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05 본문
알렉스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레널드는 그의 휴대폰에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어느새 통화연결음은 사라지고 부재중이라는 메시지만을 앵무새처럼 내뱉을 뿐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일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 문자를 보내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확인했을 때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랑스러운 검은 고양이가 행여나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는가,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금방 잦아들었는데, 아침식사를 마치고 갑작스레 그의 아버지가 그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그러니 헬하우스 인더스트리의 회장의 서재는 생각보다는 조촐했다. 호화찬란한 에드워드나 리바이와는, 그렇다고 담뱃진이 책상에 어린 자신의 서재와는 달랐다. 조촐하다면 조촐하지만 책 한권, 가구 하나마저 힘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니 들어가자마자 위압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어렸을 때부터 레널드는 그 서재에 들어가기 전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왔구나, 그래 일은 어떻게 되어가지?”
아버지는 두터운 안경을 쓰고는 서류에 코를 박고 있었다. 아침인사도 생략하고 말하였지만 그건 이미 이 저택 내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가 말한 것은 아마 레널드가 맡고 있는 기묘한 사건인 것 같았다.
“닷새 후에 면담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선한 것은 아니고 그쪽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이죠. 그때, 폴 제머슨에게 접근금지명령을 들먹여서 그쪽에서 포기하게 할 작정입니다.”
늙은 지옥개는 서류의 서명란에 사인을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노쇠하고 전성기의 정력은 이미 많이 빠져나가버렸지만, 그의 탁한 에메랄드빛 눈만큼은 아직도 그가 충분히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연 그걸 받아들일지는 모르겠구나.”
“재판까지 끌고가면 매스컴에서도 달라붙겠죠. 최대한 그것만큼은 막아보도록 할겁니다.”
“해밀턴 전무의 일은?”
유산 때문에 고생한다던 그 대머리 이사의 일이다.
“좋은 변호사를 소개시켜주기로 했습니다. 조나단 도킨스라고, 아버지도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아버지는 목을 갸우뚱 기울이더니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리고 얕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빛과 말투는 차가워서, 누가 대화만 들어보면 아버지와 자식 간이 아니라 그저 회장과 고문변호사의 대화라고 착각할 만 했다. 그나마 집안이라는, 공간적인 요소가 그 이질성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존이군, 존이라면 괜찮겠지. 그쪽도 빨리 해결해주었으면 싶다, 이리저리 시끄러운 일들만 가득이니 말이다.”
“조만간 해결될 겁니다, 기다려주세요.”
“그래, 네가 말한다면 그렇겠지.”
그 말 한편에 숨겨져있는 신뢰에 순간 레널드는 정신을 차렸다. 가슴이 뛰며 기쁨의 함성이 몸속에서 터져 나오려다 사그라들었다. 그는 속으로 이 신뢰를 끊임없이 부정했다. 방금 전 자신의 아버지가 한 말은 ‘자식’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 애머릿 이사는 어떠냐? 들어보니 감기 때문에 오늘은 쉰다고 하던 것 같던데.”
“네, 하지만 오늘 자택에 직접 찾아갈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본인의 입으로 말하게 하는게 더 효과적으로 보여서요.”
아버지는 골치가 아프다고 느꼈는지 안경을 벗고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는 아침에 하는 일도 부쩍 피곤하다고 여겼다. 레널드는 아버지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위로의 한마디도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당신의 일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양육권소송이라니... 얼마나 황당한 말이어야지. 하지만 그런 소송을 당할 정도면 아이한테 잘 대해주지 못하는 건 아니냐?”
그 말에 순간 레널드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말로 몸이 뻐근한 건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 말을 당신이 내뱉을 자격이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죠, 그는 적어도 아버지로서의 소임은 다 하고 있습니다. 아이와 가지는 시간이 적을 뿐이죠.”
‘마치 당신처럼’ 하지만 굳이 그 말은 꺼내지 않는다. 어차피 꺼내봤자 그의 아버지는 시침을 떼며 다음 사안으로 넘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단 둘이서 다정한 시간을 지냈던 것을 떠올리려다 포기했다. 단둘이 있었을 때의 기억이란 오로지 사무적인 부자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것들뿐이었다. 용돈을 얼마를 주겠다느니, 어느 학교에 들어갈 것이라느니, 유학은 어디로 가겠냐느니 하는, 애정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관계.
“그런 위치에 있으면 그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하아, 알았다. 그만 물러가렴.”
