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06 본문
날씨는 겨울하늘에 걸맞게 너무나도 화창했다. 하늘은 구름한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았고 깊었다. 햇살은 따사로워서, 찬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밖에서 돌아다니기 알맞을 것이었다. 제랄드 애머릿과 폴 제머슨이 만나기로 한 곳은 교외에 위치한 허름한 카페였다. 둘은 가족들끼리 면담을 할때마다 이곳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평소 오토바이를 타는 시민들말고는 찾아오는 이가 없었으며, 덕분에 세간의 눈치를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하기 편했다고 했다. 물론 그만큼 음료의 질은 장담하지 못한다고 애머릿은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말이다. 당장에라도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수준이라고 말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시 외곽에 위치한 Hell’s Kitchen,의 외양은 대단했다. 이미 간판은 형편없이 녹이 슬어있었으며, 툭 튀어나온 볼트는 옆에 지나다니는 행인을 위협했다. 주차장은 이미 선이라고는 알아볼 수 없는, 틈사이로 잡초가 자라나는 갈라진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설마 그뿐만이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몰골에 외벽에는 곰팡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헬랫이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에 레널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가 고개를 내젓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와 애머릿이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먼저 카페 구석에 앉아있던 무리를 바라봐야 했다. 붉은 피부에 하얀 머리칼을 가진 악마 한명과 늑대인간 두 명이 메뉴판에 코를 묻고는 무엇을 시킬지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른인 쪽이 원고 폴 제머슨이라면, 그 옆에 있는 아직 어려보이는 늑대인간은 그의 아들인 헨리 제머슨일 터였다. 분명 전에 아서와 만났을 때엔 아이들은 두고 오는 것으로 약속을 해놓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걸로 치면 그도 반박은 할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이 들어온 제랄드 애머릿의 뒤에는 스콧이 붙어있기 때문이었다.
아이 한명과 어른 두명은, 그 중 어른 두명은 매우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대방이 앉아있는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드디어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아서와 제머슨의 고개가 돌려진다. 그리고 뒤에 있는 스콧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미묘하게 썩어들어가는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우선 자리에 앉고서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폴 제머슨은 할로윈 근처 고등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일하고 있는 늑대인간으로, 안경을 쓴 모습이 꽤나 지적으로 보였다. 검은 털은 살짝 거칠었지만 충분히 야성적이었으며, 체격도 의외로 애머릿보다 큰 편이었다. 레널드는 제머슨과 악수를 나누면서 카사노바를 붙잡은 늑대인간의 매력을 인정했다. 일단 아이들은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면담은 가벼운 식사를 끝내고 가지게 되었다. 웨이터에게 메뉴를 주문하고나서야 부부였던 두 늑대인간은 평소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아서와 레널드가 보기에는 안봐도 지어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한편 변호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된겁니까? 스콧은 데려오지 않는걸로 하지 않았습니까?
의외로 아서 애플은 문자를 보낼때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할때도 표준어를 써준다면 얼마나 편할까.
미안합니다, 저도 합류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스콧군은 어떻게든 제머슨씨를 보고싶다고 졸랐다가, 급기야 차에 몰래 숨어들었다는군요.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어째서 헨리군이 있는거죠?
형제가 똑같이 행동했네요. 헨리도 뒷자석에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휴게소 지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둘의 시선이 디저트로 뭘 고를까, 고민하는 형제를 향해 돌아갔다. 헨리는 아마도 애머릿의 털로 만들어졌을 푸른색 목도리를 두르고 스콧에게 이번에는 이 메뉴에 도전해보자고 말하고 있었다. 스콧은 그런 형의 말에 자신은 파르페가 먹고싶다고 강하게 주장하다가 결국 형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둘은 제법 투닥거리긴 했지만 사이좋은 형제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 며칠전까지만 해도 수줍음을 그렇게 타던 스콧도 즐겁다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헨리에게 새로 나오는 히어로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난 그런거 이미 졸업했어. 대세는 역시 오버워치지.”
“그렇게 말한거 치고는 저번에 극장에 갔잖니.”
“아빠도 참! 내가 그 얘기는 하지 말랬잖아요.”
