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Me, revolving you 본문
Side A.
직사각형 화면 안에서는 다양한 시민들이 저녁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부러 뭉그러뜨린 것 같은 얼굴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할로윈을 앞두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일 터였다. 빵봉투를 들고 악마아이 두 명이 골목으로 뛰어들어가다 한 남자와 부딪혔다. 재빨리 장면을 멈추고 스크린 속을 들여다보니 얼룩덜룩한 검은 고양이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동료에게 보여주니 드디어 잡았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증거를 잡았어, 며칠 동안 밤을 새워가며 CCTV영상을 뒤진 보람이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옆에서 동료가 잘했다고 칭찬하는 소리도 무시한 채, 스크린 너머로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한 남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동료의 말에 대충 대꾸하면서도 조금씩 뒤로 영상을 돌렸다. 용의자인 검은 고양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그래, 저거지. 동료의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턱밑이 하얀 지옥개를 향하고 있었다.
“뭘 그리 쳐다보냐? 다시 앞으로 돌려봐.”
동료는 알렉스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따라 알렉산드로 토레스라는 검은 고양이는 부쩍 철이 든 것 같았다. 임무중에 일어나는 자잘한 사고들도 많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말수가 줄어서 마치 다른 시민이 된 것 같다고 느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을 정도다. 자연스레 그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지만 반대급부로 오히려 불안을 내비치는 동료들도 늘어났다. 회사 내에서는 드디어 알렉스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레널드 헬하우스가 절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는 모르나 가끔씩 데스크에서 기다리던 지옥개의 모습이 요즘따라 부쩍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도 가끔씩 내뱉곤 하던 레널드와의 일들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소문은 기정사실로 변해가고 있었다.
“잡은거지?”
알렉스의 말에 동료는 수긍했다.
“그래, 이젠 독안에 든 고양이지. 저 새끼 잡는다고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냐?”
이제 이 CCTV자료를 바탕으로 용의자는 체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알렉스가 이 영상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자료는 검찰로 넘어갈 것이며, 스파이인 자신은 도저히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영상속의 지옥개와도 헤어져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영상을 정리해서 증거로 보내는 그 시간까지, 알렉스에게는 그런 시간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더 봐도 될까?”
“응? 뭐하러?”
“증거는 많으면 좋으니까.”
동료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로 이 검은 고양이가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자처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내 레널드와의 사이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자 수긍해버렸다. 원래 그런 일이 있으면 안하던 짓도 하기 마련이었다.
“그래, 나갈 때 불 꺼둬. 난 정리해서 먼저 간다.”
동료는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방송실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동료가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마저 끊기자 이제 방 안에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검은 고양이가 숨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딸깍, 그는 되감기버튼을 눌렀다.
빵봉투를 들고 있던 아이들과 얼룩무늬 고양이가 화면에서 사라지고나서도 그의 손은 되감기버튼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영상 속 지옥개는 길거리에 서서 다른 지옥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알렉스는 재생버튼을 눌렀다. 지옥개는 상당히 즐거운 분위기로, 가끔 미소를 짓기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애석하게도 화질이 좋지 않아서 입술을 읽어 대화의 내용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저런 표정이 나오는걸 보면 분명 어두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저 점심식사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어떤 연예인에 관한 이야기거나.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영상을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이 검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레널드 헬하우스가 알렉스를 향해 저런,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둘이 헤어진 지도 벌써 3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레널드는 결국 이야기하던 상대와 헤어지고, CCTV를 향해 등을 돌리고는 고개를 숙인다. 빵봉투를 든 아이들이 얼룩무늬고양이와 부딪힌다. 몇 분간의 실랑이가 끝나고 레널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화면 밖으로 걸어간다.
알렉스는 다시 되감기버튼을 눌렀다.
결국 그다지 쓸모도 없어 보이는 영상 하나를 건지고 퇴근했다. 최근들어 집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지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집이라는 마굴에 들어가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있는 것이라고는 가구와 널려진 옷가지들밖에 없는 마굴에는 이제 지옥개가 그 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증거 따위는 없어진지 오래였다. 알렉스는 둘이 헤어지고 한달이 지나자 아예 청소회사를 불러서 집안을 정리했다. 그 사이에 그는 인간계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보인 것은 거실에 쌓여있던 수많은 서적들이 있던 자리였다. 햇빛에 그을려서였을까, 바닥에는 상자가 있었던 흔적만이 하얗게 남아있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는 다시 먼지가 쌓일 것이고, 그러면 그 흔적마저도 그의 시각에서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는 그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못내 아쉬웠다.
그는 먼지쌓인 바닥에 드러누웠다. 레널드 앞에서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이제는 마음껏 할 수 있다. 옷과 몸에 먼지가 달라붙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먼지란 것은 씻으면 씻길 나름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바닥에 누워있길 몇분이 지났을까, 그는 TV장식장 밑에서 작은 무언가가 미세한 빛에 반짝이며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닥과 장식장 사이의 미세한 틈새에 알렉스는 가까스로 눈을 갖다 대었다. 마치 압정이 확대된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는 그게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어째서, 청소회사가 그렇게나 열심히 했건만 왜 이제야. 알렉스는 중얼거리며 자로 장식장 아래를 쓸었다. 커다란 압정 모양의 무언가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자 끝에 걸려 나왔다. 하지만 먼지 속에서도 파란 보석 가운데에서 뻗쳐나가는 6갈래의 선은 빛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알렉스는 즉시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먼지들을 닦아내었다. 스타 사파이어, 마치 별빛같은 하얀 선이 중앙에 새겨져있는 불투명한 사파이어 커프 링크스였다. 알렉스는 이것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에 잃어버렸을 때엔 가구를 옮겨대며 찾았기 때문이었다.
