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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호두까기인형과 클라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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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호두까기인형과 클라라

rabbitvaseline 2015. 8. 20. 04:14




*어벤져스 2 이전 시점




12월의 후반부는 언제나 소란스럽고 혼잡하기 마련이다. 한해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사람들의 모임, 연말 특수를 노리는 쇼핑업계와 공연업계의 전략들. 사람들의 마음도 그에 따라 들뜨기 시작해서, 벌써부터 파티장소는 예약이 완료되었고 유명하다싶은 콘서트와 공연들도 매진되기 마련이었다. 거리 곳곳마다 아이들이 정답게 부르는 캐롤이 울려퍼졌으며, 상가들에는 벌써부터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알록달록 장식이 되어 있었다. 쇼핑가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트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전직 CEO이자 현직 개발부 부장이자 최대주주인 토니 스타크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세워진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한 뉴스를 보고 있었다. CEO자리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정재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크리스마스시즌에는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받게 되기 마련인데, 주로 토니 스타크의 유명세를 이용하고 싶은 공연계에서 보내는 티켓들이 많았다. 주로 발레와 클래식콘서트가 많았고 연극, 뮤지컬공연들도 있었다. 그의 몸은 하나였고, 티켓들은 대부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는 공연들이었으므로 자연스레 그는 남은 표를 지인들에게 나눠주게 되었다. 덕분에 제임스 로드는 친구의 은총을 받아, 아마 현물로 구하려면 몇천달러를 호가할 공연들을 즐길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에게는 여러 티켓이 왔었고, 그 중 하나를 골라 페퍼와 함께 클래식 콘서트에 가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는 역시나 남은 티켓들을 지인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자비스와 티켓들을 가지고 누구에게 줄 것인가 하고 갈무리를 하는 가운데 손에 볼쇼이 발레단에서 하는 '호두까기 인형'의 티켓이 잡혔다. 그에게 발레란 무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딱히 관심이 가는 분야는 아니었다. 볼쇼이, 라는 명칭을 본 순간에 떠오른 것은, 똑같이 러시아에서 온 당찬 여자 스파이였다. 이건 로마노프거군, 그는 그 봉투에다가 로마노프,로 체크할 것을 자비스에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마침 휴일이라 타워에 있을 그녀에게 직접 표를 건네줄 생각까지 하였다.


"싫어."


나타샤는 발레, 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거절하였다. 그 거절이 너무나도 빨랐던지라 충격에 토니는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어째서, 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나타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마음이야 갸륵하지만 말야, 스타크. 난 레드룸에서 훈련으로 발레를 배웠어. 특히나 호두까기 인형이라면 춤의 동작까지 다 외웠다고."

"그래서 싫다고?"

"그쪽이라면 질리도록 외운 시나 소설을 낭독하는 자리에 가고 싶어?"


그 말에 토니는 전적으로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교시절 억지로 들은 교양에서 외웠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생각하자니 다시 머리가 아파질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표는 안갖고 왔거든, 다시 들고 올게. 콘서트는 어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베토벤공연을 한다던데."

"좋아, 그건 괜찮아. 그나저나 왠일로 스타크가 자선사업을 하신대?"

"난 원래 독실한 자선사업가였어."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에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럼 어떻게 한담, 하고 주인잃은 봉투를 보고 있었던데 복도 너머로 익숙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배너!"


오, 배너는 마침 다행이라는 투로 토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알고보니 토니에게 용무가 있어 가려는 길이라고 했다. 둘은 집무실까지 일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갔다. 용무는 간단해서 토니가 문을 열려는 순간 해결되어버렸다. 문을 열면서 안녕,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토니가 아무 생각없이 입을 열었다.


"맞아, 배너. 혹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간되나?"


응? 배너는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말하였다.


"이거 내가 받은건데 어때?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공연이야, 무려 VVIP석이라고. "

"발레? 난 그다지 흥미가 없는데."

"어때, 근처에 괜찮은 여자 한명 데리고 가서 데이트도 하고 오라는거지. 크리스마스잖아, 그쪽도 즐겨야 할거 아냐?"

