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비전완다 _ Red 본문
01. Yellow
02. Orange
창문을 타고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뜨려놓았다. 비전은 현관의 센서등이 꺼질때까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똑딱거리며 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완다 막시모프는 달빛을 등진채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비전은 내심 그녀가 상당히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슬프지만 어딘가 처량한, 마치 형제를 잃었을 때처럼.
"늦었네?"
비전은 아무 말도 내놓지 못했다. 흠모해마지않던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괜찮냐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았느냐는 걱정스런 말마저 내뱉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여야 그녀가 상처를 받지 않을지를, 그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없는걸 보니, 내가 있다는걸 눈치도 못챘구나. 언제나 알고 있었으면서."
완다는 천천히 비전이 있는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조그마한 발소리와 함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울렸다. 그녀가 비전의 앞에 다다랐을 때에서야 센서등이 다시금 켜져, 노란 불빛의 그의 자줏빛 얼굴을 비추었다. 철저한 무표정으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며, 완다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천천히 비전의 눈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가워진 손끝이 그의 피부에 닿자, 순간 긴장에 잠겨있던 몸이 크게 흠칫거렸다.
"완다."
공기가 순식간에 더워지자 비전은 반사적으로 완다의 손목을 붙잡았다. 혈류가 느껴질 정도로 세게 손목을 붙잡히자 완다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손을 털어냈다. 비전은 무표정에서 벗어나,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잔뜩 눈썹 끝을 내리고는 황망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야?"
완다의 질문에는 날이 서려 있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한거냐고? 넌, 도대체 내가 널 어떻게 보고 있었다고 생각한거야?"
머릿속에서 환하게 웃는 완다의 모습이 수십수천장 스쳐지나갔다. 완다는 비전이 피에트로 막시모프를 모방으로 한 행동을 보일때마다 행복하게 웃곤 하였다. 다정스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던지 그녀를 가끔씩 품에 안는다던지 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완다는 행복하다는 듯 웃었고, 그 모습에 자신도 점차 행복이라는 감정에 대해 배워나갔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해왔던걸까. 쑥스럽다는듯 팔을 끌어당길때, 수줍게 자신의 볼에 입을 맞추었을 때, 수트를 받았을 때 축하한다며 선물을 했을 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처음 했을 때 비전은 완다가 자신과 피에트로를 겹쳐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완다, 난-"
차마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그녀와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신경을 자극하였다. 행복했던 순간들, 슬펐던 순간들, 자신이 배웠던 감정으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조심스레 완다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팔은 생채기가 가득하여 반창고를 얼기설기 붙은 모양새가 꽤나 안타까웠다. 안구의 초점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맞추어지고, 마치 곧 울것만 같은 표정으로 변한 완다의 얼굴이 들어왔다. 당신은 나를 피에트로의 대역으로 보고 있지 않았느냐는 말을 내뱉고 싶어졌지만, 그 말을 내뱉다가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완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전의 머릿속이 갑작스레 붉게 물들다가 사그라들었다. 시야가 깨끗해지자마자 인식되는 것은 굳게 잠겨져 있는 눈꺼풀과 길다란 속눈썹, 흘러내리는 눈물과 입술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피부의 감촉이었다. 그것이 키스, 라는 애정표현의 한 형태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는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완다가 눈물을 닦고 눈을 뜨자, 그는 당장에라도 뒷걸음질쳤던 자신을 책망하였다. 완다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애써 울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형제끼리는 이런 짓 안해... 피에트로에게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어."
만약 자신의 심장이 다른 인간들처럼 작동되는 물건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규칙적으로 똑딱거리지 않고 매우 거세게, 마치 터질것처럼 두근거렸을 터였다. 다시금 완다의 한쪽 볼에 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머릿속은 너무나도 하얗게 물들어져서 그 이후 완다가 내뱉는 말을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좋아해."
