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본문
단어: 우산
문장: 이곳은 동화가 아니야
분위기: 파르페마냥 달콤하기 그지없는
창문에 빗방울이 달라붙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틀자 기상캐스터가 우산을 들고 나와 귀중한 비가 내렸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몇 주 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가뭄이 해갈되었다고 기뻐하며, 현재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바닷가 풍경을 화면에 띄웠다. 레널드는 창밖을 바라보며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산 없이 다니기에도 애매한 양이었다. 이래서는 알렉스가 실망할 것이 뻔했다.
과연 알렉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공기가 습하단 걸 알아채고는 곧장 창문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우거지상을 지으며 들리지도 않을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는 게 제법 실망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센트럴파크의 동물원에 가기로 했고, 내일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보기로 했고, 모레에는 비행기를 타고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빗방울이 계획을 망쳐버린 것이다. 캐스터가 그 우거지상에 화답하듯 이번 비는 일주일동안 계속해서 내린다고 말했다.
“이러려고 인간계에 온 게 아닌데 말이야.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거야.”
레널드는 울기 직전인 연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10시가 넘었지만 어젯밤 침대에서 무리했던 터라 둘 다 늦게 잠을 이루었다. 알렉스가 씻고 있는 동안 아침준비를 하며, 그는 문득 자신의 동생이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어차피 비로 예정을 변경해야한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놀이공원가는것도 힘들까...”
샤워를 마쳤지만 면도는 하지 않은 알렉스가 식탁에 앉자 레널드는 커피와 토스트를 내놓았다.
“다행히 LA는 비가 내리지 않았댔어. 이정도면 비행기도 뜰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애당초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 꿈의 놀이동산이었으니 말이다. 그 말에 알렉스는 기분이 풀어졌는지 싱긋이 미소를 짓고는 토스트에 잼을 발랐다.
“그럼 오늘은 뭐하고 놀지... 내일 가기로 한 미술관에 갈래?”
“오늘은 월요일이라 휴관일이야. 오늘은 그냥 쉬자. 어차피 나도 갈 데가 있고.”
“어디?”
“레오가 애들한테 보여줄 동화책을 부탁했어.”
요즘 지옥에서는 인간계의 동화책이 유행이었다. 다종족세계의 문화를 맛보기 위해서라며 많은 출판사들이 인간계의 책들을 수입하고 번역했다. 하지만 레오는 이왕이면 현지에서 직접 사는 게 좋지 않겠냐는 얘기를 했다.
“여기나 거기나 동화책은 똑같지 않아?”
“일부러 수입을 꺼리는 종류의 동화책이 있거든. 레오는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가 궁금하댔어.”
지옥에 주로 수입되는 인간계의 책들은 주로 유성애적인 묘사가 없는 책들이었다. 특히 동화는 그런 경향이 더 심했는데, 덕분에 지옥의 아이들은 인간계의 동화라면 양파가 못된 이를 찾아 여행을 떠나거나 여우가 책을 먹는 이야기만 알고 자랐다. 레오는 인간계의 애니메이션들이 원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 여행을 간다는 형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영어는 한글자도 못 읽는다는걸 깜빡 잊고서 말이다.
“그런건 진한 키스장면이 으레 나오기 마련이잖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알렉스는 연인의 얼굴을 붙잡고는 깊게 입을 맞추었다. 딸기잼의 단맛이 커피의 쓴맛과 섞이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개를 틀 때마다 알렉스의 수염이 따가웠다. 입술을 떼고나자 레널드가 제발 수염을 깎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멋있지 않아? 지옥에서도 수염이 인기잖아! 여기도 이런 수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저번에 길을 걷다가 나보고 멋진 수염이라고 한 인간도 있었어.”
레널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따지자면 수염이 없이 말끔한 편을 좋아했다. 게다가 멋있는 수염이라기엔 알렉스의 수염은 방치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난 동의하지 않아.”
