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토니+자비스+비전 _ 마음의 한가운데 01 본문
강철판이 비틀려지는듯한 굉음과 함께 차가 뒤집혔을 때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기절하고 있었을까, 그가 가까스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자 느낀 것은 자신을 품에 안고 있던 집사의 식어가는 체온이요,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미지근하고 비린내를 풍기는 피의 감촉이요, 그리고 초점이 점점 흐리멍텅하게 사라져가는 눈동자였다.
"자비스!"
그는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선 자비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평소 그렇게나 좋아하던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피로 거뭇거뭇해져있었고 얼굴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그의 복부에서는 피가 새어나와 며칠전에 사주었던 정장의 베스트를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가 좋아했던 자비스의 그런 점들이 망가졌다는 것보다도 그의 마음을 붉은 심연속으로 나자빠지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다행이군요, 주인님."
쿨럭, 하고 터져나오는 자신의 피를 차마 닦지도 못한 채, 자비스는 조심스레 그의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그 손을 붙잡고는 평소보다도 미지근한 온도에 절망하며 집사의, 그의 수양아들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돼, 안돼, 자비스. 점점 자비스의 눈에서 빛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 본 뒤에 계속해서 아들에게 안된다고 말하였다. 자비스의 입가에서 다시금 미소가 띄워졌다.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서 간신히 입을 열어 평소라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로 제 손을 붙잡고 있는 그를 향해 속삭였다.
"...아버지.."
자비스가 스타크가에 온지 10여년만에 처음으로 토니에게 내뱉은 단어였다. 그 말에 토니는 오히려 미친듯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을 하지 말라고 급하게 말하였다. 자비스의 눈동자가 김어린 렌즈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자비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차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
다시금 내뱉어진 아버지란 소리는 전과는 다르게 날이 서 있었다.
“...어째서 절 죽이셨나요?”
“토니!”
토니 스타크가 약혼자의 외침에 잠에서 깨어난 건 이제 막 10시가 되려던 때였다. 페퍼 포츠는 그의 침대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술병들을 발로 걷어차고서는 그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손에 닿는 까실한 감촉이 요 며칠 새 그가 제대로 수염조차 깎지 않았단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뿐일까, 제대로 정리도 안한 머리는 이미 엉망이었으며 씻지도 않았는지 몸에서는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 억지로 퇴원하자마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매일 방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술을 벗 삼아 끔찍했던 사고와 병원에서의 기억들을 잊고 있었다. 페퍼는 혀를 차며 토니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워서는 그를 욕실로 끌고갔다. 욕실에 그를 억지로 쳐넣은 다음 문을 닫으며 페퍼는 소리쳤다.
“장례식 1시에요! 지금 완다만으로도 힘든데 장주인 당신이 정신줄을 놓으면 어떻게 해요? 그 꼴로 추도사를 읽겠다는 건 아니겠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겠다면,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하겠다면 어서 사람모습을 차려요.... 토니, 당신이 힘들어하는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오늘만은 온전한 모습으로 자비스를 보내줘요.”
자비스, 라는 말에 욕실문에 기대앉아있던 토니는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그는 오늘이 어떤 날인지,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를 깨달았다. 깁스를 한 왼쪽 팔은 부자유스러웠지만, 그는 그 불편함마저 잊은 채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뿜어져나오는 뜨거운 물은 김이 되어 욕실을 흐린 색으로 채웠다. 마치 그 때의 그 눈처럼. 그가 좋아했던 파란색 눈에서 생기가 점차 사라지던 그 때처럼, 그는 심장을 후벼파는 통증에 신음소리를 흘리며 물에 머리를 갖다 대었다. 모든 것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마치 그 교통사고가 없던 일인것만 같아서, 지금에라도 자비스가 욕실문을 열고는 자신이 욕조에 빠져죽지 않았나 확인할 것만 같았다. 동생으로 여기던 완다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묶어주고는 자신의 넥타이를 매어주는 그런 평범한 나날이 다시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그러다 문득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보았다. 그 속에는 사랑하던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다, 장례식이다. 일주일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흘전에 사망한, 그의 수양아들의 장례식이었다. 그를 아는 친지들과 몇몇 사람들만이 참석하는 소소한 장례식을 이끌어야 하는 건 바로 토니 스타크였다. 절차는 알고 있었다. 자비스는 천주교였으니 장례미사를 지낸 뒤 자신이 추도문을 읽고, 그의 빈 몸뚱이에 인사를 고한다. 그리고 자비스가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동묘지에 매장될 것이다. 그리고는? 그는 그 다음을 상상하기 무서웠다. 자비스가 없는 집에서 지내야한다는 것이, 그가 자신의 말을 비꼬는 모습이 없다는 것이, 어린 완다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자신의 넥타이를 매어줄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이, 언젠가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기를 바랬는데 그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눈을 감을 때 그 손을 잡아줄 그가 없다는 것이.