▒ ▒ ▒
짝, 하고 박수소리와 함께 비전은 회상에서 벗어났다. 박수의 주인공은 눈을 뜬 안드로이드를 향해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짓고서는 그에게 파일을 건네었다. 유럽에 위치한 모 하이드라 소속의 연구실은 다행히도 폐쇄되었지만, 연구진중 몇명이 치타우리족의 무기를 이용하여 불법무기를 제조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탐문탐색을 거쳐 공장을 급습하여 모든 것들을 잿덩이로 만든 것이 불과 3시간전의 일이었다. 나타샤로부터 건네어받은 파일에서는 정확한 임무경과가 표기되어 있었다.
"요새 계속 죽을 상인거 알아?"
"죄송합니다."
그는 파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완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밤, 완다는 고백만을 남긴채 그의 숙소를 빠져나갔다. 현관의 센서등이 꺼지고 달빛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빛도 찾아볼 수 없는 어둠속을 몇시간이고 그는 서 있었다. 차마 완다를 따라가지도 못한 채. 일종의 가벼운 쇼크였던 모양이었던지 정말로 쓰러져버렸고, 다음날 눈을 떴을 때에는 헬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후로 완다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A타워로 옮겨져 심리치료와 재활치료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 놀랍게도 배너가 안타깝다는 투로-평소 그는 완다에게만은 적대적이었으므로- 능력을 컨트롤하는게 힘들어졌다고 전화를 통해 비전에게 전했다. 그것이 2주일 전이었다. 그동안 그는 너무나도 소중한,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기계적으로 임무경과를 수정하면서도 그는 언제가 되어서야 완다를 볼 수 있을지 그 기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시간은 늘어졌다 줄어들었다 유동적으로 변했는데, 그 기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괴로움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몇번이고 A타워 내에 있는 CCTV를 해킹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비스의 시스템을 이식받았기 때문에 프라이데이의 눈을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에게 분노와 경멸을 표했던, 즉 자신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내비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마지막 단계에서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마르지나 않았을까, 혹여 또 식사를 거부하는게 아닐까, 라는 걱정은 항상 혹처럼 달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나타샤에게 파일을 건네주었다.
"완다 보고싶지 않아?"
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그리웠다. 정말이지 지금에라도 그녀를 만난다면 당장에라도 품에 안고 미안하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는 그녀와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이 드디어 말했다는 후련함인지 아니면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녀의 '그 말'에 온당한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무슨 대답을? 여태껏 완다를 형제처럼 사랑해왔던 자신이 이성으로서 사랑을 고백한 여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무얼까. 아니, 애시당초 그는 자신의 감정에 상당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 재활훈련이 잘 되어가고 있다던데, 한번 연락이라도 해보지 그래?"
"조만간 직접 찾아갈 예정입니다. 하지만 무사히 재활하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그가 완다에게서 느끼는 감정들은 연민, 애정, 슬픔, 욕심같은 것들이었다. 이것들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사랑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다는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비전이 생각한 것과 달리, 완다는 똑같은 방식으로 비전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때, 내가 뭐라고 대답하면 되었던 겁니까?"
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은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퀸젯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시끄러운 엔진음 속에서 아주 그립고도 달콤하다못해 쓰기까지 한 목소리를 간파해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 평소에는 풀고다니는 머리카락을 높게 묶고서는 옆의 캡틴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전은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 단어 하나와 완다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완다!"
이름을 먼저 부른 것은 나타샤쪽이었다. 그녀로서도 갑작스런 방문이었는지, 헤드셋을 놓자마자 캡틴과 완다쪽을 향해 달려갔다. 완다는 나타샤를 보자 환히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니!"
"어떻게 된거야? 이제 끝난거야?"
"아뇨, 아직 능력을 컨트롤하는게 조금 힘들어요. 하지만 곧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훈련 경과를 보고하러 왔어요, 그동안 이쪽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죠?"
