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02 본문
알렉산드로 토레스의 집에는 분명 계약할 당시에는 서재였지만, 지금은 잡동사니가 한가득 채워져 있는 창고같은 방이 있다. 워낙 정리에 담쌓고 지내는 주인덕분에 쓰지 않는 물건들을 쳐박아두는 용도로 전락해버렸는데, 덕분에 원래 창고보다도 더 혼잡스러운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거미가 집을 치고, 언젠가 해골개를 기르겠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가 짐덩어리가 되어버린 개집이며 여러 잡동사니들이 방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당연히 먼지도 한가득이라, 꼬리라도 바닥에 닿을라치면 바닥에서 하얗게 일어나 재채기를 유발하곤 하였다. 처음 서재를 손님방으로 꾸미겠다는 말에 레널드는 고개를 저으며 대놓고 미련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알렉스도 그것은 인정하였지만, 그의 집에서 채광과 통풍이 잘 되는 방은 침실과 이 방이 전부였다. 그는 어떻게든 레널드가 이 좋은 환경에서 숙면을 취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니 갑작스런 가구구매를 앞두고, 레널드의 소개로 케르베로스에 연락을 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방청소를 해달라는, 산하 청소회사까지 갖고 있는 케르베로스로서는 몇 번 해보았을 의뢰였고, 직원인 버나드 블루도 미리 집의 실상을 봤던지라 큰 무리없이 의뢰가 받아졌다.
가구를 사는 와중에 청소를 끝낼 거라는 말에 레널드는 그 난장판들을 떠올리며 무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지옥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검은고양이는-물론 레널드의 차로- 콧노래까지 불러대며 쇼핑몰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주차장은 주말인데다 곧 입학철을 앞두고 있었기에 유난히 가족손님들이 가득이었다. 입학선물로, 혹은 신학기를 맞이하여 새로 필요한 물건을 사려고 모인 인파에 레널드는 알렉스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아이들이 높은 목소리로 떠드는 것을 매우 시끄러워했다. 모두들 어떤 물건이 갖고 싶다느니, 히어로가 그려져 있는 가방을 원한다느니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떠들었는데, 어느 종족이건 아버지는 똑같은지 그들은 알았다는 같은 소리들만 내뱉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커다란 책가방을 둘러맨 검은 고양이 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쇼핑몰로 발길을 돌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널드는 언젠가 알렉스가 말했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보육원에 맡겨졌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의 곁을 따랐다.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
“곧 신학기니까.”
알렉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몇 번이고 돌아갈까, 생각하며 레널드를 돌아보았지만 당사자인 지옥개는 가구점 세일이라고 적혀진 전단지를 보고 묘하게 들떠있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흘낏 바라보자, 레널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침대를 고르는 건 처음이라서 그래.”
“말도 안돼. 정말? 살면서? 단 한번도?”
레널드의 나이는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들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아이를 갖고 있어도 몰랐다.
“침대가 낡았다 싶으면 바뀌어져있었으니까.”
“자취할 때는 어떻게 했는데? 분명 유학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는 사용인이 있어서, 그냥 얘기만 하면 알아서 바꿔줬어.”
그건 이미 자취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알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가끔가다가 자신이 들으면 격차가 느껴지는 이야기를 꺼내곤 했었다.
“그래도 사무용가구는 고른 적이 있어. 돈이 없어서 중고로 샀었지. 물론 사무실에서 숙식을 할 건 아니니까 침대는 사지 않았어.”
실상은 그 새장 같은 집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것뿐이면서, 애써 나오려는 말을 참고 그는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였을까, 가구점에 오는 건 처음이라며 지옥개는 짧은 꼬리를 흔들며 기뻐하고 있었다.
