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어슴푸레 짙은 上 본문
어린 펌킨은 뒷걸음질치다 결국 쓰레기통을 엎었다. 그 안에선 온갖 패스트푸드 종이봉투가 쏟아져 나왔는데, 제대로 분리하지 않았는지 음식물이 썩는 시큼하면서도 불쾌한 냄새가 같이 일었다. 아이는 커다란 지옥개를 보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안절부절해가며 쓰레기통을 간신히 치우는 와중에 지옥개는 그 아이를 향해 앉고선 눈을 마주쳤다.
지옥개의 눈동자는 마치 하늘을 보는 것처럼 파랬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아이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린 지옥개는 자신의 눈동자 색과 똑같이 파란 막대사탕을 건네었다.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아버지의 날선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아이는 급히 감사인사를 건네고는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쓰레기를 다 치웠는지 늙은 펌킨은 하수구냄새가 올라오는 낡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선 역시나 낡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혹시 인스턴트 커피라도 드십니까?”
“딱히 가리는 건 없습니다. 오히려 커피를 대접받는 것도 다행이죠.”
깡통들과 식재료-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가 널부러져 있는 식탁 위에 서류더미가 펼쳐졌다. 그는 인조로 견과류의 향을 입힌 커피를 마시며 이번 소송에서 준비해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지적해나갔다.
그와 마주보고 앉아있는 펌킨은 아들의 입원을 위해 딱 한번 결근한 것 때문에 해고당했다. 사측은 무단결근을 했으며 그 전부터 업무태도가 불량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보기에도 이 펌킨이 해고당한 이유는 그가 노조에서 꽤나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있었던 파업에서도 그는 노조측에서 목소리를 높였기에 제법 사측에서 미운 털이란 미운 털은 모조리 박힌 셈이었다. 그렇게 억욱할게 해고되어 망연자실해있던 그에게 동료가 건넨 것은 꽤나 유명한 변호사의 명함이었다.
“변호사님 덕에 간신히 한숨은 돌리게 되었죠. 아이 병원비도 생각보다 많이 나왔거든요.”
명함에는 놀랍게도 레널드 헬하우스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이 둠스데이 시티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헬하우스가의 삼남이자 유명한 민권 변호사, 그리고 헬하우스 변호사 사무소의 유일한 변호사이자 소장인 이 지옥개는 노무사에게서 받아낸 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맛없는 싸구려 커피로 이런 일까지 대행해주는 레널드에게 펌킨은 한없는 감동을 느꼈다.
“괜찮으시면 저녁도 같이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펌킨은 그나마 나아진 냉장고 사정-며칠 전 친척이 식재료를 나누어주었다-을 생각해 변호사님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하였다. 그는 나름 동료들 중에선 요리를 잘 하는 편이었기에, 조촐하게나마 식사대접까지 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친절한 변호사는 저녁약속이 있노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생각만 고맙게 받겠다고 말하며 다시 서류들을 찬찬히 검토했다.
의뢰인과의 면담을 마치고 차에 돌아가는 길에 그의 눈에 할렘가에서는 낯익은 풍경이 들어왔다. 어린 검은 고양이 여럿이 모여 공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다들 즐겁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공을 차고 있었다. 공은 이곳저곳 굴러다니다 결국 그의 발 끝까지 당도하고 말았는데, 갑작스런 지옥개의 등장에 아이들은 저마다 몸을 움츠렸다. 그나마 그 중에선 큰, 얼룩무늬 아이가 조심스레 그에게 말했다.
“저기... 아저씨, 죄송하지만 공 좀 주시겠어요?”