이 커프 링크스는 오래전 그가 레널드에게 생일선물로 사준 물건이었다. 하지만 선물을 받은 순간 레널드는 매우 큰 난처함을 표했는데, 기실 그는 커프 링크스를 달만한 셔츠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알렉스는 레스토랑에서 나오자마자 셔츠마저 다시 사주어야 했다. 잃어버린 것은 그 후로 먼 시간이 지나서의 일이다. 레널드는 이유모를 일로 괴로워하고 있었고, 알렉스와의 관계도 여러번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다툼이 끝나고나서야 그들은 생일선물의 한짝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그 때 찾았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서는 골몰히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광택은 빛을 잃지 않았고, 하얀 줄도 선명하다. 지금 당장에라도 구멍에 끼워넣으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무리라는 것을, 이미 레널드도 자신의 물건들을 갖다 버렸음을 알렉스는 알고 있었다. 레널드는 아주 홀가분한 분위기로 페터에게, 모든 것을 정리하였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자신을 향해 한 말임을 알렉스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반짝거리는 보석도 결국에는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는 발톱으로 그것을 건드리다가 이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비어있는 쓰레기통에 금속성의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마치 그의 심장도 똑같이 바닥에 떨어져내리는 것 같았다.
난방이 꺼진 한겨울의 박물관에서는 입김이 올라왔다. 알렉스는 사무실로 침투하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모형을 보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환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사랑해마지않았던 푸른색 눈동자처럼 파란 구체 주변을, 천장에서 내려온 실에 걸려 환히 빛나는 노란 구체가 돌아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레널드가 기뻐하며 말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곳은 그들이 예전에 몇 번 와본적이 있던 곳이었고, 특히 저 기묘하게 움직이는 모형을 레널드는 좋아했었다. 달이 지구 주변을 계속해서 도는거야. 남몰래 맞잡았던 손의 감촉이 다시금 떠올라 알렉스는 고개를 돌렸다. 네 눈은 달빛을 닮았어. 달콤하게 속삭이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다가 지워졌다. 레널드는 부끄러움이 많았고 수줍음도 많이 탔기에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어째서인지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했었다. 박물관을 나와 집 앞에 자동차를 주차시키고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나서 한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레널드의 눈빛은 바닷빛을 띠고 있었기에, 더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알렉스, 침투했어?”
정신을 되찾기에 많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페터의 말에 알렉스는 급히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구모형은 계속해서 자전하고 있었고, 달의 모형은 계속해서 지구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달칵, 하며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두 구체의 춤도 어둠속으로 잠겼다.
자료를 파악하고 무사히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동녘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CCTV의 사각에서 걸음을 옮겨 박물관의 담장을 건넜다. 공기는 매우 차가웠고 입김이 올라왔지만 모든 것이 가라앉아 있었기에 또한 맑았다. 서쪽 하늘 언저리를 돌아보니 이제 잘 준비를 하고 있는 달이 보였다. 이빨모양 달은 그 모습을 점점 빌딩숲 사이로 도망치고 있었다. 알렉스는 멍하니 져가는 달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 어린 열기가 그대로 밖으로 터져나오자 어쩐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걸 터뜨려버린대도 울분이 풀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박물관에 잠깐 시선을 멈추다가 이내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제부터는 평범하게 출근하는, 혹은 퇴근하는 검은 고양이처럼 보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 아침의 혼란을 틈타서 사회에 스며들기만 하면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의심하지는 않으리라. 그럼 그때처럼 경찰에 붙잡히는 일도 없을 것이고, 페터가 자신에게 왜 변호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타박하는 일도 없을 터였다.
그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대로로 빠져나가서 지하철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럼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잠을 잔 다음에, 회사로 가서 상황을 보고하기만 하면 끝날 것이다. 그렇게 평소대로, 순조롭게 일을 끝내면 페터도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이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 지구의 주변을 돌던, 작은 플라스틱 모형들이 아른거렸다. 다시 한번,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시 한번 그 모형을 닮은 눈동자가 보고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방법은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발걸음을 조금만 돌려서 술집거리로 간다면, 그리고 그 거리에서 아무나에게 시비를 거는 지옥개들을 만난다면 분명-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얼른 그쪽으로 향하라고 재촉했다. 피로와 그리움에 찌든 뇌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몸을 멍하니 심장이 향한 곳으로 움직이게 했다.
CCTV 너머 한편에 있는 지옥개는 길가에 서서 베이글을 베어물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영상실 안에서 검은 고양이는 그 지옥개가 바쁜 아침식사를 마치는 것을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옥개가 독립한 것은 그가 연인과 헤어지고나서였다. 페터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첫 자취생활이 익숙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실수가 많다고 했고, 식사도 바깥에서 때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렇게나 독립을 설득했던 자신이 우스워졌지만 입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레널드는 커피까지 다 마시고 쓰레기통에 봉투를 집어넣었다. 다시 되감기버튼과 재생버튼을 누르자 다시 지옥개가 베이글을 베어물었다.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닐거라고 생각되었다.
