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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레니+페터 _ 캠퍼스 AU _ 평범한 하숙집의 늑대인간과 친구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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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레니+페터 _ 캠퍼스 AU _ 평범한 하숙집의 늑대인간과 친구들

rabbitvaseline 2018. 3. 13. 22:59






1.

 

근처에 컴퓨터를 잘 다루는 시민이 있느냐는 말에 페터가 먼저 떠오른 것은 며칠 전 동방에서 게임을 만들어대던 검은 고양이였다. 그러고보니 학교 서버를 해킹해서 들어왔다는, 그야말로 이력서에다 쓰면 요주의 인물이 될 것 같은 이력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는 제 앞에 앉아있는 하숙인에게 찻잔을 내밀며 대답했다.

한 놈 있긴 한데, 그건 갑자기 왜?”

물론 이유야 대충 예상은 갔다. 30분 전에 그의 방에서 비명소리-정말로 처음으로 들어보는 레널드의-가 울렸으며, 지금도 상당히 초조해하는걸 보면 아무래도 컴퓨터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레널드는 이미 미지근해진 홍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평소 표정을 숨긴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표정이 없는 그답지 않게 힘이 빠진 얼굴이었다.

“...랜섬웨어에 당했어.”

그 말에 페터는 유감이라 말하며 냉장고에서 케이크까지 꺼내어 레널드에게 내놓았다. 평소라면 담담히, 그러나 빠르게 먹어치웠으련만, 충격이 컸는지 포크로 깨작깨작 파먹는다. 저런 모습의 레널드에게는 뭐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같은 동아리-보드게임 동아리였다.-의 멤버에게 연락을 해, 알렉스의 연락처를 얻어냈다. 그리고 그 번호를 넘겨주면서도, 아무리 천하의 알렉산드로 토레스라도 레널드의 고민은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하며 그의 성적에 애도를 표했다.

 

 

2.

 

이틀 뒤, 알렉스와 만났다는 레널드의 표정은 매우 미묘했다. 입고 나갔던 가디건을 종이가방에 넣어와서는 무사히 일이 해결되었노라고 말하였지만, 이상하게 기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떻게 했는데?”

“....노트북은 사흘 뒤에 돌려주겠대. 그리고 내 옷에 음료수를 뿌렸어.”

평소부터 기행을 저지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루시퍼 주립대학의 유명인인 레널드 헬하우스에게 그런 공격이라니, 페터는 잘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간신히 초조함을 숨겼다. 그는 친척의 하숙집에서 이런저런 잡일들도 도맡았기에, 자연스레 레널드의 옷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레널드는 몇 번 패션잡지를 뒤적거리긴 했지만 주로 형들이 사주는 옷들을 입었다. 그 헬하우스 인더스트리의 중역들이 사주는, 아주 비싸고 고급 브랜드의 옷들 말이다.

레널드가 부탁하는 입장이었기에 망정이지, 반대였다면 엄청난 세탁비를 물어야 할 거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부정했다. 레널드는 그렇게 쪼잔한 시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의뢰비에서 세탁비는 빼기로 했어.”

그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알렉스는 레널드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무사히 이번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이틀이나 시간을 줄였으므로 세탁비 문제는 없던 걸로 해달라고 했단다. 레널드는 쿨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흘 뒤에 무사히 해롤드 교수의 레포트를 낼 수 있게 된 보답으로 그에게 저녁까지 사주기로 했다.

이번에는 와인을 뿌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거 아냐?”

그럴 걱정은 없어보여, 이번에는 너도 가야 하니까.”

?”

페터는 설거지를 하다말고 식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말에 레널드는 티라미수를 먹으며 답했다.

이번 일은 너의 소개도 있었으니까, 너에게도 보답하는게 맞겠지. 고마워, 덕분에 문제가 잘 해결되었어.”

하지만 그건 감사인사라기보단, 마치 그 미친 검은 고양이를 제어해줄 목줄이 필요하단 뜻으로 들렸다.

 

 

3.

 

놀랍게도 알렉스는 꽤나 레널드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페터는 짓궂게 웃는 검은 고양이에게 커피를 타주며-물론 손님이 아니란 뜻에서 인스턴트로-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얼굴을 보는건 동방이면 충분하건만, 이젠 자신에게까지 엉겨붙어 레널드와 만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치만 아저씨네 노트북은 완전 구식이라고. 헬하우스라면서 그렇게 돈을 아끼나?”

, 걔 노트북 밖에서는 아직도 비싸게 팔려.”

오늘도 알렉스는 레널드가 도서관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과자를 탐냈다. 거의 매일 이렇게 하숙집에 찾아오니, 지나가던 페터의 친척 즉 하숙집의 주인이 농으로 아예 들어앉으라고 할 정도였다.

에이, 난 그럴 돈은 없는걸. 장학금이랑 알바로만 살고 있는걸.”

알렉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학우들 앞에서는 꺼내지 않았다. 동생에 대해서는 자신을 닮아 똑똑하지만 안경잡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고, 자연스레 모두들 그가 아버지와 사이가 엄청 좋지 않다는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레널드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리며 종이 울리는 소리에 알렉스의 귀가 위로 높게 솟았다. 그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으로 뛰어나갔다. 인사말과 함께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는 말, 심심해서 찾아왔다는 말이 들려왔다. 레널드는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알렉스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2주 뒤에 시험이야, 걱정되지도 않니?”

그 말에 알렉스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원래 벼락치기는 잘 하잖아! 게다가 총장이 난 성적은 안봐도 된다던걸.”

말도 안되는 특혜라 생각하며 페터는 들고 있던 과자봉지를 알렉스에게 집어던졌다. 알렉스는 감자칩을 몇조각 먹다말고 레널드가 갖고온 노트북에 손을 대려다 손등을 맞고 말았다.

손부터 닦아, 기름 묻겠어.”

네이네이, 알았습니다요.”

그 말에 페터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주방에서 손을 씻고 말리고나서야 알렉스는 레널드의 노트북에 손을 댈 수 있었다. 필요한 업데이트와 보안처리까지 다 해놓자, 이번에는 시험 끝나고 놀러갈 이야기부터 한다.

그동안 아저씨 노트북 업데이트해주고 다음에는 업그레이드 해줄테니까 그 보답으로 어디 놀러가자. 나 방학하고 한 2주정도는 시간 낼 수 있거든.”

그 말에 레널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달력을 가져왔다. 페터는 레널드가 처음부터 거절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가 짚은 숫자에 집중했다.

언제쯤? 난 개학전 2주를 빼고는 세미나와 가족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

좋아, 그럼 나도 그 시간에 맞출게, 어차피 방학동안에 끝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거든. 페터는? 이때 시간 되지?”

처음부터 거절은 거절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둘을 보며 페터는 지금 씻고 있는 컵을 내던질까 고민하다가도 결국 둘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도 하숙집이 쉬는 방학동안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노른헤임 지방에 가족별장이 있어. 근처에 바다도 있으니까 해수욕도 할 수 있을거야. 어차피 이번 여름에도 아무도 안 쓸테니까 거기 갈까?”

그 말에 알렉스가 매우 기뻐하며 수영솜씨를 뽐낼거라고 말하자 자연스레 레널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페터는 자기도 보기 힘든 광경에 넋을 잃다가 발등에 물을 흘렸다.

 

 

4.

 

과연 헬하우스의 별장은 달라도 크게 달랐다. 페터는 국내선 비행기-물론 그것도 헬하우스 항공-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레널드의 환영을 받으며 헬기로 갈아탔다. 하숙집의 방 두 개를 붙여쓰고 있을 정도로 부잣집 도련님인건 알고 있었지만, 헬기 조종사가 도련님이라 깍듯하게 받아모시는걸 보고나서야 그는 제 옆에 앉아있는 이 지옥개가 자신은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이임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하숙집에서 지내는걸까? 원하기만 한다면 그 근처의 건물을 사서 호화스럽게 살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물론 그런 궁금증은 헬기 아래로 보이는 전경에 싸그리 잊혀지고 말았다. 시끄러운 엔진과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 아래로 울창한 숲과 오른편에 붉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가을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초록빛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발 밑에 보이는 세계는 싱그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숲속 안을 좁은 길 하나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저기가 별장이야.”

레널드의 손가락 끝에서 상당히 현대적인 건물이 드러났다. 꽤나 고풍스러운 건물을 기대했던 페터는 꽤나 실망했지만, 그 앞에 펼쳐진 정원의 크기와 여러 건물들을 보고는 생각을 고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헬기에서 내렸을 때에야, 그는 이 건물이 상당히 거대하고 모더니즘적인 별장이란걸 이해했다.

생각보다 현대식인데?”

지은지 얼마 안되어서 그래. 둘째형이 지은건데, 모양이 이래서인지 가족들은 다른 별장에 가.”

헬기장에는 이미 검은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멋드러진 선글라스와 우스꽝스러운 알로하셔츠를 입은 채로 손을 흔들어댔다.

엄청 기다렸잖아! 뭐야, 페터! 시간이 날 거라고 했잖아.”

전화로도 말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형이 크게 다쳤단 말야.”

그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이 곳에 오는 것을 꽤나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짐까지 다 싸고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대문 밑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달려내려갔을 때엔, 이미 큰 형의 오른쪽 다리가 이상하게 꺾인 뒤였다.

그러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고, 간신히 시간을 낸 둘째형과 바턴을 바꾸고나서야 이 곳에 올 수 있었다. 즉 그로서는 레널드와 알렉스에게 단 둘이 있을 일주일의 시간을 준 셈이었다. 페터를 사이로 갑작스럽게 친해진 둘인데 설마 서먹하진 않을까 싶었건만, 역시나 둘은 데면데면하며 상대방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아니지, 페터는 의뭉스럽게 둘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저 검은 고양이가 레널드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말하는 것이 적잖이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알렉스는 레널드를 꽤 좋아하지 않았던가.

너희 둘이 싸웠냐? 왜 그렇게 서먹해?”

그 말에 둘 다 격하게 손사레를 치며 부정했다. 그 꼴이 더욱 더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은 미뤄야할 것 같았다. 점심이 준비되었다고 밑에서부터 연락이 왔다.

