는 사람이요. 묘지에 바칠거니까 되도록이면 수수하게 해주세요."
묘지, 라는 말에 화려한 포장지를 건드리려던 손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갈색의 민무늬 얇은 종이를 가위로 자르면서, 아직 오지 않은 겨울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장이 주저리 주저리대며 떠들어대는 말을 잠자코 들을 뿐이었다. 사장은 겸연쩍었는듯이 이내 말을 멈추고는 조용히 포장에 집중했다. 가시를 자르는 가위소리, 포장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히터소리가 돌아가는 꽃집 내부에 더해졌다. 주인은 아주 빠르게 수수하면서도 화려한 꽃다발 2개를 완성시켰다. 꽃들의 여왕 10송이가 단조로운 갈색종이 안에서 제각기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장미향은 나지 않았다. 특히 향기가 없는 종이라고 주인은 말했다. 손님은 주인에게 지폐 몇장을 건네고는 잔돈은 되었다고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나도 지쳐있어서 주인은 커피라도 권하려고 하였으나,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린 뒤였다.
브루스 배너가 잠깐 잠에서 깨었을 때, 지프트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하얀색과 검은색 밖에 없었다. 하얀색은 눈이요, 검은색은 도로와 나무의 줄기와 가지였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출발한지 벌써 3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자는 피곤한 기색 없이 일정한 속도로 엑셀을 밟을 뿐이었다. 차내에서는 엔진소리, 히터소리, 바람소리와 숨소리 빼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드라이브를 할 때면 흔하게 듣던 음악소리도 없어서, 그는 지금 상황이 꽤나 기묘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일어났어요?"
나타샤의 목소리는 어딘가 잠겨있었다. 공기는 히터때문에 건조했지만 쉽사리 창문을 열 수 없었다. 바깥의 기온은 영하 30도에 인접한데다 건조한 것도 내부와는 별로 다르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수를 꺼내 건네주자 나타샤는 한모금마시고는 다시 배너에게 건네주었다.
"어디쯤 왔죠?"
나타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제 1시간만 더 가면 돼요. 곧 이 풍경도 바뀔거에요."
"몇번 왔나 보죠?"
"기회만 되면요."
짧은 대화의 연속이었다. 배너는 새삼 나타샤를 따라가겠다고 말한 것을 후회하였다. 운전하는 내내 나타샤는 일부러 모든 행복을 멀리한다는 듯이 말을 아꼈다. 표정은 잔뜩 굳어져있고 농을 던지더라도 무시하거나 아주 짧게 답했다. 어디로 가냐고 묻자, 그녀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 때 그는 대답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대로 10여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숲의 끝과 광활한 평야가 보였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하늘은 점점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갔다. 회색빛 하늘 아래 놓여진 평야에는 몇채의 자그마한 민가들과 드문드문 심어져있는 활엽수, 그리고 십자가들이 있었다. 십자가의 크기, 형태, 재료는 제각각 달랐으나 모두 목적은 같았다. 나타샤는 공동묘지의 한구석에 차를 세웠다. 히터가 꺼지는 소리와 함께 한기가 갑작스레 몸을 덮쳤다. 나타샤는 뒷자석에서 옷들을 꺼내다 배너에게 건네었다.
"밖에는 많이 추워요."
"우리가 왔던 그곳보다요?"
그 말에 나타샤는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서야 다행히도 긴장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두꺼운 방한용 마스크를 꺼내 건네주었다.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폐가 받아들이기 힘들거에요, 평소처럼 상냥한 목소리였다. 과연, 차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니 날카로운 한기가 드러난 얼굴 피부를 찔러댔다. 안경에는 금새 성에가 끼었고, 마스크로 한겹 걸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차갑다 못해 아릴 정도여서 결국 몇번 기침을 해댔다. 나타샤는 익숙하다는듯 편하게 숨을 쉬고는 뒷자석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예쁘네요."
"일부러 이걸로 해달라고 했어요."
붉은 장미꽃다발 2개. 그제서야, 그제서야 그는 연인이 아무 말 없이 이 곳으로 온 이유를 깨달았다. 공동묘지, 꽃다발. 두가지로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누굴까, 하는 호기심이 순간 머릿속에서 일었으나 일부러 입밖에 내놓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는 나타샤가 말하기를 기대하면서.