“칫. 사실은 내 입술을 끔찍하게 좋아하면서. 나도 따라갈까... 어차피 심심해서 할 것도 없었는데. 요즘은 어떤 책이 유행일까요.”
가벼운 손놀림으로 베스트셀러를 찾는 모습이 제법 익숙했기에 레널드는 알렉스가 탄성을 낼 때까지 아침식사를 했다. 아,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을 때엔 이미 한 조각만을 남긴 상태였다. 아마도 지옥이었으면 꼬리를 사방으로 흔들었을, 즉 매우 흥분한 상태로 알렉스가 말했다.
“아저씨, 내가 저번에 말한 걔네 기억나? 왜 사랑의 도피를 떠났다는 커플 있잖아, 스켈레톤과 악마커플.”
“응, 기억해. 10년 전쯤인가, 커밍아웃하고 인간계로 도망쳤다고 했잖아.”
“맞아, 초반에는 어떻게든 연락하고 지냈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거든. 그런데 이번 주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이 걔네들이랑 똑같아. 집안의 반대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 커플이 역경과 시련을 딛고 성공하는 이야기! 우와, 그런데 이게 또 실화래.”
“대단하네.”
알렉스의 노란 눈이 반짝거렸다. 또 무슨 발칙한 생각을 한걸까, 레널드는 걱정에 휩싸이며 마지막 한조각을 입에 넣었다. 부디 위험한 일이 아니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다음에 알렉스가 꺼낸 말은 안전한 이야기였다. 알렉스는 그 커플을 찾아가겠다고 한 것이다.
“마침 비도 오고 난 할 짓도 없으니까, 오랜만에 찾아가봐야지.”
“연락도 안하고 가면 민폐지 않을까?”
“하고 싶어도 수단이 있어야 하지. 하지만 걱정마! 앙리가 일하는 카페가 어딘지는 알고 있거든. 여기서 전철타고 한 시간밖에 안걸리는 곳이야. 아저씨도 같이 갈래?”
그 말에 레널드는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가 알고 지내는 유성애자 커플이라면 알렉스가 유성애자란 사실도 알고 있을 터였다. 레널드는 굳이 옷장의 한쪽 문 너머를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그걸 이해했는지 알렉스도 그대로 알았노라고 수긍했다. 아쉬운 것도 아니었는지 대신 레널드에게 괜찮은 스릴러 소설을 사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가는 길에는 같이 우산을 썼다. 알렉스는 공기가 축축하다고 싫어했지만 레널드는 이 땅에 젖은 비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거리를 한가롭게 연인과 같은 우산을 쓰며 걷는 것도 꽤 나쁘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연인에게 팔짱을 꼈다. 지옥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인간계는 자유로웠다. 이곳에서라면 제한적이나마 알렉스에게 애정표현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모퉁이를 걸어가며 새삼 그 커플을 이해했다. 차별금지법이 있다 하더라도 애인금지법이 공존하는 지옥은 유성애자가 살기에는 좋은 곳은 아니었다. 이상한 시선을 받더라도 경찰의 시선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곳이 훨씬 더 편했다. 그랬기에 많은 커플들이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인간계로 이주했다.
레널드는 굳이 사회적 위치상 이주까지는 생각하진 못했지만 대신 미국에 집을 마련했다. 어찌보면 알렉스와 사랑을 나누기 위한 도피처라고도 할 수 있었다. 둘은 여행을 올 때마다 그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지냈다.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서로만 있는 시간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귀중했다.
“그럼 저녁까진 집에 돌아갈게.”
“그래, 뭐 먹고 싶은 건 있어?”
“음... 오랜만에 배달음식은 어때?”
“오랜만은 무슨, 지옥에서도 지겹도록 먹었잖아.”
“그럼 아저씨가 알아서 해줘, 나 아무거나 잘 먹잖아. 그럼 갈게.”
