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냇배너베티 _ Robert 본문
* 거짓말과 질투에서 이어집니다.
어벤져스 타워에는 하루에도 수천통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인터넷시대인데다가 전직 CEO란 사람이 첨단전자계통에서 톱을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꽤나 아날로그한 것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각종 고지서, 청첩장, 개인적인 편지, 부고 편지등, 다양한 종류의 글들이 종이에 실려 타워의 각 층에 퍼지고 있었다. 물론 받는 사람들 중에는 어벤져스 멤버들도 있었는데, 소코비아 사태가 일어난 뒤로는 원망과 저주의 편지가 편지의 70%를 넘겨버려서, 개중에는 검열을 통해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브루스 배너의 경우는 전세계적으로 특히 와칸다에서 그런 류의 편지가 오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그에게 오는 편지의 거진 80%는 그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에 소각로-혹은 아예 사막에서 폭탄을 터뜨리기도-에 던져졌다.
그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베이지색 편지봉투는 살아남은 20%중 하나였다. 그는 그 봉투를 차마 뜯어보지도 못하고 그저 들고만 있었고, 시선은 보낸 사람의 이름에 꽂혀 있었다.
Elizabeth Ross Mace.
그녀가 몇달 전에 제프리 메이스라는 동료 생물학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토니가 무덤덤하게 건네준 칼버대의 학교신문에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잘생긴 신랑과 키스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실려있었다. 이미 임신 6개월로 접어들어 불룩해진 배도, 그가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 않던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리지는 못했다. 베티 로스는 그가 여태껏 보았던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고 또 사랑스러워서, 그는 밑에 있던 기사만 대충 훑어본 뒤에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면서, 어째서인지 현재의 연인에 대한 죄책감마저 느끼며 그는 방안에 칩거했었다.
나타샤는 좋은 여자였다. 그는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알고 있던 여자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여자였고, 헐크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을 망정 브루스 배너에게서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헐크가 난동을 피워도 다칠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였다. 그는 그런 그녀의 강함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때문에 그녀를 선택했다.
바튼이 선물해준 커팅나이프로 조심스레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카드와 함께 사진 한장이 들어가 있었다. 무광으로 반짝거리지 않는 사진 속에서는 살짝 초췌해진 베티 로스가 아주 작은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하얀 천에 가득 둘러쌓인 그것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것을 베티가 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순간 이 사진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살짝 나가버린 느낌이었다. 봉투 속의 카드를 꺼내어보니, 너무나도 익숙하던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Robert Thaddeus Ross Mace. 2016. 06. 13
너의 이름을 땄어. 축하해줘.
단 두줄이었지만 너무나도 그리웠던 말들이었다. 로버트, 로버트. 그는 평소에는 절대로 쓰지 않던 자신의 퍼스트네임을 떠올렸다. 만약에 아이를 갖게 된다면 평소에는 쓰이지 않는 그 이름을, 처음에 태어난 아이에게 주고 싶다고 베티에게 말하였고, 그녀도 그러겠노라고 말하였다. 비록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이에게 붙여졌지만.
그는 다시금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속 아기의 이목구비는 정말로 놀랄만치 베티를 닮아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걸 보아 울고 있는 중인 것 같았고, 몸집을 보니 우량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건강해보였다. 사진 자체는 어딘가 초점이 이상한걸로 보아 아마도 제프리 메이스라는 사람이 찍은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다시 베티를 보았다. 사진속의 베티는 매우 행복해보였다.
이걸로 된거야.
그는 편지봉투 속으로 사진과 카드를 다시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손이 매우 떨고 있어서 봉투를 자꾸만 벗어났다. 결국 모두 손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그는 급히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추한, 추하다못해 스스로 욕지기가 치어오를 정도로 감정이 솟아올랐다. 원망, 질투, 슬픔, 그리움, 미안함, 죄책감. 분노보다는 더욱 더 진한 감정이 마치 동맥을 끊은 것처럼 힘차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갑작스레 들어오는 공격은 막아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 사진을 찍어야 하는건 나였어.'
턱이 덜덜덜 떨리면서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말도 안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번뇌하고 휩쓸렸다.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초록빛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슬픈듯이 울부짖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이대로 놓아버려도 되지 않을까,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했다. 사실은 자신이 가져야 했던 것들. 명성, 가족, 행복, 안정적인 생활... 하지만 이제는 가질 수도 없고 바래서도 안될 것들이었다. 아 어째서, 어째서-
브루스.
순간 머릿속이 맑아졌다.
곧 해가 질거에요.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나타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장가는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서 방향을 잃고 울려 퍼졌다. 하얗게 하얗게, 그는 자신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규칙했던 맥박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베티가 직접 썼을 카드가 잔뜩 구겨진채 책상 한켠에 쳐박혀져 있었다. 다행히도 사진은 멀쩡했다. 사진속의 베티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평생 짓지 못했을 미소였다.
"그래."
이걸로 된거야. 모든 것은 다 일어나버렸고, 그가 손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베티 로스는 이대로 행복해지면 되고, 자신도 나타샤도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면 될 뿐이었다.
그래도 끝맛이 너무 썼다. 배너는 잔뜩 구겨진 카드를 편 다음 편지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행여나 나타샤가 볼 새라, 서랍 맨 위칸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미안해요, 나타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방안에 퍼졌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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