가구점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역시나 기간이 기간이니만큼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들로 인산인해였고, 그들처럼 다 큰 남정네 둘만 있는 경우는 보이지 않았다. 둘은 자신들이 튀어보인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입학시즌이라 그런지 청소년용과 아동용가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가족들 틈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야 간신히 성인용 가구 코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레널드는 가끔씩 침대를 고르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곤 하였다. 몇몇 애들은 침대 위에서 뛰다가 직원의 제지로 내려왔고, 디자인으로 아버지와 싸우는 아이도 있었다. 알렉스는 시끄럽다고 다시 눈살을 찌뿌렸지만, 레널드가 착잡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아저씨-”
“아이고, 손님-”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둘을 향해 검은 악마 한명이 다가왔다. 방금전까지도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쌍둥이 스켈레톤을 상대하느라 힘들어하던 직원은, 침대 코너를 서성거리던 지옥개를 보고 그 자리로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레널드와 알렉스를 향해 영업용미소를 띄고는 무엇을 보겠냐고 세세히 묻다가 레널드를 향해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지옥개용 침대를 고르시는거라면 24페이지부터 보는 것이 좋습니다.”
“미안하지만 침대를 살 시민은 내가 아니라서요.”
레널드는 알렉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오늘의 주인공을 알아챈 점원의 얼굴이 붉게 변하더니, 그를 향해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사과가 너무 과했던지라 알렉스는 괜찮다며 손사레를 쳤다. 검은 고양이가 흔히들 좋아한다는, 아랍풍 디자인을 보여줘도 되겠느냐는 말에 알렉스는 다시 카탈로그를 레널드에게 넘겼다.
“괜찮겠어? 어차피 주인은 너잖아.”
“하지만 어차피 아저씨가 잘 거잖아? 이참에 책장에 책상도 사야하니까, 그냥 세트도 괜찮지 않을까.”
“책장은 왜?”
“거실에 아저씨 책이 한가득이거든요.”
레널드는 거실 한편에 쌓여져있는 자신의 책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달은 모레에 갈 것이라고, 카드 명세서에 사인을 하는 검은 고양이는 들었다. 세련된 디자인을 한 침대와 책상, 의자, 작은 책장, 침구세트, 옷걸이. 알렉스로서는 제법 출혈이 컸고 레널드도 돈을 보태겠다고 하였지만, 그는 깔끔하게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어차피 아저씨가 없었어도 할 일이었다고, 방금 전 카탈로그를 레널드에게 내밀었을 때와는 정반대의 말을 해가면서 말이다. 물론 할부로 해달라고 말할 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사랑스러운 지옥개가 편히 머물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그다지 큰 희생도 아닌 것 같았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레널드는 알렉스를 이끌고 서점으로 향했다. 평소 그가 오프라인에서 책을 사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지라-물론 둘이서 서점은 가끔씩 가긴 했지만- 알렉스는 오묘한 호기심을 느끼며 레널드의 뒤를 따랐다.
“어제 레오에게서 연락이 왔어.”
“점심으로 끝낸 거 아니었어? 더 사주겠대?”
“그런 말은 아니고, 집에 어린이 경제학이나 경영학책이 있으면 갖다달라고 했어. 하지만 집에 있는 책들은 전부 다 해진데다 요즘 이론에도 맞지 않는것들 뿐이라서.”
어젯밤 저녁식사 후 알렉스와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레오의 문자를 확인했을 때는 적잖이 놀랐었다. 그 레온 헬하우스가 스스로 책을 찾다니, 언제나 그의 어린시절에는 만화책과 게임들이 같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드님이 경제학책을 찾는다는 말에는 수긍하기도 했었다. 에드워드에서부터 자기까지, 헬하우스가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돈을 갖고 놀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레오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그 전통이 깨지게 되었지만, 아들이 그런 것들을 원한다니 역시 피는 이어져있는 모양라고 레널드는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헬하우스가의 아동용 경제학도서는 거의 3000여년의 세월을 먹었기 때문인지 글자하나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도 간신히 글자를 끼워맞추곤 하였다고 떠올리며, 그는 책등까지 다 바랜 책을 책장에 꽂았었다.
“그래서 이참에 새로 사주려고, 용돈 대신으로.”
