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04 본문
“꺄오오-!”
품에 안긴 꼬마악마의 날개가 힘차게 퍼덕였다. 아이는 검은 고양이의 높은 체온이 마음에 들었던지, 더욱더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의 표정과 자세는 매우 불편해보였다. 그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아이 아빠는 그 못난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 검은 고양이의 친우에게 보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빨리 데려가, 애가 아빠한테 가고 싶다고 보채잖아.”
“훈련해야 한다고 했던게 누구였더라, 토레스씨? 조금만 참아봐, 애도 좋다고 잘만 있잖아. 그래, 짐. 삼촌 품이 마음에 드니? 그거 참 다행인데?”
“도대체 말이야, 아직 말도 못하는 애한테 이름이라니.”
그 말에 아이의 아빠, 맥 우드먼은 아이를 향해 까꿍거리며 놀렸다. 아이가 다시 꺄르르 거리며 웃자, 이번에는 첫째인 스미스가 날아와 다시 아이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부자가 쌍으로 팔불출이라고 혀를 차며 알렉스는 제 품에서 버둥거리는 꼬마악마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이제 높은 체온이 갑갑했는지 결국엔 제 아빠의 품으로 돌아갔다. 맥은 아주 능숙하고도 편안하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를 떠나보내자마자 갑작스레 한기가 느껴졌다. 무언가가 떨어져나간 느낌은 이상하게도 서럽기까지 했다.
“역시 다 나았나보네, 알레르기.”
스미스가 가져온 핫초코를 받아들때였다. 그는 핫초코가 미지근한지 확인하고는 컵에 입을 대었다. 하얀색 작은 마시멜로가 동동 떠있는 음료수는 마시자마자 입안이 아릴 정도로 달았다. 맥의 말대로, 그도 자신이 알레르기라고 부르던 증상이 사라졌단걸 알고서는 적잖이 놀랐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일었다. 어린 아이 특유의 질척한 몸과 감촉, 높은 체온, 온 몸에서 풍겨나오는 신 냄새와 자그마한 손가락을 생각할때마다 구역질이 일었다. 하지만 며칠 전, 케르베로스의 탁아실에서 멍하니 아이들을 쳐다보았을 때엔, 그런 불쾌한 감정들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샘이 떠들고 웃는 소리는 그다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분유냄새와 섞인 시콤한 냄새는 그다지 역겹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안겨져있던 아이의 온기는 또 어떠한가. 예전에는 그렇게나 싫어했건만, 방금 전에 안았던 짐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째서 그렇게나 기분좋은 향기가 났고, 그렇게나 마음이 포근해졌을까. 그 전까진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었다. 그의 몸이 변해버린 것이다.
“이랬던 적은 없었는데.”
그는 아직도 아이를 안아 아주 잠깐 행복에 잠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몇 번 손가락을 구부리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아우성을 듣는다. 다행히도 저건 지금도 듣기 싫었다. 맥은 역시나 능숙한 솜씨로 기저귀를 갈아준 다음에 아이를 달랬다. 짐이 품안에서 잠에 들고나서야 그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는 소리는 싫은데.”
“우는 소리를 싫어하지 않는 시민은 없어. 혹시 저번의 그 사건 때문인가.”
“...그 사건?”
“저번에 클럽 쳐들어갔다가 죽었던 거. 악마들도 죽다 살아나면 성격이 바뀐댔거든.”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떠돌았지만, 검은 고양이가 몇 번을 한자리에서 죽고 되살아나고를 반복하면 성격이나 취향이 변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운동을 싫어했던 고양이가 갑자기 마라톤을 뛰게 되었다던가, 음악에는 전혀 흥미도 없다가 되살아나니 음악가로서의 재능이 꽃핀다던가.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였고, 그도 우스갯소리로 내뱉긴 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단순히 농담으로 넘길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근처에 그런 일을 겪은 검은 고양이는 없었다. 대부분 사고로 1번만 죽거나, 살해를 당하는 경우에는 끝까지 죽었다. 물에 빠졌다가 구조되지 않는 한은, 몇 번을 죽었다가 되살아난 경험을 한 고양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치면 알렉스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너한테는 좋은 거겠지. 뭐, 하긴 그런게 아니면 네가 이런 생각을 했겠냐마는.”
