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13 본문

기타/DOOMSDAY CITY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13

rabbitvaseline 2017. 8. 18. 16:31



동생이 전화로 도움을 요청한건 이제 막 휴가가 끝나 출근을 하려던 참이었다. 레널드는 커프스단추를 매다말고 동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꽤나 이른 시간이라 놀라면서도 차분하게 동생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 아드님은 할아버지가 궁금하다고는 하는데...”

그럼 된거 아니겠니?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조카는 호기심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그 호기심은 자신의 가족관계로 옮겨갔을 것이다. 텔레비전으로나마 보았던 삼촌들과 할아버지는 더더욱 궁금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정식으로 호칭을 부를 수는 없었지만.

레널드는 아버지에게 스케쥴을 물어보겠노라고 말했다. 그가 알고 있는 대강의 일정을 따지자면 아마도 생일 전후에 약속이 잡힐 것이었다. 레오는 알겠다고, 다시 연락달라고 말하고서는 전화를 끊으려했다. 순간 레널드의 눈에 끼우려다만 단추가 눈에 보였다.

맞아, 혹시 오늘 시간 있니? 아니, 너 말고 그 아이 말이야.”

만약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아이가 가봤을 것보다는 훨씬 더 고급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 레오와 사이즈가 비슷해 레오의 옷을 빌려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특별한 날만큼은 아이에게 맞는 정장이 필요할 것이었다. 레널드는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심경으로 아이의 스케쥴을 물었다. 딱히 큰 일이 없다는 말에 그는 조카에게 백화점에서 보자는 말을 전해달라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커프스단추를 다시 맨 다음에서야 집안의 단골 테일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헬하우스 산하의 백화점은 지은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신축건물이었다. 둠스데이 시티 도심 중앙에 위치해서 나름 랜드마크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언제나 수많은 시민들이 그곳에 드나들곤 하였다. 그런 백화점 정문에 시끄럽게 수다를 떨며 서 있는 무리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레널드가 보기에도 제법 눈에 띄었다.

완벽하게 검은 지옥개와 이질적으로 온 몸이 하얀 지옥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검은 악마와 그들의 무릎을 간신히 넘는 하얀 돼지 한명. 분명 자신은 조카만 불렀음에도 어째서 숙직하는 직원까지 모였느냐고 레널드는 황당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레오는 애써 시선을 무시하고선 입을 열었다.

백화점에 간다니까 가브리엘씨가 궁금하대서 말이야! 나도 온지 오래되었고, 크리스씨만 따로 떼어놓기도 뭐해서 그냥 다 같이 왔어.”

난 네 아들만 부른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형은 아드님만 데리고 돌아다녀. 우리는 따로 돌아다닐테니까.”

레널드는 두통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레오의 옆에 서 있던 직원들을 향해 인사하고는 다시 레오를 쏘아보았다.

저녁은?”

? 우리야 아직 안먹었지.”

그럴줄 알았어, 레널드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백화점 최상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고선 예약인원을 5명으로 고쳐 불렀다. 위의 레스토랑은 드레스코드도 따지는 곳이었지만, 분명 오너의 아들이 요청하는거니 한번쯤은 넘어가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아이의 영롱한 에메랄드빛 눈은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더욱 더 빛을 발했다. 아이는 쌓여져있는 원단의 산과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최신 패션에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마치 헬하우스가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처럼-실제로도 그랬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는 어떤 위압감도 느끼지 않았다. 레널드는 그걸 다행으로 여기며 재단사에게 인사했다. 300여년 동안 이곳에서 일한 중년 재단사는 처음에는 하얀 지옥개를 보고 놀랐지만, 이내 재빠르게 평정을 찾고는 평소처럼 아이를 대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지?”

... 옷가게에서 산 적은 있었지만요. 평소엔 애덤아저씨가 도와주세요.”

아이는 회색 재킷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분명 레오의 사복패션과는 거리가 먼 옷차림이었는데, 다행히도 애덤이 많이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삼촌은 그것도 다행이라 여기며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카탈로그가 펼쳐져 있었는데, 특별히 지옥개 전용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두 모델이 지옥개였다. 물론 그 중에서 아이만큼 하얀 지옥개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이는 카탈로그를 보면서도 눈을 반짝였다. 레널드는 첫 생일선물이니만큼 디자인만은 아이가 고르게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디자인을 골라서 그나마 패션감각은 물려받지 않았다고 안심했다. 대충 디자인과 소재, 색상까지 정해지고나서야 레널드는 재단사와 세부사항에 대해 협의할 수 있었는데, 그 사이 아이는 다시 마네킹에 시선을 돌리고선 체크무늬 셔츠와 스트라이프 셔츠 중 어느 것이 나은지 고민하였다. 협의가 끝나자 아이도 그래도 스트라이프가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재단사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사라졌다.

