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Lullaby of Birdland 3. 본문
3.
메리켈의 집에서 간단한 저녁식사-아이가 건네어준 음식의 질감은 최악이었지만 나름 만족할만 했다.-를 마친 뒤, 소년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하는 것을 무시한 채 에이프릴을 호텔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메리켈은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에이프릴이 걱정이 된다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대문에서 나오자마자 소년은 입을 열었다.
"실은 요즘 불량배들이 걱정거리라서요, 에이프릴은 예쁘잖아요. 분명 그놈들이 건드릴거라고요."
집에서 나와 호텔로 가는 길목에는 이미 문을 닫은 상점들이 가득했다. 상점은 집으로도 쓰이는지 문이 닫혀져있는 상점 곳곳마다 내부에 불이 켜져있었고, 낯선 음식냄새가 집안에서 풍겨왔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붉게 물드는 석양으로 인해 그림자가 져 있었는데, 얼핏 보면 누군가가 숨어있을 거라고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매우 짙었다. 그림자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파악하며 에이프릴은 다시 메리켈이 내뱉는 말에 집중했다.
"쓰레기들이에요, 사람들한테 돈이나 음식을 뺏고, 여자들은 건드리지 못해서 안달이고. 그래서 여기 여자들은 몸파는 여자들 빼고는 밤에는 나오지도 않아요."
"그렇게 심하니?"
"그럼요, 특히 우두머리가 있는데 자기딴에야 스카페이스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냥 올두르-쓰레기-라고 불러요."
"그렇게 심하면 경찰이나 그런 쪽에서 나서지 않아?"
"올두르의 누나가 경찰서장의 남편이에요. 게다가 그 누나란 작자는 꽤나 기가 센모양이야 경찰들은 건드리지 못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러니 신부님도 그냥 피하는 수밖엔... 정말 선생님도 어쩌다가 그런 놈한테 걸려서.."
선생님이라는 말에 에이프릴은 잠깐 걸음을 늦추었다. 브루스 배너에게 불량배가 관여되어있다니,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할만한 일이다.
"데이비드 선생님이 말이니?"
"맞아요, 그 놈은 항상 선생님에게 약을 타가요. 사실은 돈이 없어서 뜯어가는거죠, 무례하기도 유분수지, 어떻게 공짜로 약을 타간담!"
메리켈은 실상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약을 받아간다며 소리를 높혔다. 예외의 변수에 에이프릴도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말로 운이 좋게도 그 올두르라는 불량배가 배너를 육체적으로 건드린 것 같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랬더라면 덩치에 대한 소문이 퍼졌을테니 말이다. 메리켈은 점점 더 성이 났던지 평소보다도 빨리 걸었다.
"정말로 말이에요, 그냥 독약을 써서라도 어떻게 안될까요? 저번에 우리 엄마를 때리려고 했다고요."
소년은 울분을 토하며 에이프릴을 앞질러갔다. 아마 분에 받혀서 걸음이 빨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런 소년을 마치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를 뒤따랐다.
"♪♩♩~"
낯선 휘파람소리에 에이프릴은 급히 달려가 메리켈의 팔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뒤를 따라오던 조무래기들이 있었는데 이제야 정체를 드러낼 작정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다시금 모습을 숨겼다. 메리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놈들이에요."
소년은 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거의 뛸 기세로 저잣거리를 벗어났다.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거세져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과연 스카페이스답게 눈가에 커다랗게 흉터가 져 있는 남자가 사악하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 ▒ ▒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들어간 집은 밤새 식혀진 공기로 인해 그나마 서늘했지만 아침안개로 인해 꽤나 습했다.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집안으로 들이닥치고 숲속에서는 새들이 소음수준으로 지저귀고 있겄만, 정말 놀랍게도 그 때까지 브루스 배너는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돈이 잘 되어있던 집안과는 대조적으로 책상위에는 그녀가 알아듣지도 못할 수식이 쓰여진 종이들로 가득했다. 몇시간전까지만 해도 켜져있었는지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가스랜턴의 유리등은 아직도 온기를 갖고 있었다.
가발과 안면인식필름을 벗고 나타샤로 돌아가고, 갖고 온 싸구려빵들과 과일들을 테이블에 올려놓을때까지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타샤는 얇은 이불을 온 몸에 두른 채로 잠들어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그가 잠들어있는 모습을 본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힘든 임무를 끝내고 빅가이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올 때엔 마치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스스로의 말로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때에는 정말로 뼈와 살이 부서지는 통증을 겪기 때문에, 쇼크를 막기 위한 처사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좋은 미소로 쇼크를 받으면 다시 돌아갈테니, 라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런 쓴미소를 지을때마다 그를 쓰다듬고 싶었다.
