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11 본문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레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그가 있던,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던 골방의 문이 열렸다. 그는 한시간여만의 햇빛에 눈부셔하면서도 로날드 캐머런이 앉아있었을 자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상당히 뻔뻔한 교사군요.”
“..네.... 역시 레널드씨의 말대로... 내가 저런 작자에게...”
제랄드 애머릿은 더 무어라 말하려다 아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급히 말을 끊었다. 스콧은 긴장이 다 풀렸는지 소파에 반쯤 누워서는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진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애머릿도 자연스레 소파에 주저앉았는데, 한시간여 이어진 방문동안 그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특히 그는 아들과 선생을 단둘이 있게 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 교육청에 신고하면 되는겁니까?”
“..네. 그리고 스콧군은 상담기관에서 맡게 될 겁니다만, 사건의 처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캐머런씨와 기타 방관한 어른들에 대한 처분도 결정될겁니다. 그레이씨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지장이 없게 내가 도와주겠다고 장담하죠.”
증거는 그레이의 증언과 스콧의 진료기록이 있었다. 레널드는 오늘따라 많은 옷을 껴입은 아이의 몸을 바라보았다. 피부에 남은 멍자국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온 몸의 털을 밀어야만 했다. 그게 늑대인간으로서는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아이에게 설득해야만 했다. 사실 설득해야 한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둘은 어젯밤 아이를 데리고 모든 사실을 알고 있노라고 말하며, 너에게 폭력을 가한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두려움에 떨며 싫다고 소리치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안고 설득하느라, 결국 레널드는 새벽이나 되어서야 알렉스의 집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스콧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이는 자신이 들켰다는 사실에 꽤나 놀라면서도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그걸 간신히 인정으로 돌아서게 한 것은 이미 헨리도 알아챘을지 모른다는 한마디였다. 아이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흐느끼다가 결국에는 미안하다고 소리쳤다. 잠에 들때까지, 그 목소리가 귀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어떻게 되는거에요?”
“..스콧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레널드의 물음에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주모자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콧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아버지와 레널드, 형이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마 널 괴롭혔던 일당들은 학교폭력위원회에서 결정될테지만, 아마 교육이수에 강제전학을 가게 될거에요. 봉사활동도 해서, 다시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 시민으로 만드는거죠. 선생님은... 캐머런씨는...”
“선생님은.... 알고 있었니?”
레널드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이은 것은 애머릿이었다. 그는 레널드가 어째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렸다. 같은 지옥개로서 아이에게 말하기엔 불편했던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애머릿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태연히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 없었니?”
“....네.”
결국 그는 소파에 주저앉으려다 아이를 품에 안았다. 얼음이 카페트 위에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맞추고는 연거푸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그렇게나 믿었건만, 그는 전학 첫날 보았던 그 미소의 진의를 이제야 알아챈 것을 자책했다. 그가 아이를 품에서 놓아주고나서 마른세수를 몇 번 하자, 상황이 불편해지고 있단 것을 깨달은 스콧이 재빨리 말했다.
“그럼 난 어떻게 되는거에요?”
“..스콧.”
“그건 스콧군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학을 추천하고 싶군요. 어차피 선생들까지 얽혀들어갈 문제이고, 전학 초기에 발생한 일이니까요. 미안합니다, 일부러 이런 얘기까지는 꺼내지 않아도 되었겠군요.”
어차피 친구가 없지 않았냐는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레이의 말을 전해주지도 않았다. 남느냐, 남지 않겠느냐 하는 일은 전적으로 스콧의 의향에 달려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들어가보겠노라고 방으로 사라졌다.
애머릿은 제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널드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기계적으로 가방에서 팸플릿들을 꺼내었다. 학교폭력센터, 아동심리상담센터, 학교폭력에 관한 교육청의 서류 등등, 앞으로의 싸움에 필요한 자료들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내일부터는 제가 소개시켜주는 변호사가 찾아올겁니다. 이쪽분야로는 상당히 베테랑이니 도움이 될 겁니다.”
“...레널드씨에겐 언제나 신세만 지는군요.”
“천만에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걸요.”
애머릿은 고개를 들고선 쓴미소를 지었다. 그는 팸플릿들을 눈으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연락해주세요. 굳이 회사일이 아니더라도 돕겠습니다.”