맥의 말대로 아마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이런 생각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레널드가 아이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아이를 가져 같이 양육한다는 식의 생각은 꿈도 못 꿨었다. 그저 레널드가 빨리 아버지에 대한 부질없는 사랑에서 벗어나기를, 그래서 그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랐다.
“레널드씨에겐 얘기했어?”
“아저씨에게? 저번에 아저씨한테 자격증 따려고 준비중이란건 들켰어.”
순간 들린 사례에 맥은 켁켁거리며 괴로워했다. 그는 코에서 코코아를 뿜을 뻔 했다고 말하며 여러번을 괴로워하고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야, 너 그거 그냥 들킨거-”
“에이, 아냐. 일단 회사에서 인센티브 준다고 속였어. 다른 회사에서는 많이들 그러잖아.”
“말이 그렇지, 그거에 속아?”
“...아마도?”
알렉스는 맥의 눈초리에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사실 술을 마신데다 그 전에 고백까지 했던터라 넘어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의심을 거둔건지는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그 뒤로 아무런 언급도 없는걸 보면 그냥 믿어주기로 한 것 같았다. 맥은 알렉스의 회피에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서 아주 옛날, 페터가 당했다는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발 난 빼주라, 너희 변호사님, 한번 화나면 무섭다고 소문이 자자해. 너도 봤대매, 전에 너 한번 죽었을 때, 대장 멱살잡힌거.”
차라리 육체적으로 협박을 당하는건 괜찮다. 페터는 그 일 이후로 한동안 행여나 레널드가 소송을 걸지는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레널드는 그만큼 알렉스의 일에 관해서는 감정적으로 변하곤 했다.
“제발 그냥 말하고 허락을 받던지 거절을 받던지 답부터 들어.”
분명 거절이겠지만, 맥은 그 뒤의 말은 잇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는 레널드에게 직접 들어야 알렉스가 납득할 것 같았다. 한편 그 말을 들은 알렉스는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무리란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자격증부터 먼저 따고.”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맥은 이 검은 고양이가 결국 레널드에게 말하지 않으리란걸 알았다.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걸까. 다만 그만큼 알렉스가 레널드에게 약한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점점 쳐져가는 귀를 바로세웠다. 언제나 밝은 이 검은 고양이가 우울해하는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우리 애가 슈니첼이 먹고 싶대. 점심은 밖에 나가서 먹자.”
알렉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택가에 인접한 카페에는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늦게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있을뿐, 레널드 헬하우스가 카페에 찾아갔을 때에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레널드는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상대측 변호사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빨간 피부와 하얀 머리카락, 동생의 친구와 같은 성씨를 갖고 있어서 눈여겨보았던 상대다. 레널드가 보이자마자 상대방은 손을 흔들며, 이짝으로 오라고 걸출한 사투리를 내뱉어댔다.
“안녕하시요잉, 나가 아서 애플이라요.”
“안녕하십니까, 레널드 헬하우스라고 합니다.”
레널드와 아서는 서로를 향해 악수를 한 뒤,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둘은 이미 전화로 몇차례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오늘 만난 것은 며칠뒤에 있을 면담자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피고인 제랄드 애머릿은 원고인 폴 제머슨과 주기적으로 만남을 갖고 있었다. 둘은 서로 만나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평소였다면 웃음이 흘러넘치지는 않아도 어색하지는 않았을텐데, 이번 만남은 제머슨이 먼저 소송을 진행한 관계로 둘 간의 합의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성님이 워낙에 완고해서, 당신은 죽어도 작은 애는 데려오겠다고 안하요? 나가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말려봐도 소용이 없었오잉.”