25, 이제 46을 맞이하는 토니 스타크에게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였고, 앞으로 더 많은 나날들이 남아있을 나이였다. 토니는 그 많은 나날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비록 자비스보다는 철이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버지 비슷한 존재로서 곁에 있고 싶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수증기가 서리고, 걱정에 찬 페퍼가 욕실의 문을 두드리자 토니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쏟아져내려오는 뜨거운 물에 손을 갖다대었다.
“-우리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소중한 사람이었던 에드윈 자비스 스타크는 결국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추도사를 읽는 목소리는 매우 갈라져있었다. 토니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눈가가 붉어져있었고, 매우 침울한 표정으로 자비스가 누워있을 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속의 자비스는 원래부터 창백한 피부가 더욱 더 창백해져 편안히 누워있었다. 완다가 꽂아주었을 색색깔의 꽃들이 그 창백함을 더욱 더 강조하고 있었다. 며칠 밤을 울다가 혼절하기 일쑤였던 완다도 오늘만큼은 씩씩하게 추도사를 듣고 있었다. 평소에는 높게 묶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핀으로 내려꽂은 모습은 평소 그녀를 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풍경이었다. 퉁퉁 불어버린 눈가가 어젯밤에도 그녀가 울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오히려 장례식에서는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무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기나긴 장례미사가 끝나고 난 뒤, 추도사를 읊는 성당 내부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토니의 목소리만이 성당안을 가득 채우다가 자비스에게 향했다. 추도사는 미사와는 달리 짧게 끝났다. 하지만 다들 화장으로 가렸지만 숨길 수 없는 초췌한 모습에 수긍하고 말았다.
“스타크.”
장례식을 마치고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운구차에 동승하려던 토니를 불러세운 것은 나타샤 로마노프였다. 토니가 자문을 해주곤 했던 쉴드측에서는 최근 그의 상태가 심상치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타샤가 파견된 것이다. 물론 그녀도 자비스와 알던 사이이니 참가할 자격이 없는건 아니었다. 완다의 표독스러운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나타샤는 토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비스의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본론은 그게 아닐텐데?”
“...쉴드의 자문일에는 언제 복귀할거죠?”
그 말에 토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은 일얘기를 하려고 온 것이었나, 그는 허탈한 웃음을 몇 번 흘렸다.
“좋아, 미스 로마노프에게 특별히 말해주지. 잘 들어, 원래 이건 내일에나 매스컴에서 터질 이야기야. 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CEO직에서 물러나겠어, 후임은 페퍼야. 그리고 쉴드의 자문일에는 당분간 손을 뗄거야. 자네도 알잖아?”
운구차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내 상태 개판이니까, 이렇게 깁스까지 했고 아직도 병원에 다녀야한다고. 그러니까 당분간 얼굴보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미스 로마노프와 쉴드이하.”
그 말을 남기고는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페퍼는 애써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으며, 완다는 들고 있던 곰인형-자비스가 선물했던-을 품에 안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페퍼의 손을 잡았다. 토니, 울음에 잠긴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괜찮아. 봐, 난 괜찮아 페퍼.”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더 걱정되는거 알죠?”
그 말에 토니는 완다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눈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시선을 페퍼에게 돌렸다.
“자비스 마지막 모습 봤어? 매일 나 때문에 그렇게나 얼굴을 찌뿌리더니 마지막에는 그렇게나 평온한거봐. 속은 텅 비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페퍼는 그가 얼마나 애를 써서 편안하게 말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자비스를 스타크가에 들이기 전부터 그와 지내던 그녀로서는, 현재 그의 상태가 어떤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손을 붙잡아줘야 하는건 오히려 자신이라는 것도, 토니의 속이 얼마나 썩어들어갈지도.
“토니, 애쓰지 마요.”
그 말에 오히려 토니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태껏 그녀가 봐왔던 미소들 중에서 가장 슬픈 미소였다.
