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왕의 사진 본문
사진속의 청년은 한손을 턱에 괴고는 옆으로 앉은 채 체스에 몰두하고 있다. 케이프 사이로 하얀 셔츠와 짙은 남색 바지가 드러나 있었다. 구두를 신은 채 소파에 앉은 모습은 어딘가 무방비해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것도 사진 속에 드러나는 풋풋함에 비할 바가 없었다. 지금보다는 몇백년은 젊었을, 고등학교 시절에 찍힌 사진을 검은 고양이는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주둥이가 지금보다 짧고 눈가도 더 앳된 것을 보면 분명 청소년시기의 모습이었다. 고풍스런 옷차림은 텔레비전에서나마 보았던 기숙학교의 교복임이 분명했다. 그는 얼핏 연인이 고급자제들만 다닌다는 기숙학교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저 공부와 돈과 테스토스테론의 시기였다고 사진 속의 주인공은 언젠가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자신의 고등학교시절은 정확히 돈과 공부를 뺀 모든 것이 지배하고 있었다. 컴퓨터, 전자오락, 운동, 음주, 폭력... 할로윈에서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흔했기에, 어른들보다 몇십년 젊은 청소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검은 고양이들은 목숨이 9개이기에, 다른 종족들보다도 훨씬 더 나대곤 했다.
그러니 사진 속의 레널드 헬하우스의 모습은 알렉스로서는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이 청년은 자라서 변호사가 되었고 분위기도 지금과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지만-물론 지금은 원숙해졌지만- 아마 비슷한 나이대의 자신과는 너무나도 정반대였다. 어린 레널드의 소일거리가 체스였다면 알렉스에겐 단언코 해킹이었으며, 레널드가 펜을 들었다면 자신은 분명 키보드와 마우스를 두드렸을 터였다. 게다가 교복이라니, 할로윈의 학교 중에선 미션스쿨이나 교복을 입었었다. 물론 알렉스는 아니었다.
알렉스는 그 옆에 찍힌 사진을 보았다. 비슷한 연배의 지옥개들끼리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다. 교복을 입고 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학교 친구들인 것 같았다. 다른 사진들은 어떨까. 의외로 고등학생 레널드는 생각보다는 잘 웃는 학생이었던 모양인지, 사진의 절반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알렉스는 그 사실을 흥미로워하며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체육대회, 인간계로 떠났던 수학여행, 학교 체스대회에서의 사진-물론 우승은 못한 것 같지만-, 논문발표회, 수영을 하는 모습, 공부를 하다 지쳐서 잠들었거나, 기숙사에서 몰래 벌인 간식파티-지극히도 건전하게 알콜은 보이지 않았다-, 노를 들고 보트를 모는 모습, 졸업사진, 졸업식에서 씁쓸해하는 얼굴.
여태껏 알렉스로서는 알 수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레널드의 모습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꽤나 괜찮은 학창시절을 보낸 것은 자신과 비슷했다. 알렉스는 어린 레널드 주변에 있는 여러 지옥개들의 모습을 보았다. 꽤나 자주 나오는 지옥개도 있었고 한 두번밖에 모습을 비춘 지옥개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레널드에게 팔짱을 끼었고, 누군가는 물가에서 넘어지려던 레널드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앨범 옆으로 조심스레 헬코코아잔이 놓아지는걸 보고는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보다는 나이가 더 든 지옥개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내리니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는 이걸 어떻게 찾았냐고 묻더니 곧바로 알렉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도 계속 못 찾고 있었는데.”
“책장 옆에 상자안에 있더라고. 이거 고등학교때 맞지? 역시 좋은데 다녔네, 교복도 입고.”
레널드는 사진속처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은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디자인이 너무 구닥다리라고 불평한 동기들이 많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좋아했었노라고 레널드는 말하였다. 오히려 오래된 감성이 훨씬 편했다고, 덕분에 차분한 분위기에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그는 사진속의 친구들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듯, 사진 속 배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때 사진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어. 제롬이라고 나중에 스튜디오를 차렸는데... 그래서 우리는 선배들보다는 사진은 많았어.”
사진들을 둘러보다 시선이 멈춘 곳은 알렉스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바로 그 사진이었다. 피사체는 자신이 찍히는지 모르고 체스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레널드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여기선 체스를 많이 두나봐.”
“그다지 할 게 없었으니까. 운동을 하거나 체스를 두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정도였어. 상당히 엄격했으니까. 전자기계들도 압수당했거든.”
“으엑, 완전 최악이잖아.”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어.”
레널드는 눈을 내리깔았다. 엄격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젊음이란 이름 덕에 간신히 버틴 나날이었다. 알렉스는 그런 연인을 바라보며 다시 사진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 젊은 지옥개가 자라 자신의 옆에 있다는게 기분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보니 아저씨가 체스두는건 본 적이 없네. 잘해?”
“그냥 평균보다는 잘하는 편이야.”
“헤에... 으음.... 아저씨네 집에 체스판이 있었던가...”
알렉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거실에 그런 것이 있을리는 없었다. 결국 레널드가 자처해서 갖고 오겠노라고 말하고나서야 드레스룸에 쳐들어가려는 움직임을 말릴 수 있었다. 알렉스는 서재로 들어가는 연인의 뒤통수에다 다시 소리쳤다.
“아, 그리고 망토는?!”
몇 십년전 유행이라고 사놓았던 케이프코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널드는 검은 고양이의 속샘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있어!”
10여분을 헤매고나서야 레널드는 졸업선물로 받았던 체스판을 찾아냈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체스판 옆면에는 그가 다녔던 학교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져있었다. 그는 이 체스판을 받았을 때를 떠올리며 서재에서 나왔을 때, 연인은 이미 테이블을 깔끔하게 치운 뒤였다. 평소 집도 저렇게 했으면 좋겠네, 그는 연인의 눈동자가 노란빛으로 반짝이는 걸 보며 테이블 위에 체스판을 올려놓았다.
“게임은 뭔가 걸어야지. 응, 아저씨, 뭐든지 걸래?”
“이길 자신은 있고?”
“이래봐도 할로윈에서 날 이길 검은 고양이는 없었어.”
그 말에 얕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도 검은 고양이가 체스를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방금 터져나온 말이 단순히 허풍인지 아니면 사실인지는 게임을 시작하기까지는 모를 것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레널드도 알렉스의 내기에 응했다.
“좋아. 넌 뭘 걸거야?”
레널드는 체스말들을 꺼내 판 위에 올려놓았다. 확실히 고급품이어서 그런가, 백여년 넘게 지났음에도 말들이며 판이며 다 멀쩡했다. 알렉스는 덩달아 자기쪽 말들을 올리며 답하였다.
“다음번 데이트 때 케이프코트 입고 와줘.”
“집에 있는 건 교복과 디자인이 조금 다른데 괜찮겠어?”
“그야 당연하지.”
그럼 그렇지, 레널드는 말들을 다 올려놓고 이제는 알렉스의 차례를 기다렸다. 알렉스는 마지막으로 킹을 올려놓고선 연인에게 말했다.
“아저씬? 뭘 걸거야?”
그가 현재 연인인 이 검은 고양이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였다.
“내가 이기면 너희 집 청소해.”
“으음!! 정말, 우리 집 나름 정리정돈은 되어있다고!”
알렉스의 투덜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레널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알았다, 안된다 라는 대답대신에 자기쪽의 폰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알렉스도 입을 삐죽 내밀고 팔짱을 낀 채로 게임에 응했다. 레널드는 청소도구를 든 검은 고양이를 상상하며 폰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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