의자에 앉아 호텔에서 받아온 싸구려빵-버터대신 마가린을 썼을 것이 분명한-을 먹고 과일까지 챙겨먹고나서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멍한 눈으로 테이블쪽을 바라보다가 나타샤를 발견하고는 급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머리카락은 한층 부스스한데다 원래부터 잘 자란다던 수염도 한가득이었다. 그가 적잖이 당황해하며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으니, 나타샤는 상당히 허술하다고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그렇다고 또 이렇게 쳐들어오면은-"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간다고요. 애시당초 너무 늦게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해가 뜨자마자 잤어요."
그는 등을 돌려 옷을 갈아입고는 무언가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는 황급히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가 커피까지 다 끓이고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자마자 들어온 배너는 그 광경을 보고는 아연실색하였다. 나타샤는 그런 그의 표정을 무시한 채, 미지근하게 끓인 커피를 입에 축였다.
"...너무 뻔뻔한거 아닌가요?"
"뻔뻔하게 도망친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요."
그는 졌다, 라는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버터대신 마가린을 넣어 만든 싸구려였지만, 그로서는 상당히 오랜만에 먹어보는 빵이었다. 인공적인 풍미가 그의 둔한 후각을 자극했다.
정오 가까이 시간이 지나자 배너는 왕진가방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진통제와 해열제, 아스피린같은 상비약은 기본이었고 메스, 바늘, 실같이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기구들도 차례차례 가방안에 자리를 잡았다. 나타샤는 그 구성을 보면서 그의 '의학기술'에 대해 헬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솔직히 아마추어지만 쓸만은 하다, 라는 말에는 그가 어떻게든 돌팔이로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주고 있었다.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에도 그는 인도에서 의사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혹자는 그것을 속죄를 위한 행위라고 보았지만, 그때 그 모습을 보던 나타샤로서는 자기기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마지막으로 청진기를 넣고, 차마 닫히지도 않는 가방을 억지로 여미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브루스 배너라는 도망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성자, 데이비드 선생님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타샤는 쓴웃음을 지으며 필름을 쓰고 가발을 썼다. 그녀도 에이프릴로 변할 시간이었다.
덜컹!
누군가가 세차게 발로 문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마치 목이 타들어갔는지 허스키하면서도 거칠은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배너, 아니 데이비드는 갑자기 몸을 굳히고는 에이프릴에게 물러나 있으라고 손을 뻗었다. 다시금 문을 차는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그의 얼굴은 여느때보다도 창백해져있었다. 괜찮아요, 나지막히 말하며 그는 손잡이를 잡았다
"네, 나갑니다."
문을 열자마자 쉰내와 함께 익숙한 얼굴의 사나이가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올두르, 에이프릴은 메리켈의 경멸의 표정을 담아 부르던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쓰레기라는 이름의 뜻답게 제대로 씻지도 않는지 몸에서는 쉰내가 가득 풍겨졌고, 옷도 상당히 더러워 땟국물이 옷이란 옷에 베일 정도였다. 그녀는 절로 얼굴을 찌뿌리며 그에게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올두르는 그런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휘파람을 부르며 기뻐했다. 입술에 완연히 미소를 지은채로 그는 신발을 털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흙투성이인 채로 집안으로 들어왔다. 애써 웃음을 짓는-물론 에이프릴로서는 그것이 거짓 웃음이라는걸 간파할 수 있었지만- 의사선생에게 다짜고짜 고함부터 지르더니, 다시 에이프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아가씨."
목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정도로 불쾌했다. 그는 에이프릴 주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동안이나 씻지 않았는지 악취와 휘파람 너머로 느껴진 구취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에이프릴이 상대방에게 잘 보라는 투로 다시 얼굴을 찌뿌리자,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 의사선생. 꽤나 좋은 계집이네."
올두르의 억양은 꽤나 이상했다. 배너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주사기묶음과 앰플 한박스를 건네었다. 전보다 좋아보인다, 라는 거짓인사를 건네자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올두르는 다시금 괘활하게 웃으며 덕분에 산다고 말하였다.
"야! 너 좀 비싸보인다, 얼마야?"
그는 벌써부터 에이프릴이 넘어왔다고 생각하는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다 그녀가 더더욱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치자 혀를 차더니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어감과 배너의 붉어진 얼굴로 보아, 그다지 좋지 못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올두르가 배너를 향해 무어라 쏘아붙이자 배너는 고개를 저으며 표정을 굳혔다. 결국 침입자는 에이프릴의 가슴을 향해 음탕한 시선을 던지고는 인사 하나 없이 오두막을 나갔다.