 

별장에 오고나서 이틀동안 페터는 나름 불편하게 휴가를 지냈다. 근처의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부자들의 소소한 만찬과 비싼 술들을 축냈다. 관리인들은 그동안 별장에 손님이 오지 않아 심심했다면서 레널드의 둘째형이 사놓았던 비싼 안주와 술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괜찮냐고 물어보니 레널드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알렉스와 레널드가 이상한 거리를 유지한 건 사흘 전부터라고, 자신에게 담배를 빌린 제이콥이라는 악마가 알려주었다. 닷새 전, 둘이서 계곡으로 낚시를 나갔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근처에 있는 동굴겸 저장고로 피했다고, 관리인들은 그들이 동굴에 몸을 피하고 세시간이 지나서야 레널드의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둘은 반쯤 마른 옷을 입고, 지금처럼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그 전에는 분명 사이는 좋았는데 말이죠. 전 여기가 생기기 전에 다른 별장에서 일했었는데, 거기서 레널드 도련님도 많이 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도련님들이 손님들을 데려와도 레널드 도련님은 언제나 혼자였어요. , 그 손님들이란 치들도 다 돈보고 온 놈팽이들이었지만. 그래서 처음엔 도련님 옆에 검은 고양이가 있는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처음 며칠 동안은 또 어떤 나쁜 놈이냐고 다들 예의주시했었는데 다행히도 아니더군요.”

페터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제이콥은 레널드를 잘 돌봐주었다고 페터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저렇게 웃으시는건 처음 본 일이에요. 별장에서도 항상 무뚝뚝하게 지내셨죠, 주인님과 빼닮으셔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지셨고. 다 그 알렉스씨 덕분일까요..”

하지만 그런 보기좋은 평화도 일 이후로는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싸운거라고 보기에는 둘의 사이는 좋아보였지만, 그래도 전처럼 좋지는 않았다. 레널드는 알렉스와 단둘이 있는 경우를 피했다. 자연스레 페터가 그 사이에 끼게 되었는데, 지난 학기동안에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은, 알렉스도 레널드를 피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싸웠으면 그만 화해해.”

아예 분위기를 타서 캐비어까지-유통기한이 얼마 안남았다고- 딴 자리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급기야 레널드는 사례까지 걸리고 말았다. 켁켁거리는 숨에서 알코올향이 터져나왔는데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그의 등을 두드리다가 급히 몸을 떼었다. , 뭔가 있잖아, 페터는 급히 거리를 유지하는 둘을 흘겨보았다. 뭔가 이상해.

아니야, 정말 싸우지 않았어.”

맞아, 아저씨랑 내가 싸울 이유가 뭐가 있다고.”

알렉스는 웃어넘기고 있었지만 글쎄올시다, 페터의 눈에는 둘이 서로를 피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들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 둘이 있을 기회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서로와 떨어지긴 싫었는지, 지금처럼 항상 페터를 동반해서 자리를 마련했다.

마치 애착이 깊은 형제나 부모자식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둘이 힐끔거리며 상대방을 바라보다 잔을 들이키는, 도무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을 안주삼으며.

 

 

5.

 

개학 후 신학기가 시작되자 알렉스는 하숙집에 발길을 끊었다. 3달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자주 드나들었고, 여름방학 동안에도 자신없이 계속해서 레널드와 만났다고 했건만 이제와서는 모두 다 꿈만 같았다. 페터는 신입생들을 도우랴 하숙집 일을 도우랴 강의 적응하랴 바빴기에 동방에는 가지 못한 참이었다. 그러니 그로서도 알렉스를 캠퍼스 내에서 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간 것이 다였다.

레널드는 더더욱 바빴다. 그의 성실함을 인정한 교수 덕에 세미나를 주관하게 되었고, 원래 법학생이란 잠잘 시간도 내기 힘들 정도로 바쁘지 않던가. 덕분에 페터가 사놓은 원두가루가 일주일도 안되어 사라져버렸고, 결국 레널드의 건강을 의식해서 페터는 몰래 디카페인으로 커피를 바꾸어놓았다. 알렉스는 여전히 루시퍼 주립대학교의 문제아이자 총장에게 총애받는 장학생으로 살고 있었다. 어디가나 화제를 몰고 다니는 유명인, 괴짜이자 천재인 검은 고양이의 이야기는 특히 신입생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다.

그렇게 다시 1년이 시작되었다.

다시 페터의 친척은 엄청난 거금의 하숙비를 받았고, 페터는 레널드가 멘토를 맡게 되었다는 신입생에게 차를 대접했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을만한 땅딸막한 뱀파이어가 사실 자신의 친척과 비슷한 나이대라는 점과 꽤나 입이 험하다는 점에 놀라며 그는 순간 알렉스를 떠올렸다. 레널드의 표정은 1년 전과 비슷하게 담담했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도 어리지 않았다. 저 라즈반이라는 뱀파이어 대신 알렉스가 앉아있었다면 분명 환하게 웃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 대학의 축제는 할로윈 연휴 전에 열렸다. 페터는 그제야 동아리에 얼굴을 비출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알렉스가 이상한 게임을 만들었는지 그것을 팔 계획이라고 했다. 알렉스는 평소처럼 쾌활하게 웃으며 올해도 꽤나 괜찮게 되었다고 자부하고는 동방 소파에 앉아있던 덴젤에게 엉겨붙었다.

요즘 너 하숙집에 안오더라? 전에는 그렇게 오더니.”

그 말에 알렉스는 쿠션에 얼굴을 묻고는 대답했다.

, 그거? 그야 그 헬하우스 도련님이 얼마나 재미없는데?! 몇 번 어울려보긴 했는데 생각보다 안맞더라고. 동료로는 좋겠는데 역시 친구로는 좋지 않은 것 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렉스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페터가 알렉스의 뒤통수를 그러잡고 바닥으로 내치는 모습에 모두들 경악했다. 그리고 그건 바닥에 부딪쳐 코피가 흘러내린 검은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페터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는데, 그가 바닥에 누워있는 알렉스를 향해 발길질을 하려던걸 다른 부원들이 간신히 말려야 할 정도였다.

, 이 미친 새끼야! 너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돼! , 이 씨-”

그만해, 페터! 이게 무슨 꼴이야?!”

한명이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말리고나서야 페터는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알렉스를 천천히 뜯어볼 수 있었다. 귀가 잔뜩 내려가있고 표정은 눈물이라도 터져나올 양 침울했다. 꼬리는 바닥에 딱 붙어있어 떨어질 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페터는 제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을 느꼈다.

왜 네가 그런 얼굴을 해?! -!”

그는 거기서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동방의 수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그 이름을 꺼내면 안된다고 이성이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아침에 레니가 자신을 향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알렉스의 안부를 묻던 때를 떠올렸다.

요즘 연락이 잘 안돼, 매번 바쁘대.”

레니야말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데, 너를 위해서 시간을 내려고 밤을 샌 적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하지만 페터는 그 말들을 애써 속에 차곡차곡 묻었다. 그리고 알렉스를 향해 침을 뱉고는 동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자기야말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6.

 

축제를 앞두고 결국 레널드가 쓰러졌다. 페터는 일단 헬하우스가에 전화를 해 주치의를 요청했고, 하숙집까지 찾아온 의사는 과로와 감기가 겹친 것이라고 진단했다. 치료방법은 간단했다. 약을 먹고 푹 쉬는 것, 그리고 대학교 축제는 생각도 하지 말 것. 다행히도 간호를 해줄 시민이 따로 파견되었기에 페터는 여유롭게 축제를 즐길 수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알렉스에게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에 보드게임 동아리는 그에게 더 많은 노동을 명령한 것이다. 덕분에 동아리에서 만든 카페의 일을 도맡게 되어서 페터로서는 오히려 간호가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런 푸념을 알렉스가 없는 자리-물론 가해자 피해자간의 분리는 당연하니-에서 하니, 어느새 그 검은 고양이의 귀에도 레널드의 이야기가 전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페터 앞에서 레널드의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알렉스와 마주칠때마다 페터는 자신의 주먹을 불끈 쥐고 무시로 일관해야 했다. 말이라도 한소리 들었다가는 언제 알렉스에게 주먹을 날릴지 몰랐다.

레널드가 쓰러진 덕분에 축제 때 열릴 학회는 파토나기 직전에 간신히 수습했고, 대학의 주요 스폰서인 헬하우스의 자제를 쓰러지게 만든 교수는 여기저기서 압박을 받은 것 같았다. 페터는 주워들은 소식이었지만, 레널드의 형들이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하숙인은 형들과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면 동생은 어떨까? 간신히 축제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낯익은 고급세단이 집앞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레널드가 처음 이사왔을 때 타고 온 차와 같은 기종이었다. 그는 급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고, 검은 정장을 입은 시민들이 복도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거실로 향하는 문이 열리더니, 검고 작은 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튀어나왔다.

형이 그 형이구나!”

도련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자줏빛 악마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려는 작은 지옥개를 들어올렸다. 아이가 내뱉는 말을 통해 그 악마가 알베르토임을 알 수 있었다. 레널드가 가끔씩 말하곤 하던 집의 총괄집사다. 그는 페터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방문의 목적을 말하였다.

레온 도련님이 형님이 아프시단 소식을 듣고 견디지 못하시더군요. 방금 레널드 도련님을 뵈었고, 이번에는 관리인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버릇없고 집중력 또한 부족한 막무가내인 어린 지옥개, 하지만 의자 위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는 지옥개의 몸에는 하얀 자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검은 지옥개, 제 바로 위의 형과는 정반대로 그 몸만으로도 헬하우스 인더스트리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레니가 네 이야기는 많이 해주었어. 집에 장난끼가 많은 동생이 있다고,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는데 꽤나 귀엽다고 말이야.”

정말? 헤헤, 귀엽다는 말은 많이 듣지만 형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형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은건 처음이야.”

아이는 활짝 웃고선 정말로 신이 났는지 몸을 흔들어댔다. 레널드의 두 형들이 막내를 견제한다는 소문은 세간에서도 유명했다. 어쩌면 소문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제멋대로긴해도 그래도 착한 아이야. 알프레드가 제대로 키워주면 좋겠는데.”

비장의 치킨스프를 들고 올라갔을 때, 레널드는 애써 간호인을 내보내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때 아버지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형들로부터 전해 들었노라고, 그래서 꽤나 쓸쓸했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하지만 정작 집사로부터 사진을 건네받으니 그런 마음은 눈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는 천성적으로 아이를 좋아하는 시민이었다.

카페에 못가서 미안해, 시간은 내고 싶었는데.”

아서라, 시민들이 많아서 소란스럽기만 하고 재미도 없었어, 안 온게 나았어. 게다가-, 그러니까 축제도 별거 아니더라고.”

말이 잠깐 끊긴 이유를 레널드는 알아챈 것 같았다. 그는 페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렉스는 어떻게 지내?”

페터는 몇 번 한숨을 내쉬고 뜸을 들이다, 레널드의 간절한 시선을 눈치채고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답을 내렸다.

“..내 말이 충격적일 수는 있겠지만 잘 들어, 레널드 헬하우스. 그 녀석이 너에게 접근한건 돈때문이었어. 그 놈도 그렇게 말했고, 다른 시민들도 똑똑히 그 소리를 들었어. 그래, 그 녀석은 널 갖고 논거야, 네가... 그러니까 네가 헬하우스니까 즐겁게 놀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네가, 난 그렇게 생각안해, 그러니까 재미가 없다고 더 이상은 못놀겠다고 말했어. 이젠 그 녀석 그만 잊어, 그딴 쓰레기 자식한테 마음 쓸 필요 없어.”