개찰구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키스를 한다. 몇몇 시선들이 거슬렀지만 레널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곳은 동성결혼까지 허락되는 곳이다. 이정도의 애정표현은 당당히 할 수 있다. 그것이 레널드의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서점은 꽤나 규모가 컸다. 3층짜리 건물 하나가 통째로 서점이었는데 층마다 섹션이 나뉘어져있었고, 내부는 꽤나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레널드는 일단 아동서적 코너까지 찾아갔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다양한 색의 매트 위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이들은 저마다 귀를 기울이며 부모가 내뱉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는 그 모습에 익숙한 광경을 떠올렸다. 케르베로스의 탁아소에서 하얀 할로윈박쥐가 어린 두 아이와 큰 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다시는 볼 수 없는 따뜻한 그 광경을 말이다. 루카스는 삼촌에게 가 동생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바니의 동생 샘은 아버지를 따라 인간계로 이주했다. 그 변화를 안타까워하며 그는 다채로운 색색깔의 표지를 둘러보았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괜찮아 보이는 책을 몇 권 고르고나자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DVD와 동화책 코너가 눈에 띄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나란히 서 있는 광경 밑에는 디즈니 프린세스라고 적힌 팝업이 걸려있었다. 그는 이들이 레오가 말한 공주님이란걸 곧바로 알아챘다. 때마침 옆에 한 공주와 비슷한 의상을 입은 아이가 어머니에게 인형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드레스와 붉은색 리본 머리띠를 한 아이의 성화에 결국 어머니는 다음 생일에 사주겠노라고 약속해야했다. 레널드는 그 아이가 따라한 공주의 동화책을 찾았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표지에는 공주로 보이는 여자가 붉은 사과를 들고 있었다.
대충 사줄 책을 바구니에 넣고나서야 레널드는 자신이 읽을 책을 고를 수 있었다. 그는 책이라면 웬만해선 종류를 가리진 않았지만 요즘은 인간계의 법에 관심이 있었다. 법에 관련된 책 두 권과 심심풀이로 읽을 베스트셀러 페이퍼북 두 권, 알렉스가 특히 좋아하는 스릴러도 3권정도 사고 나니 양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바구니가 가득 찼다. 결국 그는 계산대에서 부직포로 된 장바구니를 권유까지 받았고, 돌아가는 길에는 우산과 책들을 들고가느라 꽤 고생했다.
알렉스는 밤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시간이 되어가자 밖에서 먹고 오겠노라고 연락이 왔다. 다행히도 앙리라는 친구를 찾았지만 그의 일이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널드는 그 말에 아쉬운 감정을 애써 숨기며 혼자서 식사를 마쳤다. 알렉스의 말대로 기껏 중화요리점에서 포장해왔건만, 남은 요리 하나는 내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오늘 산책들을 대충 읽고 텔레비전에서 하는 드라마를 보았는데도 알렉스는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전화를 하려는 찰나에 다시 연락이 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같이 바에 가서 술을 마시기로 했어, 알렉스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활기차고 즐거워보였기에 레널드는 부러 일찍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심히 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너무 늦으면 먼저 자도 돼, 그래도 오늘 안에는 들어가도록 노력할게.”
통화의 마지막에는 노골적인 쪽소리가 났다. 레널드는 누가 듣는 것도 아님에도 부끄러워하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렉스가 집에 들어온 건 12시가 넘어서였다. 그때까지 레널드는 거실에서 책을 읽으며 곧 올 택시를 기다렸다. 택시를 타기 전 미리 연락을 받은 터였다. 노란 택시가 집 앞에 멈추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우산을 펼쳤다. 가로등불빛이 우산에 가려져 알렉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널드는 어쩐지 그의 발걸음이 꽤나 무겁게 보인다고 느꼈다.
“다녀왔어? 꽤 늦었네.”
우산을 다 접고 정리할 때까지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관등 아래의 얼굴은 매우 침울해보였다. 레널드는 직감적으로 오랜만의 만남이 좋게 끝나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알렉스의 입가에서는 술냄새가 났지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응. 오랜만에 만났다보니까 얘기할게 오죽 많아야지. 다행히 인간계에 적응은 잘 한 것 같았어. 카페에서도 벌써 부점장이래. 그래서 퇴근하는 게 워낙 늦었어야지. 저녁도 대충 거기서 샌드위치로 때웠다니까?”