“훗... 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악수를 교환하고나서야 레널드도 얕게나마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드디어 일이 끝났다는 탈력감이 들기도 했지만 당사자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애머릿에게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제부터 매스컴들이 그들 부자를 들쑤시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애석하게도 그도, 그의 아버지도 원하지는 않는 일이었다.
▒ ▒ ▒
레널드가 동생의 사무실에 들를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곤 했다. 동생이 어려진다던가 지옥넝쿨에 당한다던가 하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음식이 폭발하기도 하고 누군가가 손을 베는 그런 사소한 일들도 있었다. 레널드는 방금전 애덤과 나눴던 통화에서 동생의 비명소리를 듣던 참이었다. 별 거지같은 일이라고 평가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며, 또한 걱정하며 그는 사무실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참상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닥에는 비닐이 깔려져 있었으며 그 위에서 동생이-언제나처럼- 벌거벗고서는, 가뜩이나 짧은 털을 이발기로 밀고 있었다. 그는 뭐하는 짓이냐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우선 동생에게 인사했다. 흩날리는 털의 주인공인 레온 헬하우스는 형이 왔다고 날뛰려다 살을 집히고는 미친 듯이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레오, 움직이면 더 다쳐!”
한창 등을 밀어주고 있던 릭 레몬트리가 레오를 붙잡았다. 한편에서는 애덤이 한숨을 내쉬며 레널드에게 오셨냐고 인사를 건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거죠?”
“...다음달이 하양이의 생일이거든요!”
릭이 말하자 다음은 CB가 이었다.
“그래서 레오는 자기 털로 만든 물건을 만들어서 아들에게 선물하고 싶어하고 있어요, 레널드형. 하지만 아시다시피 지옥개는 털이 짧아서, 아예 펠트를 만들기로 결정한거에요.”
할로윈의 유행은 지옥개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레니는 헨리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떠올리며 바닥에 떨어진 짧은 털들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정도로 짧아선 실로 만들기는 무리일 것이다.
“뭔 바보같은 게 유행해선... 그냥 털있는 종족들만 하면 되는걸...”
아무래도 애덤은 뭔가를 당해본 것 같았다. 레널드는 굳이 떠오르고 싶진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어제 보았던 동생바보 변호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형들도 해주던가보죠?”
그 말에 애덤의 표정이 지독하게 썩었다. 그는 삭발을 하겠다는 형들을 말리느라 고생했다면서 치를 떨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레오는 계속해서 자신의 털을 깎았다. 손과 발, 목 위의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털을 모으자,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징그러운 느낌을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고작 이게 다야?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원래 털을 모을때는 꽤 장시간동안 모은댔어.”
애덤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저번에 잭은 한달만에 다 모았다고 했잖아.”
“걔는 검은 고양이잖아. 털갈이하는 애들이랑 네가 같냐.”
털 안에 있던 속살은 검붉었다. 레널드는 검붉은 레오의 거죽에 두통을 느끼며-심지어 그걸 말리지 않은 친구들도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과연 저런 동생과 조카에 대한 일을 협의해야하나 고민까지 했다.
레오는 자신의 털의 양이 상당히 적으며, 자신의 털을 모아봤자 A4 용지 한 장 정도의 펠트밖에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알자마자 실의에 빠졌다. 그는 형과 면담을 나눌때까지 징징거리다 늦게나마 돌아온 바니의 한소리를 듣고나서야 옷을 입었다.
“너 그거 아버지에게 들키면 정말로 한소리 들을거야.”
“형은 안하고?”
“...아니,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어.”
그치만 다음달이란 말야, 레오가 투덜거리자 레널드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음달이지...”
레널드는 물을 마시고선 다시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내가 전화로 말했었지만, 아버지가 네 아이를 만나길 원하셔. 어디까지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버지시니 아마 진상에는 거의 다다랐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실 레오가 숨기는 정도는 그야말로 어린애 장난이어서, 서류 한 장만 떼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어째서 아버지가 그걸 숨겼느냐와 반응이 어땠을까, 하는 점이지만. 레널드는 아버지가 조카의 존재를 몰랐을거라 생각하던 때의 자신을 떠올리고 속으로 비웃었다. 자손이 하얗다고해서 대놓고 충격을 밖으로 드러낼 시민이 아니란 것을, 까맣게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혹시 빼앗아가는건 아니겠지?”