마치 비밀이라도 들킨 양 헨리의 귀가 새빨개진다. 스콧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다가 급기야 딸꾹질에 걸려버렸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의 시선은 어두웠다. 그들은 웃고싶지 않았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웃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들도 그에 화답하며 상냥한 모습을 지어냈다. 레널드는 아주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어느 파르페가 더 맛있다고 아예 거짓말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 이짝이 더 맛있응게.”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종용하자, 결국 스콧은 지옥사과조림이 올라가 있는 파르페를 골랐다. 메뉴 주문이 끝나자마자 아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레널드에게 창밖으로 고갯짓을 하며 밖으로 나가자고 무언으로 말했다.
“둘이 너무 불쌍하당게요.”
아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전(前) 가족이 있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은 제머슨의 대학교 후배라느니, 제머슨과 애머릿이 만났을 때부터 일들을 알고 있었다고, 딱히 레널드가 꺼내지 않았는데도 말하였다. 레널드는 이것이 정말로 아이들이 불쌍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동정심을 불러일으켜서 자신을 교란시키는건지 알 수 없었다. 전자라면 아서는 정말로 선한 악마일 것이고, 후자라면 역시 능력있는 변호사일 것이다. 어느쪽이던 레널드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의 등에는 회사의 평판이 달려있었다.
“저랗게 털색깔도 다른 것이 서로 성이니 아우니 하는게 너무 눈물나지 않소잉? 마치 내 동상 보는 것 같아서.”
동생? 레널드는 그 말에 아서를 바라보았다. 방금 동생이 있다고 했나?
“동생분이 있습니까?”
“아, 있지요. 참말로 있지요잉. 내 동상도 나랑 피부색이 쪼까 다른디, 그래서 아들이 동상을 많이들 괴롭혔지라.”
분명 케르베로스에서 일하는 직원 중 애플이라는 성을 가진 악마가 있었다. 애덤, 딱봐도 눈에 띌 정도로 하얀 피부와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레오의 고등학교시절 친구. 레오가 가끔씩 보여주곤 했던 사진속에 모습이 있었고, 결국 그 인연은 대학을 졸업하고나서까지 이어졌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아서의 동생이라는 자는 애덤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군요,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는 위로의 말만 꺼내었다. 여기서 동생을 안다느니 하면, 앞으로 있을 면담에 영향을 줄 것 같아서였다. 아서 애플은 분명 마음씨 좋은 악마로 보였으나, 여기서는 단순히 원고의 변호사일 뿐이었다. 아서는 휴지를 꺼내 코까지 풀었다.
“그라도 셋째 아가 어리니, 얼마나 아빠품을 찾겠소잉?”
제머슨의 곁에 오래 있었고, 스콧과 헨리와도 안면이 익혔다면 아마 그가 말하는 ‘아빠’는 폴 제머슨을 가리키는 말일테다. 레널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애머릿은 제머슨이 소송을 걸기 전까지는 양육권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었다. 제머슨이 요청만 했어도 방학을 틈타 아이를 보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 왜 제머슨씨는 스콧을 원한다고 보십니까?”
그 말에 아서의 눈빛이 변한다. 설렁설렁한 태도지만 이쪽도 나름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야 당연히 애머릿씨가 아를 부실하게 보니까 그렇죠잉.”
과연 부실하게 본다는 것의 정의가 뭘까, 그는 그걸 물어보려 했지만 식당쪽이 훨씬 빨랐다. 애머릿은 음식이 나왔다며 레널드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는 아서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음식은 말대로 정말 형편없었다.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마치 고무타이어를 씹는듯한 스테이크에 감자튀김은 해동마저 덜 되어있어서 얼음이 씹혔다. 이런걸 돈주고 사먹는 자들이 궁금할 정도의 품질이었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열심히 포크를 놀렸다. 스콧은 헨리와 제머슨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아이의 입에서 ‘아빠’라는 소리가 열심히 튀어나왔고, 그걸 들은 애머릿의 표정은 때때로 어두워지곤 했다. 만약, 정말 인간계의 법대로 양육권 선택에 자식도 관여할 수 있다면, 스콧은 누구를 선택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레널드는 결국 스테이크를 절반도 넘게 남겼다. 어째서인지 짠맛까지 나는 커피도 물로 희석시켜서 간신히 마셨다. 그나마 기성품으로 나온 크래커로 대충 배를 때웠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열심히 떠들면서 파르페-의외로 아서의 말대로 파르페는 호평이었다.-까지 다 먹고나자, 애머릿은 수다를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P와 이 아저씨들과 할 이야기가 있는데, 밖에 나가서 놀까?”