페터는 적어도 레널드가 충격을 받는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레널드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전 처음보는 모습에 놀란 것은 오히려 페터였는데, 레널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마시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기뼈서 짓는 웃음이 아니라 그야말로 조소였다.

괜찮아, 이런 일은 워낙 흔해서 이야깃거리도 안돼.”

“..하지만 레니.”

정말로 괜찮아, 오히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속이 시원해. 고마워, 페터.”

그는 페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페터의 눈에는 레널드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 차마 그 손을 뺄 수 없었다.

 

 

7.

 

연휴의 첫날, 레널드는 형들이 걱정을 많이 했노라며 이번에는 집에 가야겠다고 문을 나서고 한시간만에 하숙집에 돌아왔다. 원래부터 조용했지만 더 조용해진 하숙집을 나홀로 지키던 페터는 황망한 표정으로 짐을 들고 쓴웃음을 짓는 레널드를 바라보다 뒤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익숙한 얼굴, 코 부근에 물방울 모양의 하얀 반점- 페터의 몸이 반사적으로 그 무언가에 달려들었을 때, 레널드는 필사적으로 그를 막아야만 했다.

너 이 미친 새-”

그만해, 페터. 알렉스가 아냐, 잘 봐. 더 어리잖아.”

알렉스의 얼굴을 한 무언가는 레널드의 등을 꽉 붙잡고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레널드의 말대로 알렉스가 아니었다. 우선 어렸으며 안경을 썼고, 살집도 더 있었다. 체크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아무리봐도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시민은 허리를 펴고 서더니 도대체 형이 뭔 짓을 저질렀냐고 레널드에게 말했다.

아주 쓰레기짓을 했지.”

그 양반이 남에게 맞을 짓은 해도 미움받을만한 짓은 안하는데.”

그나저나 어떻게 된거야? 레널드, 넌 집에 간다고 했잖아. 왜 돌아온거야?”

미안, 페터.”

레널드는 일단 짐부터 거실에 들이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자신이 이 어린 검은 고양이를 만났는지를 설명했다.

본가가 있는 둠스데이 시티까지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편했기에, 그날도 레널드는 역에서 둠스데이 시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플랫폼 한가운데에서 역무원이 어느 검은 고양이를 둘러싸고 실랑이를 벌이는걸 발견했다고 한다. 어린 고양이는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다고 역무원에게 뻐댔고, 역무원은 당장에라도 경찰을 불러 무임승차로 감옥에 쳐넣을거라고 위협했다. 아무리봐도 종족차별의 소지까지 있어 보여 레널드가 다가갔는데, 고양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랐다.

그 소년은 알렉스의 동생으로 마침 아버지와 싸우고 형이 있는 이 곳으로 가출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교통비가 많이 들어서, 중간지점부터는 거의 무임승차 형태로 왔고 그걸 발각당했다고 했다. 레널드는 우선 이 질줄 모르는 소년을 구해주었다.

알렉스 그 놈에게 말하면 되잖아,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어.”

알잖아, 내 전화는 무시하는거. 그런데 공중전화로도 연락을 받지 않았어. 그렇다고 얘 혼자 이 도시에 남겨놓기도 뭐해서.”

페터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번 연휴에 집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동아리 멤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도 저번 사건 이후로 알렉스와는 연락을 거의 끊은 상태였다. 그 멤버는 축제 끝날 무렵부터 알렉스의 상태가 영 아니라고-즉 거의 폐인이 되었다고- 말하며, 어떻게든 연락은 전해주겠노라고 말했다. 페터는 레널드가 그 녀석 때문에 걱정하는 모습은 죽어도 보기 싫었기에, 폐인이 되었다는 것만 빼고 전해주었다.

그럼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고... 넌 어떻게 할거냐?”

형과 연락이 되면 형한테 가야지. 당분간 그 아저씨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아저씨란 아무래도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친구문제 때문에 싸웠노라고, 스콘을 먹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누굴 사귀든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그 놈이 친구로서 괜찮은 놈이면 친구가 되는거지, 내가 형처럼 유-”

순간 굉음과 함께 동생의 말이 끊겼다. 레널드의 발 옆에서 머그잔이 산산조각난채로 우유와 뒤엉켜있었다. 레널드는 급히 미안하다고 말하며 잔해를 치우려했고, 페터는 레널드답지 않은 행동이었단걸 알아채지도 못한 채 급히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빗자루를 들고 나와보니 동생은 그새 화를 가라앉혔는지 조용히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말로 미안해, 페터.”

아냐, 뭐 이럴수도 있지.”

페터가 조각들을 치우자 레널드는 걸레로 우유를 훔쳐내었다. 그들이 정리를 마쳤을 무렵에서야 방금 전에 전화를 걸었던 동아리 멤버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숙사에 있는 다른 녀석의 말로는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로 널부러져 있으며, 아마 찾아가도 제대로 대접받기는 힘들거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 말에 페터는 자기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는 두 시민앞에서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형이 왜 전화를 안받는데?”

..... 많이 아프다네?”

술에 취해 널부러져있다는 것보다는 나은 대답이었으나 대상이 잘못되었단걸 페터는 알고 있었다. 레널드가 걱정어린 시선으로 정말이냐고 묻자, 페터는 아파서 못 일어난다고 대충 꾸며 대답하였다.

그러니 너도 그냥 집에 돌-”

얼마나 아프다는데? 일어나지 못할 정도면 심한거잖아.”

레니.”

레널드는 당장에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게다가 옆에 앉아있던 동생이 그 기세에 기름을 끼얹어서는, 자기 형이 어떻게 아픈건지 알아야겠다며, 형의 주소까지 물었다. 그는 한달 전, 형의 간호를 했던걸 생각하며 이 형제에게도 우애란게 있구나, 감탄했지만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그는 어떻게든 레널드와 알렉스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알렉스의 생각은 전해주었으나, 직접 듣는다면 그 여파가 얼마나 클지 어떻게 알겠는가?

일단 주소는 내가 알아볼테니까-”

내가 알아, 거기까지 데려다줄게.”

?”

레널드가 알렉스의 기숙사 주소를 알고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도대체 언제 그런 사이까지 되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일어서려는 레널드를 막는 게 우선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래? 네가 걱정할만한 가치도 없는 녀석이잖아.”

괜찮아.”

그리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을 이끌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페터는 어쩔 수 없이 그 둘의 뒤를 따랐다.

 

 

관리인에게서 열쇠를 받고 나서야 페터는 굳이 레널드가 따라올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냥 주소만 받아다 자신이 가도 되었을 문제였다. 그는 혹시 모르니 뭐라도 먹을 것을 사오라고 레널드에게 이르고는 동생과 함께 3층 계단을 올라갔다. 알렉스가 살고 있는 기숙사는 대학교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맨션이었는데, 거실 하나를 두고 방 3개를 3명이서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행히라고할까 룸메이트들은 이미 연휴를 즐기러 본가에 내려갔고, 갈 곳 없는 알렉스만이 이 곳에 남겨져 있었다. 한창 나이의 남정네 셋이 사는 공간답게 거실은 적당히 어질러져 있었다. 알렉스의 방은 복도에서 맨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과연 총장이 총애하는 장학생답게 제일 좋은 방에 배정된 모양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 맙소사, 루시퍼시여! 이게 뭐야?!”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옷가지와 잡지, 술병이 이리저리 좁은 방 안을 가득 어지르고 있었다. 굴러다니는 술병들은 보아하니 싸구려지만 죄다 도수가 높은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의 주인공은 잔뜩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동생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알렉스를 부축했다. 숨을 쉴때마다 술냄새가 잔뜩 배어나왔다. 결국 참다못한 페터는 일단 방안을 환기부터 시키기로 했다.

아프긴 아픈거네, 술병이라니. 원래부터 술 좋아하지도 않던 양반이.”

동생의 말이 맞았다. 알렉스는 즐기기 위해서 술을 마셨으면 마셨지,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부류는 아니었다. 애당초 머릿속에서 마약이 나온다는 소문까지 있는 녀석이었다. 굳이 술을 마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페터는 이 상황을 목격하고나서야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도대체 무엇이?

페터는 행여나 레널드가 볼새라 재빨리 술병들을 옷장안에 집어넣으려다 포기했다. 이미 옷장안은 제대로 개키지도 않은 옷가지들로 산더미라, 제대로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동생이 형에게 먹일 찬물을 뜨러 부엌으로 간 사이, 초인종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어째서 이 놈이 술병에 시달리는 것을 알려주기 싫은지는 몰랐지만, 하여간 페터는 뭐든 해야했다. 결국 술병들을 그러모아 침대 밑에 집어넣고는 이불로 재빨리 그것들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동생에게 그냥 아프다고만 하라고 한 뒤에 문을 열었다. 레널드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봉투를 잔뜩 들고 있었다.

미안, 늦었지?”

아냐, 녀석 상태가 많이 안좋더라.”

혹시 몰라서 스프랑 이것저것 사왔어. 감기야? 일단 약도 사왔는데.”

그럼 일단 데워줄래? 녀석은 내가 살필게.”

상태를 보러가겠다는 레널드를 만류하고 그는 다시 급하게 방안으로 돌아갔다. 반쯤 눈이 풀린 알렉스 토레스가 자신을 보며 미친 놈처럼 웃고 있었다.

뭐야, 웨 페터가 여깄어? 이번에는 또 날 어떻게 죽이려고 헤헤헤.”

웃지마, 이 미친 놈아. 이것부터 마셔, 네 동생이 왔어. 동생한테 이런 모습 보이는거 부끄럽지도 않아?”

우리 아우님이? 정말?! 내가 보고 싶어서 온거구나 하하. 내가 힘들어하는걸 어떻게 알고 왔담.... 페터... 그럼 아우님이랑 페터만 온거야?”

그는 주방에서 스프를 데우고 있을 레널드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놈에게 레널드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알렉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아우님 뵈러 가야지!! 동생아, 우리 귀엽고 멋있는 동생님!!”

, 밖으로 나가지마! 제정신도 아닌 놈이-!”

그가 문 밖으로 달려나가려는 알렉스를 붙잡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건 안타깝게도 알렉스가 그렇게나 찾던 아우님은 결코 아니었다. 당황한 표정의 레널드가 트레이를 들고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린 알렉스를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 레널드의 입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에 알렉스의 몸이 크게 무너졌다. 트레이와 스프가 처참하게 바닥으로 내팽겨져 바닥에 큰 얼룩을 남겼지만 레널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재빨리 바닥에 쓰러진 알렉스의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저씨?”