애머릿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토마스 애머릿, 스콧 애머릿. 특히 스콧은 가족결합을 하고나서 생긴 아이로, 제머슨은 친자식처럼 스콧을 길렀다고 했다. 이정도까지는 애머슨에게서 이미 들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둘은 주기적으로 자식을 데리고-기숙학교에 입학한 톰을 제외하고- 만남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러니 이 소송이 이상할 수밖에. 애머릿은 폴이 스콧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레널드에게 말했다. 만약 그만큼 간절하게 스콧을 원했다면, 이혼했을 당시부터 양육권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아이가 보고싶다고 요청을 했다면, 단기라도 스콧을 그곳에 보낼 요량도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소송을 걸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성님은 애머릿씨가 아를 잘 돌보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어요.”
아서는 그 이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비록 질 재판이라도 그도 일단은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지켜줄 의무가 있었다. 물론 레널드는 애머릿이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한다, 라는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다. 비록 집안에 사용인들이 아이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는 하나,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일주일넘게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은 방임으로 보일 소지도 있었다. 더군다나 아이의 형제인 톰도 기숙학교에 있었다. 스콧은 사용인들 사이에 끼어 외롭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아서씨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갑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쪽에서도 소송까진 원하지 않습니다.”
“미안하게 되었어라. 하지만 나가 보기에는 아마 재판까지 가게 될까 싶네요잉. 나흘 뒤에 만나는 것도 솔직히 성님은 별로 탐탁치 않아하는 것 같지만... 헨리가 하도 조르길래 어쩔 수 없다고 하고...”
헨리는 제머슨의 아들이다. 헨리와 스콧은 친형제처럼 각별하게 지냈다고 하였다.
“결국 애플씨도 거기까지는 어떻게하지는 못하는거군요.”
“나도 일단은 변호사니까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일은 해줘야죠.”
레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고는 웨이터에게 리필을 요청했다. 아버지는 매스컴을 두려워하는 시민인지라 일이 커지는 것은 원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여기서 그들이 인간계의 법을 들먹여 양육권을 내세운 것처럼 면접교섭권을 들먹일 수도 있었다. 그럼 그 전까지는 요청만 있으면 아이를 볼 수 있는 것이,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까지 내세운다면 제머슨은 이 소송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물론 애머릿과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골이 파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단 레널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말은 이 능수능란한 변호사가 아니라 본인에게 직접 말해야 효과가 더 좋을 터였다.
“되도록이면 그날에는 아들은 안데리고 왔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시오잉. 성님도 헨리는 데리고 오지 않을거라고 했으니까.”
그도 하려던 말이었다. 아버지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봤자 좋을리 없었다.
“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지요.”
“그라믄 우리는 여기까지 해야하겄죠. 나는 일단 바빠서 먼저 가볼랑께요. 가사조사 시작되면 알려주시오, 뭐, 이짝에서도 받아야 하는거지만.”
물론 가사조사를 벌인다 하더라도 서로 비등하게 나올 것이다. 고등학교 교사와 대기업 이사. 시간과 돈의 균형으로 따지자면 둘 다 아이들에게 쏟을 수 있는 자본은 비슷했다. 레널드는 먼저 일어서는 아서와 악수를 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레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이 만남에서 얻은 것이라곤 제머슨은 절대로 소송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친자식도 아닌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하는 것은 지옥에서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아서도 이 소송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으니, 아마 제머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 무엇을 원하는걸까, 어쩌면 애머릿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에 대한 관심을 주지 않는 늑대인간에게. 하지만 경고한다고해서 변할 수 있을까도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지난번, 우연히 삼촌을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엉터리 탐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레오와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쓸모없는 혹으로 여겨지던 삼촌은 아직도 형제들이 ‘그 집’에 남아있는가를 물었다. 불쌍한 것들, 난 형님에게 분명히 경고했었다, 특히 너에 대해서는. 하지만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고, 그는 결국 검은 털을 가진 막내를 보고나서야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자식들을 무기처럼 휘둘렀다. 그는 애머릿도 아버지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 애정을 갖고 있으며, 틈틈이 전화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아버지의 눈과 똑 닮았기에, 레널드 자신도 그가 진정으로 자식을 생각한다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제머슨에게 돌아가는게 나을지도.’