아이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떨려있었다. 레널드는 안심하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짓고는 아이들을 향해 약하게 공을 찼다. 공을 되찾자마자 언제 그렇게나 긴장하고 무서워했냐는 양, 아이들은 다시 공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런 호칭으로 불린 것은 거의 5년 만이었다. 그 때는 방금 전에 말했던 고양이보다는 훨씬 더 어린 검은 고양이가 말했었다. 조카였었던가. 귀의 안쪽은 붉었고 검은 얼굴에 코와 입 주변을 커다란 하얀 물방울이 감싸고 있었다. 익숙하다못해 사랑까지 했었던 얼굴이었지만, 정작 그 얼굴의 주인은 자신이 사랑했던 이보다는 훨씬 어렸었다. 그는 똑같은 얼굴의 부자를 보며 놀랐고, 아이의 아버지가 내뱉는 목소리가 사랑한 이와 똑같다는 사실에 울컥하기도 했었다. 만남은 거의 10여분 정도로 짧게 끝났고, 그 뒤로는 둘의 소식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남에게서 아저씨, 라는 다소 무례한 표현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는 간신히 발을 떼며 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약속이 있다는 말은 단지 식사를 거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민권 변호사로 활약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호의는 칼날같이 끊어냈다. 그래서 의뢰인들은 사건이 끝나고나서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뚝뚝하다는 인상을 받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지옥개라 저급한 할로윈 주민들과 어울리기 싫어한다, 라는 오해까지 살 정도였지만 본인은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해명하진 않았다. 다행히도 그런 오해는 쉽게 풀리곤 했는데, 어린 아이에게만큼은 상낭히 대하였고 비단 할로윈 출신 주민들뿐만 아니라 같은 지옥개에도 나름 냉담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에게도 유일하게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비슷한 시민은 있었다. 그는 그 시민에게만은 굳어있던 얼굴을 풀곤 했는데, 그건 전화를 받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차에 올라타서는 핸즈프리로 전환했다. 시동을 켜고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며, 혹여나 그가 같이 밥을 먹자고 하지는 않을까 우려반 기대반을 하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오랜만이야, 페터. 무슨 일이야?”
그는 페터의 목소리가 어서 튀어나오기를 기대했다. 이 늑대인간의 목소리는 그에게 연인의 활달했던 대화를 상기시키곤 했었다. 하지만 페터의 목소리는 축 가라앉아 있었다.
-“.....레니, 찾은 것 같아.”
그 말에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는 기어를 바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번에 테러혐의로 본거지를 습격한 단체가 있어. 지금은 전부 다 구속되어서 귀소에 있고 자료들은 우리쪽에서 분석하고 있었는데.... ‘그’ 사건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었어. 아직 확실한 건 아냐. 하지만 실마리정도는 보이는 것 같아.”
이제야.
클락션 소리가 골목에 크게 울려퍼진다. 갑작스런 소음에 몇몇 시민들이 밖으로 나와 상황을 확인하고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문을 닫을때까지, 레널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클락션소리를 내며 이마를 부딪히다 간신히 숨을 골랐다. 무슨 일이냐는 페터의 다급한 질문에도 답을 하지 못한 채, 그의 잇새에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이제야.
그는 핸들을 꽉 붙잡고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에 그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상황을 눈치챘는지, 전화 너머의 상대방도 차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왜 이제야.
시체안치실에는 기묘한 냄새가 풍겨왔다. 비릿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러나 망자를 위해 향수라도 뿌려놓았는지 포근한 냄새도 풍겼다. 공기는 냉동고에서 불어오는 냉기에 차가웠지만 바람은 일지 않았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마주보고 앉아있는 두 시민 사이에서 가라앉는다.
검은 고양이의 얼굴 반쪽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동공은 크게 확장되어 있었고 그렇게나 자랑하던 하얀 털도 윤기를 잃었다. 그는 검은 고양이를 향해 말했다.
“널 죽인 시민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꿈속에서 알렉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날은 오랜만에 수면제를 먹어야 했다. 그는 간신히 집에 도착하고나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페터는 아직 분석 중이라 자세한 것은 알려줄 수 없다고 했었지만, 레널드로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희열은 그의 몸을 부추겨 상자를 꺼내 유품을 쓰다듬게 했다. 한번 불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그는 새벽 2시까지 연인과의 추억을 더듬거리다 약을 먹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난 10년 동안 단 한번도 꿈속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연인이 꿈에 나타났다. 꿈속에서의 알렉스는 머리 반쪽이 날아간, 처음으로 자신 때문에 죽었던 때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샌디, 이제야 나타났구나.”