그 날은 레널드가 소개시켜준 변호사를 만난 날이었다. 벌써 5번째였는데 이번에는 사고뭉치 아이들을 가진 펌킨이었고, 그는 아주 익숙하게 마치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듯 알렉스의 패악질도 태연하게 이겨냈다. 결국 모든 흥미를 잃어버린 알렉스는 펌킨의 말에 따라 전에 자신을 집단폭행했던 지옥개들에 대한 합의금에 대해 협의했다. 꽤나 많은 액수를 받아낼 수 있을거라는 말에 기뻐해야 마땅했지만, 그는 단순히 제 앞에 앉아있는 시민이 펌킨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실망하고 말았다. 차라리 그 말을 지옥개의 입에서 들었더라면, 그걸 알아챈 펌킨 변호사는 재빨리 협의를 끝냈다. 이제야 드린다며 받은 명함에는 낯선 이름과 낯선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그는 다시 되감기를 눌렀다. 이번에는 그가 건물에서 나올때까지였다. 그의 곁으로 이번에 쫓는 용의자가 지나쳐갔다. 레널드는 누군가와의 전화통화를 마치고는 봉투에서 베이글을 꺼내었다. 알렉스는 멍한 눈빛으로 이번에는 빨리감기를 눌렀다가 떼었다. 지옥개는 쓰레기통에 봉투를 집어넣고나서 멍하니 CCTV를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마치 서로의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지만, 그가 알렉스에게 일부러 보라고 그랬을리는 없었다. 헬하우스씨에게 들었습니다, 정보국에서 일하신다고요. 펌킨은 악수를 청하며 말했었다. 알렉스는 순간 CCTV 화면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는 몇 번 얕은 웃음을 터뜨리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더 크게 웃다못해 흐느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면속에서 레널드의 모습을 발견할때마다 그는 되감기와 재생버튼을 반복했다. 흐느낌은 이내 울음섞인 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등이 들썩거리며 눈물을 참아내지 못한 순간에도, 화면속 지옥개는 그 심경을 아는지 담배를 한 대 태우고는 화면 너머로 사라졌다.
Side P.
경찰서에 도착한 건 밤중이었다. 페터는 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형사를 앞에 두고 앉아있는 검은 고양이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돌진했다.
“알렉스!”
목소리는 노기에 차 있지만 검은 고양이의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앞에 컴퓨터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던 초록색 악마는 페터를 확인하고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알렉스 앞의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릴 수 있었다. 동료왔다, 그 말이 끝나고나서야 검은 고양이의 머리가 올라갔다. 반쯤 멍하니 시선을 놓은 채, 알렉스는 페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온 몸의 피가 말라버릴 것 같은 기분에 페터는 저도 모르게 알렉스의 정수리에 크게 주먹을 내리꽂았다. 보호자분! 하는 악마의 경악섞인 목소리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바보야! 네가 붙잡히면 어떻게 해?!”
주먹과 함께 내려간 고개는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증거는 찾아서 보냈어요. 그거면 되었잖아요.”
“그렇다고 경찰에 붙잡혀? 넌 당장 시말서감이야!”
페터는 펴지지 않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다가 아직도 분에 못이겼는지 땅만을 내려다보는 검은 고양이를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가끔씩 사소한 사고를 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나 부주의하고 위험한 사고라니, 설마 용의자를 미행하다가 자신이 경찰에 신고당해서 붙잡힐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기, 보호자분, 잠시 이야기좀-”
“그건 알거 없고, 여기 책임자 누구요? 이 녀석은 내 부하라서요.”
그는 다른 시민들은 보지 못하게, 넌지시 자신의 정보국 수첩을 악마에게 보여주었다. 그제야 변호사도 부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검은 고양이를 상대하던 형사는 무슨 일인지 알아챘다. 그가 서장에게 전화를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락사인이 내려졌는지, 형사는 서장실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알렉스의 손목에 차여져있던 수갑은 어느새 풀려져있었다. 그 모습에 페터는 혀를 차며 다시 한숨을 내쉬고, 그러다 다시 부하에게 꿀밤을 먹였다.
“잘나신 묵비권은 어디다 놔뒀어?”
서장과의 이야기는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었다. 둘 다 없던 일로 하자는, 그야말로 기관 대 기관으로서 할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조수석에 알렉스를 앉히고, 그의 집까지 운전해가면서도 페터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렉스는 페터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서는 흘러가는 빌딩의 불빛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써먹으라고 있는 게-”
“혹시 좋은 변호사 있어요?”
그 말에 페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제야 그는 제 옆에 앉아있는 검은 고양이가 제 개인변호사를 부를 수 없는 상황임이 다시 기억난 것이다. 세달 전부터였던가, 언제나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연인을 부르던 그의 입에서 그 단어가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다. 둘이 결국 이별을 선택했음을 알게 된 건, 그 후 검은 고양이가 아저씨라고 부르던 시민을 만나고 나서였다. 먼저 이별을 고한 것은 레널드였다. 그 레널드가 검은 고양이의 변호사였다.
“...레니가 소개시켜주지 않던?”
“...지옥개가 소개시켜주는 변호사가 거기서 거기지.”
페터는 언젠가 레니가 말해주었던, 둘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일화를 떠올렸다. 알렉스는 은연중에 단순히 거슬린다는 이유로 음료수컵을 레니를 향해 쳐버렸고, 덕분에 레니는 고양이에게 세탁비를 청구해야 했다고. 레니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 때를 떠올렸었다. 아마 비슷한 짓이라도 했을 것이고, 그걸 제정신으로 견뎌낸 변호사는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검은 고양이가 좋아, 아니면 펌킨이나 늑대인간.”
알렉스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침 동료에게서는 무사히 자료가 도착했고, 증거로서의 효력도 갖추었다는 연락이 왔다. 알렉스가 체포당하면서까지 얻은 보람이 있었다.