만약에 인간계였다면 가능성은 있을지도 몰랐다. 인간계에서는 이혼한 부부끼리 양육권을 두고 다툴 때엔 아이의 의사도 적절히 반영한다고 하니 말이다. 평소에도 일에 바쁜 애머릿대신 제머슨이 돌봐주었다고 하니, 아마 스콧도 제머슨을 따라갈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이혼은 절차대로 진행되었고, 지옥에서는 이혼한 파트너가 직접 양육권을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아동국에서 친권을 박탈하고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입양’하는 형태로 데려간다면야 가능은 하겠지만, 양육권을 내놓으라고 직접적으로 소송을 건 데다, 무엇보다 아동국에서도 친권을 박탈할 정당한 사유도 없어보였다. 애머릿의 양육은 도의적으로는 옳지 않게 보였으나, 애석하게도 법적으로는 옳게 보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대로 말이다.
“커피 더 드릴까요?”
“네, 그리고 여기 팬케이크도요.”
카페에는 시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야간업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시민 몇몇-그들은 검은 고양이와 늑대인간이었다-이 피곤하다고 허브티를 사서 나간 것 뿐이었다. 털이 부숭부숭해서 당장에라도 미용실에 데려가야 할 것 같은 검은 고양이를 보며 그는 알렉스를 떠올렸다. 이 일이 끝나면 알렉스의 말대로 텐트를 사서 그와 함께 캠핑을 갈 작정이었다. 그의 집에 고이 모셔놓은 천체망원경까지 같이 가져가서, 밤새도록 그와 함께 별을 관찰할 작정이었다. 아마 연말이 겹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예 그곳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보였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라면 알렉스의 눈동자도 만월처럼 노랗게 빛날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멍하니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 한낮의 주택가에는 정적이 가득했다. 그나마 몇몇 시민들이 보이곤 했는데, 그들도 점심은 집에서 해결하려고 했는지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저편에서 아주 익숙한 인영이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
그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보았다는 눈으로 황급히 안경을 찾았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인영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차림으로 의기양양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앞에 메고 있는 아기띠에는 파란색 아기가 안겨져 있다. 표정까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모양새긴 했다. 그 옆에는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꼬마악마가 날아다녔고, 또 그 옆에는 듬직한 체격의 악마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파란 피부에 자줏빛 머리카락이라 하면 레널드도 알고 있는 시민이었다. 맥, 몇 번 알렉스의 직장에서 대화를 나눴던, 알렉스의 직장 동료였다. 분명 알렉스가 품에 안고 있는 아기와 옆에서 날고 있는 꼬마 악마는 맥의 자식들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아니 어떻게? 그는 어떻게 알렉산드로 토레스라는, 아이를 알레르기 요소로 취급할만큼 싫어하는 검은 고양이가 아이를 품에 안고 걸어갈 수 있는지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인다고 하질 않았던가. 그런데 저렇게나 다정히, 마치 애머릿의 가족사진에나 보일법하게 한 가족처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라니. 속에서 무언가 이름 모를 것이 들끓었다. 그것은 분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질투라고 불러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레널드는 즉시 알렉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30여미터 밖에 있는 검은 고양이가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귓가에 울려대던 통화연결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아저씨? 이 시간에 왠일이야?”
“응, 지금 뭐 하나 싶어서. 혹시 점심에 시간 있니?”
의례적으로 내뱉는 상투적인 대사다. 그는 행여나 자신이 알렉스를 보고 있다는걸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시선을 테이블로 두었다. 저 멀리서 웨이터가 자신이 주문한 음식을 들고 오는걸 보자 일부러 손가락을 내밀어 조용히 해달라고까지 했다.
-“아, 미안. 나 지금 친구랑 같이 있거든. 맥이라고 알지, 그 뚱뚱한- 아야, 맞는 소리잖아! 짐네 아빠말야.”
“응, 알아. 맥켄지씨.”
-“맥이랑 같이 밥먹기로 했어.”
“애들하고 같이?”
순간 알렉스의 말이 멈추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검은 고양이는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애들은 유치원에 있어. 일하다가 나온거야.”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레널드는 처음에 알렉스의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에 놀랐고, 알렉스의 손이 짐의 발가락을 만지고 있다는 것에서 두 번째로 놀랐다. 지금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걸까, 전화상으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추궁까지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가족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포근해보였다. 절대로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것임을 떠올리자 속에서는 이유모를 분노가 들끓어올랐다.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 질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노는 이내 슬픔과 우울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봐. 점심 잘 먹고.”