가능성은 없는건 아니었다. 그렇게나 검은색에 집착하던 아버지니 하얀 자손을 눈감아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억지로 시민을 억류하는건 범죄야. 아버지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리도 없고.”
그는 그런 가능성을 굳이 입 밖으로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아버지가 선례가 없는건 아니었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아들을 토막내지 않았던가. 그걸 알고 있었는지 레오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모르겠어... 하지만 아버지가 아드님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와 나도 동석할 수 있어. 수상한 짓은 못하실거야.”
정 안되면 상황을 감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널드의 말에는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미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이상, 둘의 만남을 미뤄봤자 좋지 않을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일단 아드님이랑 얘기해볼게.”
레오는 허탈하게 대답하고는 탁아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는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매체상으로만 접했을뿐, 다른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하고 자라났다. 레오와 친구들은 일부러 아이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들도 로날드 헬하우스가 자손에게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했다.
“다음달에 생일이라고 했지? 첫돌이면 그만큼 준비해야겠지.”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전의 그 난리도 그 준비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도 아드님이고 첫 생일이니까 뭔가 성대한걸 해주고 싶긴 한데...”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생각해.”
레널드는 소매 너머로 보이는 검붉은 피부를 바라보았다. 검붉고 가죽이 접혀 주름이 져 있는 피부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얼마나 동생이 조카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머리털까지 밀 생각 하지 말고. 아이한테 뭐가 필요한지도 물어봐좀 주고.”
레널드는 가방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서냐는 레오의 질문에 그는 일부러 등을 돌리고 답하였다.
“첫 조카의 첫 생일이잖니.”
문 너머로 보인 검은 코에 아이는 책을 읽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턱밑의 하얀털을 가진 지옥개라면, 아이가 아는 한 이 지옥에서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삼촌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내비치자 아이의 얼굴에도 기쁨의 웃음이 떠올랐다. 루카스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지내는가 해서 말이야. 잘 지내고 있었니?”
“네! 저번에 보내주신 책들도 잘 읽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 지옥개를 위한 경제학책이 재밌었어요.”
어째 제일 좋다는 책이 경제학책인 것이 걸렸지만, 그래도 좋아한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아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조명에 비춰 반짝거리며 빛났다. 어느 책에서도 어느 부분이 좋았고, 또 어디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에 레널드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도 지극히 깊어졌다. 어쩌면 아이는 이런 말을 할 상대가 있어서 좋아하는 건지도 몰랐다. 레오는 경제쪽으로는 전혀 생각이 없으니, 아이는 자연스레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다니 다행이네. 혹시 더 갖고 싶은건 없니? 너희 아빠한테 전하면 어떻게든 구해줄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나중에 책을 다 읽거든 그때가 되어서야 알려주겠노라고 말하였다. 레널드는 그렇게 말하는 조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비록 몸집은 크고, 이미 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빛나는 눈동자와 말하는 투를 보면 역시 어리기는 많이 어렸다.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삼촌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샘과 릭의 아이가 무슨 일이냐며 다가오고 있었다.
▒ ▒ ▒
거실쪽이 소란스러웠다. 비속어가 섞인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하면 다시 다른 이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말도 안된다고 검은 고양이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들렸다. 레널드는 베개로 귀를 막으려다 현재 시간이 새벽이란 것을 알고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바깥은 깜깜했지만 태양이 스물스물 올라오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커텐사이로 보이는 보랏빛 하늘을 곁눈질로 보다가 결국 침대에서 나왔다. 라디에이터가 꺼진 공기는 상당히 미지근했지만, 그것보다는 밖에서의 소란이 더 거슬렸다.
“샌디, 시간이 몇시인데 시끄럽잖... 페터?”
“아.... 레니. 오랜만이야.”