“...지옥개는 싫어, 까탈스럽기만 하고 너무 답답하고, 말하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검은 고양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잠에 들었다. 페터는 까탈스럽고 답답한 지옥개를 떠올렸다. 그 무표정한 지옥개는 연인을 만날 때마다 마치 보석이라도 보듯 눈을 반짝였었다. 둘은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걸 아는 시민은 자신을 비롯해 한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더더욱 페터는 둘의 일거수일투족을 억지로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알렉스는 레니와의 연애담을 마치 비밀처럼 그에게만 조금씩 들려주곤 했던 것이다. 그걸 듣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친구와 부하가 나누는 연애는 이 세계에는 법적으로 어긋난 일이란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지적에 레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미 반쯤은 죽어버린 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조만간 200여년 안에는 사라질 법이라고, 그 말을 지옥개를 통해 들었을 때 페터는 이 커플은 어떻게든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다음부턴 이러지마, 더 그러면 나도 손 못써.”
엑셀을 밟으면서도 페터의 머릿속에는 쓴웃음을 짓는 레니의 모습이 아련거렸다. 과연 그만큼 알렉산드로 토레스를 이해하는 변호사를 찾을 수 있을까, 페터는 도저히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만큼은 다른 변호사를 떠올릴 수 없었다. 본인도 가끔씩 레니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변호사를 만날 일이 없었다. 철창 안에서 검은 고양이는 얼굴 한쪽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채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는 2시간 전, 지옥개 무리와 싸움을 벌였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고, 지옥개 무리에 비해서 덜 다쳤다는 이유로 철창 안에 갇혀있었다. 하필이면 공무중이 아니었기에 페터도 손을 쓰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는 다른 변호사는 생각할 수 없었다. 형사들의 앞에서 지옥개 너댓명이 어디가 더 아프다느니, 자신을 죽일뻔 했다느니 하며 뻐팅기고 있었다. 그들은 지옥 내에서도 상위종족이었고 덕분에 콧대는 하늘을 찌를만큼 높았다. 그들의 코를 눌러줄만한 변호사는, 그가 생각하기로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미안, 어쩌다보니까 생각나는데 그쪽밖에 없었어.”
레니는 페터의 생각보다는 빨리 경찰서에 도착했다. 일하던 중이었는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페터는 이 안경쓴 모습이 처음이라 상당히 낯설었다. 그는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형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감놔라 배놔라하던 지옥개들에게 명함을 나눠줌으로서 그들의 높은 콧대를 바닥으로 깔아뭉갰다. 레니는 체포의 부당함을 역설하고서는 쌍방폭행이 아닌 일방폭행과 그에 따른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일이 얼추 다 끝나고나서야 레니는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을 수 있었다.
“...분명 알렉스에게 소개시켜줬어, 정 아니면 국선변호사도 있었고.”
“내가 알고 있는 변호사는 너밖에 없어서. 게다가 저놈들을 누를 수 있는 것도 너밖에 없고.”
페터의 말에 레니는 들고 있던 미지근한 커피를 마셨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알렉스가 있을 유치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고양이는 형사의 부축을 받아 밖에서 나왔는데, 레니의 존재를 알아채자마자 잠시 지긋이 바라보다 일부러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레니는 생각보다 부상이 심한 것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머리에 둘러진 붕대에 손을 갖다대려다 이내 서류더미를 붙잡았다. 담담하게, 평소처럼 클라이언트를 대하듯 그가 말했다.
“쌍방폭행은 안되게 처리했어. 그러니까 경찰서에서 나가자마자 병원에 가서 진단서부터 떼. 변호사는 괜찮은 시민 소개시켜줄게, 내가 오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짜증난다는 듯 마지막 말에는 가시가 돋혀있었다. 알렉스는 그 가시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그러나 시선은 마주치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 헬하우스의 변호사님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주셨잖아. 괜찮아, 아저씨. 아저씨가 한 대로 다 할게, 와줘서 고마워.”
마치 비꼬는 것 같으면서도 진심이 담겨져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옆에서 둘을 바라보는 페터는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둘은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필요한 서류, 소개시켜줄 변호사, 피의자들의 대우... 그야말로 변호사와 의뢰인이 나눌법한 대화였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페터는 더욱 답답했다. 3개월 전이었다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레니는 다치지 않았냐고 타박하면서도 걱정했을테고 알렉스는 괜찮다고 웃으면서 말했을 것이다. 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페터는 숨이 막혔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알렉스는 그 뒤로는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페터는 내심 혹시 일부러 지옥개들에게 맞은게 아니었냐는 생각을 해야 했지만, 그 뒤로 보인 반응을 보면 아닌 게 분명했다. 알렉스는 레니가 제 할말을 다하고 나가자마자 바닥에 침을 뱉어 경찰에게 혼나야 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본 듯한 눈이어서, 오히려 둘의 관계가 더 악화되지 않기만을 빌어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동료들도, 근처의 그 누구도 알렉스에게 레니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둘의 절교-라고 알려진-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출장을 위해 인간계로 떠나는 비행기를 탈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약을 맡은 부하는 알렉스를 의식해서인지 일부러 헬하우스항공이 아닌 다른 비행기를 예약해놓았다. 페터는 공항에서 헬하우스항공의 표식을 지나칠때마다 일부러 알렉스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도 알렉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스코트를 붙잡고는 다정하게 셀피를 찍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레니와도 저렇게 찍었었지, 딱봐도 억지로 붙잡고 찍은게 분명하던 사진들을 보여주던 알렉스를 떠올리니 모든 것이 다 며칠 전에 일어난 일만 같았다. 수줍어하던 지옥개,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하던 검은 고양이. 애석하게도 이제 둘의 조합은 볼 수 없게 되어버렸고, 앞으로도 기대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페터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던 알렉스를 억지로 데려오며 그것이 못내 아쉽다고 생각했다. 알렉스의 지옥개폭행사건 이후로 우연히 만났던 레널드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황망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둘 다, 서로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던 무언가가 아주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Side L.