순간 웃음에 젖어있던 헨리의 표정이 변한다. 헨리는 레널드와 아서를 한번 둘러보고선 스콧의 손을 잡았다. 제머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놀다오라고 아이들을 부추겼다. 헨리의 시선이 순간 애머릿에게 머물렀다.
“...네. 아-, 네, 알았어요.”
마치 그리운 단어를 토해내려고 했지만 이내 말을 돌렸다. 아이는 매우 불편한 표정으로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헨리는 스콧의 목에다 자신이 두르고 있던, 아버지의 털로 만들었다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애머릿은 마치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은 참담한 표정으로, 두 아이가 문을 열고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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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이 질 무렵의 집에는 애석하게도 냉기만이 감돌았다. 레널드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자신의 목을 죄어오던 넥타이를 끌러내렸다. 방안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고, 소파 위에도 벗은 옷자락들과 잡지가 가득했지만, 그걸 치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다 떨구었다.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뉘이고는 간신히 깊은 숨을 내쉰다. 방안에서는 자신이 숨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흔한 키보드 타자를 누르는 소리도, 이어폰에서 유튜브 영상이 살짝 새어나오는 소리도, 무슨 일이 있었다면서 조잘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팔로 눈가를 지그시 누른다. 온 세상이 정적과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폴 제머슨은 소송취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많이 봐왔던 세월들을 강조해가며, 현재 스콧 애머릿이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애머릿은 그걸 부모로서 잘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따져물었다. 물론 애머릿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양육은 전적으로 가정부인 로비에게 맡긴 상태였고, 가끔씩 안부만을 묻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넌 언제나 그랬지, 양육은 언제나 남에게만 맡겼지. 날선 말들이 애머릿의 찌뿌려진 얼굴에 박혔다. 스콧은 애머릿의 이사와 함께 전학을 갔다. 그리고 그 내용을 차마 아빠나 아버지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가끔씩 헨리에게 말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무섭게 느껴진다니, 그 나이에. 레널드는 자신의 손길을 두려워하던 스콧의 모습을 떠올리고서는 화난 제머슨의 말을 수긍했다. 그럼 그것만 알려주면 되었지, 굳이 양육권을 요구할 필요는 없었잖아? 애머릿의 말에 제머슨은 비웃음을 흘렸다. 톰을 기른 것도 네 아버지였고, 스콧을 기른건 나였어, 넌 스콧이 언제 말을 했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르잖아. 점점 상황은 이상해져가고 있었다. 아서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애머릿은 완전히 압도당해버렸다. 결국 레널드가 나서서 소송의 문제점을 읊어주고나서야 애머릿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서는 의뢰인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면서도, 다음에 만날 곳은 법정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도 제머슨이 화가 나면 말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저래봬도 왕년에 지옥축구선수였지라, 그래도 아들은 잘 길렀죠잉. 레널드는 아서가 말하는 제머슨의 과거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방금전 자신이 말했던 만약 소송으로 간다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다시 말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협박에 가까웠던 말들을 꺼내었을 때, 제머슨의 표정은 얼마나 일그러져있던가. 마지막에 헤어지는 순간에서도 그는 안경 너머로의 적의어린 시선을 맞아야 했다. 아이들이 헤어지기 싫다고 눈물을 짜내며 우는 소리를 들은 것은 덤이었다. 아버지, 나 형하고 조금만 더 놀면 안돼요? 만약 제머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는 학교에서도 외톨이일 가능성이 컸다. 이해가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제머슨이 이사를 온 곳은 고급주택가였고, 당연히 초등학교에서도 고위인사의 자제들이 가득할 터였다. 그 곳에 늑대인간, 그것도 유성애자의 아들이라면 배척을 받아도 이상하진 않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는 계속해서 헨리를 붙들어안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스콧을 떨어놓았다. 역시 나이를 조금이라도 더 먹어서인가, 지금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다음에 또 만나서 놀자, 스콧. 헨리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짙푸른 목도리를 스콧의 목에 둘러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중에 보자고, 어른들로서는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했다. 아버지들은 그 광경을 애써 무시했다. 둘 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는 땅만을 쳐다보았다.