다시 알렉스의 모습을 보니 심장 부근의 피부에 구멍이 나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 구멍 사이로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춰보였다. 저 상처는 마지막으로 죽기 직전에 난 것이었다. 과거와 그보다도 더 먼 과거, 자신 때문에 죽었던 모습들이 알렉스의 몸에 혼재했다.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행여나 무너진 피부가 더 무너질까, 차갑게 식어버린 몸을 껴안았다. 시취가 풍겨나왔지만 그것마저도 연인의 체취라고 생각하자 사랑스러워졌다. 그는 더욱 더 연인을 깊게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너의 목숨 7개를 내가 가져가버렸어. 고양이의 몸은 차갑고 딱딱했다. 털은 짐승의 털처럼 빳빳하고 거칠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고양이의 몸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등에 난 구멍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 구멍으로 한번, 검은 고양이는 목숨을 잃었다. 그를 구하려다 난 상처였다.
총알은 정확히 고양이의 등과 심장을 꿰둟고선 그의 팔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검은 고양이의 몸이 무너졌던 그 때를, 갑작스레 몸에 실리던 무게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고양이는 연인의 머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총알은 다시금 고양이의 머리를 꿰뚫었다. 두 몸은 빠르게 무너져내렸고, 그 다음엔-
“일어나!!!!”
레널드 헬하우스는 알렉스의 몸을 껴안고 바닥에 쓰러졌을 때를 떠올리며 잠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소음에 그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과연 지금이 꿈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굉음을 내며 이불을 들춰내고 있는 저 검은 고양이는 분명 꿈속에선 시체의 모습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아저씨! 지금이 몇시인줄이나 알아? 회사에 안 늦겠어?”
그는 반사적으로 협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수면제를 먹고 잤던 여파인지 벌써 시침은 9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재빨리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니었는데, 어차피 지각을 해봤자 그를 타박할 시민은 사무직원 한명 뿐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알렉스로 보이는 검은 고양이는 10년 전의 모습을 한 채로 레널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저씨, 어서 회사-”
레널드는 곧바로 검은 고양이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10년 전에 자신의 품에서 스러졌을 연인이 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윤기넘치는 검은 털, 장난스러운 표정, 물방울 속에서 웃는 얼굴, 천천히 흔들리는 길다랗고 검은 꼬리, 살아 움직이는 너. 그는 살아 움직이는 연인을 보고는 엄청나게 기뻐하며 품에 안으려다 멈추었다. 그는 연인과 똑같이 생긴 검은 고양이를 알고 있었다.
“....토레스씨? 혹시 나에게 무슨 장난이라도-”
“토레스씨라니 낯간지럽게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도 알렉스라고 불렀으면서!”
그러고보니 꼬리 끝이 마치 잘린 것처럼 평평한 모습이나 얼굴에 기본적으로 어린 표정이 5년 전에 만났던 연인의 동생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걸 알아채자마자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검은 고양이의 주변을 살피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확인하고 거울을 갖다대기도 했다. 검은 고양이는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따졌지만 레널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양, 하얗게 질린 채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직원에게 당장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도대체 왜 그래?”
“네, 안녕하세요, 뮐러 선생님. 네, 레널드 헬하우스입니다. 네, 아니요 선생님..”
그는 괜찮냐고 묻는 알렉스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다시 알렉스의 환영이.... 네, 10년 전과 마찬가지입니다. 네... 저도 지금 너무 충격이라.... 오늘 찾아가 뵐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알렉스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환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환영이라니!”
하지만 그는 애써 검은 고양이가 내지르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네... 제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선생님은 역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시는군요. 네.”
환영이 다시 어깨를 붙잡자 그는 소스라치듯이 놀랐다. 그리고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네, 압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 그럼 오후에, 네 오후에 찾아뵙죠.”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황망해하는 노란 눈동자가 그의 눈에 비추었다. 검은 고양이는 환영, 이라는 말에 질렸는지 아무 말도 내놓지 못했다. 그는 그런 표정을 보는게 꽤나 큰 상처였지만 이내 다시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아저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꽤나 크게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사실은 제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일 뿐이었다.