“네, 물러가겠습니다.”
레널드는 어서 빨리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었다. 이 비뚤어진 관계속에서는 도저히 희망이란 보이지 않았다. 감정없는 대화들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다보면, 자신의 뇌마저 회색으로 물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참, 그리고 저번에 내가 말했던 그 하얀개 말이다.”
마치 오늘은 어떤 일을 해야 하겠다, 라는 사무적인 말투였다.
“혹시 이름이나 그런 건 알고 있느냐? 리바이가 그렇게 말은 했다만 별 소식이 없더구나.”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자신이 경악하고 있다는 것을 숨겼다. 갑작스레 아버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터져나올 줄은 몰랐다. 여기서 눈을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레널드는 시선을 바닥에 두고 대답했다.
“...이름은 레오와 같습니다. 똑같이 레오. 성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이름이 정해지기 전에 붙이는 아명도 일단은 레오.Jr로 등록되어 있다.
“그렇군, 이름이 똑같다니 그런 우연이 다 있구나... 정말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단다, 그렇게 하얀 지옥개는 나도 처음이거든.”
과연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의 조카는 제 할아버지를 눈앞에 두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자신의 아버지는 조카가 자신의 손자임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전이었다면 그 상황을 상상하고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스믈스믈 불안감이 기어들어왔다. 과연 당신은 새하얀 자손을 용납할 것인가.
“레오에게 말해보도록 할게요.”
물론 그런 일은 없다. 레널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숨길 작정이었다. 그걸 알고나 있는지, 아버지는 평온한 눈으로 레널드에게 인사했다.
“그래, 그럼 출근 잘 하렴, 레널드.”
아버지의 입가에 사무적인 미소가 어렸다. 레널드는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문을 열었다.
“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
제랄드 애머릿의 모습은 형편없어보였다. 그의 윤기나는 푸른빛 털들은 생기를 잃고 푸석푸석하게 변해버렸으며 눈에는 차마 떼지도 못한 눈곱이, 입술은 매우 창백했다. 누가 봐도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까지 직접 올 수 밖에. 변호사는 서재 내부를 돌아봤다. 그의 집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손때를 탄 수많은 장서들이 3면에 꽂혀있었다. 애머릿은 한편에 있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앉히고는 건너편에 서있는 레널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레널드씨. 몸이 이 모양이라.”
가정부가 홍차를 내주고 사라졌다. 주인장의 이마에는 해열팩을 붙여져 있었고, 온 몸에는 담요로 감싸여 있었다. 열기어린 숨결이 그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기침도 함께 터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손으로 기침을 막고나서야, 장서들을 둘러보는 레널드를 향해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옛날부터 책은 좋아해서 말입니다. 뭐, 원래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어요. 이혼할 때 한 1/3은 그쪽에다 넘겨줬지만요. 헨리도 책을 좋아했거든요.”
헨리는 전남편, 폴 제머슨의 아들이다. 그 아이를 떠올리는 애머릿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갔다. 분명 옛날을 회상하고 있으리라. 그를 지배한 고열은 그의 머리마저도 녹진녹진하게 녹여버려서, 이렇게 옛날 일을 슬프게 회상하게 만들곤 했다. 그의 시선이 어린이전집으로 옮겨갔다. 문득, 레널드는 이 집으로 오기 전, 압둘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
“정말 아꼈나보네. 이거 봐, 목도리 털색깔이 이사와 똑같잖아.”
“그러네, 그건 왜?”
압둘은 헨리가 두르고 있는 파란색 목도리와 애머릿 이사의 얼굴을 가리켰다.
“뭐, 지옥개님들이야 잘 모르시겠지만, 아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제발. 아무튼 요즘 할로윈에서 털달린 종족들 사이에서는 이게 유행이야. 자기 털을 빗으로 고스란히 모아서 실로 만들어서 작은 소품을 만드는 거지. 그리고 그걸 자식이나 친구에게 선물하는 거야. 뭐가 그렇게 낭만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덕분에 요즘 뜨개질이 유행이라고 하더라고. 이것 봐, 여기 목도리랑 이사님 털색이랑 똑같잖아. 이건 분명히 이사가 자기 털을 모아서 목도리로 뜬 거야.”
분명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괴기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그만한 선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압둘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은 애머릿도 그의 전남편인 폴 제머슨만큼 상대방의 자식을 사랑했다는 것일 테다. 물론 레널드는 그 생각에 무조건 동의는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무엇 하나, 정작 친자식에게는 애정을 보이지 않는데.