돈을 주어봤자 레오가 제대로 책을 사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주식은 형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양도하려면 수를 써야하는데다 시간도 걸린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 손으로 책을 사서 주는게 좋다고 판단하였다.
“심심하면 다른 책 보고있어, 다 고르면 찾아갈게.”
“..응.”
과연, 이미 아동용도서를 보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일을 할 때마다 짓던 눈빛이었는데, 평소 알렉스와 있을 때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서점에서는 알렉스가 스릴러나 첩보 소설을 주로 산다면, 레널드는 소설들을 들춰보다가 결국에는 천문학 잡지를 사는게 다였다. 둘이서 오던 소설 코너에 혼자 있자니 기분이 묘하면서도, 평소에는 보기 힘들었던 책들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레널드의 눈치가 보여서 도저히 고를 수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책 몇 권을 훑어보았다. 낯간지러운 말들, 아들에게 훈계조로 말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클리셰처럼 계속해서 여러 책에 나타나고 있었다. 둘은 화해를 하거나 파국에 이른다. 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그런 류의 책들의 엔딩은 배드엔딩이어서 알렉스는 쓴물을 삼켜야 했다.
결국 알렉스는 형사콤비가 된 부자를 다룬 소설시리즈 몇 권을 골랐다. 그가 계산대에 섰을 무렵, 이미 짐을 한꺼번에 든 레널드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어린이책만 열 몇 권을 골랐다면서, 거기에 더해서 만년필까지 살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큰 조카인데도 그렇게 좋은걸까, 알렉스는 아저씨 좋은대로 하라고 말은 하였지만 그렇게나 열중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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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널드의 ‘조카’는 자신을 향한 책선물에 얼굴을 붉히며 고맙습니다, 라고 연거푸 말하였다. 책 몇 권을 훑어보더니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하는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레널드의 입가에도 어느새 인자한 미소가 어려졌다. 저런 얼굴을 자신이 아닌 다른 시민에게 보이는건 오랜만인지라, 알렉스는 어딘가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는 복도로 나왔다.
케르베로스에 도착했을 때엔 직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직원들은 모두 다 알렉스의 집에서 청소를 하는 중이라, 건물내에는 놀러온 라즈반 블라드와 어린 자식들, 그들의 보모인 루카스밖에 없었다. 라즈반은 그들이 사온 과자에 심퉁하게 고맙다고 대답하고는 아이들은 탁아실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탁아실에는 루카스가 주말이라 놀러온 샘과 레오의 아들, 릭의 아들에게 한창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던 참이었다. 알렉스는 레널드가 노크를 하고 루카스에게 말하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다가, 벽에 달린 창문을 통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샘이 한창 릭의 아들의 머리카락을 여러갈래로 땋고 있었다. 저녁놀이 탁아실안에서 환히 아이들을 비추었다. 따뜻하고 어딘가 간지러운 광경, 알렉스는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다가 레오의 아들이 나오고나서야 그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그는 몇 번 자신의 속이 괜찮은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슬픈 눈빛으로 레널드와 조카의 뒤를 따랐다.
‘아이’는 매우 기뻐하는 눈으로 게임소프트와 만화책으로 반쯤 채워져있는 책장을 채웠다. 책장도 며칠전에 레오가 급히 마련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신체적 나이대의 헬하우스 가문의 시민들이 보일법한 반응을 보였는데, 바로 돈에 대한 지식욕이었다. 문제는 레오 자신은 경영이나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그는 제 막내형에게 SOS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아예 책장도 새로 마련해버렸다.
레널드는 조카의 옆에 서서는 우선은 어떤 책을 읽을지를 추천해주었다. 어린이용도서에서 조금 더 심화한 내용까지 다룰 수 있도록, 만약 책들을 다 읽고 더 필요하면 레오에게 말하라면서 말이다. 그 말에 조카의 눈이 에메랄드빛으로, 그야말로 초롱초롱 빛났다. 그 모습이 마치 밤하늘을 볼 때의 레널드와 닮았기에, 알렉스는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샌디?”