“아저씨! 내가 환상이라고 생각하는거야? 난 알렉산드로 토레스야. 환상이 아니라고!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10년 전이라니! 그 때도 내가 환영으로 보였다는거야? 아저씨, 도대체 무슨 일이-”
제 어깨를 붙잡는 느낌이 너무나도 실감났기에 그는 더욱 입을 굳게 다물었다. 10년전 카운슬러인 암말이 해준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환영은 환영이라 인식하면 더더욱 당신을 따라잡을 겁니다. 그냥 무시하세요,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는 벌레라고 인식하세요. 그건 당신의 상상력을 먹고 자라납니다. 물론 애석하게도 그런 조언은 당시의 그에게 듣진 않았다.
10년 전, 그러니 연인이 죽고 몇 달이 지났을까, 갑작스레 자신의 앞에 나타난 환영에 레널드는 회사를 쉬어야 했다. 그 때도 알렉스의 환영은 계속해서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장난을 걸곤 했었는데, 몇 번 그에 대답하니 레널드 헬하우스가 미쳤다는 소문이 회사에 퍼진 것이다.
“진정하자, 레널드 헬하우스. 진정하자.”
그는 협탁에서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애석하게도 안정제를 먹고나서도 환영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전에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는 뮐러의 조언에 따라 환영을 무시했지만 그 때마다 환영은 계속해서 그에게 장난을 걸며 사랑한다고 속삭였었다. 그가 환영에서 벗어난 건, 변호사를 때려치우고 정신병원에 갈 각오까지 하고 알렉스의 묘를 파고나서였다. 흙이 몸에 묻는건 신경쓰지도 않고서 미친 듯 묘를 파헤치고선, 아직 썩지 않은 관을 꺼내 부패해가는 연인의 몸을 목도했을 때에서야, 환영은 언제 나타났다는 양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그런 방법이 상당히 폭력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시신을 훼손했다고 체포되었지만 페터와 아버지 덕에 풀려났다. 그는 알렉스가 제 품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고나서야 연인이 죽었단 것을,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런데 왜 지금와서, 왜 다시 뇌를 말썽을 일으킨단 말인가.
이제와서 다시 묘를 파서 시신을 확인해봤자 남은 것은 뼈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봐달라는 환청을 무시하고, 거울 너머로 보이는 상처받은 표정까지 무시한 채로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 환영은 욕실에까지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대신 문 너머로 계속해서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노즐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로 환청들을 다 걷어냈다. 그리고나서야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반추할 수 있었다.
분명 어제 페터의 전화가 계기일 것이다. 그리고 꿈속에서 알렉스-비록 시신의 모습이었지만-의 모습을 보고 반겼던 것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것이든 범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다시 환영을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욕실에서 거실로 나오자 환영이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10년 전과 똑같은 자세로, 소파 위에 모로 누워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켜졌는지 화면에선 페터가 어제 전화로 말했던 테러단체의 본거지가 드러났다고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여태껏 일으켰던 테러에 대한 영상들이 쏟아졌는데, 그나마 아직 의혹 수준에서 멈추었기 때문이었는지 10년 전에 있었던 피습사건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언급이라도 되었다면 매스컴이 들고일어났겠지. 다행히 그에게는 사무직원과 의뢰인 말고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레널드는 텔레비전을 끄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자신의 노트북이 열린 채로 있었는데, 그 위로 10년 전에 일어났던 피습사건에 대한 기사가 떠 있었다.
“왜 아저씨가 날 환영으로 보는지 알겠어. 그 뒤로 그런 환영을 봤다며?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환각도 있었던가? 왜 죽은 시민이 돌아오는 이야기도 많잖아. 내가 다시 살아났다고 보면 안돼? 예전에 한번 덜 죽어서 그런거라고 생각하고.”
기사 제목은 하나같이 자극적이었다. 그는 그 사건을 통해 아웃팅 당하듯 커밍아웃을 했다. 매스컴을 그런 그를 뜯어먹으려 달라붙었다. 그것들을 막아준 건 헬하우스라는 가문의 영광 덕분이었다.
