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Lullaby of Birdland 05. 본문
메리켈의 집 주변에 형성된 군중을 보자마자 배너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심장을 진정시켰다. 라브의 연락에 반신반의해하며 메리켈의 집에 도착한 것이 방금 전이었다. 처음 그녀의 연락을 받았을 때에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웃으며 넘어가려 했지만,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결코 농담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메리켈의 엄마, 즉 사비나씨와 외국인이 다쳤다, 라는 말에는 어딘가 이해가 가지 않은 점이 있었으나,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때에는 도저히 그런 점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그는 왕진가방도 냅둔 채로 낡은 자전거에 올라탔다. 나타샤가 다쳤다는 소리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미친듯이 페달을 밟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은 집 주변에 밀집된 군중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배너를 발견하자 그를 붙잡고 다시금 말을 토해냈다.
"선생님 오셨구려!"
"아이고, 선생님. 글쎄 쓰레기 그 자식이 결국 일을 치고 말았다요."
"일단은 호텔양반이 와서 치료를 해주어서 다행이에요."
그는 다시금 심장을 진정시키고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들어보니 다행히도 사비나씨와 뤼미에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약간의 타박상정도만 입었다고 한다. 반면에 외국인, 즉 에이프릴은 칼에 베여 상처를 꿰맸다는 말이었다. 베였다, 라는 말에 다시금 그의 심장이 곤두박질치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다시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한숨엔느 짙은 분노의 초록색 향기마저 배어있어서, 애써 주먹을 꽉 쥐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요? 그 쓰레기는?"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올두르의 일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외국인을 건드렸으니 별 수 있나. 결국 경찰에 끌려갔어. 그 놈 누나도 잘 됐지, 이제야 골칫덩어리를 떨굴 수 있게 되었으니-"
주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인파를 헤쳐 메리켈의 집으로 들어섰다. 마당은 상당히 난장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사비나와 메리켈, 에이프릴을 위로느라 시장통보다 더 복잡한 것 같았다. 사비나는 뤼미에를 등에 업은 채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에이프릴은 팔에 난 상처를 얼음주머니로 누르면서 메리켈과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과 팔에는 몇개의 반창고가 더 붙여져있었지만, 그의 시선에는 오로지 그 팔의 상처만이 보였다. 주변 바닥에는 아직 덜 굳은 피가 선명한 검붉은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머리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에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머릿속이 천천히 녹색으로 점멸하다가 메리켈의 목소리에 간신히 진정되었다.
"선생님!"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메리켈에게 애써 미소를 보여주고는 괜찮느냐고 물어보다가 다시 에이프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 얼굴의 생채기도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 그녀는 그를 향해 싱긋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메리켈의 괜찮았다는 말도 무시한 채 에이프릴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배너의 행동에 숨을 죽인 채, 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일부러 그런거죠?"
"아, 선생님. 전 괜찮아요, 크게 다친것도 아니고 이스프와 선생님이 다행히도 도와주셔-"
에이프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너는 그녀가 들고 있던 얼음주머니를 뺏어 바닥에 내던졌다. 물기어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얼음주머니가 있던 자리에는 사선으로 길게 베인 상처가 약 10센티가량 붉은 선을 자랑하며 나 있었다. 이스프와가 능숙한 솜씨로 꿰맨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그녀를 보고는 헛웃음마저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했다. 일부러였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가 알고 있는 나타샤 로마노프란 여자는 일개 양아치에게 이런 상처를 입을 여자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당신이 고작 그자식에게 당할 여자가 아니란건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나ㅌ-"
이름이 터져나오기도 전에 에이프릴은 조심스레 배너의 손을 붙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할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무언의 말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 가서 이야기해줄게요."
말을 마치고 에이프릴은 땅에 떨어진, 흙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얼음주머니를 주워올리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먼지를 털고는 다시 상처부위에 갖다대려다 배너의 제지를 받았다. 그는 왕진가방안에 있던 가제를 그녀의 상처부위에 묶었다. 그 일련의, 살짝은 긴장스러운 화해과정이 끝나자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내 마당에는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냥 소란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방문을 닫자마자 배너는 난폭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통증이 심하게 일기라도 하건만, 에이프릴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안해서 그로서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다른 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어루만져 안면인식필름을 벗겨내어도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는 얼굴에 난 생채기가 절대로 분장이 아니란 점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끌고 가려는 저의가 질리기도 했다.
"그래서 만족하나요? 그 인간이 골칫거리란걸 알고나서, 그 인간을 치우려고 이딴 연극이나 하고."
"이딴 연극이 아니에요, 당신이 말하는 그 골칫덩어리가 메리켈의 어머니를 공격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머리에서 가발을 벗어던졌다. 이 짓거리도 지긋지긋하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가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경찰에 잡힐 놈이었고, 나는 당신을 위해 당신이 있는 동안 그렇게 해준 것 뿐이에요. 연극이요? 물론 연극이죠, 하지만 아무리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마음을 편하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제 당신의 골칫덩어리는 사라졌어요."
"고작 그것때문에 이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벌였다?"