그가 오두막을 나가자마자 배너는 급히 문을 닫고서는 의자에 힘없이 앉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혈색이 어느정도 돌아오는 것을 느낀 에이프릴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방금 그 사람은-"
"올두르, 쓰레기자식이에요. 방금 한 얘기 알아듣지 못했죠? 다행이네요, 내가 들어봐도 정말 심해서, 까딱하면 화라도 낼 뻔 했네요. 뭐, 그게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손부채질을 하면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하고 긴장하고 있어서, 에이프릴은 그가 마치 궁지에 몰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메리켈에게 간략한건 들었어요,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갱단이라도 봐도 될까요? 설마 그런 것들 때문에 기간을 달라고 한건 아니겠죠?"
"아뇨, 사실이에요. 일단 밖으로 나가죠, 그 인간의 썩은내 때문에 숨쉬기 어려우니까요."
배너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크게 쉼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들어마셨다. 마치 단공기를 맛보듯 몇 번이고 숨을 내쉬다가 진정이 되었는지, 마을로 향하는 길목을 걸어가면서 여유롭게 말을 꺼내었다.
"실은 협박..이라고까지는 아니고 그냥 위협을 당하고 있어요."
"들켰어요?"
배너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범죄자, 라는 것만요. 난 당신같지 않아서 생각보다 감정을 잘 숨기지는 못하는데다, 원래 그런게 있잖아요. 동족은 동족끼리 알아본다고. 내 몸에 피냄새가 절절한걸 눈치채고 있었던거에요."
"당신은 그딴 인간과는 동족이 아니에요!"
에이프릴의 큰 소리에 배너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였다. 그는 작렬하는 태양으로 인해 흘러나오던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날 경찰서로 데리고 가겠다는군요. 뭐, 경찰에 끌려가는거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니까 괜찮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올두르는 배너에게 필요할때마다 찾아와 약을 요구하였다. 그 대가로 그가 주는 것은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는 창녀나 음식쓰레기, 다 썩은 생선이었다. 용케도 이런 환자를 찾아냈는지, 라며 그는 감탄해하며 창녀를 치료하고 본섬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다운 친절에 에이프릴은 속으로 감탄해하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다행히도 올두르는 브루스 배너에게 육체적인 폭력은 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백인이라서가 아닐까, 라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그것은 올두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나에게 요구하는건 인슐린이에요, 그 인간 당뇨병이거든요. 정말이지 용케도 살아있다 싶었어요, 나에게 약을 얻기 전까진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했죠. 그래서 기한을 달라고 했던거에요.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분명 호텔에 있는 이스프와씨를 찾아갈거에요. 문제는 그 인간, 소아성애자라는 소문도 있어서요. 이스프와씨에게는 이제 막 10살이 된 하누이라는 딸이 있거든요. 분명 하누이를 걸고 넘어질거에요. 그게 큰 고민이에요."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을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제서야 에이프릴은 그가 순전히 마을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기에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사라지면 남은 사람들이 행여나 해를 입을까, 그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어째서 그들은 걱정하고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냐는 이야기를 당장에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그 말은 꺼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원망섞인 표정을 애써 숨기고는 에이프릴은 계속해서 마을로 발길을 향했다. 옆의 숲에서 새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그녀의 귓가에 울렸지만, 내려쏟아지는 햇빛은 너무나도 따가웠다. 그녀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배너가 왕진을 도는 동안, 에이프릴과 메리켈은 어제 이야기를 했던 대로 성녀가 죽었다는 숲으로 떠나기로 했다. 부디 몸조심해요, 배너의 힘이 빠진 목소리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마을 근처에 있는 숲은 열대우림답게 초록색으로 가득하여 마치 에메랄드 월드에 온 것 같은 기분마저 자아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솟은 나무들 아래로 작은 넝쿨들과 이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메리켈은 행여나 이끼에 에이프릴이 넘어질라 계속 그녀를 살피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숲 안에는 여러가지 소리들이 울려퍼지고 섞였다. 짝짓기를 맞은 수컷 새의 울음소리, 원숭이소리, 벌레소리, 어디선가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등 수많은 소리들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작은 개울가를 건너 30분쯤을 걸었을까, 갑작스레 나무들이 사라지고는 평원이 나타났다. 마치 가운데를 뚝 잘라놓은 것처럼 평원은 둥그랗게 형성이 되어 있었고, 길다란 풀들이 덮고 있었다. 평원 중심에는 커다란 상록수나무가 서 있었다. 상록수나무로 가는 길을 걸어가며 메리켈은 이 곳에서 있었던 성녀의 순교에 대해 설명했다.
"성녀님은 붉은색 머리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살던 족장이 그녀를 사랑했다고 해요. 그런데 그녀는 주님께 몸을 바치기로 결정한 상태라면서 청혼을 거절했죠. 족장은 성녀님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냈어요. 가브리엘님이 급히 그것을 알려주어서 성녀님은 이 나무로 도망쳐왔어요. 하지만 사방에 족장이 뿌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 성녀님은 붙잡히고 말았대요."