아이는 생각보다는 매우 의연하게 재단사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재단사는 이 하얀 지옥개가 몸은 어른이지만 속은 어린 아이임을 알아챘는지 레널드와 아이에게 잘 버텼다고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아이의 입꼬리가 수줍게 올라가자 그와 덩달아 레널드의 입술도 아주 살짝 호선을 그렸다. 둘이 가게에서 나온 건 두시간여가 지나고나서였다. 아이의 손에는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는데 방금 전 마음에 들었던 스트라이프 셔츠가 담겨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생일축하해. 일주일후에 완성품을 볼 수 있을거야.”

.”

둘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래서 레널드는 편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는 제일 아래층의 버튼을 누르자마자 조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면서.”

아이는 놀랐다가 다시 몸을 고정시켰다.

.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좋은 시민은 아니야. 그래서 레오도 많이 걱정했었고.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알고는 있니?”

아이는 뜸을 들이다 간신히 대답했다.

“...저에겐 아버지의 기억이 조금은 남아있습니다. 그 기억속에서 할아버지는 유순해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강건하고 고집 센 시민이었죠.... 하지만 그건 제 아버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니까요. 전 직접 할아버지를 뵙고 싶습니다. 그래서 왜 절 태어나게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검은 지옥개를 원하셨어.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레오가 태어났고, 결국 네가 태어났어...”

레널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의 표정은 점점 울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 태어난지 1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말할게. 나와 레오는 네 존재가 아버지에게 드러나길 바라지 않아. 이런 말을 해서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너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하얗고 아버지, 그러니까 너의 할아버지가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어. 그래서 레오와 난, 행여나 아버지가 너에게 무슨 위해라도 가하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 그게 아니더라도 네가 손자란걸 알게 되면 분명 너에겐 상처입을 행동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미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알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건 이미 제가 당신의 손자란것도 알고 있단 뜻이 아닙니까?”

“....그건 몰라. 아버지는 그저 너에 대해 알고있을 뿐, 네가 어떤존재인지는 내색하지 않으셨어.... 이런 상황에서는 대놓고 널 손자라고 소개할 수는 없어.”

아이의 눈이 커다랗게 뜨인다. 아이는 심히 당황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를 뭐라고 소개해야하죠? 전 이름도 아직 없는데, 아버지의 아들이란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해야하는겁니까?”

순간 레널드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것만 같았고, 덕분에 순식간에 엘리베이터속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무엇이라도 말하려고 입을 뗐다. 하지만 동시에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둘 사이의 냉랭한 공기를 그나마 조금은 덥혀주었다.

 

 

 

▒ ▒ ▒

 

 

 

쟝 버건디가 운영하는 금은방에는 언제나 수많은 시민들이 넘나들었다. 기념선물이든 아니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든, 혹은 제테크의 의미로 시민들은 그의 가게에서 수많은 보석과 귀금속을 사곤 했다. 혹은 시계가 고장나서 오는 시민들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쟝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시계를 수리해주곤 했다. 그는 이웃과도 상당히 잘 지내는 편이며, 자식은 아직 없지만 옆집의 꼬마 스켈레톤을 돌봐주는 자상함은 가지고 있었다. 일주일에 이틀을 쉬며, 쉬는 시간에는 독서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고상한 악마이기도 했다. 특히 주말에는 교회에 나가 자신의 바이올린 솜씨를 뽐내며 루시퍼에 대한 신앙을 공고히 했는데, 그렇다고 광신도인 것도 아니라서 교회에 오는 모든 종족들에게 친절히 대하곤 하였다. 이름답게 살짝 푸른색이 얽힌 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이 4안마의 가게에 오늘에서야 수줍음을 잘 타는 파란 악마가 아르바이트로 첫 출근을 했다.

앨릭군, 잠시 이것 좀 도와줄래요?”

“....”

