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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완다 _ 갈색머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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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완다 _ 갈색머리

rabbitvaseline 2015. 9. 23. 17:45



재편된 어벤져스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소코비아 사태가 일어나기 전보다 늘어나, 대략 수백여명의 사람들이 새로 지어진 어벤져스 훈련소에 적을 두고 있었다. 기실 늘어났다고는 하나 소규모인 것은 마찬가지라 그들만의 사회에서는 스캔들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3시간도 안되어서 훈련소 전역에 퍼지곤 했다. 사내연애, 불륜 스캔들, 출산소식, 결혼소식... 그렇기에 더더욱 '그' 유명한 사내커플이 헤어졌다는 소식은 2시간도 채 안되어서 어벤져스 내에 퍼져버렸다. 소문이 퍼졌을때엔 모두들 누군가가 고의로 퍼뜨린 거짓말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명물이 되어버린 초능력자와 안드로이드 커플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붙어다녀 싱글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훈련을 받을때나 밥을 먹을 때나 휴식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둘은 항상 붙어다녔다. 안드로이드는 남들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상냥한 미소를 연인에게만 보여주었고 초능력자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연인의 팔을 끌어당기곤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제 결혼할 것인가에 대한 내기와 함께 과연 법적으로 결혼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저 안드로이드가 호적을 등록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타샤 로마노프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자신에게 소문을 퍼뜨린 샘 윌슨을 타박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어두운 표정을 짓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던 비전을 보고나서야 완다 막시모프, 즉 소문의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녀가 숙소로 달려갔을 때엔 당사자는 제 모습을 둥글게 만채로 방 한구석에 쳐박혀져있었다. 나타샤는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목소리를 듣고서는 그 소문이 사실이란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완다.."

완다의 몸 주위로 선명한 주홍빛 선들이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비단처럼 흔들거리며 떠다니고 있었다. 방안은 엉망이었다. 가구는 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수어져 파편이 널려있었고 깨진 창문 틈새로는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나타샤는 방에 들어서서 등을 켜려고 스위치를 몇번이고 눌렀지만, 이미 전등을 잃어버린 천장에서는 스파크만이 요란하게 튈 뿐이었다. 기척에 고개를 돌린 완다의 눈가는 부어있었다. 그녀는 애써 괜찮다고 미소를 지으며 미안하다는 사과를 덧붙였다.

"...나에게 헤어지자더군요. 날 사랑하지 않는대요. 더이상 그의 마음속에 날 위한 자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그래서 헤어지자고... 그게 오히려 날 위한거라고 하더라고요."

"..설마 그걸 진심으로 한거겠어? 뭐라도 이유가 있었을거야."

"...나타샤..."

완다의 얼굴이 처참히 무너져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나타샤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흐느끼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목소리가 떨리면서 가늘게 마치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에너지처럼 방안에 흩어졌다.

"...비전의 머릿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식은땀이 잔뜩 흘러 축축해진 손이 미끄러져내려왔다. 나타샤는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간신히 안아들었다. 충격에 얼굴이 창백해져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듯한 더러운 기분에 혀를 차며 완다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마 전조가 있다고 한다면 최근 비전이 두통을 호소했다는 점일 것이다. 대략 한달전부터 갑작스레 발생한 두통으로 인해 그는 A타워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헬렌과 토니, 배너는 여러차례 비전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하였지만 문제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가 완다에게 이별을 고하기 전날에도 그는 A타워를 찾아가 검사를 받았다. 경과를 나타샤에게 설명하면서 그는 마치 머릿속에서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느낌이라고 두통을 표현했다. 그 말에 스콧은 우스개소리로 자기 개미들은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였지만, 확실한 것은 그 개미들이 흘러나오는 장소를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점점 두통을 호소하면 호소할수록 그의 태도가 아주 잠깐 바뀔 때가 있었다. 그는 최근에 냉소와 조소를 배웠는지 적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면서도 비릿한 날선 미소를 보이는 것이 잦아졌다. 물론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는 당황해하며 표정을 거두었지만 말이다. 나타샤는 탈진한 완다를 침대에 뉘이고는 침대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슬픔에 창백해진 이마에 몇번이고 몇번이고 손을 올렸다.


완다 막시모프는 피로와 정신적인 충격이 겹쳐서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어차피 최근 몇개월동안 제대로 된 휴식이 없었던 터라 그녀는 반강제로 휴가를 받게 되었다. 또다른 당사자인 비전또한 휴가를 요청했는데, 최근들어 두통이 더욱 심해져 임무에도 지장이 갔기 때문이었다. 둘은 이별을 한 그 순간부터 서로의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마이애미에 숙소를 잡고 완다가 그곳에 휴가를 떠난 직후, 비전은 타워에 머무르고 있던 배너의 곁으로 숙소를 옮겼다. 아이러니하게도 훈련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이를 슬퍼하면서도 안도했다. 그리고 비전이 숙소를 떠나기 전에 곧 울것 같은 슬픈 눈으로 자신들을 훑고 지나간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헤어진 이유를 찾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 ▒ 




-"알고 있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나타샤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배너는 평소에는 부리지도 않던 능청을 떨며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비전의 상태가 최근 이상하다는건 다 알고 있었다고요. 헬렌도 알아차릴 수 없으면 당신이 알지 누가 알겠어요? 게다가 크레이들까지 그쪽으로 옮겨갔잖아요. 무슨 일이에요? 비전은 괜찮은거에요?"