레널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제 앞에서 훌쩍이는 늑대인간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감기가 심했으면 코부근이 발갛게 헐어있었다.
“그쪽 변호사로부터 들었다면 아시겠군요. 다음 주에 면담이 있습니다만, 솔직히 아이들을 데려가기는 그렇죠. 물론 스콧이 P를 보고 싶어하지만... 솔직히 난 P가 우리 아이를 데려갈까봐 걱정까지 됩니다.”
“다행히 그쪽에서도 아이는 데려오지 않겠답니다. 온전히 두 분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겁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 모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법정이 될 것이다. 제머슨쪽에서도 아이를 데려오지 않는다는 말에 애머릿은 적잖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럼 헨리를 보는 것도 저번이 마지막이 되겠군요.”
“네. 그리고 만약 소송을 강행하려고 할 경우, 이쪽에서도 무언가 수를 써야 합니다. 그건 어떤 건지 대충은 예상은 하셨겠죠, 제가 저번에 서류를 드렸으니까요.”
“....과연, 그게 가능은 한겁니까? 애초에 레널드씨가 준 서류는 인간계의 법이잖습니까.”
레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너머의 눈빛이 반짝인다. 레널드가 애머릿에게 준 서류는 인간계에서 흔히들 쓰이는 이혼소송에 쓰이는 내용들이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쓸 수 있는 무기들 여러 개를 이미 지정해놓고 있었다.
“애당초 양육권소송도 인간계의 법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아직까지도 지옥에서는 결혼을 가족결합의 한 분류로 생각하고 있죠. 그렇기에 이런 경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에 대해서는 인간계의 선례를 들고 오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네, 궤변인건 압니다만, 이렇게라도 압박을 줘야죠. 아시잖습니까, 그 분께서는 일이 커지는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분, 이라는 말에 애머릿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는 제 앞에 앉아있는 지옥개가 어쩐지 그의 아버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렇게 법리를 다툴 때는, 오히려 형제들 중에서도 그가 제일 닮지 않았냐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일 좋은 건 그쪽에서 소송을 취하하는 거죠. 그 다음은 법원에서 소송을 기각하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이 우리 쪽에서 승소하는 거죠. 가능한 경우의 수는 이 세 개입니다, 우리가 패소하거나 애머릿씨가 아동국에서 친권을 박탈당하는 경우는 없을겁니다.”
“레널드씨.”
“저는 이번 면담에서 제머슨씨에게 확실히 말할겁니다. 어떻게되든간에 우리가 양육권을 넘겨주는 일은 없으며, 만약 그쪽에서 소송을 진행하면 패소하거나 기각이 될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쪽에서 그랬듯 인간계의 법을 따라서 면접권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제머슨씨가 아동을 약취하려고 했음으로 보고 접근금지명령을-”
“레널드씨!”
마치 물에 잠긴 것 같은 코맹맹이소리로 애머릿이 소리쳤다. 담요사이에서 열기가 후끈 올라왔다. 그는 잠시 어지러워하다가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는, 다시 몸을 담요 속으로 웅크려들었다.
“...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P도 사실은 아이가 너무 그리워서 그렇게 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난 그저 P가 이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애머릿은 절박한 시선으로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시선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그의 가슴 한편을 찔러댔다. 그는 애머릿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고, 그가 아직도 전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재결합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먼저 뒤통수를 친 건 저쪽이었다. 레널드는 그의 변호사로서, 이 배신당한 늑대인간을 변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감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보겠습니다, 애머릿씨.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당신은 회사 안팎으로 적이 많은 시민입니다, 내가 당신 변호를 맡아주는 건 이번만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어쩌면 당신은 무고한 죄를 뒤집어쓸지도 모르고, 누군가가 당신을 배신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심지어 부자관계라도 당신은 항상 뒤를 잘 살펴야 할겁니다. 회장님이 어떻게든 소송을 막으려는 건, 소송 때문에 당신에게 가해질 세상의 시선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애머릿씨도 아시다시피, 당신의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겠죠.”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애머릿은 정신을 차렸는지, 이사로서의 눈빛을 띄고 레널드의 말을 들었다. 그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데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어떤 희생까지 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한낱 감기와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레널드는 다음 말을 내뱉는 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스콧군이 아직 많이 어리죠?”