테이블에는 피자와 도넛상자가 널부러져 있었다. 알렉스는 뜨겁다 못해 흐늘거리는 피자를 입에 넣고 있었고, 페터는 옆에서 커피와 함께 도넛을 베어물고 있었다. 하얀 설탕가루가 테이블에 떨어짐과 동시에 레니의 귀에 아주 익숙한 말투가 들려왔다. 사투리가 살짝 섞인 노인의 말투, 그는 텔레비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서는 한창 둠스데이 시티에서 일어난 학교폭력에 관한 뉴스를 방영하고 있었다. 모자이크로 가려진 어느 악마가 초등학교 내에서 일어난 폭력에 증언을 하고 있었다. 짙은 회색 피부, 스콧이 다녔던 초등학교의 잡역부였던 그레이임을 레널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런거 보면 남일은 아니어서 더 가슴아파. 더군다나 늑대인간이잖아.”
아마 알렉스는 사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니 페터의 말에 더 맞장구를 치고 있겠지. 오늘 즈음에 매스컴에 방영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데다, 직접 목도하니 레널드도 착잡한 심경이었다. 모자이크와 변성된 목소리가 계속해서 학교 내에서 있었던 폭력을 증언하고 있었다. 부디 저걸 스콧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교육청에서 진상조사를 위해 나섰다는 증언과 함께 학교폭력위원회에 가해자의 아버지들이 이의를 제기했다는 뉴스도 이어졌다. 물론 어제 애머릿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었다. 특히 주모자인 케이브 하운드의 아버지, 즉 하운드 회장은 직접 자기 자식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과연 모자이크 너머로 그가 자식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페터가 강하게 혀를 찼다.
“루시퍼도 외면할 놈들같으니라고, 지 자식만 중요하다 그거지.”
그러면서 그는 딸기필링이 들어있는 도넛을 들어올렸다. 그가 절반정도 베어물고나서야 스콧에 관한 뉴스가 끝났다. 페터는 몇 번 하운드 회장을 욕하고나서야 레널드 헬하우스가 알렉스 토레스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다시 시계를 보더니, 그제야 어째서 네가 여기있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자고 있었어?”
“응. 덕분에. 샌디, 이제 들어온거야?”
“오늘 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아침은 먹고 오려고 했는데 근처에 식당도 연 곳이 없는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아침먹이고 보내려고 왔어. 괜찮아, 아저씨. 페터는 밥만 먹으면 곧바로 여기서 나갈거야.”
반쯤은 소파에서 잠이라도 자고 가려던 페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무어라 대꾸라도 하고 싶었지만 뚱한 표정에 파자마 차림으로 서 있는 레널드의 존재감이 상당히 무거웠다. 그가 한숨을 쉬고선 도넛상자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도넛을 들어올리자, 알렉스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레널드에게 건네었다. 그가 그걸 자연스럽게 마시고나서도 페터는 안절부절했다. 그는 무언가가 불편했던지 커피를 다 마시자마자 식사 잘했다고 말하고선 인사도 채우 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알렉스는 레널드에게 달라붙었다. 코와 코를 서로 맞대는 가벼운 키스를 즐기고나서야 그는 연인의 곁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늦었네?”
“응, 요즘 일이 좀 바쁘거든. 뭔 일인지는 말해줄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 증거는 잡고 있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힘드네.”
“위험한 일은 아니지?”
그 말에 알렉스는 손사레를 쳤다. 오히려 그런 태도가 더 의심스러웠지만 레널드는 못본척 넘어갔다.
“나야 뭐 자료찾고 그러는 일이지, 뭐. 왜, 내가 없으니까 심심했어? 아저씨도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까 한가로운거야? 그래도 요 며칠동안 바쁜거 아니었어?”
레널드는 그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애머릿가의 일을 마무리하고나서는 그동안 미뤄뒀던 다른 일들과 자동차에 관한 일을 처리했다. 결국 폐차처리된 차를 대신해 그나마 최신형모델을 주문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 알렉스는 같이 고르지 않았다고 꽤나 아쉬워했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을 빨리 끝내자마자 레널드는 곧바로 회사에 휴가를 신청했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그러고보니까 전화도 꺼놓고 있었잖아? 역시 무슨 일 있어? 또 누가 아저씨에게 뭐라 그랬어?”
“아직은. 조만간 그럴 것 같아서 일부러 꺼놨어.”