-“응. 나중에 연락할게, 안녕, 아저씨.”
전화가 끊기고 나자 단란한 4인 가족은 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겨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표정이 보였다. 알렉스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자신의 앞에서가 아니면 보여주지도 않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꼼지락대며 알렉스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알렉스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애롭게 아이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걸 바라보는 레널드의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그는 그 단란해보이는 가족-같은 구성-이 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나서야 레널드는 제 앞에 놓여진 팬케이크를 인지할 수 있었다. 팬케이크는 이미 식어서 퍽퍽한 밀가루 덩어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묵묵히 달고 차가운 밀가루 덩어리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 ▒ ▒
병원으로 가는 길목은 반쯤 외워두고 있었다. 시내 외곽에 위치한 병원으로 가려면 시에서 만들어놓은 공원을 왼편으로 끼고 달리는게 가장 빠른 루트였다. 깨어나고 3개월 동안은 공원의 나무들이 변하는 광경을 조수석에 앉아서 구경하곤 했었다. 운전을 한 건 레널드였다. 그는 보름에 한번씩 바쁜 시간을 쪼개 병원에 데려다주곤 했다. 지금은 딱히 사건 이후로 받아야 하는 필수검사 때문에 가는 길은 아니었기에, 굳이 그에게 간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병원에 가는 이유는 단지 부모자격증 서류접수를 위해 받아놓은 검사결과를 받기 위해서였다. 공원의 나뭇잎은 전부 다 떨어져서, 앙상하고 적나라하게 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렉스는 몇 번 나무를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엑셀을 돌렸다. 헬멧 너머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접수대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주치의를 만나려면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접수원이 말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제 순서가 오길 기다리며, 몇주 전까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던 지옥개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저씨, 뭐해? 난 지금 서류떼러 병원에 왔어. 혹시 저녁에 시간 있어? 같이 저녁 먹을까?( ´∀`)つt[]
예상외로 문자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서류라고? 지금 병원이야?
응. 부모자격증 서류 때문에. 내일이 제출이잖아.(*´・ω・)
아슬아슬하게 서류준비가 끝나서 다행이었다. 내일 쉬는 시간에나 나가서 서류를 제출하면 일단은 준비작업은 끝이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받게 될 교육이나 심사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알았어.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약속이 있어. 미안해.
그 말에 알렉스의 귀가 축 처진다. 레널드와 제대로 된 식사를 한지 벌써 일주일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 자고 갔을 때에도, 숙취에 시달려서 찬물만 먹이고 집으로 보내야 했다. 레널드의 말로는 지금 맡은 일이 겹쳐서, 당분간은 계속해서 이런 상태가 되어야한다고 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ェ)・`)
그 문자를 보내고나자마자 진료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는 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완숙한 할로윈박쥐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주치의인 데이비드는 알렉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우선 앉으라고 말한 뒤에, 알렉스가 자리에 앉자 서류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저번보다 더 좋아지셨어요, 알렉스씨. 아마 이정도라면 아동국에서도 허가를 해줄거에요.”
물론 목숨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정도라면 알렉스도 이미 알고 있다고 본 것이다. 알렉스는 그가 내밀어주는 서류봉투를 확인하고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은 어렸을 때부터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하얀 할로윈박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제법 싫지 않았다.
“의사소견서에도 부적절사유는 딱히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약만 제대로 먹고 있다면 PTSD도 그다지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썼고요.”
퇴원하고나서 초반에는 커다란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와도 온 몸의 털이 곤두세워지는 것 같은 불안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알렉스는 강박적으로 레널드에게 문자나 전화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이야기라, 이제는 아예 사격연습에 참여해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다. 데이비드는 그런 알렉스의 적응력에 상당히 관심을 가졌다.
“혹시 무언가 이상이 있다면 곧바로 얘기하는게 좋아요. 수상한 점이 생기면 거기서도 추가검사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일단 알렉스씨는 그다지 우려하지 않아도 되지만요.”