"왜 날 죽였죠?“
“아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엔 잠자리에 든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토니는 어둠속에서 자신의 머리를 붙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자비스가 죽고나서부터, 그는 매일매일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가 전복되었고 흐려져가는 눈동자를 한 채 자비스는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여기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자비스는 그 뒤로 계속해서 왜 자신을 죽였냐고 묻고 있었다. 몇 번은 꿈속의 일이라고 인식하면서 넘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이주일을 넘어가자 자비스가 진짜로 그 말을 한 것처럼 기억의 혼동마저 일어났다. 악몽을 꾸면 몇시간동안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 결국 새벽을 맞이했다. 페퍼는 물려받은 CEO직에 바빠 그의 곁에 없기 일쑤였다. 완다는 도저히 돌봐주기 어렵다는 판단에 페퍼에게 보내버렸다. 그는 도저히 10살짜리 여자아이를, 그것도 사랑하던 오빠를 잃은 소녀를 돌볼 자신이 없었다. 자연스레 말리부 저택엔 그 혼자만이 남아 힘겨운 밤을 보내야했다.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그의 눈가에는 항상 블랙서클이 자리잡았다. 공구를 만지려고해도 손이 미친듯이 떨려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핸드폰의 버튼을 눌러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 것도 몇 번, 결국엔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짜증나 핸드폰을 부수기까지 했다.
“아냐, 자비스 아니야. 내가 아들을 죽일 리가 없잖아.”
나지막히, 하지만 절박하게 그는 몇 번이고 그 말을 읊조렸다. 아니야, 자비스. 아냐. 난 그러지 않았어.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다 결국 흐느끼는 말로 변하였다. 제발 아냐, 자비스. 아니야. 그렇게 몇시간을 흐느끼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술을 마셨다. 그러면 다시금 머릿속에서 자비스의 시신이 말을 했다.
“아버지.”
토니가 그 시신에게 하는 말은 언제나 같았다.
“..그래, 우리 아들.”
잠도 이루지 못한 채, 평소처럼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던 낮이었다. 인공지능이 손님이 찾아왔다면서 현관의 영상을 비추었을 때, 그는 처음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영상에 흐릿하게 비친 남자는 갈색 곱슬머리를 수더분하게 정리하고는, 역시나 헐렁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딱 봐도 과학도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고요하지만 짙은 분노와 지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브루스!”
토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침실 이곳저곳에 널린 술병더미를 헤치고 거실로 향하니, 커다란 갈색 더플백을 든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인도에서 언제 온거야?”
그는 당장에라도 친우를 껴안으려 팔을 벌렸지만 배너는 뒷걸음질을 쳤다. 술냄새가 지독하다는 듯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소파위에다 가방을 올려놓았다.
“정말로 고약한 냄새가 나니까 이 이상은 오지 마. 듣던대로네, 토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이럴거야? 미국엔 언제 온거야? 언제는 인도에서 뼈를 묻겠다며?”
그 말에 배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페퍼와 로드대령에게서 천재이자 억만장자이자 박애주의자이자 자선사업가인 양반이 다 죽어간다고, 어떻게든 살려달라는데 별 수가 있어야지.”
"..다 죽어간다라.."
토니의 몸이 천천히 소파로 무너져내렸다. 그는 더플백을 베개삼아 누워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배너에게 말을 이었다.
"알콜중독에 수면부족, 환청에 환각. 수전증은 너무 심해서 드라이버조차 들지 못하고. 페퍼랑 로디가 걱정하는것도 당연하겠군....하하... 있지, 브루스. 매일 밤마다 자비스가 꿈속에서 나와."
"...꿈속에서?"
그래, 라며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팔뚝으로 눈을 가리고는 어둠속에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왜 자길 죽였냐고 그러더군."
"토니, 그건..!"
"그래, 나도 잘 알아. 나도 나름 과학자라고,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그렇지만 닥터 배너, 이런 생각 해 본적 없어? 가까운 미래라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설사 뇌사에 빠진 사람이라도 다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장기기증서에 사인하기 전까지도 수없이 그 생각만 했어. 이대로 자비스가 살아있다면, 수천억을 들여서라도 그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사인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건 무리야, 토니. 다 알잖아."
"...머리가 아는거랑 인정하는건 다르던데?"
전화 속 페퍼는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며 책망했다.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토니는 해피의 부축을 받아 자비스에게 심장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그 덕에 자비스의 심장은 멈추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한번 산소가 끊겨버린 뇌는 생존을 제외한 기능이 파괴되고 말았다. 흔히들 뇌사상태, 라고 불리우는 상황에 이른 자비스의 지갑에서 나온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 사인이 발견되었고, 때마침 같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보호자인 토니-법적으로는 양부모였으니-에게 연락이 갔다. 처음에 토니는 반대했고 페퍼는 가는 길을 좋게 해주자고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토니는 눈을 감고 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토니, 뇌가 죽은건 살아있다고 말하지 못해."
"나도 알아. 그런데도 매일 밤 꿈속에서 자비스는 내게 묻는다고. 왜 죽였어요? 왜 날 죽였어요, 아버지?"
"토니!"
배너는 억지로 토니의 팔을 눈에서 떼내었다. 그의 눈가는 상당히 붉어져있었고 표정또한 어그러져있었지만 끝내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가 속에 얹힌 사람처럼 숨을 고르다가 흐느끼듯 내뱉었다.