순간 페터는 숨을 멈추고 둘이 눈을 맞추는 광경을 보았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빨려들어갈것만 같은 장면이라, 그는 이 상황에서 어떤 소리도 내면 안된다고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레널드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손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구역질하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는 레널드에게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을 게워냈다.

 

 

8.

 

욕실에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을 수가 없었다. 페터와 동생이 엉망이 되어버린 방을 다 치우는 동안에도 알렉스와 레널드는 목욕을 끝내지 않았다. 다만 샤워기 물소리 사이로 조그맣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는데, 그것마저도 아주 작게 들려온지라 무슨 내용인지, 어떤 감정인지는 페터로서도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둘이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페터는 둘의 눈가가 붉은게 아무리봐도 단순히 목욕때문은 아니란걸 깨달았다. 둘의 관계는, 페터는 커피를 마시며 데면데면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마치 별장에서의 모습같다고 생각했다.

 

 

9.

 

알렉스의 동생은 연휴기간동안 형을 데리고 관광을 다니다, 아버지가 보낸 시민에게 압송되어 끌려갔다. 그들의 아버지는 장남과 대면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시민을 보낸거라고, 동생은 끌려가면서도 투덜거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레널드의 속도 편하지는 않았기에, 나중에 형을 통해 이야기하면 별장으로 불러주겠단 말을 대신 할 정도였다. 페터는 동생을 배웅하는 둘을 보면서 말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껴야 했는데, 아무래도 둘의 관계가 별장에서의 일 이전으로 회복된 것 같아서였다. 그는 이제 이 파렴치한 검은 고양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식당에서 알렉스는 페터에게 그동안의 일을 사과했다. 일이래봤자 레널드를 그렇게 물주로 대한 일은 아니었고, 그저 엉망이 된 집안을 청소해 준 것에 대해서였다. 페터는 도대체 욕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다.

? 무슨 일?”

시치미 떼지마. 너 토하고 레니랑 같이 씻었잖아. 그 때 뭔 일이 있었길래 화해했냐고, 아니 싸운것도 아니지. 뭐라고 한거야, 도대체?”

둘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추었다. 페터는 레널드가 당황해하는 꽤나 보기 힘든 광경에 놀라며 다시 알렉스 쪽을 바라보았다. 이쪽은 아예 딴청을 부리려는 양, 아예 웨이터를 불러서 커피를 더 주문하려고 했다.

, 알렉스!”

화해했어! 별장에서 오해가 있었는데 결국 다 풀었어. 정말이야.”

레널드답지 않게 횡설수설한게 더욱 더 수상했지만 페터는 이만 넘어가기로 했다. 더 이상 추궁했다가는 레널드의 어떤 모습을 볼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결과로 알게 된 점은 있었다. 알렉스는 레널드를 물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데, 오해(레널드의 말에 의하자면)로 인해 일부러 멀어지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알렉스 토레스란 놈은 그렇게 엄청 나쁜 놈팽이는 아니었지만, 레널드에게 큰 상처를 입혔기에 여전히 요주의 대상이란 점.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버지에게 끌려간 동생에게 감사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10.

 

할로윈 연휴가 끝나고 알렉스는 천연덕스럽게 거의 일주일의 절반을 하숙집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천연덕스럽다고 말하는 이유는 거의 한달전에 자신에게 코피를 낸 당사자에게 팬케이크 타령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레널드는 방 2개를 빌려쓰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서재로 하나는 침실로 쓰고 있었다. 알렉스가 하숙집에 올 때마다 쓰는 방은 서재로, 숨막히는 책장 사이에 위치한 카우치에서 불편하게 잠을 이루었다. 페터는 도대체 본인의 침대가 있는 편안한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는지를 의심하며 하숙집의 주인인 친척에게도 말하였지만, 도리어 알렉스가 갖고 온 뇌물 덕분에 친척은 아예 손을 떼고 말았다.

인간계에서 밀수한거라니까, 이 시럽.”

결국 어쩔 수 없이 팬케이크를 해주니 이상한 시럽을 레널드의 케이크 위에 뿌려댔다. 페터는 무어라 말하려다, 한조각 먹고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 레널드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둘은 하숙집에서는 거의 붙어다녔다. 레널드는 여전히 공부로 바빴지만 그래도 시간을 내어 알렉스와 밖으로 놀러나가기 위해서 전보다도 시간표를 빡빡하게 짰다. 그러고는 저녁까지 먹고 들어와서는 서재에서 공부를 했다. 물론 그 시간동안 알렉스는 이제는 거의 전용 침대가 되어버린 카우치에 들어누워 동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곤 했다.

알렉스는 결국 레널드의 컴퓨터 전담 기사가 되어버렸고, 거기에다 마사지 담당까지 되어버렸다. 마사지는 거의 심야에 이뤄지곤 했는데, 솜씨가 서툴러서인지 몇 번 레널드가 크게 앓는 소리를 낸 적도 있어서 페터가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생겼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기진맥진해있는 레널드를 보며 페터는 적당히 하라고 알렉스를 힐난하기도 했다.

피곤한건 알겠는데 차라리 가게에서 하는게 낫지 않아? 요즘 계속 허리 아프대매.”

알렉스가 원래 그런걸 좋아하거든.”

정말이지 이해가 도통 가지 않는 친구사이였다. 페터는 반년만에 이렇게나 진전된 둘의 관계를 보다가 신경을 꺼버리곤 했다. 저렇게나 붙어있는 시간도 아까운 절친이라니, 가끔씩 부러워지거나 서운해 했다. 3개월 전만 하더라도 저 사이에 끼어있었을텐데 말이다.

 

 

11.

 

짧은 겨울방학이 오자 레널드는 다시 페터와 알렉스를 별장에 초대했다. 안타깝게도 알렉스의 동생은 결국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지 못했고, 겨울방학 내내 할로윈에 갇혀있는 신세라고 했다. 알렉스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형제와 만나는 것마저 혐오했다.

그 이야기를 한건 별장으로 향하는 기차안에서였다. 왠만해선 남의 이야기를 안하던 레널드는 알렉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너희 가족은 어때?”

우리 가족이야... 뭐 다른 가족하고 비슷하지. 그렇게 사이는 나쁘지 않았어. 아버지도 우리 독립하니까 홀가분하면서도 쓸쓸하다고 하시더라고. 하지만 알렉스는 좀 이상하네. 혐오라니, 보통의 아버지가 할만한 생각은 아니잖아? 게다가 검은 고양이인데.”

검은 고양이는 다른 종족들보다 유난히 부성애가 많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 말에 레널드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는 알고 있어?”

, 하지만 너에겐 말할 수 없어.”

너무나도 빠른 거절에 페터는 오히려 놀랐다. 하지만 이미 둘의 관계는 자기가 끼어드는게 미안해질 정도로 발전되고 있었다. 사실 페터는 지금 별장에 가는 길도 어딘가 불편했지만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즈음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곤 이번에 또 뭘 하고 놀거냐고 레널드를 닦달하다가 바깥 풍경을 보고 감탄했다. 저 멀리 설산이 점점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눈이다!”

이번에 가는 곳은 헬하우스가의 겨울 별장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실제 눈을 본 적이 없는 친구들을 위해 특별히 예약했다고 했다. 둘 앞에서 들뜬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페터였지만, 정작 설산을 직접 목도하니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차는 계속해서 설산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페터는 곧 맞을 차가운 공기를 기대했다.

 

겨울별장은 여름에 묵었던 곳과는 정반대로 아주 고루한 곳이었다. 거의 10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은 고풍스러웠고, 설산 속에 파묻혀있어서 주위는 역시나 고요했다.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라고 말한 것이 믿겨질 정도였다. 잎을 잃은 검은 나무들이 눈옷을 입고 빽빽이 숲을 지키고 있었다. 어찌보면 조용하지만 어찌보면 축 가라앉은, 놀기에는 그다지 적당한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가라앉은 분위기에 일조하는 것이 더 있었다. 셋이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별장에 도착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선객이 있었다.

!”

레널드는 정문에서 그의 어린 동생이 뛰어나오는 것보다 그 뒤에 있던 인물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정문에 서 있던 늙은 지옥개의 몸에는 레오만큼이나 하얀 터럭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 오랜만이네요.”

그래, 레널드.”

레널드는 품에 동생을 안아올리며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실로 몇 년만에 보는 부자관계같지 않은, 그저 사무적인 인사였다. 페터가 레널드의 아버지, 즉 헬하우스 인더스트리의 회장인 로날드 헬하우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레널드의 아버지노릇은 형들이 해왔고, 일 관계 즉 하숙집에 관한 것도 모두 형들이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쁜 스케줄을 이유로 아들이 사는 곳에는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흔한 전화마저 없었다. 페터는 인사만을 끝내고 뒤돌아 별장 안으로 사라지는 로날드를 보며, 방금 전 기차안에서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알렉스의 아버지가 아들을 지독히도 혐오했다면, 레널드는 반대로 무관심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름 평범한 가정에서 지냈다고 자부하는 페터가 보기에는 둘 다 비정상적인 관계로 보였다.

 

일분단위로 스케쥴이 짜여진다는 로날드 헬하우스가 굳이 별장에 들러 셋째아들의 얼굴을 본 것은 막내아들의 간청 때문이었다. 막내아들인 레오는 손윗형제를 매우 좋아했는데, 별장에 도착하고나서 한순간도 품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 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첫째와 둘째가 견제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아이는 레널드에게서 형제애를 찾고 있었다. 그에 비해 로날드는 레널드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는 곧바로 서재로 사라졌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식당에 얼굴을 비추었다. 페터와 알렉스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달전에 보았던 알베르토가 지키고 있었다.

페터는 처음부터 알베르토가 자신과 알렉스를 탐탁치 않아한다는걸 깨달았다. 미묘한 시선이나 행동, 표정들은 그가 헬하우스의 자제와 할로윈 출신들이 어울린다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걸 알렉스도 알아챘는지는 모르지만 상관은 없었다. 둘이 로날드와 인사를 하고 역시나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 것 만으로도 그 악마의 콧대를 눌러줄 수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그들 둘은 레널드의 손님이었으니까.

로날드는 그다지 말수가 없었다. 그는 과묵했고 진중했지만 그 공간의 시민들을 아우르는 카리스마는 갖고 있었다. 처진 눈 사이로 보이는 눈은 탁했지만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페터는 식사를 하다 문득 그가 레널드와 매우 비슷하단걸 깨달았다. 분위기가 외모, 심지어 말투나 목소리마저 둘은 부자지간이란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오히려 높은 목소리로 알렉스와 싸우고 있는 저 막내아들이 남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알베르토는 레오를 말리다 결국 포기한 지경이었고, 레널드가 간신히 알렉스를 꼬집어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보는 로날드의 얼굴은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그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고, 자신의 후계자가 검은 고양이와 말다툼을 하는데도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무생물을 보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여간 식사시간이 무사히 끝나고 그는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 레오는 알베르토에게 끌려가 훈계를 받았고, 알렉스 또한 레널드에게 혼이 나야했다.