앨릭이라 불린 악마는 어두운 골방에서 접안렌즈를 끼고 시계를 수리하고 있는 쟝에게 달려갔다. 재빠르게 공구상자를 꺼내어주자 쟝은 고맙다고 칭찬하며 덕분에 일이 편해지겠다고 환히 웃었다. 그는 최근에 밖에서 다닐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게 되었노라고 면접을 보던 앨릭에게 말했다. 그는 푸른 3안마가 꽤나 괜찮아보였기에 그 자리에서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앨릭은 반지를 보러 온 손님을 맞으러 곧 골방에서 자리를 떠났다. 쟝의 손이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1시간 후에 그는 밖에 나가 잠시 은행에 가야한다고 말했다. 손님은 파란 털을 가진 늑대인간이었는데 그는 단체주문 용지를 보고 있었다.

경찰학교 동기들끼리 반지를 맞추기로 했는데..”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기 카탈로그가 있어요. 이쪽으로 와보실래요?”

앨릭은 일부러 골방에서도 보이지 않는, 그리고 늑대인간이 등으로 CCTV를 가릴 수 있는 위치로 그를 인도했다. 그는 요즘 잘 나가는 디자인이라면서 어느 한페이지를 펼쳐놓고서는 디자인이며 가격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아주 재빠르게 움직였다.

-1시간 뒤에 외출 예정임. 발신기와 GPS는 웃옷 주머니안에 넣었음.-

이 디자인 괜찮겠네요. 다만 가격이 너무 비싼게 아닌가 하는데.”

인원에 따라서 할인도 가능할겁니다. 자세한 사항은 사장님께 물어보는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사장님!”

페터는 행여나 들킬새라, 재빨리 쪽지를 주머니안에 넣었다. 쟝은 일을 하다말고 일어서서는 늑대인간 손님을 보고 환히 미소를 지으며 환대했다. 가격과 디자인에 대한 협의가 끝나자 전직 경찰이라는 늑대인간은 동기들에게도 물어봐서 결정하겠노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계산기 위에 떠오른 숫자에 쟝은 매우 기뻐하며 앨릭의 어깨를 잡았다.

앨릭군이 오고나서 곧바로 손님이 오다니, 무슨 행운을 몰고 다니는 사나이같군요.”

“..그런 소리 가끔씩 듣곤 해요.”

그는 수줍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쟝의 입가도 저절로 올라갔다.

 

가끔씩 듣곤 해요?”

헤드셋에 귀를 기울이던 호세의 표정이 아주 약간 일그러졌다. 그는 도청기 주파수를 맞추며 이제 막 트럭에서 들어온 페터를 향해 말했다.

이번 일은 운이 좋은건 맞지. 1시간 후에 은행에 간댔고, 그 시간동안 우리의 히어로께서는 정보를 빼낼 테니까.”

페터는 알렉스가 적어준 종이쪽지를 보고는 CCTV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트럭 안에는 여러 기계장치들과 모니터와 함께 세네명의 동료들이 쟝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알렉스, 그러니까 가게에서는 푸른 악마인 앨릭은 생각보다는 일을 잘 하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평소에도 저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혀를 찼다.

하지만 동료들과 만나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일부러 나 어디간다, 라고 말하는 것도 수상한데요.”

사장이 직원에게 어디 다녀오겠다고 말하는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저쪽이 먼저 의심할 가능성은요?”

혹시 몰라서 알렉스가 미리 도청장치랑 CCTV 다 확인했고, 나도 들어가면서 확인했어. 그래도 만약, 이란게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대기한다. 어차피 오늘 목적은 체포가 아니라, 쟝 버건디가 그 일당과 관계가 있느냐만 보면 되니까.”

여러 장비들을 확인하면서 1시간이 지나갔다. 그새 멋지게 옷을 갈아입은 버건디가 밖으로 나가자 곧바로 알렉스로부터 문자가 왔다.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말을 확인하자마자 CCTV 너머, 파란 손가락이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호세는 혀를 차면서도 평소에도 저렇게 일해주면 어딜 덧나나, 하고 한탄했다.

알렉스는 평소처럼 매우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컴퓨터의 자료들을 백업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하드디스크에 있는 것들뿐만이 아니라 이메일 계정과 채팅서비스까지 그가 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빼내고 있었다. 20여분되는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나자 CCTV너머 길다란 파란색 꼬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다 되었다는 표시다.

저놈 요즘따라 실수하는게 적어지는 것 같지 않아?”

그래서 더 걱정이죠. 더 큰 일이 터질거라는 징조같단 말입니다.”