레널드는 알렉스의 턱밑에 코를 비볐다. 진한 체취가 코를 타고 전해져왔다. 요 며칠간 바쁜 건 이 검은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집에 붙어있을 때가 없어서, 레널드는 몇 번이나 빈 침대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연인을 품에 안고선 눈을 감았다. 한번 마음을 나눈 이래로, 어쩌면 그 전부터 그는 연인을 원해왔다. 털복숭이 팔이 자신의 등과 허리를 감고 키득거리자 안도감과 함께 뭐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흘러넘쳤다.
“보고싶었어, 아저씨.”
“...응.”
품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레널드의 입가에 무언가가 스쳤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그것이 연인의 입술이란걸 안 것은 연인의 귀가 붉다못해 검붉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레널드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스는 씻겠댜며 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레널드도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방금 전에 일어난 짧은 키스의 여운을 즐겼다.
여운이 사라질 무렵에서야 그는 테이블 위를 치우고 핸드폰을 켤 수 있었다. 액정 위에는 같은 번호로부터 십여통의 전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는데, 처음에는 정중하게 연락을 받아달라는 말부터 뒤로 갈수록 초조해졌는지 온갖 욕설과 절박함이 담겨져 있었다. 론 캐머런,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라는 데에서 오히려 더 혐오감을 느끼며 답장을 보내고는 전원을 꺼버렸다.
드라이기 돌리는 소리에 그는 다시 선잠에서 깼다. 샤워를 다 마쳤는지 실오라기 하나조차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알렉스는 자신의 털들을 말리고 있었다. 유난히 평소보다도 복슬거리는 하얀 가슴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금세 검은 고양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플러그를 뽑자마자 곧바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방금 마른 뽀송뽀송한 털을 자랑하듯 레널드를 품에 안고는 뺨을 연인의 목에 비볐다.
“샌디!”
레널드는 갑작스레 달라붙는 연인을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미 무술로 다져진 몸이었기에 알렉스는 키득거리며 연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연인의 자신과 같은 향이 섞인 체취를 마음껏 들이켜마시며 팔을 둘렀다. 그리곤 아예 간질이려고 손을 놀리려는 찰나,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황급히 레널드에게서 떨어졌다.
“....아저씨..”
알렉스는 상당히 매우 당황한 목소리로 연인을 불렀다. 귀와 코끝이 붉다못해 검붉어진 모습에 당황한건 레널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금전 고양이가 내뱉은 신음소리를 다시금 떠올리며, 꽉 붙잡았던 꼬리에서 손을 놓았다.
알렉스는 급히 등을 돌린채로 자리에 누웠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느낌에 도저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레널드가 잡았던 꼬리가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화끈거리면서도 간지러웠다. 이런 직접적인 접촉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만이어서 소감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마치 사춘기 시절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내뱉은, 열락섞인 신음소리가 매우 부끄러웠고, 그 뜻을 레널드가 알아차렸을까 두려웠다.
“샌디, 괜찮아?”
“응? 아, 맞아! 괜찮아, 근데 나 아직 꼬리도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붙잡으면 어떻게해? 하하하하.”
억지로 지어낸 웃음소리는 금방 멈추었다. 알렉스는 되도않는 짓을 한 자신을 탓하며,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컸기에, 이 소리를 연인이 들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긴장되면서도 초조했던 적은 그다지 없었건만, 레널드의 파아란 눈동자를 보자 다시 심장이 울컥거리며 급하게 피를 토해냈다.
“알렉스.”
“...어.. 응... 왜 그래, 아저씨. 괜찮아, 별로 아프지도 않았거든?”
대답이 끝나자마자 코 끝에 익숙하지만 낯선 감촉이 와닿았다. 코 끝에서 터져나오는 숨결을 느끼기도 한순간, 이윽고 그 숨결은 옆으로 파고 들어왔다. 자신의 귀를 매만지는 손길에 더욱 놀랐을 무렵 입술에 얇지만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게 레널드의 입술이란걸 깨달은 것은, 축축한 혀가 제 입술을 스치고 지나가고 나서였다. 알렉스는 놀란 눈으로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이 완고한 지옥개 연인은 성적으로는 무지하다고 생각했건만, 정작 레널드의 가느다랗게 뜬 눈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
입술이 닿을락말락, 근거리에서 둘은 말했다.