완다는 걱정과는 달리 밝은 모습이었다. 수척해지지도 않은 것 같았고, 카운슬링 덕분인지 미소에는 한점 어두움이 보이지 않았다. 완다는 꺄르르 웃으며 나타샤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퀸젯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완다의 입가에 어려있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밝게 미소지으며 완다는 입을 열었다. 한글자 한글자 발음이 될때마다, 그녀의 미소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마치 묠니르로 심장을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몸은 휘청이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운동신경 전부를 차단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완다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하나씩 폭발했다.
"...잘 지냈어?"
"네, 물론 덕분에. 완다도 그 동안 별 일 없었습니까? 재활은 힘들지 않았고요?"
다행히도 그녀의 질문에는 무사히 대답할 수 있었다. 평온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요지부동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를 향해 나타샤는 왜 내려오지 않느냐고 말하였지만, 비전은 상사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였다.
"솔직히 배너박사님이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당장에라도 완다를 품에 안고 보고싶었노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 곳은 보는 눈이 많았고, 무엇보다 완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은 그럴 자격도 없어보였다. 가까스로 그녀의 앞에 당도하자, 완다는 비전의 차가운 손을 끌어당겼다. 두근, 완다의 박동음이 손가락을 타고 느껴졌다. 평소보다는 빠른 박동에다 완다의 얼굴도 살짝 붉어졌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눈물샘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완다는 몇시간동안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모두의 배웅 아래에 다시 타워로 떠났다. 그녀는 한층 편해진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다 비전에 이르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차가운 손가락을 몇번 쓰다듬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하고는 프라이데이가 운전하는 무인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차가 시야에서 벗어날때까지 비전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제발 가지 말라고 완다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마치 어린애같은 어리광이라 하더라도 완다의 앞에서라면 상관없었다. 2주일이란 그에게는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매우 긴 시간이었고 완다와 함께했던 시간들로 따지자면 더욱 더 긴 시간이었다. 앞으로 더 긴 시간을 완다와 떨어져지낼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웠다. 하지만 그는 차마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줄 수 없었다. 부디 평온하길, 부디 무사해지길 바라는 수밖에는 없어서, 샘의 들어가자는 말에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날아가고 싶은 충동을 참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가 그리웠다. 갈증에 시달리다 맛보게 된 물 한방울에 더욱 더 심한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여태껏 그 어느때보다도 그는 그녀가 보고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한다느니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느니는 도저히 신경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사흘뒤에 완다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엔 너무나도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스텝을 밟으려던 발을 애써 움직이지 않은 채, 그는 평온을 가장하며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감기에 걸렸는지 살짝 코맹맹이소리가 들리자 걱정과 동시에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훈련은 괜찮아. 감기는 며칠 약먹으면 괜찮을거래."
"그래도 몸조심하십시오, 특히 요즘은 환절기니까요. 몸을 따뜻하게 하고 뜨거운 물을 드세요."
평소와 같은 당부의 말을 하는 것이 이리도 기쁘다니. 그는 저절로 높아지는 목소리를 애써 낮추고는 다시금 당부의 말을 하였다. 완다는 지겹도록 들었다면서도 수화기 너머로 웃고 있었다. 마치 구름위에 떠 있는듯한 행복감이 비전의 몸을 감쌌다. 마치 예전으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간것만 같았다. 이렇게 계속해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수만 얼마나 좋을까.
-"..전에 말한 것 말인데."
그는 완다의 말이 매우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애써 상처자국을 덮어놓았는데 다시금 그것을 헤집고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해서, 자신도 완다의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의도적으로 그 질문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올바른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하여야 다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침묵에 완다도 비전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말하였다.
-"...괜히 그런 말해서 미안해. 나도 그 때엔 정신적으로 몰려있었으니까-"
"아뇨, 완다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순간 비전은 숨을-그에게 폐가 쓸모있는 것이라면- 멈추고는 스스로의 행동에 경악했다. 말은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터져나와 차마 그가 안된다고 막기도 전에 성대를 따라, 입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왔다. 똑딱, 갑작스런 외침에 완다도 이을 말을 찾아내지 못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몇 분이 지났을까, 완다가 크게 한숨쉬는 소리가 전해져오자 필사적으로 대답을 머릿속에서 찾던 비전은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 말은 진심이었어. 물론 대답을 해주지 않아도 돼, 그건 너무 가혹한것 같아서."