그 말에 페터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최근 상사로부터 소설가를 생각해보는게 어떻겠냐는 농담아닌 농담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아예 장편소설을 내게 도와주려는 모양이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곤 버건디가 누군가를 만났다는 말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비슷하게 정장을 입은 검은색 악마가 카페에서 그를 반기고 있었다.

 

앨릭은 퇴근하자마자 변장을 풀었다. 마법으로 숨겨놓았던 꼬리와 귀까지 드러내자 페터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늘 잠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쟝 버건디가 오늘 만났던 자는 순수한 지옥 클럽의 회원이자 라진스키 사건으로 현제 교도소에 있는 조 블랙록의 사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메일기록을 보면 그들이 폐쇄된 순수한 지옥 클럽을 대체하는 다른 클럽을 만들기로 결심했다는 내용들이 나왔다.

이걸로 기소만 해도 몇십년은 썩을 수 있겠지만...”

하지만 원하던건 그게 아니잖아? 필요한건 은행강도를 했다는 증거 아니에요?”

알렉스는 빠르게-평소보다도 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피케셔츠나 입는 순박한 악마의 모습에서 벗어나자 그는 급히 가방을 챙겨들었다. 부하가 갑작스럽게 퇴근하려는 모습에 페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너 이거 분석은 다 해야지?!”

오늘 자격증 때문에 미리 갈게요. 어때요, 뭐 원하던건 다 얻었잖아? 내일도 금은방으로 출근하면 되는거죠?”

그 말에 페터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는 어째서 이 검은 고양이가 자격증을 따려고하는지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이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의 끝에는 알렉스의 침실에서 나오던 레널드의 모습이 있었다. 헬하우스가의 자식들은 막내를 제외하곤 자식들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히 퍼져있었다. 알렉스가 자격증을 따려는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거라고 그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가 할말을 잃었을 때 알렉스는 재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갔고, 그제야 페터는 다시 알렉스가 사라진 곳을 향해 소리쳤다.

 

5시가 다 되어가는 관공서에는 여전히 시민들이 많았다. 앉아서 기다릴 자리도 없는지라 알렉스는 번호표를 뽑고선 서서 기다려야했다. 지난번에 마주쳤던 스켈레톤 커플을 다시 보았는데, 일이 잘 해결되었는지 벌써 아이를 신청하는 서류를 쓰고 있었다. 문득 어느쪽 선조의 뼈를 선택할까, 하다가 같은 종족이라 괜찮겠다,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고나서야 그는 빈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창가 앞에 위치해있던 빈자리 옆에는 아주 멋들어지게 생긴 키작은 펌킨이 아주 환하게 미소를 지은 채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머리꼭대기에서 난 길다랗고 털달린 줄기가 알렉스의 귀를 건드리자 그는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잠시 일이 바빠서.”

, 아니에요. 괜찮아요.”

펌킨은 잠시 말을 끊고 화면에 집중하다가 다시 알렉스를 향해 말을 꺼냈다.

그쪽도 교육일자를 신청하러 왔나보죠? , 수상하게 보진 말아요. 나도 그 서류 받았거든요. 난 알이라고 해요, 그쪽은요?”

알렉스, 알렉스 토레스요.”

펌킨은 매우 놀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지만 알렉스는 별 신경쓰진 않았다.

나와 똑같은 이름이라니! 나도 알렉스에요, 친구들은 다 알이라고 부르지만요.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당신 꽤나 멋진 고양이군요, 원래 알렉스라는 이름을 가진 시민은 다 멋있기 마련이죠.”

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펌킨은 검은 고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악수가 끝나자 이 펌킨은 다시 높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쩐지 자신과 비슷한 족속을 보는 것 같아서 알렉스는 불편했지만, 어차피 순서를 기다려야했으니 피할 이유도 없었다.

난 사거리에 있는 은행에 다녀요. 이렇게 멋진 고양이를 만나게되다니, 정말로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네요. 그쪽은 무슨 일을 해요?”

? 나는 저기 정보국에서 일해요. 오퍼레이터로 일하고 있어요.”

수상한 상대에게 정보를 흘릴때는 거짓안에 사실을 넣기 마련이었다. 정보국에서 일한다는 말에 알의 눈이 더욱 더 반짝였다. 그는 어렸을 때 보았던 스파이 드라마 등을 언급하며 정말 멋있겠다고 말하려다 자기 순서가 되고나서야 수다를 멈췄다. 알렉스는 알이 등을 내보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로 꽤나 귀찮은 시민이 들러붙은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알의 순서가 끝나기도 전에 알렉스는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교육시간을 조정하며 스케쥴을 짜나갔는데, 현재 산적한 일이 일이라 생각보다 취득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대충 상담을 마치고 나오니, 방금전까지 밝은 표정으로 수다를 떨던 알이 현관에 서 있었다. 그는 알렉스를 보고 정말로 반가웠는지 손을 흔들었다.