나무의 밑둥이 보였다. 순간 에이프릴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는데, 나무의 밑둥은 마치 피같이 검붉은색 얼룩이 져 있었다.
"아, 저기네요. 족장은 마지막으로 성녀님께 물었지요. 결혼을 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고. 뭐, 성녀님의 대답은 뻔했지요. 결국 성녀님은 이 자리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나무에서는 그 때 성녀님이 흘린 피가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족장은 충격을 받아 미쳐버리고 말았죠. 그 이후로 이 나무를 성.로사의 나무라고 불리게 되었대요. 여기가 섬의 중심이에요."
메리켈은 성녀가 피를 흘렸다는 자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어머니의 세례명이 로사, 에요 하고 쑥스럽다는듯이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사는 마을은 다른 마을과 달리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메리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매우 일요일마다 성당으로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성녀 로사의 전설을 알려준 것도 마을의 신부님이었다고 했다.
"에이프릴도 성당에 가나요? 아님 프로테스탄트?"
"아니, 교회엔 안나가."
근처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간식을 즐기다가 나온 말이었다. 물론 교회에서 하는 미사에서는 몇 번인가 간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심에서가 아니라 임무에서였다. 배신과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신에 대한 생각도 사그라기들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을 비웃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신앙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조금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자연스레 내세에 대한 믿음도 없으니,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더욱 더 그녀를 긴장감 속에서 능숙하게 살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선생님과 비슷하네요. 선생님도 그러거든요, 신을 믿고 싶지 않다, 라면서. 물론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안하지만."
한번 스티브 로저스를 따라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 것을 들었는데, 그 얘기를 하자 배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원래 과학도들이-특히 토니도- 무신론적인 경향을 보인다고는 하나 브루스 배너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는 신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럴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쓴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성녀 로사는 진짜에요, 성녀 로사는 진짜에요, 성당에 가면 사진도 남아있거든요. 머리카락이 정말 붉은색이라 놀랐어요. 금발이야 몇 명 본 적이 있지만 그렇게 빨간 색은 처음이었거든요. 마치 태양의 붉은 빛 같았다니까요."
"금발이야 백인들이 가끔씩 보이잖아."
"그게 아니에요. 백인이 아니라 흑인인데 금발이라고요. 식당일을 하는 호파가 금발인데, 그래서인지 매일 여행자들이 올때마다 같이 사진을 찍어요. 생각보다 팁이 짭짤하다던데요."
그 말에 에이프릴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메리켈이 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동년배에 대한 경쟁심이려나, 하고 그제서야 제 앞에 있는 게 아직 10살짜리 소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는 그런 행동을 읽고서는 입을 내밀어서는 자신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어필했다. 자신도 금발로 태어났으면 좋았으려만, 하고 씁쓸하게 말하였지만 그래도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랑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식당은 괜찮아? 언젠가 한번 가볼까?"
"난 가본적이 없지만, 호파의 말로는 생선보단 조개요리가 더 맛있대요. 그리고 나야 가고 싶지만, 나중에 엄마랑 뤼미에와 함께 갈 거니까 괜찮아요."
돈을 벌어 자신이 사고 말거라고, 10살밖에 먹지 않은 소년은 웃으며 말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장하고 기특해서, 에이프릴은 저절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장하네."
"헤헤, 아니에요."
해가 지기 전에 숲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목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울창한 숲을 헤쳐나가야 했다. 올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렸다는 정도였다. 새 울음소리를 듣자 에이프릴의 코에서 자연스레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숲을 나오고나서 확인하니 어느새 신발과 옷이 진흙범벅이 되어 있어서, 차마 이대로 입고 레스토랑으로 향하기에는 민망한 정도였다. 배너를 만나러 시장에 들러 그의 행적을 묻자 과일을 파는 라브, 라는 사람의 가게에 있다고 했다.
"자, 이제 괜찮아질거에요. 당분간 조심하는거 잊지 말고요."
배너는 에이프릴에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중년여성의 종아리에 난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환자는 라브라는 살짝 몸집이 우락부락한 40대 여성이었는데 멜라네시아인답게 강인하게 생긴 것이 전사를 연상하게 하였다. 점심쯤에 낚시를 하는 남편을 만나러갔다가, 낚시바늘에 베였다는 것 같았다. 배너는 능숙하게, 마치 전문 의사처럼 상처를 꿰매었다. 다 되었다, 라고 말하는 순간 라브가 그의 몸을 껴안고서는 무어무어라 말하면서 환히 미소를 지었다. 메리켈의 말로는 고맙다, 라는 말이라고 했다. 치료가 끝나고 돌아가려는 때에 라브는 과일바구니를 제 상처를 치료해준 의사선생님의 품에 안겨주었다.
'AVGS > Lullaby of Birdland(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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