커다란 돔 안에서는 오로라가 한가득 펼쳐져있었다. 마치 루시퍼가 실크커텐이라도 두른 양, 검푸른 하늘에는 천자락들이 아름답게 걸려있었다. 물론 이것은 진짜 오로라가 아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플라네타리움에 앉아 혼자서 돔 표면에 투영된 가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로 자신의 눈으로 오로라를 본 적이 있었다. 간신히 휴가를 맞춰 연인과 함께 북유럽에 여행을 갔을 때였다. 역시 인간의 피부는 털이 없어서 약한지라 둘의 얼굴은 추위에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특히나 코가 심하게 붉어져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다가 사진을 찍기도 했다. 녹색의 커텐이 하늘에 드리워질 때엔 숨도 쉬지 못하고 미친 듯이 하늘만 바라보다가, 다음날 목이 쑤신다고 고생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열심히 오로라를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새벽까지 침대 위에서 뒹굴어서인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때는 정말로 미쳐있었다, 고 물을 마시며 그는 생각했다. 어느새 하늘에선 커텐이 걷히고 선명한 은하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은 별의 바닷속을 허우적댔다. 마치 물에 잠겨 익사하듯 사랑을 했었다. 야근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장기휴가를 얻어냈고, 그렇게 휴가를 얻어냈다 싶으면 인간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성애자들, 특히 연인들끼리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기회만 되면 돈을 많이 벌어 인간계로 갔다. 개중에는 불법으로든 합법적으로든 인간계에서 사는 시민들도 있었다. 인간계는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다. 길거리에서 손을 잡든 입을 맞추든 사람들은 시선만 보낼 뿐 관여를 하지 않았다. 경찰들의 시선을 신경써야하는 지옥과는 너무나도 천지차이였다. 그래서 상대방만 괜찮다면 더더욱 인간계에 있고 싶었다. 그들은 사랑하기에는 모든 시간이 부족했고, 또한 사랑하기에는 지옥 시민들의 시선이 너무나도 따가웠다.
“손님, 이번 타임은 다 끝났는데요.”
객석 한가운데에 앉아서 투영기를 만지던 중년의 남성이 일어나서 말했다. 다음 회차까지는 30여분의 시간이 있었기에 직원은 잠시 목이라도 축이고 싶어했다. 그는 그걸 알아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둠속에서는 바닥에 깔려있는 조명만이 길잡이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통로를 지나 두꺼운 문을 열자 갑작스레 햇빛이 눈앞에 쏟아졌다. 그는 창문 너머로 비쳐오는 햇빛에 얼굴을 찌푸렸다. 복도에는 손님을 기다리며 졸고 있는 직원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직원은 따사로운 햇빛에 서서 졸고 있었는데, 그가 앞을 지나가자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가볍게 목례만을 하고서는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한참 시험기간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박물관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볼 수 있다고 위안을 삼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청소년 취향의 박물관에 어른, 그것도 중년이 다 되어가는 30대 남자 혼자만 있는 것은 어딘가 겸연쩍었다.
아마 연인을 데려왔으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연인은 취향이 어린애같아서 움직이는 모형만 보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연인은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모형을, 마치 둘이 춤추는 것 같다면서 좋아했었다. 그 말이 나오고나서는 결국 집에서 같이 춤을 추고 말았다. 단 둘이서, 간신히 치워놓은 방에서 블루스 음악을 틀어놓고, 연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서로의 손과 허리를 붙잡으며, 그렇게 느리게 달과 지구가 서로의 곁을 돌고 있듯이. 애석하게도 이 박물관에는 달과 지구만 있는 공전모델은 없었다. 그보다는 더 큰,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이라는 주군의 주위를 빙빙 도는 재미없는 모델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홀로그램상으로나마 지구의 주변을 돌고 있는 달을 보며, 언젠가 서로가 서로의 한쪽 얼굴만을 보며 돌아가게 될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투영실에 갈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를 발견한 기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기사가 자신을 과연 무어라 생각할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좌석 맨 끝의 가장자리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양새 하며, 살짝은 어색해보이는 분위기가 사귄지 얼마 안 되어보이는 것 같았다. 둘은 데면데면해가며 천장에 시선을 집중했다. 별무리가 그들 위로 쏟아져내리자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감탄이 튀어나왔다. 저것봐요, 여자가 남자에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둘은 행여나 그에게 들릴라, 서로의 귀에 속삭이며 대단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너가 있는건지 없는건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연인과 처음으로 플라네타리움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연인은 정말로, 옆에 있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리액션이 과했고 결국 그날은 대판 싸우고 말았다. 그들은 몇날 며칠을 서로에게 토라져 있다가 간신히 화해했다. 연인이 먼저 그에게 연락을 걸어, 아무리봐도 풀이 심하게 죽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나서야 그는 연인의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나레이션이 포함된 것이었는지 늙은 남성의 목소리가 돔 안에 가득 퍼졌다. 돔안에 울리는 목소리에 커플의 목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꺄르륵 거리는 웃음소리, 너무 재밌다고 고맙다고 말하는, 짜증이 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일어서서 너무 시끄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단순히 뒤에 있는 커플을 향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래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았다. 눈앞에는 다시 오로라가 환하게 펼쳐졌다. 감동을 받았던지 뒤에서는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둥그런 벽을 올려다보았다.