우려하지도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안심했다. 하지만 그는 요즘 들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새에 생겨버린 변화. 혹시나 좋지 않은 징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근의 일을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할로윈박쥐는 나름 눈을 반짝이며 곰곰이 생각하다, 자신도 확신은 못한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드문 케이스이긴 하지만... 가끔씩 그렇게 죽었다 되살아났을 때 성격이 변하는 검은 고양이들의 사례는 있긴 있어요. 보통 그런 사례들의 공통점을 보자면 머리를 공격당해서 여러번 죽은 경우가 많아요. 알렉스씨도 머리를 공격당한 케이스잖아요? 우뇌는 주로 감정적인 면을 많이 담당하고 있죠. 학계에서도 우뇌가 재생되고 파괴되고를 거듭하다가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는 해요.”
물론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 아는 거지만, 이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데이비드는 알렉스가 말한 변화상에는 꽤나 관심이 갔다. 하지만 이 검은 고양이가 총소리에 익숙해진 것은 그나마 최근의 일이었고, 자신은 그만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알렉산드로 토레스의 뒤에 있는 지옥개의 눈치가 보이는 것도 있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거든 곧바로 연락주세요. 그리고 이건.. 레널드씨에게는 어떻게 하죠?”
“내가 직접 말할게요.”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의외로 답이 과학적으로 나와버려서 시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일이라면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거리로 쓸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하지만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데이비드의 말이 맞다면, 자신의 이런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만약에 나중에라도 아이를 가진다면, 분명 자신은 아이를 ‘사랑해줄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아저씨에게도 좋겠지, 그는 과연 문자에 어떤 답장이 쓰여져있을지를 궁금해하며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데이비드가 다급하게 알렉스를 불렀다.
“잠깐만요! 내가 이걸 까먹었네, 알렉스씨 잠깐만요.”
데이비드의 손에는 다른 서류봉투가 들려져있었다. 그 위에는 Leonard Hellhouse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져 있었다.
“저번에 레널드씨 건강검진받은 건데요, 본인이 찾아가지 않아서요. 원래 본인이 아니면 안되지만 알렉스씨라면 괜찮겠죠?”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심부름이라면 지겹도록 해보았기에 이상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서류를 알렉스에게 내밀면서 결과는 모두 정상이라고 미리 귀뜸까지 해주었다. 그는 문을 열고 나오면서 과연 저 의사에게 모든걸 맡겨도 되겠냐는 의구심을 품었다.
답장에는 미안하다는 사과가 연거푸 씌여져 있었다. 알렉스는 서류를 받았으니 가져가겠다, 라고 쓰려다가 문장을 고쳐찍었다. 가끔씩 서프라이즈처럼 놀래켜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오늘 출장이나 외근 있어?
답장은 수납까지 마치고 오토바이에 올라탔을때에서야 왔다. 아니, 그런데 왜? 알렉스는 그 문자를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냥. 문자를 보냈다는 소리도 울리기 전에 그는 헬멧을 뒤집어쓰고는 키를 열쇠구멍에 넣었다.
병원에서 헬하우스 인더스트리까지는 3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알렉스는 레널드가 다니는 회사에 갈 때마다 빈손으로는 가지 않는 나름의 법칙을 갖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 있는 도넛전문점은 그의 단골가게였는데, 매번 그가 들를 때마다 상당량의 도넛을 사가는 덕에 모두들 검은 고양이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오늘도 그가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사장인 초록색 악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오랜만이네, 알렉스.”
“안녕, 사장님. 혹시 신상품 나온 거 있어?”