"완다, 나는... 난... 난 당신을... 나는..."
머릿속에서 꾸준히 '답'을 찾기 위해 뇌세포가 연산되었다. 그는 사랑에도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제애, 우정, 남녀간의 사랑, 연민, 존경, 맹목, 부모자식간의 사랑,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랑의 형태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랑 중에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그의 순수한, 완다를 향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중에 어떤 것을 골라야 그녀가 상처받지 않을지-
"..미안합니다."
-"...아니야."
다음에 보자,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겼다. 신호음이 계속해서 그의 온 몸을 쳐댔다. 엄청나게 깊고 어두운 절망이 그를 감싸다가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그는 전파를 차단한 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감정에 이름을 붙여야했고, 어떻게든 올바른 대답을 완다에게 하여야했다. 분명 완다는 지금쯤 매우 슬퍼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이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동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 ▒ ▒
헬렌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아연실색하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처음 인터폰 화면을 통해 비전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에는 토니가 질나쁜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비전의 할 말이 있다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비전은 누구의 앞에서 쉽사리 거짓말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현관문의 체인을 풀고 열자마자 그 곳에는 왠지모르게 쓸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안드로이드가 서 있었다. 헬렌은 급히 비전을 집안에 들였다. 그의 몸은 뉴욕에서 서울까지라는, 정말 무모하다못해 한숨마저 나오지 않는 10시간이 넘는 비행탓인지 상당히 차가워져 있었다. 따뜻한 차를 주면서 비전에게 자신이 덮고 있던 숄을 걸쳐주니, 그 모양새가 심히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아들?"
그녀도 토니와 마찬가지로 우스갯소리로 비전에게 아들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비전은 헬렌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시선을 맞추었다.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빛을 띄며, 마치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 때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박사님, 저는 이 감정에 대해 답을 얻어야 합니다."
▒ ▒ ▒
분위기가 이상해진 통화를 끝으로 이틀째 비전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통화연결음이 결국 맥없이 수신자부재를 알렸을 때엔 입에서 쓴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완다는 자신이 무슨 터무니없는 짓을 벌였는가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내려놓고서는 더욱 더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너무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는, 배너의 뼈있는 질책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도 나타샤를 통해 비전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고, 마치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때의 고백이 비전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배너의 말로 그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비전은 애써서 답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에게는 '답'이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비전에게 자신은 무엇이느냐에 집착했던 적도 있었다. 여동생으로 보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는 마치 피에트로처럼 자신을 대해주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생각이 폭발한 것이 감청사건에서였다. 그녀는 격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 수치심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을 언제까지 '여동생'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분노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다 상관없는 일이다. 오히려 지금은 그렇게 비전을 몰아세운 것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그녀는 다시금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몇번이고 받지 않던 번호를 눌렀다. 그녀는 비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너무 규칙적이라 오히려 어색하기까지 한 숨소리, 낮지만 기품있던 목소리, 영국식의 말투, 숨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시계소리가 듣고 싶었다. 연결음은 규칙적으로 울리다가 이내 다시금 여성의 목소리가 이어나왔다. 그녀는 마치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종료를 누르고는 무릎깊이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울어버린다 하더라도 비전은 모를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슬픈 날이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규칙적이라 수상하기까지 한 노크소리가 들린 건, 이제 막 눈물이 흘러내리던 참이었다. 완다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마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급히 문을 열었다. 비전은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문앞에 서 있었다. 그로서도 완다가 울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하였던 것이다. 완다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마 손잡이에서 손도 떼지 못한 채, 자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괜찮습니까?"