짐정리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이제 둘은 텔레비전 화면을 붙잡고는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알베르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레널드가 일부러 휴식시간을 주었다고 했다. 페터가 듣기에는 휴식시간이 아니라 쫓아낸 것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내일 돌아가신대.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아마 오늘도 무리하신걸거야. 미안해,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려서.”

... 나도 이렇게 되어버릴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놀랐어. 그게 너희 아버지구나. 왜 네가 저번에 그런 얘길 한줄 알겠어.”

그는 알렉스와 레오가 게임에 빠져있는걸 확인하고는 레널드에게 속삭였다.

넌 알렉스와는 정반대잖아.’

“...맞아. 아버지가 뭘 생각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아. 아버지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아. 당신이 애착을 갖는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어.”

기껏 속삭인 것도 헛수고를 만들어버릴 정도로 당당한 목소리여서 순간 페터는 당황해할 수 밖에 없었다. 행여나 레오가 들었을까 뒤돌아보았지만, 다행히도 알렉스와 함께 몬스터를 잡느라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괜찮아, 레오도 알고 있고 유명한 얘기야. 아버진 레오를 매우 늦게 가지셨지, 형들에게는 자식뻘이야. 애당초 정상적인 시민이라면 그렇게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진 않았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비정상적이라고 말하는 모습에 페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여태껏 이런 레널드 헬하우스를 본 적이 있었을까,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모습이야 낯익었지만 그래도 그 대상이 가족이라니 살짝 무섭기까지 했다. 그는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레널드가 건네어주었던 코코아를 마셨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 너랑 네 아버지가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어떤데?”

그 말에 레널드는 놀랐다는 표정으로 페터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내가?”

그래. 솔직히 너희 아버지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너와 헷갈렸을정도로.”

하하, 말도 안돼.”

레널드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에 페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웃음은 이내 잦아들더니 조소로 변했다. 뒤에서 드디어 이겼다고 레오가 크게 소리쳐 그 다음 레널드가 한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페터는 그 입모양을, 그리고 레널드의 표정으로 대충 그가 뭘 말하고자 했는가를 짐작했다.

 

아버지는 하얗지 않아.

 

 

12.

 

레오는 하룻밤 내내 알렉스와 놀다 다음날 아버지와 함께 돌아갔다. 페터는 알베르토에게 안겨 차에 올라타는 레오와 그 뒤를 따르는 로날드를 보며 전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레널드가 그에게 대놓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어쩐지 레널드가 자신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고 또한 불편해하기도 했다. 사실 하얗지 않은건 그의 동생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레널드는 새까만 자신의 동생은 매우 익애했다. 애당초 후계구도와는 동떨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로 아이를 좋아해서인지는 모르나, 알렉스와 놀다가 지치면 아이는 형의 품으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알베르토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곤 했다.

불청객들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날씨가 좋으면 낮에는 근처의 스키장에 가서 스키를 배웠고, 밤에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체스를 두거나 했다. 가끔씩 알렉스가 챙겨온 게임을 할 때도 있었는데, 언제나 레널드가 꼴찌가 되어서 벌칙을 걸 수 없어 김이 빠지기도 했다.

겨울별장에는 위스키종류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비싼 빈티지와인뿐이었다. 할아버지대부터 이어온 별장이라 그런지 와인창고에는 오래된 와인들이 가득했다. 알렉스는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와인을 발견했는데, 레널드는 그날밤 기꺼이 그 와인을 땄다. 태어나기도 전의 와인맛은 생각보다는 그냥 와인맛이라, 페터는 비싼 것도 똑같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알렉스는 취하면 레널드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는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다. 검은 고양이가 누군가에게 달라붙는 건 학교에서도 많이 본 모습이라 어색하진 않았지만, 그런 알렉스의 머리털을 레널드가 세심하게 만지는 모습은 많이 낯설고 간지러운 광경이었다. 그러다 골골거리는 소리도 잦아들고 완전히 잠에 빠졌을 때, 그제야 페터는 레널드에게 그 날의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거 이 녀석도 알고 있어?”

?”

네가 네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하는거.”

그 말에 레널드는 잠깐 고심하는 듯 하다 대답했다.

“...알렉스에게 그런 소리는 안해.”

나한테는 했잖아.”

넌 너니까. 알렉스에겐 굳이 할 이야기도 아니었고.”

알렉스는 모르는 이야기란 점에서 그는 조그만 희열을 느꼈다. 요즘 꽤나 둘이서만 놀러다니는 통에 소외감을 느낀 참이었는데, 그게 조금은 가셨다. 페터는 이왕 더 깊숙이 들어가보자 싶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왜 나한테는 했는데?”

... 너는 친구잖아. 그리고 너라면 이해해줄거라 생각했으니까.”

친구라는 말을 꺼냈을 때, 레널드는 왠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긴 그의 입에서 그런 단어를 듣는건 처음이라, 페터도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럼 이 녀석은? 이 녀석도 친구잖아.”

아냐.”

너무 즉답이었다. 그걸 알아챘는지 레널드는 횡설수설해가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알렉스랑 너랑 어떻게 같아? 알렉스는 알렉스고 너는 너인데.”

질문을 묘하게 회피하고 있었지만 페터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다른 종류의 친구인가보다, 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다른 종류의 친구, 굳이 따지자면 알렉스는 레널드의 방에서 잘 수 있고 자신은 아닌, 그러나 레널드의 콤플렉스는 엿볼 수 있는 그런 친구.

페터는 그게 그다지 기분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특별한 종류의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 들뜨기까지 했다.

 

 

13.

 

겨울방학이 지나고 3학기에는 세미나가 활황이었다. 레널드는 세미나를 주도해서 맡지는 않았지만 신입생 한명을 전담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신입생은 당연하게도 레널드의 멘티인 라즈반 블라드였다.

잠깐, 페터, 저 뱀파이어는 뭐야?!!”

언제나처럼 집에 놀러왔던 알렉스는 서재에 비뚜름하게 앉아있던 라즈반을 발견하고는 기겁했다. 그는 자신의 자리였던 카우치를 뺏겼다는 사실과, 당분간 레널드가 이 지독한 표정의 뱀파이어와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저씨, 어떻게 좀 해봐. 저긴 내 자리였잖아.”

우선 블라드씨는 내 후배로 여기 온거고 넌 친구로서 온거잖아. 그리고 카우치는 네 전용이 아냐.”

그러고는 냉담하게 문을 닫아버린다. 결국 알렉스는 울고불고 문을 발톱으로 긁다가 페터에게 걸려 밖으로 쫓겨나고는 수리비까지 청구당했다. 그 광경을 보는 라즈반의 얼굴은 그야말로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간 미소로 가득했다. 성격이 더럽다고 탓하고 싶었지만, 라즈반이 올때마다 집사가 집안일을 도와주는 터라 바깥으로 내뱉을 수도 없었다.

라즈반의 집사는 입이 가벼웠다. 분명 레널드네 알베르토라면 전혀 내놓지 않을 주인의 과거사까지 샅샅이 페터에게 내놓곤 했다. 가족과 불화가 있어서 인간계로 도망쳤다가 결국 잡혔다, 그리고 어떤 조건을 달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입은 걸걸하지만 그래도 착한 분이세요.”

집사가 따로 있고 그 집사가 마법을 정액제로 쓰는걸 보면 분명 잘사는 집안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뱀파이어는 꽤나 낯설었다. 페터는 세간에 떠도는 뱀파이어에 대한 소문은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경계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루카스는 페터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하며 어떻게든 도련님의 인상을 좋게 보이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라즈반과 알렉스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은 이상한데서 모가 안맞았기에, 싸우는 것 이전에 서로를 조롱하다가 무시하기 일쑤였다. 덕분에 레널드는 아예 알렉스와 라즈반의 스케쥴을 조정해야만 했는데, 세미나 일정이 촉박한 지금은 알렉스는 거의 밤이나 되어서야 레널드와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보고싶었다고 레널드를 품에 안으며 갸릉갸릉거리곤 했고, 그 모습을 라즈반이 꽤나 흥미로운 모습으로 쳐다보곤 했다.

헤에, 선배님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네.”

뭐 꼽냐?”

저 고양이, 정말로 친구사이란거 맞아?”

그래, 이제 1년 되었는데, ?”

그 말에 라즈반은 콧방귀를 치며 페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비웃는듯한 모습에 페터도 조금씩 열이 올랐다.

너 경찰이 될거라면서 정말 눈치가 없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범인을 잡을래?”

뭐라고?!”

아이고, 도련님! 죄송해요, 페터씨. 도련님이 원래는 착한 분이신데 또 이러시네요, 하하.”

루카스는 라즈반을 안으로 감싸고 돌았다. 페터는 저 싹수가 노래진 원인이 루카스가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하여간 라즈반이 꽤나 페터네 하숙집에 드나든 덕분에 세미나는 무사히 끝이 났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에 대학에서는 이상한 스캔들이 터졌다.

 

 

14.

 

루시퍼 주립대학 지옥축구부의 쿼터백 메이슨 잭이 정학을 받은 건 이미 학내에 널리 퍼져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학교 측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고 학생 측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즉 몇몇 시험이 끝날 때 쯤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실 메이슨 잭은 유성애자였으며, 지옥축구부 기숙사에서 다른 시민과 성적인 행위를 했기에 정학처분을 받았다는, 악독하다면 악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시험이 끝날때까지 더욱 널리 퍼졌고, 결국 매스컴에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침 방학이 시작되었던 터라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교수님이 학교측에 진상조사를 요구하셨어.”

그럼에도 학교에 남아있는 몇몇 학생들은 그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그건 연구실 때문에 항상 학교에 붙잡혀있는 레널드도 마찬가지였다. 한달정도가 지나자 매스컴은 잠잠해졌고 그 소문은 다시 묻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뜻밖에도 레널드의 담당교수가 다른 교수진들과 함께 이번 일을 들고 일어났다. 학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학칙에는 범법자에 대한 학교 측의 처벌이 가능하다고 되어있는데, 문제는 이 조항이 애인금지법과 얽혔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메이슨 잭이 유성애자고, 애인이 있기 때문에 범법자가 된다는거네?”

. 하지만 차별금지법에 따르면 유성애자에 대한 차별도 엄연히 금지사항이야. 이 경우에는 학교측의 과실이 되는거지.”

저녁식사를 하다 우연히 나온 질문에 레널드는 제법 쉽게 대답해주었다.

너희 교수님은 애인금지법 조항은 넣지 말아야한다고 보는거군.”