환영이 리모컨을 만지자 채널이 바뀌어 아침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레널드는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침실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환영의 귀가 잔뜩 내려간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괴로웠지만 그는 카운슬러로부터 받은 충고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의뢰인을 생각하고서라도 이제 와서 미쳤다는 소문을 다시 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환영이 제 넥타이를 붙잡았을 때도 그는 제 뇌가 맛이 갔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이해시켰다. 그건 집을 나설 때에도, 차에 올라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환영이 제 손목을 붙잡는 그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내비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감촉이, 올록볼록한 손바닥이 손목을 꽉 잡았을 때엔 시선을 그쪽을 향해 돌려버릴뻔도 했었다. 손바닥은 축축했지만 동시에 뜨겁다고 느낄 정도로 따뜻했다. 아주 오래전,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때가 떠올랐기에 그는 더더욱 재빠르게 뛰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아저씨.”
그 때엔 곧바로 손을 떼어버렸지만 어색한 기분을 차마 숨기지는 못했었다. 그 서로가 어색했던 시기는 제 뒤에서 종알거리는 환청에 의해 더욱 더 머릿속에 떠올랐다. 간신히 서로의 손에 깍지를 끼고는 수줍게 웃던 때를 떠오르며 계단을 올랐다. 환영의 꼬리가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이 난간에 반사되어 보였다. 환영은 레널드가 다시 사무소를 차렸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말을 끊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레널드는 할렘가 근처의 낡은 상가건물 2층에 올라가면서도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왜 회사를 나온거야? 아저씬 ‘그걸’ 이루기 전까진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잖아?”
문이 열리고, 꽤나 훈훈한 공기가 흘러나오자 환영의 말도 멈추었다. 마치 둘이 만난지 얼마 안되었던 그 때로 돌아가듯, 그는 매일 보았던 풍경에 미시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셨어요, 변호사님? 오늘은 늦으셨네요.”
파란 악마가 일어나서 그를 반겼다.
“미안해요, 짐. 그만 늦잠을 다 자버렸군요.”
짐은 10년 동안이나 레널드의 수발을 들고 있는 사무소의 직원이었다. 레널드는 알렉스의 묘를 파헤치고나서 곧바로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알렉스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듯, 아니면 회사에서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듯 다시 사무소를 열었다.
“변호사님 평소에 무리하시니까 어쩔 수 없죠. 조금 더 자고 오셔도 되었을텐데요.”
다행히도 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환영은 계속해서 파란 악마의 주변을 맴돌며 시끄럽게 소리치고 무어라 말하였지만,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서 일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충격을 받은건 검은 고양이 모양을 한 환영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나 행동이 짐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아저씨, 이 악마는 진짜 악마인거지? 망할... 이렇게 나오겠다는거야...”
그는 짐의 책상을 거칠게 손으로 뒤집었다. 그러나 이 착한 악마는 오히려 바람이 다 분다면서 창문을 닫을 뿐이었다. 물론 창 밖에선 바람의 기미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예 몸을 잡고 흔들어대니 이번에는 몸이 안좋은가, 하고 현기증을 호소했다.
“....이건...”
레널드는 환영에게서 눈을 돌렸다. 환영은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듯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레널드는 의뢰인을 만나겠노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놀랍게도 환영은 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그걸 더욱 더 꺼림칙하게 느끼며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어제 만났던 의뢰인과 상담을 하고 돌아오자 보인 것은 평소처럼 태연히 일을 하고 있는 짐과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책상을 골몰히 바라보고 있던 환영이었다. 알렉스의 모습을 한 환영은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책상 위에 있던 액자에 시선을 집중하다가, 레널드가 다가가서야 고개를 돌렸다.
“왔어? 왠일이래, 책상위에 사진을 다 놓고. 게다가 달력에도 내 생일까지 표시해놓고. 아저씨 원래 이런거 좋아하지 않았잖아.”
귀는 반쯤 쳐져있다. 그가 더욱 더 다가가자 그제야 환영은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쪽 상황은 어떻던가요, 변호사님.”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만 노력은 해봐야죠.”