인간계에서의 휴가는 지루한 연례행사가 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플라네타리움에 환장하며 살았건만, 정작 오랜만의 천체투영은 너무나도 지겹고 시시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는 박물관을 빠져나와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더 이상은 자신이 우주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생각을 해야만 했다. 설마 그 모든 것들이 지겨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무엇을 봐도 큰 감흥이 없었고 따분하고 지루했다. 그는 예전이었다면 들렀을 기념품코너도 무시한 채 차에 올라탔다.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어떠했던가. 그는 연인의 티셔츠를 끌어당기고는 이리저리로 튀려고 하는 연인을 끌고 다녔었다. 인간계에서는 옷자락을, 지옥에서는 꼬리를 잡았다. 그럼 연인은 또다시 투덜거리며 이리저리 쫑알거리긴 했지만 잘 따라와 주곤 했다. 기념품가게에서는 커플로 똑같은 기념품을 두 개를 사곤 했었다.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연인과 헤어지면서 연인과의 기억이 어린 물건들은 모조리 다 수장시켰다.
모조리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딱 하나 연인과의 기억이 어린 것이 있기는 했지만 수장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현재 향하고 있는 별장은 그와 연인이 인간계에 놀러올 때마다 쓰던 곳이었다. 뉴욕 북쪽에 위치한 주택가에 마련한 별장에는, 인간계 기준으로 일 년에 일주일도 있지 못했다. 하지만 호텔에 있는 것보다는 지옥의 시민들과 마주칠 위험이 적었고, 무엇보다도 연인은 그 곳을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좋아했다. 둘은 그 집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잤고, 텔레비전을 봤으며, 서로를 품에 안고 아침을 맞이하곤 했다. 그런 공간을 그는 아직까지도 처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살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변명을 하며, 몇 번이고 부동산 중개인의 전화번호를 뒤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는 연인과 함께 뒤집어 쓰곤했던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서는 전화번호부책을 열었다 펼쳤다 하며 아까운 휴가시간을 보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아까운 휴가시간을 더욱 아깝게 인간계에서 보낼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만약 진작에 이 집을 처분했더라면, 아니면 아까운 휴가시간을 아깝게 여겨서 지옥에서 보냈더라면, 아니면 플라네타리움에 흥미를 가져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밤이나 되어서야 들어왔다면, 아니면 연인생각을 하지 않아 입맛이 돌았기 때문에 밖에서 저녁이라도 먹고 왔다면, 수많은 만약이라는 생각은 그의 뇌에 아주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런 생각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빼앗길 수가 없었다. 둘이서 계약했던 집 앞에 아주 익숙한 오토바이가 서 있었고, 히스패닉계의 남성이 헬멧도 쓰지 않은 채 그 위에 앉아있었다. 남자의 상태는 너무나도 심각해보였다. 얼굴 한쪽은 거의 함몰되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입술은 심각하게 찢어있었다. 옷또한 엉망이라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고, 심지어 옆구리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저 집 대문만을 먼지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도로에 발을 딛자 순간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샌디!”
그는 급히 차를 세우고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남자는 갑작스런 집주인의 등장에 당황해하며 급히 시동을 켰지만 열쇠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그는 급히 달아나려던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몸이 다시 크게 휘청이더니 급기야는 커다란 오토바이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그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급히 오토바이를 한쪽으로 밀고선 남자의 몸을 끌어당겼다.
“괜찮아? 괜찮은거야?”
남자의 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다리의 긴장이 풀렸는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품에서 벗어나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남자를 진정시키려 그는 남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이, 천천히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고서는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샌디.”
처음 그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레널드는 몇 번이고 알렉스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알렉스의 몸이 더욱 잘게 떨렸다. 그리고는 사랑하던 이의 품의 안긴 채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자 보이는 곳은 아주 익숙한 광경의 방이었다. 익숙한 감촉의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마도 부엌쪽에서 누군가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거의 1달만일 것이다. 경찰서에서 마지막이라고 냉담하게 말하는걸 들은 게 마지막이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작은 화면을 통해서 가끔씩 보이던 모습만 쫓았을 뿐이었다.
레널드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구급상자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알렉스는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려했던지 상체를 일으켰다.
“페터에게 말했어, 임무중이었다며?”
레널드는 억지로 알렉스의 어깨를 잡아눌렀다. 신음소리가 잇새에서 흘러나왔지만 이 환자는 어떻게든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안돼, 일단 응급처치는 해야지. 30분 있다가 페터가 온댔으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있어, 상처 벌어지잖아.”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억지로 일어나려던 움직임도 잠잠해졌다. 레널드는 조심스레 가위로 이미 넝마주이가 되어버린 셔츠를 잘라냈다. 어디서 굴렀는지 온 몸이 긁힌 상처 투성이었고, 왼쪽 옆구리에는 총알이 비껴나간 상처마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미 피는 반쯤 멈췄다는 것이었다. 레널드는 이 참상에 차마 눈을 돌리지도 못한 채, 한없이 망가진 알렉스의 신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러려고 연인과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런 꼴을, 평상시 자신이라면 학이 뗄 정도로 싫어하는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려고 알렉스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 내가 알아서-”
레널드는 알렉스의 말을 무시하고는 솜에 알코올을 잔뜩 묻혔다. 핀셋 끝, 몽글몽글한 솜덩어리에서 알코올냄새가 진하게 풍겨나 왔다. 솜덩어리는 상처에 닿자마자 검붉게 물들어갔다. 알렉스의 입에서 다시금 신음소리가 나왔지만, 레널드는 봐줄 생각이 없었는지 계속해서 솜을 바꿔가며 상처부위들을 소독했다. 피비린내는 어느새 알코올냄새에 가려졌고, 방 안에는 알렉스가 이따금 내뱉는 신음만이 얕게 울렸다.