말은 활기차보이지만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울 것 같은 표정에 레널드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걸 알아채고는 알렉스의 얼굴에 쓴미소가 어렸다.
“에헤이, 아무 일 없었어. 아저씬 먼저 씻었지? 나도 곧 씻고 들어갈게, 먼저 침대에 가있어.”
애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모습에 레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인이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볼에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알렉스의 귀가 새빨개졌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침실로 들어오니 시간은 벌써 1시가 넘어있었다. 알렉스는 침대 위로 올라오자마자 레널드의 안경을 벗기고는 입술부터 들이댔다. 따갑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먼저 혀가 입을 막았다. 서로의 손을 붙잡고 일부러 소리가 나게 키스를 한 뒤에, 그는 머리카락이 덜 마른 것도 신경쓰지 않고 다짜고짜 허리를 껴안고 레널드의 가슴팍에 귀를 갖다 대었다. 머리카락에서 새어나온 물기가 옷에 묻었지만 그것보다는 당황스러운 게 더 컸다. 레널드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알렉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역시 좋지 못한 일이 생긴 걸까, 그저 조심스레 연인의 등을 토닥이며 그는 기다릴 뿐이었다. 그 슬픈 일을 언젠가 털어놓기를, 그래서 속에 얹힌 무언가를 자신에게 내뱉어주기를.
“아저씨 심장소리 엄청 빨라진 거 알아?”
칭얼거리는 목소리다. 레널드는 나지막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네가 있으니까 그래.”
그 말에 알렉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장난기어린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어딘가 처연했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환한 미소를 짓고는 침대 옆의 부직포 가방에 시선을 옮겼다. 그는 그 무거운 책더미들을 일부러 침대위에 펼쳐놓고는 무슨 책을 샀냐며 구경했다.
“절반은 그림책이고 절반은.. 아 이거 내가 갖고 싶어 했던 소설이다.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이건 아저씨거겠지?”
인간계의 법에 관한 인문대중서를 들어 올리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잘 모르겠던데, 라고 말하면서 다른 그림책을 꺼낸다. 여자가 사과를 들어올리는 표지, 위에는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라는 제목이 화려하게 금박으로 쓰여져 있었다.
“이건 여자가 나오네? 괜찮아, 이런거 갖고 가도?”
“법적으로는 문제 없어. 그리고 레오가 공주가 나오는 책을 사다달라고 했거든.”
그제야 알렉스는 이 책 말고도 여자가 나오는 그림책들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의 나오는 책 위에는 같은 디자인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디즈니, 아무래도 이 공주님들은 시리즈인 모양이었다.
“이건 <신데렐라>, 저건 <잠자는 숲속의 공주>. <미녀와 야수>랑... 이거 괜찮은거 맞지? 남자도 같이 나오는데?”
“맞아, 아까 대충 읽어봤는데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다 유성애자야. 모두 남자랑 이어져서 행복하게 살게 돼.”
그 말에 열심히 책을 고르던 알렉스의 손이 순간 멈추었다. 그걸 알아채지도 못한채 레널드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유성애자가 있다는 것도 가르치면 좋고, 인간계가 유성애자 투성이란 것도 언젠가는 배우잖아. 여자란 존재가 있다, 라는 것도 배울 수 있고.”
알렉스는 대답 없이 백설공주 책에 손을 뻗었다. 레널드는 연인이 이상하단걸 눈치챘는지 걱정어린 시선으로 책을 읽는 연인을 바라보았다. 컬러풀한 삽화와 큰 활자가 페이지마다 이어진다. 흑단처럼 까만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입술,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갖고 태어난 공주는 새어머니로부터 구박을 받던 중 운명의 왕자님을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질투한 새어머니는 사냥꾼에게 그녀를 죽이라 명하고, 백설공주가 가여웠던 사냥꾼은 결국 그녀를 살려주고야 만다. 예상외로 알렉스는 꽤나 동화책에 집중한 것 같았다. 레널드는 조심스레 연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말도 안돼.”