책상 위에는 액자가 여러개 놓여져 있었다. 가족사진, 조카와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알렉스와 함께 찍은 사진과 그의 독사진. 10년 전이었다면 그의 사진을 직장에 두는 일은 상당도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알렉스가 죽어버린 이상, 그 사진은 죽은 연인의 사진이라는 의미를 넘어 레널드 헬하우스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채찍질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알렉스의 사진을 보며, 끊임없이 속죄하는 심경으로 일을 맡았다.
그걸 알고나 있는지 환영은 액자를 몇 번 만지다가 급기야 레널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짐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는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다가가길 선택한 것만 같았다. 레널드의 정수리에 검은 고양이의 턱이 올라간다. 그는 레널드가 열심히 일하는걸 보면서도 계속해서 조잘조잘 입을 놀렸다.
“헤에, 이번에는 누가 잘려서 그런거구나. 하긴, 아저씨는 그런 일은 많이 맡았었지. 저 사진 언제인지 방금 기억났어. 우리 처음으로 여행갔을 때의 사진이지? 나 혼자 있는건 내가 운전면허증 갱신한다고 새로 찍었을때고. 언제 그것도 다 챙겨놓았었어?”
정수리 위로 턱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환영이 말하는 하나하나가 이 순간을 환상에서 현실로 끌어내린다. 손가락이 옷자락을 만지는 느낌에 와서는 그도 잠시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짐의 의문 섞인 목소리에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위에 올려있던 환영의 머리도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괜찮으신가요? 갑자기 멍해지셔선....”
“어제 너무 늦게 자서 그런가봅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미안하지만 점심은 혼자서 드셔야겠습니다. 저는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봐야겠군요. 곧바로 퇴근할테니 짐도 일이 끝난다면 퇴근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정말로 내가 환영이라 생각하는가봐? 그치만 환영은 이렇게 모니터를 끌 수는 없을 거야.”
그는 모니터가 깜빡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검은 고양이가 스위치를 눌러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계이상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면서도 목에 스치는 알렉스의 팔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이런 스킨쉽은 그가 죽고나서 거의 10년만이었다. 그리웠던 체취가 아주 얕게 뒤에서 풍겨 나온다.
“그러다 제가 땡땡이치면 어떻게 하려고요? 에이, 농담입니다. 요즘 계속 무리하셨잖아요, 오히려 쉬라고 권유하고 싶은걸요.”
환영은 제 뺨을 레널드의 머리에 비볐다. 털과 털이 마찰되는 느낌에 그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아저씨가 생각하는 최악이었어? 이렇게나 마르고 늙은 지옥개가 되어서?”
그는 마르고 늙었다는 구절을 무시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워낙 요즘에 일이 많았으니까요.”
“....아저씨.”
매우 울적한 환청이었다. 그는 하마터면 고개를 돌려 환영에게 말할 뻔 했다. 왜 그렇게 있냐고, 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냐고 물을 뻔 했지만, 그를 가까스로 붙잡은 것은 제 눈앞에 있던 액자였다. 그의 시선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알렉스에게로 향해있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입지도 않을 정장을 입고는-넥타이는 자신이 매어줬지만- 어울리지도 않게 털까지 정돈하고선 천하의 그답지 않게 긴장까지 해가며 사진을 찍었었다. 그 어색한 미소, 알렉스는 마지막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괜찮다고 속삭였었다. 아마 그 때 저런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그럼 전 이만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점심은 가는 길에 먹도록 하죠.”
“그러세요. 전 여유롭게 땡땡이나 치면서 일하겠습니다.”
레널드는 자그맣게 미소를 지으면서도 시선을 액자에 떼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뒤에서 그를 안고 있던 환영도 자리를 비키고는 뒤를 따랐다.
'기타 > DOOMSDAY CI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13 (0) | 2017.08.18 |
---|---|
알렉스레니 _ 어슴푸레 짙은 下 (0) | 2017.08.01 |
알렉스레니 _ 검은 냄새 (0) | 2017.06.22 |
알렉스레니 _ 징크스 (0) | 2017.06.20 |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12 (0) | 2017.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