그가 복도 한편, 햇빛속에서 먼지들이 움직이는 것들을 관찰하다가 다시 탁아소로 시선을 옮긴 참이었다. 샘은 릭의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길다란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얼굴은 심하게 굳어져있었지만, 레널드가 보기에는 상당히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원래 알렉산드로 토레스라는 검은 고양이는 오전에 쇼핑몰에 갔을 때도 그랬지만, 어린 아이들의 모습만 봐도 얼굴을 찡그리기가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불리우고나서야 지옥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간에 반쯤 어렸던 주름이 레널드를 보자마자 갑작스레 펴졌다. 언제나 잘 짓곤하던, 철없어보이는 웃음을 띠면서 그는 일이 다 끝났냐고 물었다.
“응, 이제 가자.”
“그럼 안녕, 나중에 봐!”
레널드가 탁아실에 있는 루카스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나누자, 알렉스도 문 너머에서나마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탁아실에서는 분유냄새와 함께 어린아이 특유의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잔잔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제법 싫지는 않았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샘의 몸짓에 가볍게 답하고나자, 레널드가 다 끝났노라고 탁아실에서 나왔다. 검은개의 입가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민만이 지을 수 있는 인자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몇 번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나서야 그는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래?”
“응? 뭐 말했어?”
“오늘따라 그러네, 어디 안좋니?”
알렉스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녔던 탓일까, 조수석에 앉자마자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져버리고는 공상의 세계를 한창 떠돌고 있었다. 만약 옆에 앉아있는 하얀 조카가 사실은 레널드의 아이였다면, 하는 상상. 그럼 과연 자식을 가진 것을 기뻐할까, 아니면 큰 자식, 게다가 온 몸이 하얀 괴이한 자식을 가졌다는 데에 괴로워할까. 아마 이 말을 꺼낸다면 괴이하다, 란 표현 때문에 혼이 날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알렉스는 어쩌면 방금 전에 보았던 하얀 개가 아저씨의 자식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랑하는 지옥개가 색깔하나만으로 어떤 취급을 당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난 멀쩡해. 시간도 애매한데 그냥 집에 가서 피자나 시킬까? 아직 연락이 없는걸 보면 동생네도 엄청 오래 걸리나봐.”
“분명 추가금을 요구할거야.”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냐, 나라면 추가금을 요구하겠어. 네 그 방은 도저히 몇 시간만으로 끝날만한 곳이 아냐.”
변속레버를 잡고 있던 레널드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지난 몇백년의 세월동안 알렉스의 집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간신히 다 치웠다싶으면 일주일도 안되어서 원상복귀된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양, 어떤 수를 써도 알렉스의 집은 더 어질러졌으면 어질러졌지, 전혀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알렉스가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점과 식기세척기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앉을 자리는 있잖아.”
“그 방은 어느 시민이라도 앉고 싶지 않을거야.”
자신이 열자마자 포기한 방이었다. 그는 문을 열던 그 순간, 당장에라도 자신의 머릿속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정도로 혼돈과 파괴를 의미하는 공간으로, 벌레가 슬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알렉스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였지만, 필요한 것이 있냐고 레오에게 전화를 걸고나서는 귀를 축 늘어뜨리고는 편의점에 들르자는 말을 해야 했다. 레오의 말로는, 청소기가 폭발 직전이며 애덤은 열심히 추가금을 계산하고 있으며, 릭은 기진맥진한 상태라고 했다.
집에 들어섰을 때에 우선 그들을 맞은 것은 차가운 가을바람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기진맥진하며 소파에 쓰러져있던 릭 레몬트리였다. 그는 알렉스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오랜만이라고 말하며 다시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청소는 다 끝났던지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거실 한편에는 쓰레기봉투 몇 개만이 남아, 여기서 청소를 했다는 것을 알렸다.
“오, 오셨어요?”