바닥과 벽에서 흘러들어오는 냉기에 소름이 돋는다. 만약 여기서 더 추워진다면 입김이라도 보일 터였지만 레널드는 도저히 소파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면담을 끝내고 애머릿의 집에서 차를 마시고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애머릿은 절망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헨리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는 그 사실이 매우 괴로웠다면서, 스콧은 P를 아빠라 부르고 헨리는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상황에 대해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제머슨이 말해주었던 사실들을 전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스콧이 워낙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친구들은 늦게 사귀는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과연 자신이 스콧을 기를 자격이 있는가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 레널드가 꺼낼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애머릿씨, 애머릿씨가 잘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달으셨다면 정정하면 되는 일입니다, 더 나쁜 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이죠, 이 세상에는 애머릿씨보다도 못된 아버지가 널려있습니다. 굳이 예시를 들어주지 않아도 애머릿은 무슨 소리인가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자식을 피를 이을 도구로만 여겨, 불량품들은 체스말로밖에 이용하지 못하는 아버지, 자신의 실패에 절망하여 동반자살을 꾀했던 아버지. 레널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두 명의 아버지를 애머릿은 모를테지만, 적어도 레널드의 말은 이해했을 것이다. 애머릿은 스콧의 방이 있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난 스콧이 불편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 아이긴 하지만, P를 닮았죠, 게다가 양육은 전부 P에게 일임한 상태라 신경을 써주지도 못했습니다. 애머릿은 후회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빨리 후회하고 절망하고 깨닫고 반성하다니, 레널드는 애머릿의 유연성에 감탄했다.
그럼 아버지는 뭐지? 그도 이렇게 아들 때문에 후회하고 절망할까? 레널드는 소파에 누운 자신의 몸이 물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머릿은 적어도 스콧이 물에 빠진다면 제 몸을 바쳐서라도 아들을 구해낼 것이다, 그는 단순히 오랜만의 양육에 서툴러서, 아들이 불편해서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이 물에 빠져 영혼마저 차갑게 식어가려던 순간에도 아버지는-
한없이 우울하고 차가운 상념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성냥이 켜지는 소리였다. 아마도 종이에 불을 붙이는 소리, 그 위로 장작더미를 올려놓는 소리, 타닥타닥거리며 조금씩 불이 옮겨붙는 소리, 그리고 연기냄새. 레널드는 조심스레 팔을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거실 한구석에 위치해있는, 지난 여름과 가을동안 작동을 하지 못했던 벽난로에서 작게나마 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벽난로 앞에는 누군가가 쪼그려 앉아서 부지깽이로 장작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장작불에 길다란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비춰보였다.
“...알렉스?”
살짝 물기어린 목소리에 누군가가 뒤돌아본다. 커다란 귀, 털이 짧은 얼굴, 입과 코 주변은 커다란 물방울이 하얗게 지어져있었고 표정은 천진난만했다. 불빛에 황금빛 눈동자가 더욱 빛을 발했다.
“어, 일어났어? 아저씨도 참, 내가 침대를 사줬으면 침대에서 잤어야지. 게다가 오늘부터 엄청 춥다는데 담요라도 뒤집어쓰던가, 방에 난로도 있잖아. 여기서 자면 곧바로 감기 걸린다고, 요즘 감기가 얼마나 독한지 몰라? 맥네 스미스도 결국 학교 쉬었댔어. 맥이 회사쉬고 병원갔는데 내가 대신 일한다고 얼마나 고생한지 알아?”
알렉스 답지 않은 잔소리가 입에서 터져나오자, 어쩐지 레널드는 그 모든 것이 우스워보였다. 자신에게 이렇게 타박을 할 수 있는 시민은 지금 열심히 불을 지피는 검은 고양이밖에 없었다. 알렉스는 세간에서 터져나오는 감기의 증상들에 대해 털어놓다가, 레널드가 애머릿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그는 향기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더욱 더 거세게 몰아세웠다.
“J 그자식도 독감 때문에 고생한거 아녔어? 그럼 더더욱 이렇게 춥게 지내면 안되잖아.”