"토니, 전에도 말했지만 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은 없어.... 그렇지만 크리스마스분위기는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배너는 능숙하게 토니의 손에서 봉투를 빼앗았다. 봉투 내부에는 화려한 금박장식이 되어있는 티켓이 두 장 들어있었다. 토니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까지 확인하자 배너의 입가도 슬며시 올라갔다. 티켓 고마워, 하면서 배너는 발길을 돌렸다. 그나저나 두장이라니, 누군가 한명이라도 데리고 가야 할 모양인데... 그는 그가 최근에 알고 지내던 사람을 떠올리다가 어느 사람에 이르러서는 복도 한켠에서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온 붉은 머리의 미녀. 그러고보니 그녀는 전에 텔레비전에서 해주던 발레공연을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눈길로 보고 있었다.


'한번 가보자고 할까?'


물론 요즘은 사적인 이야기도 가끔씩 내뱉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긴 하였지만 그녀 앞에서는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 거절하겠지, 라고 예상을 하면서도 그는 그녀가 있는 홀로 가는 발을 멈출 수 없었다. 다시금 고양이같은 그 눈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안, 갑자기 이브에 약속이 생겨서.]


토니는 그 문자메시지에 나타샤에게 주려던 티켓을 다시 티켓더미속에 쳐박아두었다.




공연은 저녁 7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나타샤가 현재 살고 있는 스타크타워에서 20여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곳으로, 가끔씩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에는 그냥 편한 차림으로 갔었고, 자리도 일반석을 끊어서 공연을 보곤 했었다. 사람을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공연을 즐기곤 했었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다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네일을 하였고,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면서 세팅을 했다. 옷장안에서 언제 입을 지 몰라서 내버려두던 베이지색의 실크드레스를 입고, 화장도 평소보다는 힘을 줬다. 문득 루즈를 바르다가, 자신이 평소보다 치장에 공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울속의 자신은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해있었다.

이유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파이였고, 남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이용해먹는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루즈를 들다가 순간 말도 안되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블랙위도우에게 사랑이라.


아마 토니 스타크라면, 이번 일을 듣고서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그는 남의 일에 관해서라면 눈치가 빨랐으니까. 브루스 배너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정말로 이상하게도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눈치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남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점이 그나마 나타샤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녀도 배너와는 동료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이좋은 동료로만 지내는 것이, 그들이 같이 일하는 것에는 더 도움이 될 터였다. 그녀로서는 이 감정이 서서히 사그라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저 휴식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화장을 마쳤다. 휴대폰을 보니 배너에게서 먼저 기다리고 있겠다, 라는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서는 화장대에서 일어섰다.




나타샤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 사그라들기 어려운 감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파이였고, 덕분에 자의로 누군가와 연애를 한 적은 없었다. 항상 명령으로, 임무로 사랑을 했고 그녀 스스로 그것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해온 참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일보다는 뒤에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하더라도 일이 더 중요했기에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일까. 모든 집단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에 와서 생긴 감정은, 마치 억누르고 있던 물꼬를 트는 것처럼 세차게 흘러넘쳤다.

나이는 저보다 10살은 더 많은데다 솔직히 잘생긴 편은 아니다. 몸도 그녀가 곁에서 봐왔던 남자들에 비교하면 오히려 살이 붙어 있었고, 그나마 뱃살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게다가 성격은 은근히 까다롭고 앞에서는 살살 웃는 척 하면서 남의 가슴을 잘 후벼판다. 브루스 배너와 함께 지낼수록 그의 웃는 얼굴 뒤편에는 도저히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의 우울과 잡념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는 생각보다 자신감이 넘쳤으며, 항상 남들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신기한 것은 그 일정거리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타인에 비해 현저히 빠르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거리까지 도달하면 그가 선을 그어버렸다. 

선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몇 없었다. 그의 옛 동료 몇명과 베티 로스, 토니는 그나마 최근에야 두발 다 넣을 수 있었고, 나타샤와 기타 어벤져스 멤버들은 아직 한발밖에 내밀지 못했다.