화장실에서 크리스 루치아노가 손을 씻으며 나왔다. 그의 말로는 모두들 쓰레기를 버리러 갔으며, 아마 조만간 돌아올거라고 하였다. 레널드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서재의 모습에 놀라다못해 감탄을 내뱉었다. 몇 달 전 자신이 보았을 때 까지만 해도, 저 공간은 그야말로 어둠의 던전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리된 지금에 와서야 보니, 그 곳은 그저 햇빛이 잘 드는 방이었을 뿐이었다. 곧 석양이 되어가려는 태양이 주홍빛 햇살을, 회색 방안에 비추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가보니, 서늘한 마루가 발바닥에 닿아왔다.
“아저씨? 어때, 마음에 들어?”
“응.”
고개를 끄덕이는 레널드의 눈이 석양을 받아 보라빛으로 빛났다. 방안은 회색과 석양빛이 섞여 오묘한 색을 자아내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선 레널드 헬하우스의 윤기있는 짧은 털이 반짝거렸다. 어쩌면 반짝이며 빛나는 것은 그의 털이 아닌 그 자체일지도 몰랐다. 알렉스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둘러보고 있던 레널드가 짧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저렇게, 꼬리까지 흔들며 기뻐하는 모습은 그로 하여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지어내고 있었다.
“곰팡이가 슬지 않아서 다행이야, 제일 걱정했었는데.”
목소리에는 웃음이 서려있었다. 레널드는 어느 공간에 어떤 가구를 둘까, 머릿속에서 오늘 결제한 가구들을 꺼내다가 이리저리 배치하였다. 그러다 알렉스가 그저 입만 벌린 채, 경탄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곧 레오가 올거야, 우리도 돕자.”
“아, 응. 피자 지금 시켜둘까?”
“애들 오면 물어보고.”
그는 급히 문지방에 서있던 알렉스의 옆을 지나갔다. 순간 어렸던 공기는 매우 어색했기에, 둘 다 시선을 서로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달달하면서도 간지러운 무언가가 심장을 가득 채운 기분이었고, 싫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좋다고 말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이 간지러움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예전에도 가끔씩, 이런 순간이 폭탄처럼 터져나올 때가 있었다. 그럴때마다 둘은 그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어깨만을 붙이고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곤 했다. 애석하게도 지금 그 자리에는 릭이 반쯤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릭은 알렉스가 테이블 위에 콜라캔을 올려놓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주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의 말로 보아하니, 예상보다 청소도구가 많이 필요해졌기에 릭이 몇 번이고 회사에 드나들며 물건을 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호기심많은 검은 고양이가 자신의 머리를 땋는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마치 샘이 그의 아들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아주 가느다랗게 릭의 머리카락을 땋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아들과 꽤 닮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재빠르게 놀리던 손놀림을 멈춘 건, 마치 경멸하는 표정으로 뭐하냐고 무언으로 말하고 있는 레널드와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양 손을 펼쳐보았지만, 난감해하는 크리스의 표정을 보니 아마 유죄는 피하기 힘들 것 같았다.
“지금 당장 풀어놔.”
“으음, 어떻게 풀어놓을지 모르겠는데?”
“알렉산드로 토레스.”
“네, 알았어요, 아빠.”
애써 땋았던 머리들을 거의 다 풀고나서야, 쓰레기를 버리러 갔던 직원들이 돌아왔다. 사장인 레온 헬하우스가 레널드와 인사를 하는 사이, 바니와 나머지 멤버들은 릭을 깨우고는 캔을 하나씩 들어올렸다. 알렉스가 고맙다고 말하자,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안경을 낀 애덤 애플이 반쯤 표정을 썩히며 대답했다.
“버나드에게서 들은 것과는 좀 다르던데요?”
“에이, 뭐가 다르다고.”
“아뇨, 알렉스씨. 저번에는 거실만 봤었잖아요, 창고와 비교하면 여긴 무균실이에요.”