원래 사장된 법이고, 지금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거든. 아무튼 법이 충돌하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우리 학교가 좀 보수적이지, 그래서 정말로 메이슨 잭에게 정학을 내렸고, 그 진상이 밝혀진거다? 아마 학교측에서는 더 높은 처벌을 원했지만, 문제는 메이슨 잭이 에이스 쿼터백이라는 점이겠지.”

덕분에 이번 시즌은 망쳤지만 말이야.”

하지만 학교는 다음 시즌을 위해 정학결정을 내렸다. 페터는 잭이 유성애자라고 기정사실이 되는 과정에서 제법 흥미를 느꼈다. 유성애자라니, 텔레비전에서나 볼법한 시민들이 아니었던가. 뉴스에서 가끔 애인금지법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를 보곤 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옆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일은 처음이었다. 레널드는 세상의 가쉽은 신경쓰지 않는 부류였지만, 이번 사건은 교수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사했다고 말했다. 조만간 신문기사에서 정식으로 이 문제가 올라갈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넌 어떤데?”

?”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 말에 레널드는 포크를 내려놓고는 찬물을 마셨다. 물 넘어가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릴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어차피 없어질 법이야.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그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었지만 페터도 그 쯤에서 포기했다. 어차피 이야기야 나중에 들을 수 있을 것이고, 자세한 이야기는 매스컴들이 알아서 파헤쳐줄 것이다. 그리고, 메이슨 잭의 이야기는 다음 학기가 되면 또 이어질 것이라고 그는 성급하게 생각했다. 메이슨 잭은 텔레비전에 자신의 일이 뉴스로 뜨자마자 학교에서 자퇴해 어디론가 잠적했다.

 

 

15.

 

알렉스는 여행 내내 기운을 못 차리고 있었다. 기껏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인간계로 여행을 왔건만, 메이슨 잭 사건이 그에겐 크나큰 충격인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그 악마와는 꽤나 친한 사이로 몇 번 술자리도 가졌다고 했다.

좋은 놈이었는데... 매번 술을 마실때마다 자기네 집에서 만들었다는 특제 위스키도 갖고 왔었단 말야.”

알렉스는 몇 번 그 악마의 과제도 도와준 적이 있다면서, 스포츠카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에도 힘을 빼고 거의 누워있다싶이 앉아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페터도 불편한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순히 흥미로 생각했던 일로 한 시민의 인생이 망가질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운전을 하는 레널드만이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을 뿐이었다.

거의 아웃팅을 당한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본인으로선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거야.”

불미스러운 일이 불미스러운 소문과 사실을 만나 결국 파국을 낳아버렸다. 레널드는 학칙을 지적했던 교수도 꽤나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말하며 대교로 자동차를 몰았다. 페터는 순간 제 앞에 앉아있는 이 지옥개가 어쩐지 낯설어보였다.

알렉스의 상태가 안 좋았지만 여행은 재미있었다. 페터는 여전히 털이 없는 자신의 몸에 익숙하지 않았고 주둥이가 짧아져 자주 음식을 흘렸지만, 여름에 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좋아했다. 물론 매일 아침 수염을 깎는 것은 제법 곤혹이었다. 그는 왜 악마들이 그렇게나 수염에 집착하는지 의아해하며 전기면도기를 쓰곤 했다. 그에 비하자면 알렉스는 수염을 방치하는 편이었고, 매일 아침 레널드가 그를 붙잡고는 억지로 수염을 깎았다.

메이슨 잭의 일을 겪고 인간계에 오니 페터의 눈에는 그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였다. 남녀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걸어가거나 부부가 나란히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들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어떤 남자 둘이 나란히 걸어가다 가볍게 입을 맞추는 광경이었다. 그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보았고, 갑자기 큰 고독을 느꼈다.

“...페터?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여긴 지옥과는 반대다 싶어서. 여긴 유성애자들이 더 많잖아.”

애써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이성이건 동성이건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다. 페터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여기에는 지천에 널려있었다. 여전히 침울해져있는 알렉스에게 핀잔을 던지면서도 그 사랑이란 감정이 문득 궁금해졌다.

바에서 만난 여자는 그 말에 꽤나 놀라며 더욱 페터에게 이야기를 캐내었다.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흑인 여자는 페터가 무성애자란 사실에 자기 친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진짜에요? 막 뽀뽀하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내가 있는 곳이 다 남정네들 뿐이라서요.”

그럼 여자를 봐도요? 어머, 그럼 나도 안되겠네? , 꽤 괜찮게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여자는 혀를 차며 헌팅에 실패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그쪽이 잘생겼다고 술을 몇잔 사주었는데, 페터로서는 여자가 친구로서는 꽤나 괜찮아보였다.

성적으로 끌린다는게 뭔지는 몰라도, 당신은 인간적으로는 끌리네요. 고마워요.”

그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 다 넘어간다니까. 당신, 진짜 무성애자 맞아요? , 그럼 어쩔 수 없죠. 좋아요, 이건 인사에 대한 답례.”

여자는 페터의 볼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페터도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서 부끄러워하다 다시 답례로 여자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의 입에서 치사하다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꽤나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니, 거실에서 알렉스가 여느때처럼 레널드의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레널드는 여전히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다가 페터에게 왔냐고 말했다. 그 평화롭고 일상적인 광경을 보다 페터는 문득 괴리감을 느꼈다. 그의 눈에는 레널드의 저 눈빛이, 저 부드러운 빗질이, 알렉스가 레널드의 허리를 안고서는 뺨을 부비는 모습이 마치 방금 전 여자가 호의로 했던 키스처럼 보였다.

바에서 많이 마시고 왔어?”

? .. .”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밌는 걸 샀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페터는 쭈뼛거리며 레널드와 닿지는 않을 애매한 거리를 두고 소파에 앉았다. 레널드의 표정이 방금 전 알렉스를 다룰 때와는 달리 미묘하게 변한다.

정말로 친구사이란거 맞아? 뱀파이어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16.

 

개학하고나니 학교는 스캔들로 인해 더욱 더 논란의 도가니로 변해있었다. 광장에 자신이 유성애자임을 밝히며 학교측의 처분에 대해 반발하는 대자보가 붙여졌다. 학내에 있는 유성애자 동아리에서도 성명을 발표하며 학교의 유성애자 탄압에 대해 지탄하고 있었다.

연일 캠퍼스에서는 사라져버린 메이슨 잭과 그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터져나왔다. 몇몇은 기숙사에서 그런 짓을 벌였다는 점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고, 대놓고 혐오발언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페터는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친구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말로는 자기에게 폐만 끼치지 않으면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알렉스와 레널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신학기에 들어서자 하숙집에 오는 빈도를 줄였다. 그렇다고 둘이 싸웠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알렉스가 일부러 조절하는 것 같았다. 대신 둘은 전화를 많이 했다. 가끔씩 레널드가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리곤 했다.

메이슨 잭과 기숙사에서 성적인 행위를 했다고 추측되는 시민들은 몇 있었지만 아무도 대놓고 그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저 술자리에서, 아니면 그냥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서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나갔다. 알렉스는 그 소문의 중심지에 있었다. 컴퓨터에 관해서라면 총장도 인정할만큼 실력자이니 모두들 알렉스라면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럴때마다 그는 꼭 어느 과의 누군가라는 이야기를 해놓았지만, 정작 그 누군가는 아예 없는 인물이었고 그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면 이름을 잘못 알았다고 말하곤 했다. 소문은 재벌가의 누군가가 부정입학했다는 스캔들이 터지고나서야 가라앉았다. 학생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고, 그렇게 자연스레 메이슨 잭과 그의 수수께끼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술자리의 안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입학처장이 파면되고 총장까지 바뀌었지만 알렉스의 위상은 바뀌지 않았다. 시위가 시작되면서 알렉스는 자연스레 다시 자취방에 자리잡았다. 마치 그 스캔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바쁜 레널드에게 달라붙었다. 시위가 끝날 때 즈음에 알렉스는 중고로나마 자동차를 샀다. 10년된 왜건이었지만 전주인이 관리를 잘한터라 내외부가 깔끔했다. 주말에 페터는 몇 번 알렉스의 차를 얻어타고 드라이브를 즐겼고, 레널드는 자신의 차가 있음에도 가끔씩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밤산책을 하곤 했다. 그리고 밤산책을 하고 난 다음날엔 이상하게 알렉스는 차에 태워주지 않았다.

그렇게 메이슨 잭 사건이 잊혀져가는 와중에도 대자보는 누군가가 관리하는지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켰다. 페터는 학우들과 광장을 지나다니며 그 대자보를 볼때마다 이상하게 하숙집에서만 붙어다니는 두 시민을 떠올렸다. 레널드는 어젯밤에 또 밤산책을 나갔고, 알렉스는 또 오늘 아침에 태워달라는 페터의 요구를 거절했다.

 

 

17.

 

알렉스의 동생은 아예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할로윈 연휴 전날, 다같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다 연락이 왔는데 또 연휴 때 오겠다는 것이었다.

너희 아버지 어떻게 허락하셨대?”

이번에는 삼촌하고 짜서 그쪽으로 가겠다고 속였대. 이 녀석, 표까지 위조해서 보여줬대. 역시 될놈이었어.”

네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알렉스가 하도 들떠있어서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작년에는 근처의 공원에서 죽치고 놀았으니 이번에는 아예 놀이공원에 가야 하냐고 친척에게 물을 정도였다. 친척은 동생의 연령을 듣고는 그 나이대라면 차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헬스파크가 괜찮을거라고 대답해주었다.

난 거긴 별로던데. 게다가 연휴니까 시민들도 많이 모일거 아냐.”

무슨 소리야! 오히려 놀이공원은 시민들이 없으면 더 재미없는거야. 몇시간을 기다려 롤러코스터를 타는게 얼마나 짜릿한데!”

그건 너야 그렇지.”

레널드는 알렉스가 흥분한 광경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저녁을 먹고는 또 본가로 돌아가야 했다. 친우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더 못보는게 제법 아쉬웠는지, 꼭 사진을 찍어서 보여달라고 할 정도였다.

괜찮으면 페터도 갈래? 거기 퍼레이드도 한다는데?”

아서라,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알렉스는 스마트폰을 뒤지며 페터가 좋아할만한 요소를 뒤지다 괴음을 내며 화면을 갖다대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냐, 싶었지만 정작 화면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새로 나온 롤러코스터 광고였는데, 스릴 넘친다던가 지옥 최대 높이 같은 수식어보다 그 외양이 대단했다. 사이렌을 단 경찰차모양, 그 모습을 훔쳐본 친척은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넌 예전부터 경찰차만 보면 호들갑을 떨었었지.”