"걱정말아요, 비전의 상태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어요. 크레이들은 검사용으로 가져간거니까 다 쓰면 확실히 돌려줄게요."

-"당신 거짓말을 내가 눈치채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어요? 점점 더 나빠져가고 있다는거군요... 이유까지 알고 있는거 아녜요?"

배너는 끝까지 아니라고 말한 뒤 급히 전화를 끊었다. 아마 나중에 만나면 더욱 더 강한 추궁을 만날 터이지만 그에게는 통화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비전의 머릿속에서 증식하고 있다는 개미는 점점 더 그의 정신을 파먹고 있었다. 이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터였다. 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는 크레이들로 다가갔다. 주인없는 크레이들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정도로 착잡하고 슬펐다.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감정적이었다면 눈물이라도 흘러나왔을 것지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마저 느꼈다.

"...박사님."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배너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태어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로 돌아간, 자식처럼 여겼던 안드로이드가 서 있었다. 그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배너를 보고 있었다. 배너는 그 시선이 못내 안타까워서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말한대로 정리는 다 끝냈습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리면 안돼?"

'그건 무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그 말에 배너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에서 무언가가 들끓어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날 택한거야? 너는... 하아... 너는 그게 정말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거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볼수도 있잖아, 토니에게 아니 헬렌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면 되는 일이야."

"그들도 제 머릿속의 울트론 인자를 발견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최선의 방법이 아닙니다. 고장난 컴퓨터를 수리할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잖습니까. 아버지, 이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신이 아니면 절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에 더욱 더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며 올라왔다. 그는 애써 자신의 심박수를 체크하며 흐느끼듯 뭉개진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너는 아버지더러 자식을 죽이라고 말하는거군."

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배너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리하기 전에 중요한 자료들을 백업하고 고장난 부품을 수리하거나 교체를 한다, 그리고 그 컴퓨터에 운영체제를 새로 깐다. 일반적으로 PC를 수리하는 방법이지만 그것이 비전에게까지 적용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비전이 자신을 찾아왔던, 죽여달라고 말하였던 그 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던 개미를 알아내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심히 가라앉아있었다.

"울트론입니다. 제 몸속에 인스톨되어있던 울트론이 제 정신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대로가다간 그가 제 몸속에서 다시 부활하겠죠."

그 말에 배너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전혀 개의치않는다는 듯, 비전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미 제가 그걸 발견했을 때엔, 그의 인자가 제 두뇌 깊숙이 자리잡은 뒤였기 때문에, 제 힘으로는 제거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토니나 헬렌, 심지어 당신이라해도 불가능하단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런 때에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리셋밖에 없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배너는 그 말을 내뱉은 뒤, 심장에 가해진 통증에 숨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방금 비전이 내뱉은 말의 뜻을, 그는 처참히도 너무나도 잘 하고 있었다. 그의 뇌를 리셋, 즉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여태껏 그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뜻은 즉 그의 짧디짧은 인생을 없애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것을 기계가 내뱉으면 리셋,이라고 아주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말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버린다. 

"...왜 하필 나야? 차라리 토니나 헬렌에게 간다면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거야. 난 이쪽 전공이 아니라고. 왜 나야?"

그는 마른 세수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럴때엔 도저히 무어라 말을 꺼낼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비전은 담담하게,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말했다.

"...그건 완다양이 당신을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당신을 무서워한다는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당신밖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습니다. 박사님, 자료는 이미 백업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이 할일은 간단한 일입니다. 제가 머릿속의 모든 것을 지우면, 울트론이 제거된 데이터를 다시금 제 두뇌에 깔아주고 자료들을 백업만 해주시면 됩니다."

"...안돼, 그건 최후의 일이야. 지금으로선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돌아가."

"박사님. 부탁드립니다."

배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가리키며 다시금 돌아가라고 말하였다. 비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방을 나서자, 그는 급히 비전이 들고 온 자료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는 차마 밖으로 내뱉지도 못할 좌절감에 그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 ▒ 




"저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에 따라 그는 자신의 정신을 이루는 회로를 차단하고 기계적으로 그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완다가 자신의 정신을 읽어 진상을 알아차리지 않게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장난하는 거냐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닙니다, 정말로 당신에 대한 모든 사랑이 사라져버린 것 뿐입니다. 완다, 이 관계는 당신에게나 나나 그다지 좋은 관계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가장 좋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붉은 선이, 그녀의 정신이 그의 머릿속을 훑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읽히지 않는 머릿속에 완다는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말도 안된다고 소리치며 그의 팔을 붙잡았을 때, 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떼내었다. 그러자 그녀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전..."