어느새 방에서 가져왔는지 두꺼운 담요더미를 레널드에게 덮어주고나서야 알렉스는 만족한 것 같았다. 레널드는 검은 고양이의 체취가 묻은 담요에 코를 박고 주방을 쳐다보았다. 시간은 벌써 저녁을 지나 밤으로 가고 있었고, 알렉스는 이제야 퇴근한 모양이었다. 항상 사고만 치는 말괄량이 같았는데, 가끔씩 이렇게 믿음직스럽게 보일 때가 있었다. 우유 끓는 고소한 냄새, 타닥거리는 작은 소리를 내며 불타는 벽난로, 두꺼워서 숨이 막히는게 아닐까 싶은 담요들. 오늘 하루는 매우 피곤했었다. 그것이 지금와서야 풀리는 것 같았다.
“저녁은 먹었어? 대충 햄버거는 사왔는데 나눠먹을까?”
레널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낡고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거의 남기다시피 먹은 이래로 위에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피로에 허기마저 잠식당한 것 같았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는 햄버거세트와 코코아가 내려졌다. 레널드는 자기 몫의 코코아 잔을 들어올렸다. 너무 뜨겁지도 않으면서도 미지근할 정도도 아닌, 레널드가 좋아하는 정도의 온도였다. 그것을 들이키자, 식도를 따라 뜨거운 코코아가 위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당분이 몸속으로 흡수되자마자, 피로로 누르고 있던 허기가 다시 제 힘을 얻었다.
“미안한데 다른 뭐 먹을거 있니?”
그 말에 알렉스는 진작에 말했어야지, 라고 말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조심스레 칼로 먹고있던 햄버거를 반으로 가르고서는 레널드에게 나눠주었다.
“아저씨가 올 줄 알았으면 차라리 두 개를 사올걸, 아저씨도 적게 먹는 편은 아니잖아. 게다가 난 오늘 몸을 움직이느라 얼마나 피곤했다고. 계속 뛰고 걸어다니고 그랬단 말야, 게다가 맥 일도 대신 해야 했고... 관절 삐걱거리는거 봐.”
그러면서도 웃음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레널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햄버거를 입에 물었다. 빵은 질척거렸고, 양상추는 풀이 죽었으며, 패티에서는 노린내가 풍기는, 그야말로 소스맛으로 먹는 싸구려햄버거였지만 이상하게도 여태껏 먹었던 것들 중에서는 최고였다.
“벽난로 결국 피웠네, 그렇게 귀찮아하더니.”
“갑자기 피우고 싶었더라고. 그렇다고 담배 필 생각은 하지 말고. 밖에서 담배피고 왔지? 평소라면 페브리즈도 다 뿌렸을텐데, 그렇게 지쳤어?”
그 말에 레널드는 셔츠에 코를 대고는 냄새를 맡아보았다. 하지만 소스냄새와 코코아냄새, 담요에 묻어있던 알렉스의 체취말고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느새 알렉스는 감자튀김으로 손을 옮기고 있었다.
“하핫, 아저씨도 참. 자기가 맡으면 안 나는게 당연하잖아.”
그러면서 빨대로 이미 김이 다 빠져버린 콜라를 마셨다. 참으로 형편없는 식사다, 아마 몇시간 전에 포장한걸 지금에서야 간신히 먹는 걸테다. 식어빠져서 흐느적거리는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레널드는 벽난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나 차가웠던 거실은 어느새 불이 내뿜는 온기에 따뜻해져있었다. 그는 그 온기가 제 가슴속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따뜻한 걸 이제야 맛보게 되다니, 그는 눈을 감고 담요더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아들보다는 일이 중요했던 아버지, 옛 가족을 잊지 못하는 아들. 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불편했을 뿐이었다. 애머릿은 자신의 생각대로 아들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그런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동시에 실망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저씨, 오늘 집에 갈거야? 먹을 건 있는데 순 안주랑 술밖에 없어.”
이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에 제 발을 묻고 싶었다. 이 곳에서라면 레널드도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매우 행복해하며 지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려야 했다. 이제 자신은 소송을 준비해야 할 처지에 처해있었다.
“응, 가야돼.”
알렉스는 풀이 죽은 얼굴로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괴로웠지만 그는 슬슬 재판준비로 들어가야 했다. 목적은 승소가 아니라 최대한 매스컴에서 멀어지는 것, 형들의 일로 자주 해왔던 일이었지만 여전히 하기 싫은 일이기도 했다. 알렉스는 몇 번 더 주방에서 먹을거리를 뒤지다가 결국 유통기한이 몇 년은 지났을 크래커 한봉지를 찾아냈다. 크래커는 푸석했지만 그나마 먹을만 했다.