그런데 어째서.



어벤져스 멤버들 전용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평소와는 다르게 턱시도와 코트를 입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얼마나 멋지던지.

나타샤는 그 모습을 본 순간 발을 떼지 못할 뻔 했다. 배너는 나타샤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도 오늘따라 멋을 부렸는지 머리에도 손을 댄 모양이었다. 안경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모습도 어딘지 지적으로 보여서 좋았다. 아, 틀렸어. 그를 향해 좋은 저녁이라 인사하면서 그녀는 깨달아버렸다. 이 감정은 정말로 쉽사리 사그라들기 힘들 것 같다고, 자신의 눈에 씌인 콩깍지가 벗겨지는건 당분간은 무리일 것 같다고 말이다.




▒ ▒ ▒




배너는 발레가 처음이라고 말하였다. 천성이 너드였고, 문학과 음악과 무용의 아름다움 대신 물리의 운동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다행히도 호두까기 인형은 동화로도 널리 퍼진데다가 팜플렛도 판매하고 있어서, 배너는 틈틈히 팜플렛을 보면서 내용을 확인했다. 토니가 준 VVIP 티켓은 확실히 최고위층 손님을 위한 것이어서, 나타샤와 배너는 어느 노부부와 함께 박스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가족단위로 온 손님들도 많았다. 뛰어다니는 아이를 본 순간, 배너의 몸이 크게 굳은 것을 발견하고는 나타샤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어서가요, 늦겠어요."


배너는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의 손이 축축했는지 차가웠는지 아니면 따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를 끌고서 박스석으로 올라가는 내내, 나타샤의 심장은 자신이 봐도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두근거렸다. 나타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차가운 가죽의 감촉만으로도 어쩐지 부끄러웠다.




내용은 재밌었고, 발레도 수준급이었다. 옆의 노부부는 러시아인이었는지 러시아어로 무엇인가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아마 배너와 나타샤가 미국인이라고 착각했는지 둘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 말에 나타샤는 흠칫거리며 배너를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는 무대를 향하고 있었다. 저 눈이 나를 바라봐준다면, 나만을 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쯤 무대 위에서는 쥐들이 클라라를 위협하고 있을 터였다. 곧 고개를 들려는 순간, 귓가에 그가 속삭였다.


"괜찮아요, 나타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선량해보이는 그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쥐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장난감 병정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나왔다. 빠져버릴 것만 같은 눈동자, 난처한 목소리. 그는 나타샤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장갑속에 있던 손은 생각보다 건조했고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괜찮지 않을까.


"열은 없어보이는데, 현기증인가요?"

"아뇨, 괜찮아요. 미안해요, 잠깐 바닥에 뭔가를 떨어뜨린것 같았는데 아니었나봐요."

"그거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무리해서 나온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손이 이마에서 떨어지던 순간 다시금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그라들기 힘든 감정이라면, 차라리 폭발시켜버리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호두까기 인형은 클라라와 춤을 추고 있었다. 일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들었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나타샤는 배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선전포고의 미소였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발레는 오랜만에 보는데 여전하네요."

"아뇨, 나야말로 고맙죠. 사실 나타샤가 허락해주지 않았으면 가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혼자서 보는 것도 뻘쭘하니까요."

"이번에 발레 보여준 대가로 밥 한끼 살게요."


그 말에 배너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토니에게 받은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타샤는 어떻게든 빚은 갚아야 하는 거라면서 다음주 주말을 비워놓으라는 통보 아닌 통보를 하였다.


"정말로 괜찮은데요."

"내가 안괜찮아서 그래요."


그러면서 메뉴가 뭐가 괜찮을지 물어보았다.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서, 나타샤의 얼굴에 웃음기가 절로 띄어졌다. 나타샤는 배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이 나를 바라봐준다면.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할텐데.


배너는 갑작스레 웃음소리를 내는 나타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차키로 문을 열었다. 왜 그래요? 라고 묻자 나타샤는 다시금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아니에요."




사실 귀여워서, 라는 말을 한 것은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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