“....아프니?”
레널드는 착잡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너무나도 무서웠기에, 총알이 빗나간 자리를 소독했을 때에는 핀셋으로 상처부위를 찔러버리는 실수를 저지를 정도였다. 약을 바르고나면 얼굴의 차례였다. 알렉스의 인간일적의 얼굴은 상당히 잘 생긴편이어서 레널드도 제법 좋아했었는데, 그 얼굴이 처참히 망가져있었다. 유난히 민감했던 탓일까, 이번에는 통증이 더 심했는지 앓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특히 한쪽 눈가가 발갛게 부어있어서, 그가 그렇게나 사랑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거의 실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레널드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귓가에 울리는, 맹렬히 소리치는 심장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레널드는 천천히 면봉으로 상처부위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일어나서 뒤돌아.... 도대체 어떻게하면 이렇게 심할 수가 있니?”
알렉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레널드가 물어봐야 할 질문은 따로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왔느냐고, 어째서 헤어진 연인의 별장에 모습을 비췄냐고, 혹여나 자신이 인간계에 있는걸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이 쏟아질 것을 각오했었지만, 정작 레널드는 어떻게 다쳤냐는 이야기만을 했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안심하다가도 묘한 불안을 안은 채 그저 일하다 다쳤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대답을 마치고는 레널드를 향해 뒤돌아 앉았다. 다시금 따끔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린다.
“...아저씨는 뭐하다 왔는데?”
순간 레널드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솜을 등에 난 상처에 대고 지긋이 누르다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잠시 박물관에 갔다왔어. 새로 생겼다길래.”
“천체박물관이지? 아저씨가 혼자서 박물관을 찾아간다면 그런 곳밖에 없을테니까. 우연이네, 나도 지옥에 있을 때 갔었어, 왜 그 둘이서 가끔씩 놀러가던 곳 있잖아. 사실은 일 때문에 간거였지만.”
아마 일이 아니었다면 다시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투다. 오랜만에 알렉스의 수다를 들으니 마음이 편하다가도 다시 불편해졌다. 이제 둘은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관계였다. 친구로라도 남자던 악수를 거절한건 분명히 알렉스 바로 자신이었다. 레널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등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보니까 아직도 있더라, 왜 그 달이 공전하는 모형 있잖아. 여전히 안변했더라고, 아저씨 그거 꽤 좋아했었잖아.”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말에 울음이 섞여있는 것 같다.
“다시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더라고. 달이 지구 주변을 그렇게 뺑뺑 돌기만 한다는게... 날 닮은 것 같더라.”
그리고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자신의 눈에도 눈물이 어려있을 것이다. 레널드는 손을 거두고는 조심스레 소맷부리로 눈가를 닦았다. 알렉스의 앞에서 미련이 있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앞에 있는 남자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해, 계속 CCTV로 아저씨를 훔쳐봤었어.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되더라. 어떻게해도 아저씨 주변을 계속해서 도는것만 같아. 나도 미치겠어! 그런데 이게 마음이 말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일방적으로 차인거니까 더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다시 시작하자는건 아냐, 아저씨도 나름 이유가 있을거고...”
알렉스의 말끝은 점점 뭉개졌다. 어쩌면 울음을 참아내느라 숨을 쉬지 않는걸지도 모른다. 레널드는 핀셋을 바닥에 떨구고는 고개를 숙였다. 평소처럼 투덜거리듯 말하는 그 태도에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그리움을 느꼈다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그는 속으로 소리쳤다. 이 이상은 자신도 더 이상 견딜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여기 온 건 그냥 우연이야, 정말이야. 내가 여기 CCTV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저씨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마치 지구를 돌고 있는 달처럼, 그리고 그 달을 보고 있는 지구처럼.
“..우습지? 미안해, 곧 나갈테니까-”
“샌디.”
순간 알렉스의 말이 멈추었다. 너무나도 침착하게, 하지만 평소대로 부르는 애칭에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공전이란건-”
레널드는 한번 입술을 물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자신도 확답할 수 없었지만, 이 터질듯한 심장고동이 어떻게든 말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알렉스는 갑작스런 레널드의 말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다시 레널드의 입이 열렸다.
“...단순히 달이 지구의 주변을 도는게 아냐. 중심이 지구에 있을 뿐이지, 지구도 달의 영향을 받고 있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레널드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만약 달과 지구가 비슷한 질량이었다면... 서로가 서로의 주변을 돌고 있었을거야.”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서로의 손을 맞잡고 몸만은 부딪치지 않게 거리를 두면서. 다큐멘터리에서 두 새가 서로의 주변을 돌며 구애를 하듯. 하지만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시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로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지만 두 천체가 그 술래잡기를 끝내는건 천문학적인 시간이 지나고나서일 것이다.
레널드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다시 이를 악물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스물스물 올라오며 그의 심장을 짜내고 있었다. 굳게 다문 눈 사이에서 눈물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머리를 들어올렸다가는 눈물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젖어가는 볼에 차가운 손바닥이 닿아 얼굴을 올린다. 레널드는 무언가가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부드럽고 축축한, 하지만 뜨거운 무언가가 자신의 눈가를 핥았다. 혀는 그의 눈가에 어린 눈물을 핥았다. 만약 평소였다면 싫다고 기겁했을만한 일이었지만 레널드는 그런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그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알렉스가 입술로 자신의 얼굴을 파악하는 것을 허락했다. 입술은 반대편 눈가도 핥고나서 코 끝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짧게 입술에 머물렀다가 이내 떨어졌다. 레널드는 그게 못내 아쉬워서 천천히 눈을 떴다.