당장에라도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토해내고 싶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산전수전은 다 겪었고, 이미 시궁창에 발을 담그고 있었기에 그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할 뿐이었다. 이건 협박이 아니다, 이건 그저 아버지와 그와 그의 가족을 위한 길이라고 애써 자신을 위로하면서 다시 눈을 떴다. 애머릿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잠깐 쉬는 게 낫겠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담배라도 한 대 피고 싶건만, 그가 있는 곳은 회사 근처의 아파트라 마땅히 필 곳도 없어보였다.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면 알렉스의 집에라도 가고 싶었다. 검은 고양이는 자신을 위해 손님방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손님방의 침대가 아니라, 그저 그가 가끔씩 단잠을 이루던 소파에 드러눕고 싶었다. 그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창 요리준비를 하던 가정부가 자신을 보고 놀랐다. 그는 차가운 물을 한잔 달라고 부탁하고 응접실로 발길을 돌렸다. 응접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대략 10여분정도 주면 마음을 굳히기에는 알맞을 것이다. 알렉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페터가 별 연락을 안 하는걸 보면,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 것 같아보였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기요...”
찬물을 들고 온건 가정부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이치고는 작은 체구의 늑대인간 아이는 트레이에 담긴 물컵을 레널드에게 건네었다. 사진속에서 그 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스콧 A. 애머릿, 제랄드 애머릿의 둘째아들이자 이번 소송의 중심에 서 있는 시민이었다. 막내가 낯을 많이 가리지요, 언젠가 애머릿이 했던 말대로 아이는 매우 수줍어하며 물잔을 건네자마자 화분 뒤에 몸을 숨겼다. 레널드는 그 모습이 제법 귀엽기까지 해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안녕, 네가 스콧이니?”
아이의 뾰족한 코가 지옥고무나무의 잎사귀 뒤에서 튀어나왔다. 짙은 파란색 털에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네,”
“난 네 아버지 일 때문에 여기 왔단다.”
레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가 몸을 숨기고 있는 화분을 향해 다가갔다. 아이의 머리라도 쓰다듬으려 손을 올리자, 순간 아이는 움찔거리며 꽉 눈을 감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레널드는 석연치 않음을 느끼며 팔을 내리고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
“난 레널드 헬하우스라고 해, 너희 아버지가 일하는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 눈 좀 떠볼래?”
아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몸짓에는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고 그 작은 몸은 바들바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레널드는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커다랗고 올망올망한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담겼다.
“안녕.”
레널드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스콧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제 앞에 있는 지옥개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악수에 응했다. 아이의 고사리같은 손은 축축했지만 따뜻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스콧은 나무 뒤에서 나와서는 레널드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스콧 A. 애머릿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마치 가라앉을 기세로 말하긴 했지만 예의는 바른 것 같았다. 아이는 레널드가 소파에 앉자, 옆에 있는 스툴에 앉았다.
“그... 아버지는 괜찮은가요? 아빠랑 다투었다고 하던데...”
“누가 그러든?”
“...롭이요....”
롭이라면 이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였다. 입이 꽤나 가벼운지 스콧이 알면 불편한 일들을 이것저것 말해준 모양이었다. 입단속을 시켜야겠군, 언제 매스컴에 정보를 팔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는 그런 레니가 안전하다고 여겼는지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또 싸우는거에요? 아빠랑 아버지랑?”
아버지는 애머릿을 말하는걸 테고, 그럼 아빠는 폴 제머슨을 말하는 것 같았다. 레널드는 아이가 아빠와 아버지라고 둘을 부르는데서 위화감을 느꼈다. 보통은 친아버지를 더 친근하게 부르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본 적도 없는 시민이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전에도 많이 싸우셨니?”
아이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집을 나오기 전에도 몇 번 싸우셨어요. 형들이랑 내가 듣지 못하게 2층에다 보내고는...”
둘은 아이의 양육문제와 애머릿의 일 때문에 많이 다투었다. 애머릿은 톰을 기숙학교로 보내고 싶어 했지만 제머슨은 원하지 않았다. 제머슨은 애머릿이 양육에 관심을 가져줬음 했지만, 애머릿은 일을 핑계로 소홀히 했다. 어느새 둘 사이에는 사랑을 맹세하던 시절에 가졌던 신뢰가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이사하는 날에는 아버지와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형들은 그게 차라리 낫다고 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헤어지던 날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라 괴로운 것이다. 둘은 헤어지기로 결정하고나서도 아이들에게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톰은 모든 상황을 눈치채고 마음의 정리까지 해놓았지만, 아직 어린 헨리와 스콧은 이사가 결정되기 나흘 전에야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빠가 보고싶으면 어떻게하니?”