“맞아요, 덕분에 보통이라면 한번만 돌아다닐걸 여러번 돌아다녔죠. 애석하지만 추가금이 조금 들 것 같아요.”
애덤은 영수증내역을 보여주며 알렉스에게 평소보다는 더 돈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평상시 청소를 하러 간 집들의 사진과 그에 맞는 액수까지 보여주면서, 오늘 청소를 하느라 대형쓰레기도 많이 버렸으니 더 많아야 한다며 말이다. 알렉스는 생각보다는 높아진 액수에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쾌활함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애덤이 수전노처럼 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히려 가격을 더 높이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도 알아챘다.
그에 비하자면 레널드는 청소기 옆에서 아주 편안하게 레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이 깨끗해져서 고맙다느니, 피자를 시켜줄거라느니 하는 말과 함께 오늘 회사에 다녀왔노라고 말하였다.
“역시 헬하우스의 피가 흐르고 있어. 너와는 딴판이야.”
“아무리 내가 책을 싫어한다해도...”
“...아버지에겐 언제 말할거니?”
그 말에 레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그로서는 제 아버지에게 아들을 보일 상황을 아예 생각도 못해본 것이다. 그런 동생의 행동에 레널드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아이 이름을 레오 Jr.라고 할 수도 없고, 학교는 무리더라도 검정고시라도 쳐야 할텐데.”
“이름은 그냥 내가 지으면 안되나? 왜 요즘은 그런 경우도 있잖아, 아빠가 이름짓는거.”
“네가 그러고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아버지가 눈치챘어. 내가 어떻게든 친구라고 둘러댔지만, 아버지 성격상 다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건지도 몰라.”
레오는 아버지가 알아챘다는 말에 차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떻게든 숨긴다고 노력했건만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몸집이 비슷해 부모자식으로 보이지 않았다는걸 다행으로 여겨야했다.
“...너, 설마 그 애가 하얀색이라고-”
“말도 안돼!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아냐아냐아냐아냐, 난 내 아드님이 흰색이든 꺼먼색이든 전혀 신경안써. 불편한 점이야 있지만, 내가 싫다거나 그런건 아니고 그냥 시민들이 이상하게 보는것밖엔 없어. 정말이야, 형도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거야?”
어지간히 자식의 몸이 하얀 것에 고생했던지 레오는 질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털이 하얀 것은 꽤나 골칫거리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검은 털을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유치원에서 거부당하고, 밖에 나가면 시민들의 시선이 꽂히는 것 뿐이었다. 몇몇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 놀렸지만, 그럴 때마다 아들은 오히려 싱긋 웃어보이며 그 아이들과 놀곤 했다. 그는 몸이 컸고, 이미 지성도 어른과 다름없었지만 마음만은 아이처럼 맑고도 순수했다. 그런 아드님이 고작 하얀색이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한다니, 레오는 극렬히 형의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런 동생의 반응을 보고 레널드도 반쯤은 안심하며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면 됐어. 일단 책은 넣었지만, 더 원한다면 내게 말해줘. 리스트를 뽑아주던 아니면 인터넷으로도 강의를 받던 소개는 해줄게.”
“..어.... 고마워.”
살짝 기가 죽은 채로 말한다. 오늘따라 형이 이토록 완고하게 말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새로운 형의 모습에 낯설어했다. 레오와의 대화가 끝나자마, 레널드는 가브리엘이 가져다준 피자 전단지를 보며 어떤 피자를 주문할지를 바니와 이야기했다. 레오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침을 흘리며 자고 있던 릭을 깨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릭의 머리 한쪽은 그야말로 파마를 한 것처럼 구불거렸다. 레오는 방금 전 형에게 추궁을 당한 것도 잊은 채, 스마트폰으로 릭의 모습을 찍어 보여주었다. 릭은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하게 웃으며, 학교 친구들에게 보여줄테니 보내달라고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펑-!!”