어린시절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매우 끌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도 간간이 경찰들이 지나가거나 경찰차를 보면 시선을 뺏기곤 했었으니까 말이다. 페터는 자존심으로라도 저녁시간 내내 고심하는척 하다, 결국 운전은 알렉스가 전담하는 것을 조건으로 수락했다. 그 모습에 짐을 챙기던 레널드는 더더욱 아쉬워하며 기념품을 사오라고 말하였다.

사진도?”

그것도 좋지. 나 대신이라도 잘 놀아.”

알았어, 저 놈 사진도 많이 찍어놓을게.”

고마워.”

레널드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그리고 페터는 방에 틀어박혀 헬스파크에 대해 조사하고는, 자신도 상당히 이 모험을 기대하고 있다는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알렉스는 하숙집의 거실 소파에서 잠들고는-방주인이 없으므로- 곧바로 동생의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마침 페터도 볼일이 있었기에 그 근처까지 태워달라고 말했더니 괜찮다는 대답을 들었다. 아무래도 전날 레널드와 밤산책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페터는 뒷좌석에 앉았다. 알렉스는 레널드 헬하우스 이외의 시민은 절대로 조수석에 앉히지 않았기에, 페터로서는 선택지가 따로 없었다.

알렉스의 10년된 중고차는 오르막길에서는 힘에 부치긴 했지만 그 외에는 그럭저럭 쓸만했다. 문제는 운전자의 운전실력이었는데, 면허를 딴지 이제 반년이 된 이 검은 고양이는 마치 10년을 운전한 사람처럼 차를 몰았다. 즉 매우 부주의하게 운전을 했다는 말이었다. 사이드 브레이크가 내려갔는지 확인을 제대로 안한다던가, 아니면 끼어들면 위험할 것 같은 상황에서 끼어든다던가 하는 베테랑들이 여유롭게 하는 부주의들 말이다. 문제라면 이 검은 고양이는 베테랑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페터는 안전벨트를 매고는 오늘은 무사히 가게 해달라고 루시퍼에게 비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루시퍼가 기도를 들어줬는지, 기적적으로 알렉스는 여태껏 아무 사고도 내지 않았다.

페터는 시내로 가는 내내 지갑 속에 들은 현금을 확인했다. 그는 조만간 싱글소파를 주문할 참이었는데, 마침 친척이 보너스라면서 제법 두둑한 현금봉투를 주었다. 그는 사야할 목록들과 점찍어놓고 있었던 소파를 생각하며 다시 지갑을 닫았다. 그리고 그 순간 끼익 거리는 스키드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쏠렸다.

!”

미안미안! 주황불이라고 가려고 했는데 역시 무리다 싶어서.”

아무래도 이 검은 고양이는 안전수칙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페터는 앞에 거대한 대형트럭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아연실색한 채로 운전자를 바라보다가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정말로 말이야, 레니는 도대체 어떻게 이걸 견뎌? 네가 운전하면 내 수명이 100년은 줄어드는 것 같아.”

, 아저씨는 내가 운전하게 하지 않아.”

그럼 그렇지, 페터는 안전운전을 철저하게 지키는 그의 하숙인을 떠올리며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지갑은 방금 전의 급정거 때문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제기랄, 그는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시트 밑에 손을 뻗었다. 익숙한 가죽질감을 발견하자마자 그는 당장 그것을 들어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날카롭고 두툼한 비닐조각이 손가락에 거슬렸기에 그는 알렉스를 혼낼 생각으로 그것도 같이 들어올렸다.

, 너 제대로-”

? 제대로 뭐?”

알렉스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고, 페터는 순간 그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는 재빨리 그 비닐봉투를 지갑안에 쑤셔넣고는 주머니안에 넣었다. 밀폐된 비닐봉투에는 동그란 원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봉투 위에는 영어로 무엇인가 쓰여져 있었고, 그 쓰여진 것 중에서 LOVE라는 글자가 페터의 눈을 재빠르게 사로잡고 말았다.

"? 페터, 제대로 뭐?"

"...제대로 운전하라고."

 

 

18.

 

역시나 연휴를 맞이한 헬스파크에는 시민들로 인해 발 디딛을 틈이 없었다. 페터는 잔뜩 흥분에 들뜬 형제와 함께 걷고 이상한 머리띠까지 썼지만 그다지 그들에게 딴지를 걸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차에서 발견한 그것은 콘돔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몇 번 듣곤했던 단어였는데 실물이 이렇게 생길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인터넷의 바다속에서는 연일 콘돔 밀수와 몰래 판매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인간계에 놀러갔던 시민 중 몇 명이 그 밀수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다던가, 개인목적으로 산 콘돔은 적발도 불가능하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가, 알렉스를 가리켰을 때 무슨 의미인가는 페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태엽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페터, 뭐해! 빨리 줄서야지.”

페터는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경찰차 롤러코스터를 보고도 고개를 내저었다. 난 몸이 안좋은 것 같으니 먼저 줄서라고 말하면서, 동생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빼내었다. 그 말에 속은 동생은 형에게 줄을 지키도록 엄포하고는 페터를 따라갔다.

아이스크림을 사던 중 갑자기 레널드와의 일이 떠올랐다. 레널드가 사왔던 아이스크림을 실수로 먹었던 일이었는데, 왜 갑자기 그게 떠올랐는지는 페터도 알 수 없었다. 동생은 아이스크림을 한껏 입에 물고는 그 찐득한 단맛에 홀렸다. 그랬기에 페터가 벤치에 앉아서 쉬자는 얘기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줄 정도였다.

왜 이렇게 맛있는걸 아무도 모를까.”

알렉스도 그의 아버지도 단 것은 좋아하지 않았기에, 항상 동생은 자기 돈으로 디저트를 사먹어야했다고 했다. 그의 살집이 통통한 이유는 그것도 있을거라 예상하며 페터는 입을 열었다.

너희 아버지는 네가 여깄는거 모르지?”

그야 당연하지! 그 양반이 형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만약 또 들키면 이번에는 정말로 본인이 내려올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표에다가 삼촌이랑 짜서 사진이랑 목소리랑 이것저것 다 생각해놨어. 아마 직접 보지 않는 한은 내가 여기있는 건 모를거야.”

동생은 매우 자신있게 이야기하고는 다시 아이스크림에 집중했다. 그가 이번에는 딸기맛을 물었을 때에야 페터는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너희 형, 왜 아버지랑 절교한거냐?”

순간 동생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렸고 안타깝다는 탄성을 내뱉었지만 이내 페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코에 핑크빛 크림이 묻어있는 것도 개의치않고 대답한다.

아버지가 싫어했거든, 형을.”

그 전에는 사이 괜찮았을 거 아냐? 고등학교 졸업하고 갑자기 나빠진거지? 왜 그런지 넌 이유를 알잖아.”

알고 있어도 그쪽한테는 이야기 못해. 그 양반도 일부러 밖에 하지 않는 이야기인데 왜 내가 그쪽한테는 해야하는거지? 그게 그쪽과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도 없는 시민이 왜 남의 집안일에 신경을 쓰는거야?”

동생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근처를 지나가던 시민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 집중했다. 동생은 그걸 눈치챘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형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페터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네 형, 그러니까 알렉스는 사실 유-”

페터의 말이 끝기기도 전에 동생의 발이 먼저 그의 발을 밟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저항하려던 찰나, 귓가에 분노에 찬 검은 고양이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 바보야! 그걸 여기서 말하면 어떻게 해!’

그러고서는 페터의 팔을 붙잡고는 어딘가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페터는 당황해하면서도 동생이 가자는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에게 모두 말했어. 나도 옆에 있었으니까 똑똑히 기억해. 자기가 유성애자라고,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고. 나도 아버지도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해서 엄청 놀랐었어.”

동생이 끌고간 곳은 헬스파크 주변을 둘러싼 등산길 초입이었다. 아이들이 놀이기구에 집중하고 싶어해서였을까, 몇몇 늙은 시민들을 빼고는 보이지 않았다.

... 적어도 아버지가 그렇게 행동할 줄 몰랐어. 텔레비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도 아무 소리도 안했으니까. 그런데 형이 그 말을 끝내자마자 아버지는 형을 때렸어. 옆에 있던 부지깽이까지 들어서 내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할 정도였어. 형을 다음날 새벽에 집에서 도망쳤어. 1년이 지나서야 형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무사히 대학에 입학했다고 했어. 아버지에게 알렸지만 오히려 그런... 그런 더러운 것과 연락한다고 혼났었어. 아버진 형을 모르는 시민 취급 했어. 남들이 물으면 미친 짓을 해서 쫓아냈다는 말만 했지, 형이 유성애자란건 밝히지 않았어, 왜냐면 자기에게도 누가 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 얘길 지금에야 꺼내는거야? 여태껏 몰랐던거야?”

울음에 잠긴 목소리에 페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추측만 했던 것들이 진실로 밝혀지니 오히려 온 몸의 힘이 빠졌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했다.

적어도 너한테 듣고싶지는 않았어... 레니는? 레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거지,”

작년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잔을 깨뜨린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페터는 심한 배신감에 시달리면서도 가까스로 진정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레니지?”

동생은 시선을 피했다.

그건 몰라. 그리고 그것도 아웃팅이야, 함부로 꺼낼 이야기가 아냐. 이건 꽤 민감한 이야기야. 가족들은 소문에 시달리지, 본인은 언제 들킬지 두려워해야 돼. 차별금지법이라니, 알고 있잖아. 그쪽 학교의 학생이 어떻게 쫓겨났는지.”

알렉스는 메이슨 잭이 사라지고나서는 엄청나게 침울해했다. 그건 비단 친구가 사라져서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있었고, 그 상대방은 재벌가의 아드님이었다.

젠장!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은거야?!”

페터는 두 손으로 머리를 끌어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전전긍긍해하는 알렉스의 모습이 너무나도 쉽사리 상상되었고, 화가 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속았다, 라는 생각과 함께 둘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짜증났다. 라즈반의 말이, 눈이 삐었냐는 소리가 계속해서 상기되었다. 눈이 삔 건 사실이었다. 둘은 하숙집에서만 붙어있었고, 그걸 두 눈으로 보고서도 몰랐었으니까. 그래도 왜, 페터는 배신감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와서 어떻게 둘을 다시 본단 말인가.

그 말에 동생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말할 수 있겠어? 형은 이미 자기 아버지한테도 부정당했는데, 다른 시민이라고 똑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냐고? 내가.. 내가 보기엔 형은 그쪽을 정말로 좋아해.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같이 놀러오자고 할 이유도 없잖아.”

난 다른 시민이 아니었어. 난 적어도 친구라고 생각했었단 말야...!”

그 둘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되감기되다 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랐다. 그 시간들이 계속해서 그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가 눈물로 터져나왔다. 페터는 이제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할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19.