고개를 드니 눈 주위가 붉어져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당차게도 재빠르게 눈물을 닦았다.
“그럴때면 롭에게 부탁해서 전화를 걸어요, 영상통화를 하면 받아주니까요. 물론 아버지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요즘은 롭도 일부러 안해줘요.”
아마 소송때문일 것이다. 아이는 시무룩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돌아보니 문 근처에 애머릿이 담요를 칭칭 둘러싼 채로 서 있었다. 아이는 급하게 인사말을 했다. 부자답지 않게 데면데면한 관계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마치 자신과 아버지처럼, 하지만 레널드는 자신의 아버지는 자신을 저렇게 애처롭게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스콧, 방에 가 있거라.”
냉담한-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르는- 말투로 아들에게 말하자 스콧은 자신을 향한 인사도 없이 곧바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정하셨습니까?”
레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머릿이 몸소 이곳까지 온 것은 분명 마음을 굳힌 것이리라.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서재로 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서재로 향하는 늑대인간의 발걸음은 꽤나 무거워보였다.
▒ ▒ ▒
“48번 손님!”
저녁놀이 질 무렵의 관공서는 꽤나 분주했다. 어떻게든 오늘안에 서류를 처리하고 싶은 시민들은 저마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혼자, 혹은 자식을 데리고, 혹은 어린 아이가 심부름을 하러, 혹은 절친한 친구거나 연인으로 보이는 시민 둘이. 자식을 갖고 싶어한 시민들이라면 누구든 이 곳을 찾았을 것이다. 누구는 자신처럼 두꺼운 서류봉투를 들고 부모자격증을 신청하려고 했고, 누구는 둘째를 가질 생각이라며 자식신청을 위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아이는 같이 따라온 친구에게 동생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해줄지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하고 있었다. 커플로 보이는 스켈레톤들은 어느쪽 선친의 유골을 자식으로 삼을지에 대해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을 바라보는 알렉스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전부 다 부러운 소리였다. 자신의 대기표에는 50이 적혀져 있었다. 결국 시간이 다해서 대기표를 뱉어내던 기계가 전원을 꺼버렸고, 간발의 차로 뽑지 못한 시민들은 아쉬움을 토해내며 주말이 지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아쉬워 한건 지옥개였다. 그러고보니 어제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가기 전에 레널드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혹시나 J로부터 모든 일을 들었을까, 그럼 무슨 반응을 보일까, J는 레널드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레널드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을까, 그럼 그도 어제의 자신처럼 질투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어젯밤에 레널드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애석하게도 갑작스레 일이 터져버렸던지라 그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뉴스에도 나왔지만 결국 3인조 은행강도단은 손님을 향해 발포했고, 총을 맞은 시민 셋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문제가 더 있다면, 그 시민 셋이 스켈레톤과 펌킨이었다는 것과, 아직 그들이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어린이였다는 점이었다. 은행강도와 아동살인은 분명히 다른 분야였다. 결국 정보국에서는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알렉스는 집에 들어가 레널드의 침대에 누워 몇 십분의 짧은 수면만을 취하고 본부로 소환되었다.
“아마 본부에선 종족혐오로 인한 살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아. 거기서도 그랬다더군, 이것은 ‘정화’라고.”
그렇다고 그렇게 어린 아이를 죽일 것은 없지 않았느냐며, 맥은 사진속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었다. 아침에 보니 이미 이 일은 공론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현장조사가 끝나고 나면 바빠지리라. 그럼 당분간은 레널드를 보는 일도 힘들어질 것이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어 레널드가 보냈던 십여통의 부재중전화와 위험한 일은 있지 않느냐,는 메일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일이 끝난 직후에는 답장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레널드의 메일을 보자마자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J, 제랄드 애머릿이 마음에 들어 하는 상대에게 걸던 수작이 떠올랐다.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상대방에게 몸을 기대곤 했었고,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유성애자 시민들은 모두들 그의 유혹에 넘어가주었다. 개중에 넘어가지 않은 시민이 있다고들 소문이 돌았는데, 결국 그 시민과 정착까지 했다. 알렉스는 잠자리에서 J가 그 시민에 대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어제의 그 일이 J가 흔히 행하던 수작이 아님은 알렉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유명한 카사노바라 할지라도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자제를 건드릴 정도로 미친 놈은 아니었다.