중얼거리듯 알렉스가 외쳤다. 그는 일곱 난쟁이가 썩지 않은 백설공주의 시신에게 꽃을 바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레널드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온 왕자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장을 넘기자 알렉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왕자가 그녀를 자신의 말에 태우는 모습을, 그녀가 일곱 난쟁이들과 숲속 동물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왕자와 함께 떠나는 장면까지.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지막 대목을 읽자마자 알렉스는 책을 거칠게 덮었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치 눈은 지금이라도 울 것 같았기에, 레널드는 급히 연인을 제 품에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 갑자기 무슨 짓이야! 답답하잖아, 아저씨-”
“앙리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그 말에 벗어나려던 움직임도 서서히 멈추었다. 레널드는 연인을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우는 모습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말에 알렉스의 손이 옷자락을 붙잡았다. 조그맣게,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는 질문에 답했다.
“...장애물이 사라지면 사랑이 장애물이 된다고 했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그저 동화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그 말에 레널드는 마치 소설처럼 도망갔다던 그 커플의 결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커플들이 동화속처럼 행복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장애물을 이겨내고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한들, 그건 결과가 아니랄 또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생활이 안정되면 그때에 가서야 사랑에 가려졌던 단점들이 눈에 들어오고, 곧 살아갈 자신의 삶을 걱정하게 된다. 그 때가 오면 사랑은 장애물이 되었다. 흔하고 흔해빠진 이야기였다. 기껏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사랑을 이루었지만 비참하게 끝나는 경우는 레널드도 많이 봐왔었다.
그래도 모두가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에 홀렸다.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사랑이 커진다, 그럼 그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그는 솔직히 인정했다. 그 자신도 그 환상에 홀려 있노라고.
“모두가 그렇게 끝나지 않아.”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헤어지는 커플이 있으면 계속해서 만남을 유지하거나 아예 살림을 합치는 커플도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죽을때까지 인연을 이어나간다는 이야기는 지옥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레널드는 자신들의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샌디를 사랑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웠기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이 사랑이 끝나는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지만, 지금은 제 품에 안긴 검은 고양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걱정스러웠다.
그는 조심스레 알렉스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짧은 머리칼이 손가락사이에서 스쳐지나갔다.
“그러니까 괜찮을거야.”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건 소망이기도 했다. 제 옷깃을 붙잡은 알렉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보다 숨소리는 평온했고 다행히 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제야 레널드는 품에서 연인을 놓을 수 있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이었지만 다행히도 울분은 풀린 것 같았다.
“우린 우리대로 사랑해가자.”
그러자 알렉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게 뭐야.. 평소엔 그런 말 하지도 않잖아. 사랑이라니.”
얼굴이 붉어지다못해 폭발할것처럼 검붉어져갔다. 그 모습이 귀여웠기에 레널드는 부끄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말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해, 샌디.”
“...아저씨, 얼굴 빨개졌어.”
정말?, 이라고 물으려는 찰나 알렉스의 손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둘은 그저 입술만 닿은 채로 눈을 감았다. 마치 영원처럼, 꽤나 긴 시간이 지나가는데도 둘은 얼굴을 떼지 않았다. 수염이 따갑다고 느껴질 때에 가서야 레널드는 입술을 떼었다. 그의 얼굴이 자신처럼 붉어진 모습을 보고 알렉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러게 왜 익숙하지도 않은 일을 해.”
“시끄러워.”
둘 다 영원이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아마 오래오래란 말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알렉스는 앙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행복한 순간은 있었노라고. 영원히 행복하단 건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말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알렉스는 다시 레니를 붙잡고는 이번에는 깊게 키스했다. 지금 이 순간이나마 그들은 영원을 생각하지 않고 행복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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