“응, 샌디.”
어깨뼈를 만지는 손길은 어딘가 서툴렀지만 충분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가죽과 털 너머로 전해오는 감촉에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만지고 싶어?”
“...당연하지.”
“그렇지만 난 아저씨가... 그러니까-”
“나도 유성애자란거 알고 있었어. 인간계에서였지만 몇 번 시험도 해봤고... 혹시 싫으면-”
“아냐아냐! 아냐, 싫은거 아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시험, 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연인과 매우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심스레 연인의 귀를 만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건만, 정작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온 몸의 힘이 풀렸다. 다시금 손가락이 날개뼈를 더듬었다. 그는 깨물어도 되냐는 허락을 받고서는 곧장 레널드의 목에 코를 묻었다. 레널드의 목 주변을 가볍게 깨물기도 하고, 정성스레 핥으면서 그는 연인의 체취를 다시 음미했다. 타액과 털과 혀가 마찰되는 젖은 소리에 연인의 손가락이 떨리는걸 느끼면서도 알렉스는 그루밍을 멈추지 않았다.
“....샌디....”
“...응.....”
이런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멍하니 잠들어있는 모습을 훔쳐봐야했던 세월들을 떠올리며 그는 몇 번이고 연인의 어깨를 가볍게 깨물었다. 턱에 힘을 줄때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붙드는 연인의 손길이 뜨거웠다. 결국 피까지 맛보고나서야 그는 레널드의 어깨에서 떨어져나올 수 있었다. 레널드는 잔뜩 인상을 쓰고선 고개를 옆으로 젖힌 모습이었다. 그의 열린 입 사이로 열기섞인 숨이 터져나왔다.
“..아저씨.”
레널드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그 사이로 에메랄드빛이 반짝였다. 알렉스는 그 눈빛을 경탄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가볍게 코를 맞대었다.
“...응.”
“좋아해. 좋아해, 아저씨.”
알렉스의 눈동자가 노랗게 반짝이는 모습에 레널드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세차게 울리는 심장박동이, 빳빳해진 꼬리가, 스믈스믈 중심으로 기어내려가는 열기가, 그리고 낮은 연인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솟은 귀가- 모든 것이 알렉스에게 사랑한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레널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에 똬리를 튼 감정들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그는 과묵한 남자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레널드는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깍지를 끼고선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는 연인의 박동에 집중했다. 알렉스의 체온은 뜨거웠다. 하지만 그는 그걸 자신이 흥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반쯤은 맞았지만- 다시 멍하니 알렉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알렉스는 정말로 소중한 보물처럼 레널드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입을 맞추었다. 감촉과 동시에 들리는 쪽쪽거리는 낯간지러운 소리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코끝이며 가만히 닫은 눈이며 살짝 처진 귀까지, 눈 앞에 보이는 연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응..”
간신히 대답을 하고선, 그는 제 위에서 손가락에 사랑을 퍼붓는 검은 고양이의 목을 끌어당겼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무어라 말하려던 목소리도 이내 작은 입에 잡아먹혀버렸다.
그러고보니, 라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레널드였다. 둘은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뜨고나서야 일어났는데, 기상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체액으로 더러워져있던 시트를 벗기는 일이었다. 둘은 새벽에 서로를 물고 핥다가 서로의 손에 수음을 한 것까지 떠올리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트를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입을 연 것은 따뜻한 물을 서로 나눠마시고나서였다. 애머릿으로부터 받았다는 선물에 대해 언급한건, 간단하게 생활복으로 갈아입고는 냉장고에 있던 도넛을 나눠먹다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레널드는 테이블 위에 제법 큰 종이가방을 내려놓고선 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정성스레 파란색 포장지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알렉스가 가위로 종이를 잘라내자 다시 보라색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에 애머릿씨가 준건데, 네가 있을 때 뜯어보라 하더라고.”
“헤에? J가?”
알렉스는 수상하단 눈으로 상자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날카롭게 보는 정도로는 상자를 열 수 없었기에, 레널드는 애써 그런 시선을 무시하고는 조심스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다시 양철로 된 케이스와 옅은 분홍빛을 띠는 유리병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유리병의 문구를 읽었다. 인간계의 말이었다.