“애머릿 이사의 일은 어떻게 되었지?”
알렉스의 집에서 몸을 녹이고 집에 들어가니, 벌써 시계는 자정을 알리고 있었다. 환복하고나서 주방으로 향하니 먼저 손님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어디서 꺼내었는지 쟁반 위에 꼬냑을 올려놓고 있었다.
“안좋게 가고 있어. 형은 왠일이야, 그런건 사용인에게 시키면 되는 일이잖아.”
“...이 집안에 리바이가 매수한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에드워드가 한 말은 전에 있었던 사건을 일컫는 것이었다. 리바이는 청부업자를 시켜 레오를 어리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 능력도 없는 동생에게도 그러는데 자신에게는 그러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 에드워드의 생각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에드워드와 리바이는 경영권을 두고 서로 앞치락뒤치락을 하고 있지 않던가.
물론 레널드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레널드는 검은 털에 집착하는 아버지와 회사에 눈이 먼 형들 덕분에, 권력이니 경영이니 하는 것에는 학을 떼고 있었다.
“결국 재판까지 가는건가? 아버지가 썩 좋아하지 않겠는데.”
“상대방이 완강해야지.”
“어리석은 아버지네, 이런 일에 말파리들이 얼마나 달라붙는 줄 모르고.”
에드워드는 이 이야기가 제법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는 잔 두 개를 꺼내더니 나란히 커다란 얼음을 집어넣었다.
“난 가서 일해야 돼.”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 아님, 일한다고 핑계대고 검은 고양이네 집으로 갈 생각인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사고만 치지 않으면 나도 리바이도 널 건드리진 않아.”
마치 당장에라도 사고를 쳐달라고 비는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레널드가 갖고 있을, 자신이 저지른 횡령에 대한 자료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굳이 그런 큰 위험은 감수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레널드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게 후환을 줄이는 법이었다.
“아버지는 애머릿을 좋아하는 편이지, 그래서 널 붙여준거야. 실적도 가장 좋은 편이고, 실제로 아버지와도 닮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이 일이 조용하게 끝났으면 하는거야.”
아버지와 닮았다는 말에 레널드는 꼬냑을 한모금 들이켰다. 분명 일에 대해서 집요하다는 것은 비슷했다. 어쩌면 가족을 가지면 안 될 타입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비슷했다. 둘 다 일에 미치면, 주변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널드는 몇시간 전까지 스콧에 대해서 괴로움을 토로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형은 아버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갑작스런 질문에 에드워드는 파안대소했다. 그 아버지가? 말도 안된다는 식이다.
“뭘 물어볼 것까지 있어? 아버지가 어디 그런 인물이었어? 일이 틀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분이잖아, 심지어 자식이 죽었다 살아나도 일만 하는 지옥개야.... 아, 맞아. 딱 한번 본적이 있어. 레오가 고등학교 잘못갔다는걸 깨달았을 때였어. 하긴,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괴롭지. 기껏 모셔놓은 후계자가 그 모양이니까. 아버진 레오 일에서만큼은 감정적이었지.”
에드워드는 아버지와 레오와 얽힌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막내는 지옥개에, 헬하우스 가문에 걸맞지 않게 사고만 치고 다니는 망나니였다. 가족 모두들 레오 때문에 적잖이 속을 썩였다. 하지만 만약 레오가 검은 털만 타고나지 않았다면, 골칫덩어리 막내로 지내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레오가 복권 1등 맞았을 때 기억나?”
그 말에 에드워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일들은 항상 레오 곁에서 터지는 것 같았다.
둘의 대화는 거의 한시간동안 이뤄졌다. 결국 에드워드는 평소답지 않게 꼬냑 반병을 다 마시고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레널드는 서재로 들어서면서도, 아버진 항상 레오에게만 감정적이었다는 말을 되짚었다. 에드워드의 말은 레널드가 보기에는 틀린 말이었다. 에드워드와 리바이, 레널드가 태어날 당시 분명 그들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 감정의 이름을 굳이 형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널드가 생각하기엔, 이 3형제는 모두 실망의 호수에 빠져 익사당하고 있었다.
이틀 후, 레널드는 출근하려 자동차에 오르자마자 애머릿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스콧 애머릿이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가출을 했다고, 늑대인간은 횡설수설해가며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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