알렉스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듯한 느낌에 그는 재빨리 알렉스의 손을 풀었다. 괜찮아, 괜찮아, 미안해.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에 절로 가슴이 아려왔다. 그의 얼룩덜룩한 뺨에 손을 갖다대자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마치 지구와 달처럼, 서로에게 닿지 못해서 주변만을 맴돌던 두 구체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의 노오란 눈동자는 마치 달빛을 닮았다고, 그렇게나 좋아했건만-
“정말로.... 닮았구나....”
먼저 입을 맞춘 것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목과 어깨를 감싸며 입술을 탐했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레널드는 얕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알렉스가 자신의 혀를 애무하고 옷을 벗기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셔츠를 벗기는게 서툰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고, 결국 참다못한 그가 단추가 다 풀리지도 않은 셔츠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손이 피부에 닿았지만 오히려 그 부위 하나하나가 화끈거리며 더욱 더 손길을 원했다. 레널드는 침착히 알렉스의 애무를 받으면서도 제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이제 알렉스는 레널드의 귀를 희롱하고 있었다. 그가 몇 번 힘을 주어 귀를 씹자 레널드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레널드는 알렉스의 몸 위로 올라탔다. 셔츠를 다 벗자 차가운 공기가 털없는 피부에 달라붙었다. 알렉스는 레널드의 엉덩이를 지분거리다 꼬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허리를 감싸고는 유두를 핥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패팅에 레널드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할짝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새어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을 뿐이었다. 얼마나 그리웠었나, 알렉스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레널드는 그의 등에 팔을 돌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서서히 몰려들어오는 간지러움에 허리를 흔들었다. 온 몸이 불덩이가 된 것처럼 뜨거웠고, 이제 그 열기는 점점 아래로 몰려들고 있었다. 레널드는 이미 상대방의 페니스도 반쯤 발기되었단걸 알고 있었다. 무릎으로 그 부분을 자극시키자 알렉스의 잇새에서 얕은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아... 아저씨....”
허리를 만지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레널드는 무릎으로 선채로 알렉스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벨트는 너무나도 쉽게 풀렸고 이윽고 지퍼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는 한손으로는 레널드의 허리를 감싸고 나머지 한 손은 드로즈속으로-
-Rrrrrrrrrrrrrr Rrrrrrrrrrrr-
둘 다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었다. 벨소리는 방금전까지 레널드가 통화를 하고 있던 부엌에서 나고 있었다.
“...가지마, 레너드.”
알렉스는 급히 레널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벨소리는 계속해서 부엌에서 울려퍼졌다. 레널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행여나 놓칠새라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알렉스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가늘게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제발 가지 말라고, 배에 따뜻한 입김이 느껴졌다. 아, 어째서. 레널드의 온 몸과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여태껏 무슨 일을 벌였는지 정신을 차렸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샌디, 이래서는 안돼.”
그는 마구 고개를 내저으며 알렉스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벨소리는 한번 끊기더니 다시 부엌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부탁이야, 샌디. 이래서는 안돼, 우린 이미 헤어졌어.”
도대체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은 이미 헤어진 사이였고, 이렇게 몸을 섞어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애무에 몸을 맡겼고, 그의 입술에 화답했으며, 그렇게 열렬히 서로를 원했던걸까, 그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저씨도 날 사랑하잖아... 왜 안된다는거야...”
알렉스의 울음섞인 목소리에 레널드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째서, 알렉스는 헤어지는 순간에도 미련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저 헤어지자는 말에 조용히 수긍했을 뿐이었다. 왜 지금와서 이렇게 잡는걸까, 그리고 어째서 자신은 이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은건가.
“..미안해, 미안해 샌디. 하지만 이건 안돼, 안돼.”
하지만 어떻게든 레널드는 이 품에서 벗어나야 했다. 머릿속에서 형들이 비아냥거리며 사진을 펄럭이는 모습이 다시 아른거린다. 다시, 다시 죽어버리는게 나을, 그런 생활을 하기에는 이미 그는 너무나도 많이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몇분을 실랑이한 끝에야 간신히 레널드는 알렉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언제 그런 열기가 있었냐는 양, 몸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알렉스는 멍한 눈으로 레널드의 궤도를 쫓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마치 듣는 사람이 괴로우라고 그런건지 레널드도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던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무사히 전화를 받고 담요를 가지러 방에 다녀오니 이미 소파에는 언제 그런 사람이 있었냐는 양, 정적만이 채우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로 그러니,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바닥에 널려있던 셔츠도 같이 사라져있었다. 다행이야, 그는 자그맣게 속삭이며 오토바이가 있던 곳을 향해 창문가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도로가에 형편없이 서 있던 오토바이는 이미 사라져있었고, 그 자리는 이제는 가로등불빛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져 있었고, 하얀 불빛만이 아무도 없는 거리를 비춰주고 있었다. 하늘에는 달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으로 가득했다. 레널드는 품에 담요뭉텅이를 안고서는 창문가에 등을 기대어 주저앉고는 고개를 담요에 묻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헤어지는 둘 이야기를 거의 보름동안 쓴 것만 같다. 단지 알레그로의 공전을 듣고 뽐뿌를 받은건데 이렇게 오래걸릴지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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