혹시 저녁 먹었어요? 대충 하는 얘기 들으니까 교육받는것도 많이 겹칠 것 같은데 회사 이야기좀 해주면 안돼요? 나 정말로 스필반같은 영화 좋아했단 말이에요.”

레널드는 꼬맹이에게 옷을 사주느라 오늘은 집에 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알렉스는 꽤나 괜찮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난히 타인을 꺼리지 않는 태도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가 정보국에서 일한다는걸 알면서도 가까이 다가오는 시민은 어딘가 수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좋아요. 어디로 갈래요?”

우리 삼촌이 하는 가게가 있거든요. 꽤 유명한 집인데, 요즘 호박파티를 하고 있어요.”

알렉스는 며칠 전 레널드와 가려다가 물의가 일어났었던 곳을 떠올렸다. 그곳이 맞냐고 묻자 알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렇노라고 답하였다.

잘 아시는구나! 좋아요, 내가 삼촌한테 서비스좀 해달라고 할게요!”

알은 아무렇지도 않게 알렉스에게 팔짱을 끼고선 가게쪽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알렉스는 꽤나 골치아픈 일에 엮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유쾌한 할로윈 주민을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조금은 위안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수다쟁이 펌킨에게서 벗어난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둘은 수다를 떨다가-결국 알렉스도 이 유쾌한 펌킨을 좋아하게 되었다.- 결국 바에서 술까지 마시고나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어느새 말을 놓은 알은 알렉스에게 문자보내겠노라고 소리쳤고, 그 말에 알렉스 또한 쾌활하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알렉스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레널드로부터 문자나 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저 조카와 쇼핑을 하고 저녁까지 해결하겠다는, 거의 반나절 전에나 온 문자가 전부였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넣고 있는 와중에 전화를 걸었지만 이상하게도 레널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연인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해서 별다른 걱정을 한건 아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벨소리가 거실에서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현관에 낯익은 구두 한 켤레가 놓여져 있었다. 레널드가 사적인 자리에서 즐겨 신곤 하던 브로그 있는 화려한-알렉스의 입장에서- 구두였다. 그리고 미약한 물냄새와 샤워소리가 욕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음...”

알렉스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재빨리 양말까지 벗고는 기척없이 현관문을 닫고선 아주 조심스레 욕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양말을 벗은 검은 고양이는 발소리를 숨기는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그 덕분에 그가 욕실 문 손잡이를 돌릴때까지 샤워를 즐기고있던 당사자는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을 때, 그만 레널드는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아저씨?!!!”

한창 비누칠을 하던 지옥개는 한참동안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그러다 알렉스가 간신히 부축해주고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

그는 연인에게 꿀밤을 먹이고나서야 샤워호스를 잠글 수 있었다. 넘어질 때 잘못 넘어졌던지 발목 한편이 시큰거렸다.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픈건 아니었지만,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을때마다 시큰거리는 통증이 동반했다. 샤워를 간신히 마치고-그새 알렉스는 또 꿀밤을 맞았지만- 나와서야, 레널드는 연인이 밤늦게 술을 마시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너 술마셨니?”

? , 오늘 구청에 좀 다녀왔거든. 거기서 이상한 펌킨을 만나서.”

알렉스는 실없이 웃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고서는 탈탈 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예 도청방지기까지 갖다대고나서야 만족했다는 듯 욕실로 들어갔다. 레널드는 알렉스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의아하게 쳐다보았지만, 이내 첩보원으로서 본능인가 하고 넘겼다.

 

정말로 이상한 펌킨이었어. 내가 정보국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엄청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같이 밥먹고, 꽤 괜찮은 시민인거 같아서 같이 술도 마셨지.”

괜찮은 시민이라고 한 것 치고는 방금 전의 행동은 꽤나 무례한데.”

그야 내가 정보국에서 일한다는걸 좋아한다면야 당연히 수상하게 여기지. 그래도 없는걸 보니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네.”