“당신의 밤을 도와주는 러브ㅈ...”
레널드는 차마 다음 구절을 읽을 수 없었다. 대신 알렉스가 양철케이스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납작한 정사각형 모양의 비닐포장의 중간에는 원형의 무언가가 동그랗게 튀어나와있었다. 검은 고양이는 손바닥에 그걸 올려놓고는 레널드에게 물었다.
“J가?”
“...응.”
레널드는 재빨리 알렉스의 손에서 차마 입으로 꺼내기에는 살짝 부끄러운 그것을 빼앗았다. 물론 그도 이 물건이 무엇인지, 어디에 쓰이는지, 무슨 의미로 애머릿이 자신에게 선물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난감함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알렉스의 표정은 살짝 썩어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J에게 전화를 걸어선 따지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는 상자를 닫았다.
“아저씨, 그냥 성희롱으로 소송걸어서 합의금으로 인간계로 여행가는게 어때?”
“그랬다간 정말로 난리가 날거야.”
물론 알렉스의 말에는 반쯤 솔깃하긴 했지만-난감한건 사실이었으니까- 굳이 거기까지 사건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짓궂긴 하지만 애머릿의 선물에는 상당한 애정이 담겨져 있었다.
“이건... 그냥 여기 둘게. 내가 가져가봤자 쓰지도 못할테고.”
그는 상자를 다시 종이가방에 넣고선 알렉스에게 건네어주었다. 확실히 자신의 집에서 쓰기에는 눈치가 매우 많이 보이는 물건이기도 했다. 게다가 혼자서라니, 그는 혼자서 이 물건들을 쓸 방법을 상상하는것도 불편했다. 알렉스는 알았다면서 가방을 들고 침실로 사라졌다. 인간계에서 들여오느라 고생도 했겠건만, 레널드는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까지 저 물건들을 볼 수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점심식사는 간단하게 밖에서 치르기로 했다. 둘은 오랜만에 맛본 단 둘이서의 휴가에 아예 밖에서 저녁까지 먹을 계획까지 세웠다. 중간에 요즘 유행한다는 영화를 보고 돌아다니다 저녁까지 먹으면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알렉스가 사는 동네 근처의 다이너에선 연말을 기념하는 의미로 호박요리 행사를 하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스며나오는 호박의 달큰한 냄새에, 결국 검은 고양이는 지옥개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저기서 점심을 해결하자는 말을 꺼냈다.
평일이었지만 아직 점심시간이었던지라 거리에는 많은 시민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알렉스처럼 호박냄새에 이끌린 직장인들이 문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며 줄을 서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할까.”
“그래도 한번 도전해볼만 하잖아.”
둘은 번호표까지 받아들고 다른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혹은 알렉스가 끼어들어서- 순서를 기다렸다. 검은 고양이와 지옥개가 같이 서 있는 모습은 이질적이었지만, 어차피 줄을 서 있는 직장인들의 종족이 다양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펌킨까지 서 있어서 레널드는 알렉스가 펌킨을 보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의를 돌려야 했을 정도였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시민들의 표정은 다들 만족스러웠고, 몇몇은 줄에서 아는 시민을 발견하고는 꽤 괜찮았노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검은 고양이의 노오란 눈이 기대감에 반짝이는 모습에 레널드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어렸다.
“기다려.”
“여기 핫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는-히익?!”
레널드는 급히 뒤로 넘어가려던 알렉스의 팔을 붙잡았다. 덕분에 그나마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은 알렉스는 자신을 밀친 상대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상대방은 검은 고양이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레널드의 팔을 붙잡았다.
“변호사님, 이러는게 어딨습니까?”
낯선 지옥개가 레널드를 향해 소리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부터 일으켰다. 어디 다친 곳이 없느냐는 말을 내뱉고나서야,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든 지옥개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실핏줄이 잔뜩 돋아난 퀭한 눈, 뒷목과 코 부근에 하얀 반점, 며칠전 아이에게 환히 웃으며 가식적인 걱정을 보였던 지옥개. 로날드 캐머런은 절망에 가득 찬 얼굴로 레널드의 팔을 붙잡았다.