등을 돌려 방을 간신히 빠져나오며 그는 제 머릿속이 과부화되었다고 느꼈다. 머리가 너무나도 뜨겁고 아파서, 도저히 그 이상으로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도 무거웠다. 어느새 개방된 정신회로에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을 호소했다.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 입을 열고 성대를 움직였을 때엔, 마치 속에서 무언가가 얹힌것처럼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자신을 부르던 완다의 목소리가 다시금 재생이 되었다. 숙소의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좋아하던 장미향유의 냄새가 후각세포를 자극했다.

"...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어두운 감정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다 다시금 돌아오고 다시금 그를 치고 지나갔다. 목에서는 꺼억대며 숨이 지나가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우는 모습밖에 재생되지 않았다. 사실은, 사실은 사랑한다고 당신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웃는 얼굴만 보고 싶다고, 당신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고, 당신의 곁에서 있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보는 마지막 모습이 당신의 행복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웃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다시금 목을 열어 성대를 움직이려고 하다가, 그제서야 현재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던 행동이 무언지를 깨달았다. 

"....완...다...."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있었다. 그의 눈가에서 여태껏 흘러본 적도 없었고, 흐르지도 않을거라 생각하였던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는 짜고 써서, 마치 현재의 자신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배너는 몇번이고 비전의 상태를 검사하였다. 비전의 두뇌회로 깊숙이 파고들어간 울트론을 몇번이고 제거해보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오히려 하이드라처럼 더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었다. 비전의 바람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수도 없는 비참한 상황속에서, 그는 자신에게만 이런 말도 안되는 책무를 맡긴 비전을 원망하기도 하였고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비전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품기도 하였다. 비전은 사귀고 있던 완다 막시모프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것은 상당히 일방적이었고, 비전의 평생동안 서로의 반쪽을 맡아서 지내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끼치는 후폭풍도 컸다. 그는 평소에도 완다와 비전의 관계를 껄끄럽게 보았으므로 내심 기뻐할 수도 있었으나, 이별의 이유를 알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제가 갖고 있는 완다양에 대한 호감의 근원은 울트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제 안에서 울트론을 제거한다면 완다양에 대한 호감도 사라지겠죠."

완다에게 이별을 고하고왔노라며 배너를 찾아왔을때, 그의 눈가는 평소보다 부어있었다.

"결국 어떻게든 좋지 못할 결과를 낼 것이 분명했습니다. 리셋한 제가 그녀를 다시 사랑할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럴바에는 차라리 제 손으로 끝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아마 한바탕 울었던 모양인지 목소리에서 쇳소리마저 날 지경이었다.

"...제가 박사님에게 이 일을 맡긴 것도 그것때문입니다. 완다양이나 다른 사람들도 저의 달라진 점을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저에 대해 있었던 일들을 조사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들도 박사님만은 건드리지 못할겁니다."

"...네가 죽고 다시 시스템을 깔고나면, 그때 나는 너의 몸뚱아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간단합니다, 그저 부르던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두렵지 않아?"

"...저는 생명의 편, 하지만 생명은 언젠가 끝이 있기에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저는 비록 유아정도의 삶밖에는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생명들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을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

비전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배너는 그것을 알아차리면서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애초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면, 그렇게나 바랐던 것이었다면 몇번이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돌아다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하지만 안타까운것은 있군요."

비전은 눈을 내리깔고는, 마치 그리운 것을 떠올리는듯 멍하니 테이블위의 커피를 바라보았다. 갈색향기가 그의 후각세포를 자극하면 머리속에서 똑같이 갈색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한번이라도 완다양을 품에 안을수만 있다면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배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이상 그와 있다가는 자식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꼴사나운 부모꼴을 할 것 같아서였다.



▒ ▒ 




크레이들 속에 잠들어있는 안드로이드의 모습은 마치, 처음 그를 보았을 때처럼 신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소코비아와 전세계를 눈과 뇌에 담고서 비전은 배너에게 돌아왔다. 다른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크레이들에 눕기 전에 배너와 연구실의 풍경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운 풍경들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터였다. 

"...네가 많이 그리울거야."

"아마 곧 태어난 '비전'으로 다 잊게 될 겁니다."

"..그런 일은 없을거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그는 조심히 자신의 몸을 기계안에 눕혔다. 크레이들이 닫히고 그의 머릿속을 삭제하는 프로그램이 돌아갔다. 삭제율을 나타내는 숫자가 100을 향해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배너의 마음도 초조해져 급기야는 제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50퍼센트를 넘기자 숫자가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지금에라도 멈춘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배너는 취소버튼에 시선을 옮기다 이내 포기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조용히, 그와 배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한 생명이 죽어갔다.







비전은 절대로 완다를 버릴 리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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