사장은 아주 익숙하게 이번 달의 신상을 보여주었다. 귀여운 지옥토끼모양의 도넛 2종 세트다. 알렉스는 언제나 그랬듯, 법무팀 멤버의 수에 맞게 도넛을 주문했다. 소속 변호사에 사무원들 몫까지 합치면 적은 편은 아니었다. 양손을 봉투를 드는데 쓰고 나서야 알렉스는 가게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법무팀으로 들어가는 일은 쉬웠다. 알렉스는 헬하우스 내에서도 상당히 유명인이었다. 처음에는 지옥정보국 유니폼을 입고 갔다가 회사가 뒤집혀진 적이 있는데, 그 일 이후로는 오히려 직원들이 모두들 알렉스를 알아보게 되었다. 오히려 신입사원을 골탕먹이는 용으로 그가 쓰일 정도였다. 그는 얼굴 자체가 프리패스였고, 경비원도 양 손에 도넛상자를 가득 들고 가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알렉스는 레널드가 거의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변호를 해주었던 일 이후로, 빚을 갚아야 한다며 도넛을 사들고 쳐들어가곤 했다. 물론 그건 단순한 핑계로, 그저 아저씨를 잘 봐달라고 바치는 용도였다.
“미안한데 레니는 여기 없어.”
레널드의 절친한 동료인 압둘은 토끼의 귀를 파먹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레널드의 자리에는 비어있는 의자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공짜도넛을 기리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담배라도 피러 간거야?”
“아니, 저 위에 있어. 이 이상은 나도 말 못해, 일단은 기밀사항이라서 말이지.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 몸은 괜찮고?”
“아, 응. 사실은 병원에 더 있고 싶었는데, 우리 회사에서 쫓아냈어.”
그 말에 압둘의 웃음이 터진다. 그는 레널드 몫의 도넛-특별히 5종세트-에 손을 대려다 알렉스에게 제지당했다. 알렉스는 먼지 한톨도 없이 깨끗한 레널드의 자리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그러다 탁상달력에 시선을 돌렸는데, 내일 날짜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레니에게 들었어, 자격증 따기로 했다며? 그런데 목숨 세 개밖에 안남았는데 허락은 해주나?”
결국 서랍에 있는 초코바를 가져다 먹으며 압둘이 말했다. 레널드가 꽤나 고민했었다고 말하자 알렉스의 입가엔 쓴미소가 어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가지려는게 아니면 발급은 해줄거야.”
아마 사례로는 2개 남은 고양이도 본 적이 있었다. 그 밑으로 가면 그야말로 자살행위라고 법원에서 금지시켜서 소송을 건 적도 있었는데 결국 패소했었다.
“어때? 접견실에서 기다릴래? 아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긴 한데.”
“아냐. 그냥 나 왔다 간다고 전해줘, 많이 바쁜 모양이네.”
그러자 압둘은 붕대가 휘날리는 손을 흔들었다. 알렉스도 손을 흔들며, 도넛 고맙다는 모두의 소리를 들으며 법무팀에서 나왔다. 레널드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서류와 도넛을 전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였다. 마침 엘리베이터는 그가 있던 층에 멈춰섰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을 때 그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익숙한 베르가못향 향수냄새와 함께, 낯익은 머스크향이 뒤섞여 그의 코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아주 익숙하게 생긴 늑대인간이, 5개 세트 도넛의 주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몸을 기대고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만 조그맣게 열었다. 늑대인간은 눈을 가지런히 감고서 더더욱 몸을 레널드에게 기대고 있었다. 레널드는 기대오는 몸을 양손으로 떠받들다가 알렉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뒷걸음질을 쳤다.
“..레널드씨?”
피곤이 섞인, 하지만 더럽게 섹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레널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확인해보았다. 제랄드 애머릿은 감기약에 취해서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결국 병원에 가려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순간 몸을 기대오고 말았다. 그 정도는 충분히 시민 대 시민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순간을 알렉스가 봐버린 것만으로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하얘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아저씨?”
알렉스의 말 한마디에 레널드는 급히 열림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애머릿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몸을 기대던 늑대인간에게 다음에 또 보자고 깍듯이 인사를 하며 신속한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마치 도둑질을 들킨 시민처럼 꼬리가 위로 솟구치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명하려다 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왠일이야? 연락도 없이.”
하지만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응, 오늘 병원에 갔는데 의사나으리가 아저씨 검사결과도 같이 가져가라고 해서. 아저씨는? 왜 J-, 제랄드 애머릿과 같이 있는건데?”