 

페터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재키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는데, 이 무성애자 남자가 갑자기 자신에게 전화를 걸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그녀는 만나고 싶다는 문자에 드디어 사랑을 깨달았구나, 싶었지만 정작 카페에서 만난 매력남은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한 친구 둘이 알고 보니 사귀고 있었고, 그걸 1년넘게 숨기고 있었다고요?”

. 그때 같이 왔었던 친구들이요.”

그러고보니 페터는 그때 부자 친구의 도움으로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부자친구랑 유난히 친한 해커친구까지, 세명이서 미국에 여행을 왔는데 바로 그 둘이 사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페터는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는 도움을 청할 곳을 찾다가 자신을 떠올렸다고 했다. 고작 한시간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 정도로 자신을 떠올려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고 또 단도직입적이라 그녀도 적잖이 당황했다.

알고 있는 유성애자는 당신밖에 없었거든요.”

도대체 어디서 온거에요? 아는 유성애자가 나밖에 없다니. 무슨 천당이나 지옥에서 왔어요?”

그 말에 페터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뭐라 변명하려다 말았다. 말하면 말할수록 더 꼬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재키는 커피를 마시고나서는 말했다.

일단 그 친구 둘이 동성인거죠? 친하게 지내던 친구 둘이 동성애자고 사귄다고 하면 당연히 충격을 먹었겠네요.”

페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받아들이는게 그나마 자연스러웠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런 사랑은... 금지하는 법도 따로 있어요. 처벌받는 경우는 없지만.... 게다가 그 부자친구네 집안은 세간에서도 유명해요. 그 해커놈은 집에서 의절당했고요.”

나라도 말 못하겠네,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아무리 친구라도 한번 수틀리면 그대로 원수라고요. 그런 곳이라면 가족이라도 말하는게 힘들겠네.”

“...정말로 그런걸까요?”

재키는 다리를 바꿔꼬아서는 의기소침해있던 페터를 바라보았다. 마치 비에 홀딱 젖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게 안타까워보였다. 이 남자는 성적인 사랑을 모르고 앞으로도 깨달을 길은 없을 것이다. 그걸 친구 둘이 자신 몰래 하고 있었다.

난 그 둘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친구처럼 대하면 되는걸까요? 그런데 날 속였다는게... 그게 견디기 어려워요.”

의외네요.”

?”

페터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들 중에는 게이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신은 그냥 친구가 게이였고 자길 속였단게 충격이지, 그런 감정은 없는거잖아요?”

그 말에 페터는 더더욱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자신은 절대로 알렉스와 레니를 무서워한 적이 없었고 혐오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더군다나 알렉스는 이미 아버지로부터 부정당했다. 자신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당신도 당신 친구들도 운이 좋아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좋아하잖아요? 나라면 애인이랑 여행올 때엔 친구는 안데리고 온다고요. 게다가 당신도 그 둘을 너무 좋아하니까 이렇게 고민하는거겠죠? 그냥 이런 경우에 할 만한 일을 하세요. 나도 만약에 친구 둘이 나에게 중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면 화를 냈을거에요. 하지만 그리고 이해했겠죠.”

알렉스는 그 사실을 페터에게 밝힐 수 없었다. 왜냐면 이미 가족으로부터 안좋은 소리를 들었으니 페터가 그렇지 않을거라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동생의 말대로, 알렉스는 페터를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페터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속이 쓰려왔다. 이해하는 것과 화가 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거면 된거에요.”

재키의 부드러운 손이 페터의 손 위에 올라온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20.

 

페터가 일주일만에 지옥에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에서 확인한건 수십통이 넘는 문자와 부재중 전화였다. 학우들이 보낸 것과 함께 알렉스와 레널드가 보낸 것도 한가득이었다. 짧지만 단호하게 어딨냐고 걱정스레 묻는 레널드의 문자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선 그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강의 도중에 전화를 받은 레널드는 어디있었냐고, 여태껏 페터가 들어본 적이 없던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레널드는 감정에 복받쳤는지 잠시 숨을 고르다가 알렉스와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본인답지 않게 장황하게 말했다. 순간 재키의 말이 떠올랐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좋아하잖아요? 페터는 그 때 그 말에 대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는 이 친구들이 빌어먹게 너무 좋았다.

 

 

21.

 

알렉스는 사색이 된 채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덕분에 페터는 자신이 정말로 경찰이 된 더러운 기분을 느껴야했다. 반면 옆에 앉아있던 레널드는 평상시처럼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테이블 위에 서류봉투를 올려놓은걸 보면 무언가를 준비해놓은 것 같았다. 친척은 차분히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무거운 공기가 식당을 짓누르다 금새 터질것만 같아 일단 페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네가 말할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내가 네 동생을 좀 닦달했어.”

알렉스의 귀가 한없이 내려갔고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자 레널드가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그 행동에 페터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껴야했다. 행여나 아니라고 부정하는 소리를 들었다간 정말로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괜찮아, 페터잖아.”

그제야 알렉스도 조금 안정을 차렸는지 귀가 곧게 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동생에게서 들은 말은 다 사실이야. 그걸 페터에게 숨길 마음은 없었어.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뿐이야. 드러냈다간 별로 좋지도 못한 일이니까. 게다가... 아저씨도 엮어져서 더더욱 말할 수 없었어.”

“..알아. 그래도 서운한건 어쩔 수 없더라. 난 적어도 너희들의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더더욱 말할 수 없었어. 미안해, 페터.”

알렉스의 고개가 내려가자 레널드가 부드럽게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평상시에도 보이는 행위이건만, 이제야 페터의 눈에는 이 지옥개가 검은 고양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있는지가 보였다. 페터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걸 남에게 알릴 생각은 없어.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래 너희들이 유성애자란걸 안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걸 숨겼다는게 더 충격이었거든. 솔직히 배신감도 좀 들었어. 하지만 알고 있어. 그건 말하기 쉬운 문제가 아냐. 그래도 난 괜찮아. 너희들이 어떻든간에, 그냥 난 너희를 많이 좋아하고 너희 친구일 뿐이야.”

그 말에 알렉스의 고개가 한없이 내려갔다. 울음을 참느라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웠고, 페터는 자신의 말이 생각보다 부끄럽고 겸연쩍었기에 시선을 돌리다 레널드가 서류봉투를 거둬가는 모습을 보았다. 레널드는 긴장이 풀렸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도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페터는 이 분위기가 매우 불편했기에 뭐라도 말을 꺼낼까, 생각하다 그걸 꺼내기로 했다.

사실 네 차안에서 이걸 주웠어.”

재키와 함께 했던 일주일동안 페터는 이 콘돔이라는 물건의 쓰임새와 사용법을 배웠다. 섹스는 생각보다는 기분이 좋았으나 그것뿐이었고, 재키에 대해서 성적으로 끌리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에 더더욱 안타까워하면서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간 덕분에 페터는 레널드의 방에서 이뤄지는 비밀스런 마사지라던가 다음날에는 절대로 차에 태워주지 않는 밤산책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연인은 서로의 몸을 원한다, 그 방식 중의 하나가 섹스였고 그 둘은 그걸 한 것 뿐이었다.

페터가 내놓은 콘돔에 당황한 것은 알렉스 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꼬리털이 곤두세워질 정도로 깜짝 놀랐는데 옆에 있던 레널드도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그 정사각형 비닐포장을 보았다. 둘은 매우 민감한 프라이버시를 들켰다는 사실, 즉 차 안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건 그러니까-”

나도 이게 뭔진 알아. 그리고 방에서나 차에서 뭘 하는지도 알고.”

그 말에 알렉스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귀가 검붉어지는 것이 꽤나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반면에 레널드는 평온을 되찾고는 페터가 올려놓은 콘돔을 거두어갔다. 마치 증거물을 압수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선 다시 알렉스의 등을 몇 번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괜찮아, 샌디.”

샌디? 페터는 놀란 눈으로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그건 이 둘과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들어본 별명이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레널드도 순간 당황해하다 순순히 모든 것을 인정했다.

그래, 나만 부르는 애칭이야.”

“...언제부터?”

작년 여름방학때부터.”

별장에서?”

아니, 시작했을 때.”

그 말에 페터는 아연실색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예전부터 이 둘은 서로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라즈반의 눈이 삐었다,라는 말을 다시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귀게 된 것은 역시나 할로윈 연휴 때, 욕실에 갇혀있었을 때였다고 레널드가 말했다.

먼저 고백을 한건 나였어.”

뭐라고 했는데?”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레널드로서는 매우 부끄러웠는지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간신히 대답했다.

“...평생 놓아주지 않을거라고 했어.”

“...우와.”

로맨틱이라기보단 집착에 가까운 발언이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옆에 앉아있는 알렉스의 귀가 더 새빨개진걸 보면 어지간히 애정이 담긴 표현인 모양이었다. 그는 이 천둥벌거숭이같던 검은 고양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있는, 사진이라도 찍어서 가보라도 남기고 싶은 광경을 아쉬워하며 이제는 미지근해진 차를 마셨다. 친척은 아직도 방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는 대충 끝이 난 것 같았지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끊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서류봉투는 뭐야?”

이제 필요없어졌어.”

도대체 뭐였길래?”

그 말에 레널드는 다시 평소의 표정대로, 아니 그보다는 세미나를 할 때처럼 공적인 표정으로 답했다.

네가 협박할 경우 가할 수 있는 모든 법적조치에 관한 내용이었어.”

그 말에 페터는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우와 다행이다, 라는 말조차 그는 내뱉을 수 없었다.

 

*

 

이야기가 대충 끝날 기미를 보이자 친척이 하품을 하며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 끝났냐고 말한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알렉스가 많이 힘들었나보네. 하긴 커밍아웃하는것도 힘드니까.”

그 말에 알렉스와 레널드 둘 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페터도 경악한 얼굴로 친척을 바라보았다.

왜들그래? 아니 쟤 올 때마다 레니한테 엉겨붙잖아. 누구라도 보면 알아채겠다. 난 오히려 네가 못알아챈게 더 신기했던걸.”

그 말에 페터는 레널드 쪽을 흘깃 보다가 답했다. 친척은 오해는 하고 있었지만, 개구리를 맞히듯 어쩌다가 정답을 알아낸 것이다.

쟤 학교에서 다른 시민들한테도 저래요.”

그리고 의외로 그 말에 놀란건 레널드였다. 레널드는 알렉스쪽을 보더니 진짜냐고, 은근히 감정이 실려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졸지에 행태가 모두 밝혀진 검은 고양이는 그것과 그것과는 다르다고 해명하다가 점차 목소리가 높아졌다. 페터는 점점 격렬해지는 둘의 대화를 보면서 곁눈질로 친척을 바라보았다. 친척을 겸연쩍었다는 듯 머리통을 긁으며 다시 방으로 사라졌고, 페터는 일단 싸움 직전까지 가는 둘을 말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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