‘그럼 난 미친 놈이겠네.’
생각보다 대기시간이 늘어졌다. 아무래도 방금 불려나갔던 시민이 무어라 항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기하고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스물스물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이력들을 바라보다, 결국은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저씨. 어, 전화 많이 걸었더라. 미안, 갑자기 일이 터졌어. 아저씨는? 오늘도 일이야? 내일이 주말인데 꽤나 빡세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레널드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담담했다. 평소에는 조금이라도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었는데 말이다.
-“응. 일이 끝나서 회사에 돌아가 봐야돼.”
“난 지금 아동국에 있어, 오늘 서류접수마감일이잖아, 그래서 접수하려고 왔는데 시민들이 많네. 맞아, 아저씨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응, 될 것 같아.”
“그럼 7시에 우리 자주 가던-”
순간 알렉스는 말을 멈추었다. 수화기너머 아주 작게, 하지만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레널드씨, 그럼 다음주에- 제랄드 애머릿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어린 아이의 인사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가 아주 살짝 격해진다. 지금 들켜버린 것에 당황해하고 있는걸까, 저도 모르게 분석하려고 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누구야?”
-“지금 외근하는 곳이야. 샌디-”
“헬하우스의 변호사들은 임원의 집까지 찾아가서 상담을 하나봐? 완전 직권남용 아냐?”
독한 말이 입에서 터져나왔다. 레널드는 알렉스의 말에 차마 대답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건 들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방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리란걸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까 그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더욱 더 가슴을 쓰리게 했다. 질투의 불꽃이 아주 조끔씩 마음속에서 일기 시작했다. J는 상대방을 상냥하게 다루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럼 방금 전의 목소리는 어땠지? 방금 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엔 머스크향이 묻어있던가?
“50번 손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레널드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샌디, 너도 알다시피 이게 내 일이야.”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물론 알렉스도 레널드가 말하는 바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일이 특별하듯, 레널드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걸, 그가 그 일을 받아들이던 순간부터 알렉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슨 소용일까, 알고 있는 것과 마음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다른 법이었다.
“미안, 나 서류내야해서, 끊을게.”
레널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알렉스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접수대에 앉아있는 스켈레톤에게 서류봉투와 신분증을 건네었다. 스켈레톤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들기더니, 무사히 서류가 접수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상투적인 인사였고, 알렉스가 듣기에도 썩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어차피 서류를 접수하고 통과가 된다고 한들, 레널드가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국 스켈레톤 커플은 키가 더 큰 쪽의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것 같았고, 방금 전까지 친구에게 자랑하고 있던 아이는 이제 일이 다 끝난 아버지의 바짓자락을 부여잡고는 피자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통과가 안되어서, 목숨이 3개 남았으니 허가는 어렵겠다며 거절당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애써 모아놓았던 털뭉치들은 결국 목도리든 장갑이든 되어서 레널드에게 갈 것이고, 다시 평소처럼 레널드의 곁에서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레널드 헬하우스는 다시 아이들을 볼때마다 착잡한 심경을 억지로 숨겨야 할 것이다.
그동안 몇백년을 괴로워했고, 이제 다시 몇백년을 괴로워할 것이다. 나이가 너무 많으면 자격증을 만드는 것도 어렵다, 라는 소리도 있는데 그럼 레널드는 영원히 아이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옛날에 J에게도 자식이 있다고 했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엔 아버지에게 자식을 맡기고 일을 한다고 했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그때 그 아이가 자라나서 낼 수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으니, 아마 새로 아이를 들인 것 같았다. 레널드는 그 아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쓰려온다. 건물 바깥으로 나오자 어느새 차가워진 겨울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슬슬 벽난로를 준비해야 할 계절이 오고 있었다.
맨션 현관에서 나가자마자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평소에도 지겹도록 타고 다녔던 세단이 도로가에 서 있었다. 검은색에 지붕에는 까만색 뿔 두 개가 솟아있는, 레널드 헬하우스가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새로 산 차였다. 운전석에는 차량의 주인이 자리에서 검은 고양이를 담담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서류접수는 잘 했어?”
들어가자마자 하는 인사가 저런 무심한 인사라, 오히려 알렉스는 안도해야 했다.
