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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The white donkey will bray and bray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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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The white donkey will bray and bray

rabbitvaseline 2015. 8. 20. 04:14




그러고보니, 라고 막 가운을 벗고 퇴근 준비를 하던 헬렌이 말했다. 퇴근하고 곧바로 부하들을 데리고 코리아타운으로 가겠다고 포부를 밝힌 헬렌은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춘 제 동료에게 마치 내일은 비가 올것 같다는 듯이 평범하게 말했다.


"나타샤랑은 어디까지 갔나요?"

"네?"


브루스 배너는 순간 호흡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가 헬렌과는 아주 절친한 동료사이이고, 나타샤 로마노프와도 아주 절절한 연인사이이기는 했으나 사실 둘은 그다지 큰 접점이 없었다. 건강검진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헬렌과 나타샤는 만나서 이야기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배너와 더 자주 만났을 터였다.


"아니, 아까 그쪽이 나타샤랑 전화할 때 좋아보여서요."


그 말에 배너는 얼굴을 붉히고는, 몇시간 전에 나누었던 달달하다 못해 꿀이 떨어지는 대화를 생각했다. 그도 제 나이대의 남자-즉 40대의 미국 남자-답게 어찌 보면 무뚝뚝한 구석도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타샤와 전화통화-평상시 대화는 오히려 담담함의 극치를 달린다.-를 할 때마다, 어째서인지 보고 싶다느니 당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태양같아서 예쁘다느니 하는 토니가 들으면 기함할만한 소리를 내뱉는 것이었다. 헬렌은 휴식시간에 잠시 차를 마실까 하고 탕비실에 들렀다가, 뚝뚝 떨어지다못해 바닥에 고이고있는 그 꿀덩어리 대화를 들었다.


"공주님이라는 말이  나올것만 같았어요."


그 말에 배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왕님이란 말을 더 좋아해요."

"해본 적이 있나보죠?"

"....노코멘트로 해두죠."


어느새 헬렌은 자신의 가운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후였다. 이제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근처의 한식당으로 가면 되는 일이었다. 맞아요, 연구실을 나가려다말고 그녀는 뒤돌아서서 또 무슨 일이냐는 둥 바라보는 배너를 향해 말하였다.


"그러고보니 한국의 시 중에 이런게 있어요."

"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요."

"네?"


배너는 순간 헬렌이 내뱉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중간에 나타샤, 라고 말한 것을 보아 시 제목 중간에 나타샤가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난 한국어 못해요, 헬렌."

"찾아봐요, 잘 하면 영어로 나온 것도 있을걸요. 아니면 아예 영한사전을 뒤지던가요."


요즘 어플이 많더라구요, 하면서 헬렌은 복도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호호, 거리며 왠지모르게 의기양양하게 웃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갔다.




"한국어?"


한국어를 할 줄 아느냐는 말에 토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브루스 배너라는 사람이 토니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무언가를 물을 때는 학술적인 문제라던가 타워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제 앞에서 친우가 한글이 적힌 페이퍼를 들고 난색을 표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읽을 줄은 알아. 옛날에 군수산업할때 남한에서 많이 사갔거든. 그쪽에도 몇번 갔었고. 그렇지만 배너, 왠만한 번역은 프라이데이에게 맡기면 되는걸 갖고, 갑자기 한국어는 왜?"

"실은 헬렌이 시를 가르쳐줬거든."


토니는 배너에게서 페이퍼를 건네받았다. 하얀 A4 용지의 첫줄에는 멋들어진 글씨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무슨 뜻이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는 뜻이야. 헬렌도 제법인걸, 그 나라에서는 다들 시를 한편씩은 아는 모양이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던데."


토니는 능숙하게 시를 읽어내려갔다. 그의 한국어발음은 상당히 딱딱하면서도 정확했는데, 예전에 군인들을 상대로 생고생을 했던 덕분이었다. 밀당의 달인들이야, 끼워주기를 이것저것 해줘서 간신히 팔아넘겼어, 라며 말하는 걸 배너는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아?"