“변호사님! 전 결단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캐머런씨, 저에게 말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 누가 그레이에게 그걸 물었죠? 변호사님이 아이들한테 물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애머릿씨가 무어라 말하던가요? 아님 스콧이 그러던가요? 그런 더러운 늑대인간들이 하는 말을 믿고 있는겁니까?”
마치 레널드가 지옥개이기 때문에 정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투였다. 하지만 정작 변호사는 경멸섞인 표정으로 로날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며 무슨 일이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눈으로 상황을 보고 있던 알렉스와 눈이 마주치자, 레널드는 로날드와 더 이상은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 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났습니다. 상황이 어떤지는 캐머런씨가 잘 알겠죠. 이미 증인들도 있고 증거도 충분히 있습니다. 이만 가주세요, 당신과 할 얘기는 더 이상 없습니다.”
“같은 지옥개잖습니까?! 그 호모새끼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변호사님, 변호사님은 제 심경 아시겠죠? 그 망할 할로윈 새끼들이- 어딜 봐! 그냥 하던 일 해! 옛날같았으면 낮에는 나오지도 못했을 자식들이- 손떼, 더러운 도둑놈 새끼.”
험악한 말을 듣다못한 알렉스가 로날드의 어깨에 손을 대자, 그는 급히 그 손을 쳐내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이 손을 옷에 닦는 포즈가 익숙해보였다.
“...아저씨.”
알렉스는 황당한 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시민들 중에는 벌써 이 광경을 핸드폰을 찍고 있는 시민도 있었다. 그는 분노로 부글거리는 심정을 애써 숨긴채 입을 열었다.
“캐머런씨,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저를 매우 불쾌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저에게 매달려봤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 친구에게 모욕적인 언사도 했고요. 당장에라도 당신을 종족모욕 혐의로 고발하고 싶지만 여기서 넘어가겠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아,... 그런거야.... 그런거지? 당신 그 늑대인간 새끼랑 붙어먹은거지? 그래서 내가 애한테 좀 쌀쌀하게 대한다고 좆되게 만들어 보이려는-”
“어이, 말이 너무 심하잖아.”
알렉스가 다시 자신을 말리려들자 이번에는 알렉스와 레널드를 향해 모욕적인 언사가 쏟아나왔다. 레널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누군가가 경찰을 불렀다고 소리치자, 그제야 그는 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로날드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레널드는 미간을 누르며 분을 삭히다가 주저앉았다. 일이 골치아프게 돌아갈거라는 징조에 편두통이 일었다.
“아저씨, 괜찮아? 집으로 돌아갈까?”
그는 고개를 들어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고양이를 올려다보았다.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매스컴에 뿌려질 오늘의 영상이며 자신을 둘러쌀 구설수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가뜩이나 수상한 관계였던 검은 고양이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을 터였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내저었다.
“먹고 가자, 기대하고 있었잖아.”
“...아냐, 그냥 나중에 먹지, 뭐.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응.”
레널드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로날드가 했던 언사며 행동이며 수많은 문자메시지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법적인 조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소송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알렉스와 자신의 일이라면? 레널드는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검은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 떼지 않은 초록색 깁스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연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쓰나미처럼 앞으로 닥칠 일들이 두려웠다.
“어?”
그리고 그 일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우편함에는 언제 왔다갔는지 두꺼운 서류가 꽂혀있었고, 그 위에는 선명하게 아동국 마크가 찍혀져 있었다. 알렉산드로 토레스 귀하, 라는 글자를 본 순간,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던 광경들이 떠올랐다. 동료의 아이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던 너, 스콧에게 목마까지 태우고는 장난스런 표정을 짓던 너,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던.
“서류왔네.”
“..그러게, 이렇게 일찍 올줄은 몰랐는데. 혹시 떨어진걸까?”
“그랬다면 전화나 문자로 왔을거야. 아마 필요한 커리큘럼 때문에 보낸거겠지.”
“그런가? 아 정말이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몇 달간의 훈련과 시험을 거쳐야했다. 그러고서도 신청을 하면 허가가 나기까지 1년여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레널드는 그 1년여의 시간은 필요없을거라 억지로 확신하며 알렉스의 표정을 살폈다. 설레면서도 기쁜, 그러나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축하해.”
“어... 응.”
알렉스의 성의없는 대답에 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먼저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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