“응, 일단 접수는 잘 되었어. 저녁이라 그런지 시민들이 많더라, 결국 거의 끝날 때쯤에 지옥개가 왔는데 대기표도 못 뽑고 그냥 돌아갔어. 그러고보니 거기도 스켈레톤 커플이 오더라, 옛날이었다면 쫓겨 났을텐데 세상도 참 많이 변했어.”
“곧 주말이라 그래. 평일이었으면 그렇게 붐비지도 않았을거야.”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도로로 나가자 순식간에 대화가 끊겼다. 알렉스는 자동차의 엔진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레널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걸 알고는 있는지, 지옥개는 눈 앞의 도로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하지, J를 만난 것에 대해 추궁을 해야하나,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애머릿을 만난 것은 진짜로 일이었을테니, 자신으로서는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 서로의 일에 신경을 쓰지 말자고 한 것은 그가 한 말이었다. 결국 먼저 말한 건 레널드 쪽이었다.
“어디 갈까, 우리 자주 가던데?”
“응, 그러지, 뭐. 예약은 안 해도 되겠지? 거긴 예약하지 않아도 언제나 손님이 없었으니까.”
애매한 가격과 애매한 맛에 애매한 위치인 탓에 언제나 손님이 드물게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알렉스와 레널드는 그런 곳을 좋아했다. 레널드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도 적었고, 무엇보다 눈치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했다. 하지만 과연 그곳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방금 전에 나눴던 날이 잔뜩 서 있던 통화내용을 떠올리니 아예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샌디, 아까 그 전화 말인데....”
“응?”
레널드의 시선은 앞으로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알렉스는 어딘가 이 공기 자체가 떨리고 있다고 느꼈다.
“네 말대로 임원의 집에 가서 상담하는건 상당히 드문 일이야.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라 어쩔 수 없었어.”
“무슨 급한 사안이었길래?”
“미안, 거기까진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제랄드 애머릿씨의 일이라고만 말할게, 내가 말할 수 있는건 여기까지야.”
예상이 들어맞자 오히려 알렉스는 당황스러웠다. 하긴, 언제 레널드 헬하우스란 지옥개가 거짓말을 늘어놓긴 했냐마는, 너무도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는 모양에 김이 빠진 것도 사실이었다. 말을 더 늘어놓아서 레널드가 난감한 얼굴을 짓는 걸 보고싶었는데 말이다.
“정말로 말해줄 수 없어? 제랄드 애머릿이라면 상당히 유명한 이사잖아. 그런 이사가 일부러 아저씨를 원한거면 엄청 중요한 일 아냐?”
“중요한 일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일이야, 그리고 네 말대로 애머릿 이사이기에 우리한텐 중요한 일이지. 너도 아버지 성미 알잖니.”
레널드의 아버지인 헬하우스 회장이 얼마나 언론에 신경을 쓰는지는 알렉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널드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주말도 가릴 것 없이 뒤처리 때문에 일하곤 했었다.
“그리고 애머릿이사와 난 단순히 회사 동료일 뿐이야. 네가 질투할 이유는 없어.”
질투, 라는 말에 알렉스는 놀란 눈으로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 단어는 마치, 연인 사이에서나 나와야 할 말이었다. 저번에 고백은 대놓고 무시했으면서 그런 말을 내뱉을 줄이야.
“헤에, 우리가 질투할만한 사이였던가?”
일부러 빈정거리는 말투가 나온다. 하지만 레널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의외였다.
“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애머릿씨에게 들어보니까, 옛날에 알고지냈다면서?”
“.....그치가 그렇게 말을 해? 뭐라고 했는데?”
“역시 맞네. 그냥 몇 번 같이 밥먹은 정도라고 했어. 그 이상은 없었다고 잡아뗐지만... 나도 그 정도에서 넘어가기로 했어.”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차는 교통체증이 일지는 않지만 한가로운 도로를 일부러 돌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아예 몇바퀴를 돌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방금 전 돌아갔던 가로수를 다시 지나쳤으니까. 하지만 그는 일부러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런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 때, J는 망나니였어. 하긴 나도 엄청난 망나니였지만, 매일 밤만 되면 술에 쩔어서 클럽에 나타나곤 했었지. 그래서는 시민을 붙잡고는 한탄을 해대면서 울어대는거야. 하지만 인기는 많았어. 이혼했다고 했지? 그 이혼한 상대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로 개판이라서, 언젠가 저러다 객사해버리지나 않을까, 애인한테 칼빵이나 맞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였어.”
“너도 그 중 한명이었고?”