억눌러져있던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방 한가운데로 향했다. 시선을 돌릴 수 없었던 건 두 명이었는데, 바로 청소기 옆에 서 있던 레널드와 바니였다. 둘은 먼지를 한껏 뒤집어쓴 채로,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생겼냐는 냥 당황한 눈을 하고 있었다. 먼지는 천천히 천천히 거실에 퍼져내려갔고,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애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이내 낮은 비명소리가 거실안에 퍼졌다.
“오, 이런.”
콜록이는 기침이 레널드에게서 터져나온 것은 폭발로부터 30초정도가 지나서였다.
“아저씨, 괜찮아?”
“오지마, 샌디. 난 괜찮아, 다만.... 절대 내 몸에 손댈 생각하지마.”
“이게 뭐야? 이게 왜 터져?!!”
“아마도 먼지를 너무 많이 빨아들었나봐.”
“젠장! 다시 청소해야 하잖아!”
“하하, 콜라에 먼지가 들어갔어.”
“바니 괜찮아?!!!!!!!”
“괜, 괜찮으세요?”
거실이 난장판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먼저 차린 것은 의외로 애덤이었다. 그는 신속히 마스크를 뒤집어쓰고는 먼지털이로 일단은 레널드와 바니의 몸에 쏟아진 먼지들을 털어냈다. 다행히도 바니는 작업복 차림이었기에 얼굴과 머리카락말고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레널드였다.
그는 그야말로 잿빛 개가 되어있었다. 입고나왔던 가디건이며 셔츠며 바지와 양말까지, 마치 지금 애덤이 틀고 있는 먼지털이처럼 회색털뭉치 비슷하게 되어있었다. 게다가 그의 짧은 털 한가닥한가닥에마저 먼지가 달라붙어서, 바니처럼 대충 세수와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게 분명했다. 일단 레널드는 바니에게 침실에 있는 화장실로 갈 것을 부탁했다.
“알렉스, 일단 난 씻을테니까 옷 좀 갖다줘.”
레널드는 일단 손으로 가볍게 먼지들을 털어내었다. 매케한 냄새와 함께 먼지들이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직원들은 모두 경악하면서도 열심히 먼지를 치웠다. 문제는 거실에서 터졌는지라 카페트에까지 다 묻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그가 욕실로 들어갔을 때엔 모두들 소파를 옮기려고 모였다.
“알렉스-!”
화장실 문사이로 길다란 코가 튀어나왔다. 문 틈사이로 살짝 격앙된 목소리와 함께 수건을 허리에 두른 검은 개의 모습이 보였다. 동생과는 다르게 몸통과 팔안쪽이 온통 허연색이었다. 레널드가 거실쪽을 바라보았을 때엔, 이미 청소가 다 끝났는지 직원들이 평상복을 옷을 갈아입고 소파 주변에 모여있었다. 거실에 이렇게나 시민이 많은 것은 처음봤다는 생각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집주인은 그 무리속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스씨는 피자주문한다고 잠시 밖에 나가셨어요.”
CB의 말에 레널드는 고개를 숙였다. 분명 옷을 갖다달라고 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건만, 그새 그 말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샤워가운을 입었다.
“레오, 내 옷은?”
“알렉스씨가 세탁소에 맡긴다고 같이 들고갔어. 형 옷은 괜찮아?”
“괜찮아.”
다행히도 몇 번 알렉스의 집에서 자고 갔던 터라, 집에는 자신이 비상용으로 입을 수 있는 옷들이 있었다. 옷들을 구비하기 전까지는 알렉스의 낡은 옷들을 빌려입곤 하였다. 바지가 짧은 것 빼고는 사이즈가 맞았지만 하나같이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캐주얼한 옷들뿐인지라, 결국엔 몇 벌정도는 집안에 옷을 두고가기로 했었다.