순간 익숙했던 애칭을 부르려다가 다시 이름을 부른다. 다행히도 레널드는 말을 더듬은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다른 이사가 자식문제로 상담을 요청해왔다고 말하였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는 방금전까지 애머릿의 사무실에서 앞으로의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의뢰인의 비밀유지조항보다 방금 전에 있었던 그 스킨쉽 때문이라도 알렉스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아, 맞아 나 도넛사놨거든. 압둘이 지금 노리고 있으니까 빨리 가서 먹어. 이번에 지옥눈토끼 신상으로 나왔는데 안에 딸기필링이 들어가서 새콤달콤해서 맛있대, 난 안먹어봤지만 사장이 그러더라고.”
알렉스는 당장에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웃으면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댔지만, 위의 숫자는 1에서 변할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레널드도 이대로 혼자서 가기에는 머쓱했던지 자리에서 서성대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응 뭐가?”
숫자가 올라간다. 의문을 담은 눈초리에 레널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알았어.”
어째서 자신이 변명하듯 알렉스에게 말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알렉스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애머릿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러니 걱정말라는 그런 확신. 고백을 처참히 무시한 시민치고는 해서는 안 될 말임에는 분명하나, 그는 그 말을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알렉스는 살짝 침잠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서는 인사를 했다.
“전화할게.”
“응.”
평소답지 않은 단답에 레널드는 닫히는 문을 막으려다 말았다. 그래도 회사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1로 변할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빨간 글자가 몇 번이고 바뀌는 순간을 바라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알렉스를 맞이한 것은 방금 전까지 지옥개의 품에 기대고 있던 늑대인간이었다. 가뜩이나 방금 전의 장면으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그로서는 이 만남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머스크향을 좋아하는건 여전하군, 옷입는 것도 예전과 똑같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에전엔 가게에서나 파는 기성품 정장을 즐겨 입었다면 이제는 테일러가 맞춰주는 고급수트라는 점일 것이다.
“고의가 아녔어.”
알렉스는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애머릿은 그런 검은 고양이의 뒤를 따르며 자기로서는 변명처럼 들리는 말을 했다.
“정말로 우연이었거든. 요즘 감기가 워낙 독해야 말이지, 결국 비서한테 쫓겨났지 뭐야. 이렇게 바쁜 상황에 말이야.”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머릿은 주차장에까지 따라가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또 주장했다. 옛날엔 저렇게까지 달라붙는 시민은 아니었는데, 역시 나이를 먹었다.
“너랑 레널드씨는 회사에서도 유명한데 내가 건드릴 리가 없잖아. 너도 알잖아, 내가 임자있는 시민은 거들떠도 안 본다는거.”
그랬지, 그래서 J는 바에서도 유명인이었다. 그는 항상 젠틀했고 우아했으며, 알콜중독에 빠진 것 빼고는 인기가 많았다. 지금은 알콜중독도 치료했으니 각잡고 나선다면 카사노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폴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카사노바처럼 바를 제 집 마당처럼 드나들며 여러 시민들과 지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레널드씨를 꼬시면 곧바로 위에서 자를걸, 회장님 눈초리가 워낙에 무서워야지. 그러니 걱정마, 그런 일은 없을거야.”
저런 우아한 말투, 친절한 몸놀림. 알렉스도 한때 그의 그런 점들이 좋았기에 몇 번 데이트를 하고 침대에서 몸을 섞기도 했었다. 그는 침대위에서는 매우 상냥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와 함께 밤을 보낸 시민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였을까, 알렉스는 제 옆에서 계속해서 지껄여대는 이 인물이 더욱 더 짜증났다.
알렉스는 끝까지 애머릿을 무시했다. 방금 전에 있었던 광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목소리도 듣지 않겠다는 듯 헬멧을 썼다. 그제서야 애머릿도 포기했는지 자신의 차로 향했다. 낡은 침대위에서 지겹도록 맡았던 머스크향. 그 향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자마자 두통이 일었다. 어떻게든 머릿속을 정화시키고 싶었다. 이 질투라는 감정을 머릿속에서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는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분명, 손님방에 있을 이불에는 지옥개의 체취가 묻어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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