그는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머릿속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지만, 그 분노의 화살이 누구를 향해 돌려져있는지는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었다. 간신히 쉼호흡을 하고 손을 떼자, 팔에 남은 손자국이 선명히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피곤한 기운데 배너는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몰라요. 이번에는 외국인을 건드렸다고 잡혀들어갔겠지만, 설마 그 인간이 그런 짓을 한두번 한것 같나요? 그 인간의 패거리가 당신을 노릴 거고, 그 인간도 결국은 다시 나올거라고요. 나타샤, 이건 그냥 미봉책일 뿐이에요."
"그럼 지금이라도 떠나면 되는 문제에요. 뭐가 문제인거에요? 설마 이 마을을 좋아하게 되었다는건 아니죠? 그래서 떠나기 힘들어졌다는, 그런 한심한 이유인가요?"
배너는 정곡에 찔려서인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초점없이 흔들리는 시선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걸 보여주고 있었다. 배너는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르는, 그래서 더더욱 그에게 살갑게 대해주는 마을 사람들을 떠나기 싫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나타샤의 머릿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언제나 상황이 안좋아지면 도망치던 사람이 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건데요? 브루스, 지금 당신 상황은 좋지 않아요. 곧 들킬거라고요. 지금쯤이면 벌써라도 도망을 쳐야 정상이라고요."
"나타샤, 나는-"
"이 곳 사람들이 당신에게 잘 해주던가요? 친절한 의사양반에게?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무엇을 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그녀는 심히 감정적으로 배너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 바튼이 본다면 꽤나 놀랄법할 정도로 언성이 높아져있었지만, 그녀도 배너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공기는 꽤나 격앙되어 가뜩이나 따뜻한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창밖의 새소리만 아니었으면 더 뜨거워졌을 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타샤,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브루스!"
그녀는 손을 뻗어 강하게 배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아귀에 어깨가 아파 그를 얼굴을 찡그렸지만 나타샤는 손을 떼지 않았다. 나름의 협박에 배너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그 곳에 돌아가봤자 나에게 남는건 뭐죠? 당신은 날 보호하려고 왔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닌가요? 내가 겪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보았었나요? 오, 나타샤. 난 살인자에요, 괴물이기도 하고. 그 곳에 돌아가면 모든 이들이 날 죽이려 들거에요, 아니면 날 단지 실험체 A처럼 보던가. 설마 이게 기우라고 하는건 아니겠죠? 나타샤, 그냥 날 이대로 보내주면 안되겠어요?"
그 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나타샤의 손도 어깨에서 떨어졌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는 그 이유에도 일리가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는 브루스 배너의 신상을 계속해서 어벤져스와 토니에게 요구하고 있었고, 몇몇은 그의 위험성때문에 군대를 움직일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브루스 배너는 온 세계의 적이었다. 그것을 배너도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그가 전세계를 떠돌게 할 수는 없었다. 그를 노리는 다른 이들로부터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보호하고 싶었다.
"안돼요. 허튼 소리 말아요. 말했죠? 난 당신을 지키려고 왔다고. 이대로 도망만 칠 수 없다는걸,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배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돌아가지 않고 이 곳에 머물겠다는 결심은 확고해보였다. 이미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착잡함과 불안감이 그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돌아가요, 나타샤. 난 여기에 남겠어요, 일이 생기면 그 때 다른 곳으로 가도 늦지 않을거에요."
그는 그 말을 남기고 현관으로 향했다. 이대로 아무 말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나타샤는 빠른 걸음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브루스, 이미 일은- 말이 끊긴 것은 배너가 뒤돌아섬과 함께 들린 다급한 노크소리였다.
"손님! 계십니까, 손님?!"
벨보이의 다급한 목소리와 빠른 노크소리, 순간 둘 사이에는 적막이 일다가 다시 노크소리로 깨졌다. 배너는 목짓으로 어디 한군데에 숨어있으라는 시늉을 해보았다. 아무리 유능한 스파이인 그녀라도 순식간에 금발의 여기자로 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 행동에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의 물을 틀어, 마치 손님이 몸을 씻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 물론 샤워하는 여성과 같은 방에 있는 남성, 이라는 조합은 사람들에게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했지만, 애써 배너가 그것을 알아채지 말아주기를 바라며 그가 문을 여는 소리에 집중했다.