그는 거실의 무리들을 뒤로 한 채, 집주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청소구역이 아니었는지 바닥에는 옷자락들과 책들, 온갖 잡동사니가 널려있었다. 다행히도 엉망진창인 방에 있는 옷장에 자신의 옷들만큼은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었다. 알렉스도 자신의 옷이라 건드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옷들을 꺼내놓고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고양이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이국적인 캐노피가 달린 커다란 침대는 이미 옷들로 점령되어 있었다. 이불과 베개는 헝클어져있었고 신은건지 아니면 곧 신을건지 모르는 양말들이 군데군데 널려있었다. 그나마 널부러진 옷들 사이로 속옷은 보이지 않아 안심해야했다.
협탁 위에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디즈니랜드에서 같이 찍은 셀카, 그가 입원했을 때 찍었던 사진, 자신이 안경을 쓰고 일하는 사진. 모두 그가 알렉스와 알고지내면서부터 있었던 일들이었다. 침대 주변에는 책들과 종이들도 쌓여있었다. 자신의 책장부터 사야하는게 아닐까, 할 정도로 검은 고양이의 집에는 책들도 이곳저곳 널려있었다. 그는 책무더기를 바라보다가, 요즘 검은 고양이가 잘 읽는다는 인간계의 추리소설을 집어 올렸다. 그러자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노란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카탈로그 위에는 부모자격증 안내서, 라는 그에게는 매우 거리가 먼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카탈로그의 연도는 금년이었고, 금년의 상담과 시험날짜, 필요한 서류들과 병원에서 받아야 하는 신체검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간간이 행복하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있었다. 어째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대충 카탈로그를 훑고나서였다. 그가 알기로는 알렉산드로 토레스라는 검은 고양이는 어린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로 아이만큼은 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카탈로그에서 가장 오늘과 가까운 날짜를 찾아보고서는 문에 걸려있던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2주 후의 서류접수일에 쳐져있는 빨간 동그라미에 자신의 심장이 멈춰 버린것만 같았다. 그는 몇 번이고 카탈로그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2주 후에 서류를 접수하면 각종 검사와 시험을 치르게 된다. 만약 합격하고 자격증을 얻게 된다면-
“말도 안돼.”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친 것은 대학시절 읽었던 고서의 삽화였다. 죽은 아비의 곁에서 울고 있는 아기고양이. 마치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에 그는 애써 고개를 돌리려했지만, 그의 시선은 카탈로그에 실린 검은 고양이 가족으로 향하고 있었다. 알렉스 나이대의 시민들은 대개 자격증을 얻으면 곧바로 아이를 신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들은 자신의 전성기에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 그래서 구청으로 가서 갓 나온 자격증과 함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신청하게 된다. 허가가 내려지면 나무에서는 악마가 자라나고, 스켈레톤들의 무덤에서는 선조의 뼈를 가져다가 영혼을 불어넣는다. 지옥개는 자신의 몸 한부분을 자그맣게 떼어, 특별히 주문한 요람안에 놓을 것이다. 귀의 일부분이라던지 손가락이나 혹은 꼬리같은 부분을 잘라내면 그 덩어리가 점차 자라나 아기의 형상으로 변한다. 그가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과정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검은 고양이는 어떻게 할까? 그도 다른 고양이들처럼 신청서를 가지고 병원에 가게 될까? 그래서 약간의 위험-목숨을 다 빨릴-을 감수하고서는 자신의 생명 하나-혹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을- 태어날 자식에게 바칠까? 그의 사랑스런 샌디에겐, 이제 목숨이 고작 3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는 카탈로그를 구겨버리려다 조심스레 원래 있었던 곳에 꽂아넣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알렉산드로 토레스는 절대로 자신에게 숨기고 아이를 가질 시민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몇 번이고 자신에게 자문을 구해올 것이 분명했다. 아직까지 말을 꺼내지 않은 건, 그럴 중요성을 못느껴서거나 아니면 진짜로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기 때문이 분명했다. 그는 후자가 분명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옷을 집어들었다. 그새 식은땀이 흘러나왔는지 얼굴 언저리가 축축해져있었다.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고 알렉스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거리는 노크소리와 함께 어서 나오라는 애정어린 목소리가 침실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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