공동묘지는 민가들이 모여있는 마을 한켠에 있었다. 민가에는 저마자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고, 사람이 있는지 창문 너머로 불빛이 일었으며 굴뚝에서는 연기가 올라왔다. 하얗고 또 하얘서, 하늘이 어둡지 않았다면 아마 알아보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나타샤가 선 곳은 다른 묘지들보다도 작고 수수한 십자가를 가진 묘지였다. 십자가의 크기답게 덮개석의 크기도 작았다. 배너는 알아볼 수 없는 러시아어로 된 글자 밑에 있는 숫자에 집중했다. 1993~2004, 1999~2004. 10살과 5살 아이의 무덤. 그녀는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꽃다발을 가련한 두 영혼에게 바쳤다. 배너는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인과 아이들이 어떤 관계인지는 몰랐으나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날씨는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어, 동쪽에서부터 하늘은 점점 짙은 남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4시를 넘었겠지, 옷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손목시계를 생각하며 배너는 나타샤를 쳐다보았다. 짧은 묵념의 시간을 가지느라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눈을 뜨려는 찰나였다. 격렬한 총성과 함께 숲속에서 쉬고 있던 까마귀떼가 격한 굉음을 지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타샤!"
다행히도 나타샤는 총에 맞지 않았다는 듯, 아주 평온하고도 슬픈 표정으로 소리의 진원지를 고개를 돌렸다. 한기에 얼굴이 붉어져있는 백인 부부가 서 있었는데, 남편으로 보이는 자의 손에는 공기총이 들려있었다. 그는 다시금 총머리를 나타샤에게 돌리고는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엄청난 원한이 담겨져있었다. 방금의 총격은 실수였던 모양이었고, 다시는 나타샤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가볍게 총격을 피하고는 배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총격을 피하며 지프로 올라타는 순간에 보았던 그녀의 얼굴은 아주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급하게 차문을 열며 조수석으로 올라탔을 때 배너는 떠올렸다. 공기총을 든 남자의 옆에 있던 여자, 즉 부인으로 보이던 여자의 품에는 하얀색 장미꽃다발이 안겨있었다.
총알이 운전석 옆에 있던 차창에 박혔다. 나타샤는 급하게 시동을 켰고, 엔진음이 안정되자마자 곧바로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엑셀을 밟았다. 차체와 유리창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난 살의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흥분할뻔 했던 심장박동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두근두근, 아마 나타샤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하고 옆을 바라보았지만 찌뿌려진 얼굴만 펴져 있을 뿐, 눈가가 살짝 붉어져있을 뿐이었다. 차마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엔진소리와 바람소리만이 차가운 차내를 가득 채웠다.
"미안해요."
나타샤가 도로 한켠에 차를 세우고 입을 연 것은 그렇게 도망치고나서 1시간만이었다. 엔진소리가 꺼지자마자 나온 소리였고, 그 말에 배너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나타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왜 당신은 저 사람들이 누군지 묻지 않았죠?"
"당신이나 나나 원한을 가진 사람들은 많을테니까요. 나도 갑자기 나에게 총알을 날릴 사람들이 많아요."
그 말에 나타샤는 웃음을 흘렸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이내 형태를 잃고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째선가 배너는 그녀가 엄청 크게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몸을 숙여 핸들에 이마를 기대고는 다시 말했다.
"마지막이에요."
"네?"
"내가 쉴드로 넘어가기 전에 죽였던 마지막 사람이요. 민간인이었죠. 오빠랑 동생인데, 내가 근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타겟을 죽일 때 그 장면을 목격했었어요. 언제나 그 별장에서 숨바꼭질을 했었어요. 나는 가정부로 위장하고 그 아이들과, 타겟과 함께 여름을 보냈었죠. 상당히 귀여웠었어요. 오빠는 미하일, 동생은 소냐였죠. 그런데도 난 그 아이들을 죽여버리고 말았어요. 오늘이었어요."
배너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특히 쉴드로 들어오기 전의 일들에 대해서는 함묵하곤 했었고 그도 그것을 알기에 차마 물어보지 못했었다. 연인의 과거는 비밀에 싸여있었지만 그에게는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던 문제였다.
"기일에 오는 건 처음이에요. 근처에 오기만 하면 오곤 했었는데 가족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어요. 실제로 얼굴을 본건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허심탄회하게 10년전의 여름에 대해서, 아주 천천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나 밖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밤은 짧다. 차내도 어두워져서, 이제는 그녀의 머리카락의 붉은색 마저도 알아보기 힘들어질 지경이 되었다.
"난 절대로 천국에는 가지 못할거에요."
나타샤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우는 것 같은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말아요, 나타샤."
그는 조심스레 나타샤의 어깨와 머리를 감쌌다. 그녀의 이마를 자신의 가슴에 품고서는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한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귓가에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같이 지옥으로 떨어져줄게요."
그 말에 나타샤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기가 더욱 차가워져 입김이 나왔지만 차안은 더욱 어두워졌기에 그걸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퍼졌다. 나타샤는 그 울음소리가 자신을 향해 웃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같아서, 이내 미간에 주름이 새길 정도로 눈을 감았다.
시베리아의 어원인 Sibir는 잠자는 땅이라 한다. 진단메이커를 이용했는데 키워드는 사죄, 품에 얼굴을 묻다, 또 하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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