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몇번 읽어내린 후에야 간신히 작은 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입가에 잠시 미소가 어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말해주지 않을래."

"뭐?"

"이건 자네가 직접 알아야 더 좋겠어. 헬렌도 참 사악한 면이 있단 말이야. 말했잖아, 프라이데이에게 맡기면 금방이야. 뭐, 이런 내용이라면 천천히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토니."


배너의 살짝은 높아진 음성에 토니는 양 손을 든채로 항복, 이라고 말하였다. 프라이데이에게 한글 알파벳을 띄워보라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토니와 배너 사이에 커다란 화면이 떠올랐다. 기묘하고도 기하학적인 조각들이 있었다.


"알파벳만이야, 읽는 법만 가르쳐주지 나머지는 직접 해야 돼."


그러면서 , 부터 손으로 가리켰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배너는 한손은 한글을, 다른 손으로는 사전을 찾아가며 또박또박 한국어로 읽어내려갔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번역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아름다운 나타샤가, 왜 하필이면 부족한 나를 사랑해서- 나타샤가 저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산골로 가자, 라는 대목을 읽었을 때, 순간 그는 행동을 멈추어야 했다. 바튼의 집에서 있었던 일련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다시금 펼쳐졌다. 도망가야 한다고 말하는 자신, 같이 가자고 하였던 나타샤. 결국 그 혼자 도망치는 걸로 관계를 끝내려고 했었다. 그걸로 모든 것을 끝낼 수만 있었다면, 아마 혼자서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너는 나타샤의 곁에 있기로 정했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에서와는 달리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이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어쩐지 시의 화자에게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된 것 같아서, 배너도 상당히 놀랐다. 그도 공학의 신도로서 문학은 가끔씩 소설이나 읽을 뿐, 시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시라니, 그는 순간 당황하여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그는 그 구절이 왠지 모르게 뼈저리게 아프다고 느꼈다.

다음 구절로 가기 위해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브루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배너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전혀 온 기색을 눈치채지도 못했는데도, 어느새 나타샤는 배너의 뒤에서 그 시를 다시금 찬찬히 읽고 있었다.


"브루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이 구절 마음에 드네요."


"나타샤."


나타샤는 수줍게, 마치 시 속의 나타샤처럼 새하얗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배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제 연인을 보고 있었다. 마치 야한 책이라도 들킨 심정이었다.


"당신이 한국어로 시를 쓰지는 않았을테고, 이건 또 어디서 용케 찾았대요?"

"당신 한국어를 할 줄 아는군요?"

"어머, 러시아와 북한은 붙어있어요. 몇번 잠입도 했었다고요."


그러면서 다시 능청스럽게 시를 읽어내려갔다. 다만 종이에 적힌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나타샤라는 제 이름 대신 브루스라는 이름을 바꿔 읽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나타샤가 저에게 러브레터라도 읽어주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홧홧거렸다.


"브루스는 어디가 좋아요?"


어느새 나타샤는 제 몸을 배너의 등에 기대고 있었다. 심장박동이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양 팔은 배너의 목 사이로 뻗어서 종이를 부여잡고 있었고, 턱을 배너의 왼쪽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배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마치 귀여운 당나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시의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여기도 좋은 것 같아요."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녀의 손가락은 응앙응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그맣게 배너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은 명백히 유혹의 뜻이었다. 배너는 한번 콧방귀를 뀐 뒤, 고개를 돌려 가볍게 연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종이를 잡고 있던 연인의 손에 제 손을 포개었다. 시가 적힌 종이가 책상 위로 떨어지다가 이내 바닥으로 하늘하늘거리며 추락했다.


"나도 그렇게 될 거 같네요."


그 말에 나타샤는 배너의 한쪽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키스했다.




과연, 사랑하는 연인들도 깊은 산골로 들어가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한여름밤의 꿈같은 일은 현재 쓰고 있는 Lullaby of Birdland 얘기. 아직까지 안풀려서 고생입니다. 어쩌다보니 백석의 시를 섹드립으로 만들어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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