“....맞아. 하지만 결국 J는 제 사랑만나서 가버렸지. 아까 들은거 보니까 새로 아이도 가진 것 같언데, 봤어? J의 막내?”
“응, 상당히 수줍음을 타더라. 귀여웠어. 첫째는 기숙학교에 있다더군.”
알렉스가 너무 쉽사리 예전의 관계를 인정해버린 탓일까, 레널드의 말투는 오히려 냉담해져 있었다. 어쩌면 애머릿을 질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분명 기쁜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아저씨가 이렇게 냉랭해지는 것이 무서워하곤 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레널드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헤에... 나랑 만났을 때엔 첫째는 아버지한테 맡겨놓고 살았었어. 벌써 그 정도 나이가 되었구나. 가끔씩 사진을 보여주곤 했었어. 하지만 아이보다는 일을 더 좋아했지, 그래서 애를 기를 수가 없었댔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거기까진 말할 수 없어.”
자동차는 어느새 알렉스의 맨션 앞을 스쳐지나갔다. 알렉스는 조용히 제 집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정보국에서 직업을 갖고 이사하고 나서부터, 그의 집과 관련된 기억속에는 항상 레널드가 함께였다.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가구를 새로 사고, 배치하는 모든 순간에 레널드가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런 풍경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기실, 레널드가 이런 일을 하고 싶은 상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 것은, 맥이 이사를 했다며 집들이초대를 했을 때였다. 맥은 스미스와 함께 옷장을 어디에 둘것인가 하며 싸우고 있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높게 올라간 코, 축 쳐진 눈, 하얗게 몇가닥 나 있는 눈썹과 선명한 에메랄드빛 눈, 턱부터 몸 전면을 덮고 있을 하얀 털들. 만약 당신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당신을 닮았을까.
“....있지, 아저씨. 아이 가질 생각은 없어? 왜, 아저씨는 아이들 좋아하잖아.”
“너도 알고 있지만 아버지가 원하지 않으시는걸. 아버지는 우리 후대의 헬하우스는 오로지 레오의 자식이기만을 원하고 계셔.”
말하는 투가 너무 담백했다. 감정도 실지 않고 오로지 사실만을 말하는 목소리였다.
“아저씨네 아버지는 아저씨를 사랑하지도 않잖아? 그런 상대를 위해서 가지지 않겠다고? 솔직히 핑계아냐?”
“맞아, 하지만 자식은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어.”
놀랍게도 레널드는 몇초의 침묵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오히려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알렉스였다. 몇 번 말해보았던 사항이었지만, 언제나 레널드가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것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단순히 이뤄지지도 않을 사랑 때문에 아저씨를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아저씨가 회사를 물려받는것도 아니잖아? 난 그냥 아저씨가 아저씨 하고 싶은대로 해야한다고 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란게 있어. 무엇보다 아버지는 단순히 흰 털을 가진 손자가 보고싶지 않아서 자식을 가지지 말라고 한 게 아냐. 그것보다는 훨씬 더 원론적인 이유가 있어.”
아, 이제야 레널드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레널드는 아랫입술을 물으면서 대답을 삼갔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유인 모양인지 표정에는 분노마저 어려있었다. 어느새 차는 레스토랑이 있을 거리에 들어섰다. 그렇게나 가까운 거리를 이렇게 멀게 돌아다녔다. 이미 시간은 저녁시간을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게 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못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어. 옛날에야 많았지만, 아버지가 저리도 정정하시니 아마 살아서는 무리겠지만.”
그 예전이 언제였는가, 알렉스는 아버지가 호시탐탐 레오의 몸뚱아리를 노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산산조각난 후계자의 몸, 그는 비싼 배양액까지 손수 준비해서 제 손자의 탄생을 기원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이해하기도 어려운 짓거리에 학이 떼인 건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레널드는 로날드 헬하우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건 그가 말한대로, 자식은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차라리-”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걱정해주는건 알고 있지만, 난 너 하나 기르는 것 만으로도 힘이 빠져.”
어느새 레스토랑앞 주차장에 주차하면서 레널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당장에라도 자신의 계획을 말하려던 알렉스도 말을 멈춰야 했다. 레널드가 주차를 하려고 애를 쓰는 사이, 어느새 시묵해진 알렉스는 입을 삐죽하게 내밀고는 자그맣게 투덜거렸다.
“...진짜로 기르는 것도 아니잖아.”
레널드의 입가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언제나 슬펐기에, 어딘가 서글퍼보였다.
“그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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