알렉스가 옷가지들을 그나마 빨래바구니에 넣는 동안, 레널드는 소파에 모로 누웠다. 오늘 하루가 어땠느냐는 말에 그는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는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까지 결국 조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냐는 질문에 그는 아무 답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아이는 거짓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당신의 손자라고 나서기에도 위험했다. 그는 아이의 안위와 진실 중에서 어느 곳을 골라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말 그럭저럭이야?”

알렉스가 얼굴을 들이밀고나서야 그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코 끝에 말캉하면서도 축축한 것이 닿았고, 이내 그 끝에서 더운 숨이 터져나왔다. 그는 갑작스런 뽀뽀가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돌리진 않았다. 숨결에선 술냄새가 조금씩 피어났다.

얼마나 마신거야? 내일 일은 갈 수 있겠어?”

이정도는 괜찮지! 그리고 나 당분간 따로 일하거든.”

당분간?”

. 무슨 내용인지는 비밀. 그치만 위험한 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고선 알렉스는 다시 레널드에게 코를 비비다가 조심스레 볼에 입을 맞추었다. ,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이윽고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갑자기 뭐니..”

나 오늘 열심히 일했다고 뽀뽀해줘. 내일도 열심히 일할테니까.”

정말이지...”

레널드는 가볍게 코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알렉스와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난다는, 상당히 생경한 감각에 알렉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이렇게 연인이 조금은 진한 스킨쉽을 할 때마다 놀라곤 하였다. 혀가 입술을 핥고 떨어지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아저씨 정말 치사해...”

연인이 고개를 못드는 모습을 보며 레널드는 미소를 짓고선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역시 지옥개의 몸으로는 키스같은 애정표현도 몸에 무리가 간다. 그나마 이마에 입을 맞추는건 힘들지 않았다. 알렉스의 가뜩이나 빨간 귀가 검붉게 변했다.

이만 자자. 벌써 시간이 늦었어.”

말이 끝나자마자 알렉스는 레널드의 손을 잡았다. 평소처럼 가볍게 쥐는게 아니라 아예 깍지를 쥐는 모습이 제법 흥분한 모양이었다. 마치 손을 통해서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당황하기는 레널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털이 덜 말렸는지 손가락은 축축했고, 손바닥의 육구에는 약간의 습기가 어려있었다. 그는 며칠 전 그 손에 괴롭힘당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연인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들자, 오히려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이 검은 고양이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고 또 너무나도 소중했기에, 그가 제 손을 끌고 침실로 향할 때에도, 거실의 불을 끄지 않았던 걸 알아챘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소리는 둘 중 어느 한쪽이 받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겠다는 듯 세차게 울리고 또 울렸다. 창문가에는 어스름이 자리잡고 있었고, 텃새들이 겨울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지저귀었다. 다시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반쯤 잠에서 깬 레널드는 신경질적으로 상대편의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알렉스는 어제 술을 마셔서인지 아니면 격한 운동을 해서였는지 영 잠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액정에는 푸른 늑대인간이 신경질을 내는 모습이 떠 있었다. 시간은 벌써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샌디-”

알렉스는 레널드가 진심을 담아 세게 흔들고나서야 잠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레널드와 코를 맞추었다. 그새 벨소리는 끊겼다가 다시 울렸다. 알렉스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전화를 받았다.

레널드는 다시 반쯤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알렉스가 달콤하게 코와 눈에 뽀뽀를 하고나서였다. 알렉스는 레널드에게 일이 생겨서 나가봐야한다고 말하고는 다시 코를 부딪혔다.

미안, 아저씨. 먼저 나가야 할거같아.”

평소에는 지각만 하면서, 그래서 페터에게까지 한소리를 듣게 만들면서. 하지만 레널드는 검은 고양이의 노란 눈동자에 모든 것을 용서했다. 그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나서야 다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조카의 목에는 무언가가 둘러져 있었다. 레널드는 도대체 어떻게 레오의 그 얼마 안되는 털로 목도리를 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카가 기뻐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이는 아버지가 준 선물에 뺨을 부비어대다가 레널드를 향해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정말 좋은 목도리라고, 생일축하한다고 말하고선 목도리에 손을 뻗었다.

이상하게도 목도리에선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분명히 푹신한 털목도리일건만, 이상하게도 감촉은 매끄러운 합판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 덜컹, 그리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 목도리가 그의 뺨을 때렸다.

 

레널드는 종이더미가 그의 얼굴을 덮치고서야 간신히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만졌던 건 침대 옆에 있던 책더미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 속에서, 그는 방금 전에 느꼈던 감촉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작은 아이만한 크기의, 짙은 오동나무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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