"..그런데 더 웃긴건... 난 끝까지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못한다는거야. 바보같지? 나름 아들로 여겼는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토니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언가를 놓아버린듯한 태도에 배너는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그 또한 자비스가 스타크가에 들어올때부터 일어났던 일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토니는 아버지의 집사였던 에드윈 자비스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막 고아가 되어버린 증손자를 거두었다. 자비스는 똑똑하고 명석한데다 성격도 좋았지만, 사고의 후유증은 상당히 컸다. 토니는 일로 바쁜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 자비스를 돌봤다. 언젠가 자비스의 시험성적표를 들고 기뻐하는 토니의 표정은 으레 아버지들이 짓는 표정이어서, 배너는 결국 토니가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토니는 작년, 자비스가 대학을 막 졸업하기 직전에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온 비서이자 연인인 페퍼 포츠와 약혼했다. 그리고 약혼직전, 정말 아들처럼 여겼던 자비스를 법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였다.
“자네가 얼마나 자비스를 사랑했는지 알아.”
입양허가가 되고 법적으로 자비스를 아들로 맞이한 날, 바에서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토니는 매우 기뻐했었다.
“자비스가 얼마나 자네를 사랑했는지도 알아.”
그는 빚을 갚아야겠다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토니의 집사를 자청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렇게 있으면 안돼, 이건 뻔한 말일테지만 자비스가 자네 이런 꼴을 그냥 보고 넘어가겠어? 토니, 네 아들을 생각해. 그리고 네 약혼자와 완다도 생각하라고. 이렇게 슬퍼한다고 답이 나오겠어?”
토니는 고개를 돌려 현관쪽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오면 항상 자비스가 서서 대기하던 곳이었다. 물론 자비스는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 하지만 토니의 망막에 선명히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어째서, 그는 그 곳에 시선을 집중한 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앞으로 손을 모아서 서 있는 그 모습이, 사고 이후 처음으로 보는 사고당시의 모습이 아닌 자비스였다.
▒ ▒ ▒
자비스의 각막을 이식받은 사람은 27살의 인도계 여성이었다. IT업계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자비스의 각막을 이식받고 그녀는 시각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완다와 같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녀의 보호자는 매우 놀라며 둘을 반겼다. 남편은 토니와 완다에게 차와 과자를 건네었다. 그리고 아내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들이 사는 집은 전원주택이었고 마당에는 색색깔의 꽃들이 심어져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그들을 맞이한 여자는 기증자의 아버지라는 소리에, 토니 스타크라는 이름보다 깊은 감명을 느꼈다. 그녀는 둘의 손을 동시에 붙잡고는 고맙다고 전하였다.
신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둘이었다. 한명은 40대의 중년 남성으로 백화점에서 청소부일을 하던 남자였다. 그는 신부전증으로 죽을 위기를 겪다가 간신히 나온 기증자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정말로 고맙다고 침대에 누워 말하였다. 백발이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그의 아들이 정성스레 빗어주고 있었다. 자비스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다른 한명은 막 30살을 맞이한 청년이었다. 식물학 박사과정을 받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과연 집에는 책들이 그득했다. 같이 찾아간 배너와 몇 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토니가 자신을 살려준 신장의 아버지라는것을 알게 되자 그를 껴안았다. 아드님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곧 결혼할 여자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드님이 천국에 가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간을 이식받은 사람은 54살의 남성이었다. 회복세가 느려 병실침대에서 토니와 페퍼를 맞이하였는데, 노랗게 뜬 얼굴이 이식을 받았음에도 상태가 좋지 않음을 가늠케했다. 그는 토니의 손을 맞잡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노랗게 뜬 얼굴 사이에서 떠 있는 초록색 눈이 무언의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자의 슬픔을 이해한다면서 토니의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눈물이 손등에 떨어지는 순간 주저앉을뻔 했지만 가까스로 페퍼가 부축해주었다.
아직도 자비스는 꿈속에서 왜 자신을 죽였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토니는 더 이상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손의 떨림도 사라졌다. 자비스가 생명을 선물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완다도 집에 다시 돌아왔다. 자비스의 환영을 보고나서 그는 곧바로 페퍼에게 전화했다. 완다가 보고싶다는 말에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흔쾌히 집에 보내주겠다고 말하였다. 연구소에서 오래 지낸 탓에 또래보다 똑똑하고 철이 든 완다는 말끔히 면도를 한 토니의 모습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다행이야, 텔레파시로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어린 소녀에게 말했다. 오빠의 눈을 보러가자. 완다는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긍정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그들은 자비스의 각막을 이식받은 여성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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