"아, 선생님....아, 저기 여기 계시는 손님은 지금 어디에-"
"에이프릴양이라면 지금 씻고 있어요. 지금 부를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다만... 그렇군요,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실은 밖에 올두르의 패거리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손님이 올두르랑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것때문에 온 것 같습니다. 물론 바한씨가 경비를 서 주고 계셔서 일단 호텔 안으로까지는 못들어오고 있습니다만... 만약 손님이 나오신다면 부디 오늘 밤에는 바깥에 나가지도 말고, 혹여나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거나 한다면 경찰에 연락하라고 전해주십시오. 아, 그럼 이 시각에 찾아뵈어서 실례했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샤워기의 소리도 멈추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창문가로 다가가 커텐에 몸을 숨기며 밖을 바라보았다. 살짝 겁에 질려있던 벨보이의 목소리가 과장은 아니었던 모양이던지, 과연 호텔 대문앞 길가에는 누추한 행색의 남자들이 2~3명씩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대략 10여명 정도인가, 유능한 스파이이자 전투원인 그녀로서는 무리하지도 않게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동네는 총기도 제대로 발견하기 힘든데다가 남자들의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더라도 둔봉같은 것만 갖고 있을 뿐, 총같은 무기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곁눈질로 현관앞에서 안절부절해하며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면 당신이 붙잡힐거에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그 말을 내뱉으며 거칠게 커튼을 닫았다. 커텐의 레일이 내는 소리가 지나가자 이내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방금전까지의 언쟁이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둘은 살짝은 어색해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나타샤는 소파에 앉아 현관에서 차마 신발도 갈아신지 못한 채 서 있는 배너에게 말하였다.
"...저들이 물러날때까지 여기 있는게 좋겠어요. 날 공격하려고 했으면 호텔에 쳐들어왔을텐데 그러지 않았다는건 아직 확신도 자신도 없다는거에요. 아마 몇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산할거에요."
배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타샤의, 그 몇시간이라고 말한 바를 이해했는지 소파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바깥은 등불이 없이는 숲길을 다니기에는 껌껌해져 있었고, 그가 사는 오두막까지는 가로등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빛에 의지하여 돌아가기에는 밖에 있는 일당들이 문제였다. 나타샤도 그걸 알아차린 듯 했다. 즉, 그 몇시간이란 내일 해가 뜰때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배너도 아무 부정도 못하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나타샤가 앉은 소파의 맞은 편에 앉아 우선 한숨부터 내쉬었다. 갑작스런 긴장을 떨어내는 한숨으로는 안성맞춤이었지만 또다른, 그녀와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맞아들이는 한숨이기도 했다. 나타샤도 알아차렸는지 여긴 더운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농을 던졌다가 이내 침묵했다.
"...사실 여기에 온건 휴가였어요. 아뇨, 휴가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네요. 스타크와 캡이 억지로 보낸거니까."
갑작스레 터져나온 말은 배너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녀는 마치 탄식하는 것처럼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이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갑자기 사진을 보여주더니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휴가나 가라고 그러더군요. 말이 휴가지, 당신을 잡으러 가라는 거였으니까 임무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변장하고 가짜여권을 만들고 시드니까지 가는 비행기편을 예약하고, 그리고 그 시드니에서 여기까지 오는 비행기까지 탔죠. 심지어 경비를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내 돈을 들여야 했어요. 어째서 그들이 날 먼저 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간신히 당신을 찾았으니 어떻게든 당신을 데려가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결국 당신은 또 '그' 길을 택하려고 하는군요.....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치고 살 생각이죠? 결국 이곳도 곧 떠나야 할텐데."
배너는 그 말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말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평생, 어떻게든 내가 죽을때까지겠죠."
나타샤는 터져나오려는 분노와 연민을 애써 입술을 짓무는 것으로 참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씻을게요, 라는 말을 간신히 내뱉고는 곧 욕실로 사라졌다.
그녀가 몸을 씻고 방으로 나오자 이미 배너는 좁은 소파에 몸을 눕힌채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녀는 착잡한 심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손끝으로 건드렸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새어나왔고 바람이 부는지 숲쪽에 있는 창문에 걸려있던 풍경이 흔들렸다. 살짝 숲의 비린내가 풍기는 바람이 그들의 사이를 스치다가 나타샤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이런 이국적이면서도 이질적인 풍경에서 둘만 있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신기하고도 마치 꿈만 같은 일이었고, 그에 대해 품고있던 분노와 질투, 짜증이 옅어지는 느낌에 배너의 삐져나온 손을 붙잡았다. 격무에 굳은 살이 박힌 손가락은 따뜻했지만 안타까웠다.
"...브루스."
미약하게나마 부른 목소리에 배너의 몸이 움찔거리다가 이내 다시 수면의 늪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녀는 배너의 손을 붙잡은 채로 바닥에 앉아 소파에 얼굴을 기대었다. 고요한 숨소리, 그녀가 그렇게나 좋아했던 그 숨소리를 자장가삼아 눈을 감았다.
손과 손이 맞닿은 일순간 움직임이 멈추었다.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차마 아무도 숨을 내쉬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나타샤는 조심스레 초록색 손가락에 박혀있던 나뭇조각을 빼내었다. 상처자국에서는 그나마 붉은색 피가 흘러내리다 이내 빠르게 멎었고, 흉터마저 빠르게 사라졌다. 손을 떼고나서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하지만 두려움에 떨리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물러났다. 치료를 받은 장본인은 언제 그렇게나 분노를 드러냈던가 할 정도로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몇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결국 그는 산속으로 그 거구를 숨겼다. 다시금 원래모습, 브루스 배너인 채로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의 일이었다. 그는 뿌리채 뽑혀져있던 몇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AVGS > Lullaby of Birdland(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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