비전은 급히 허리를 숙여 완다의 눈가를 닦았다. 그제서야 완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달으며 얼굴을 붉혔다. 상당히 추한 꼴을 보였다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몸을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돌리려고 했다. 만약 제 앞에 서 있던 안드로이드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품에 안지만 않았다면 새초롬하게 방안으로 들어가서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똑딱똑딱, 초침돌아가는 소리가 비전의 가슴에서 울리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심장은 매우 거세게 뛰고 있었다. 차마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비전은 완다의 등 뒤로 둘러진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포근하다못해 답답해져갔지만 오히려 완다는 그를 밀쳐내기는 커녕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부비었다.
"....보고싶었습니다, 완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보고싶었습니다."
"나도 네가 보고싶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해.."
완다는 더욱 더 비전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자 비전은 천천히 품에서 그녀를 풀어주었다. 완다는 격렬히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안타까워서 비전은 더더욱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의 체취를 맡고 싶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그는 완다에게 말하여야했다.
"완다, 들어주세요. 제 대답을 들어주세요."
대답, 이라는 단어에 완다는 순간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입을 열려고 하자, 비전은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하나 얹었다. 그는 슬프면서도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완다, 제대로 들어주세요. 비전은 나지막히 말했다.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당신이 보고싶고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고 당신이 웃고 있었으면 합니다. 다만, 저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형제로서인지 연인으로서인지 보호자로서인지 아니면 동료로서인지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저는 아직 사춘기도 오지 않았으니까요. 미안합니다, 내가 명확한 대답을 얻지 못했기에 당신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게 너의 대답이야?"
"아직은 아닙니다."
비전은 고개를 저으며 완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런 행동에 그녀는 뒷걸음질치려고 하였으나 손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비전의 이마에 있던 보석이 완다의 이마에 닿았다. 차갑다, 라며 보석에 대한 평을 내리자마자 비전의 입이 열렸다.
"제 마음을 읽어주세요, 완다. 이 감정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완다는 속눈썹없는 눈이 천천히 감기는 모습을 확인하고서는 자신도 천천히 그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그리고는 비전의 팔을 붙잡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비전의 머릿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비전의 입가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미 들리지 않는다는 듯, 붉은 기운이 둘의 사이를 넘나들었다.
완다가 눈을 떴을 때엔 이미 몸이 침대에 눕혀져있던 후였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눈가가 눈물로 버석거렸고 몸은 이상하게 삐걱댔다. 근육통마저 느끼면서 완다는 상체를 일으켜 다시금 흔적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꿈이었나.'
비전의 머릿속은 행복과 슬픔이 뒤섞여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완다가 밟는 자리마다 푹신거리면서 마치 마시멜로우처럼 달콤한 내를 풍겼다. 스토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도 모르는 사진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진뿐만 아니었다. 영상, 냄새, 촉각, 목소리 등 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완다를 떠올렸다.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 하지만 그녀는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사랑이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에 떨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했다.
그 모든 것이 꿈이었나.
그녀는 고개를 숙여 마른세수를 하였다. 어딘지 자신이 더 처량해지는 것 같아서 더욱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미 말라버렸는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착잡한 기분에 어찌할 줄 몰라, 저도 모르게 제 목을 쓰다듬었다.
"..어?"
손에 차가운 금속 체인이 걸리자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들고서는 목에 걸린 체인을 들어올렸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옷 속에서 아주 익숙한 금속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 심장에서 떼낸 겁니다. 이거라면 완다의 머리카락하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급히 동그란 금속판 펜던트를 손에 쥐고서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예전과 비교하자면 다르지 않았으나 딱 한가지, 뒷면에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손끝으로 글자를 어루만지자, 그제서야 그녀는 방금 전의 일들이 꿈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Желим да будем поред тебе.."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바보같이, 이 바보같이 수줍어하는 안드로이드라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우와우와우와 드디어 끝났다...
너무 대충끝낸것 같아서 죄책감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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