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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자비스+비전 _ 마음의 한가운데 02 (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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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자비스+비전 _ 마음의 한가운데 02 (完)

rabbitvaseline 2015. 11. 27. 20:57



마음의 한가운데 01 에서 이어집니다.








“오빠!”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소녀를 발견하자 비전은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분명 검은 코트를 입고 있는 소녀를 보았을 뿐인데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어미잃은 고양이처럼 상처입고 웅크려있는 여자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전의 입에서 완-이라고 소리가 나오기 전에, 세단에서 급히 뛰어나온 경호원이 소녀를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완다아가씨. 이러시면 안됩니다.”

완다, 라고 불린 소녀는 비전의 청녹빛 눈동자를 가만스레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묘한 순간, 붉은색의 선들이 제 머릿속을 헤집고다니다 이내 안개처럼 사그라들었다. 아가씨! 급격한 심장의 통증과 그리움에 비전이 순간 휘청거리자 또 다른 경호원이 그를 부축해주었다.

“죄송합니다, 이 일은 부디 모르는 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경호원은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사명이 찍힌 명함을 건네어주고는 곧바로 소녀를 차 안에 태웠다. 시동이 켜지고 그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그 와중에도, 소녀의 눈동자는 비전과 맞추어져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 가운데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통증과 함께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그 일을 막 퇴근한 헬렌에게 말하자, 그녀는 우선 겨울공기도 좋지 않은 인간이 어째서 바깥에 나갔느냐고 타박했다. 헬렌이 보호하고 있는 15세의, 이제 막 소년티를 벗어낸 청년인 비전이 병원에서 퇴원한지는 약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장기이식으로 인한 면역반응 때문에 비전은 항상 면역억제제를 먹어야했다. 덕분에 그는 그 흔한 감기마저 걸리면 안되는 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동물원에-”

동물원이라는 소리에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던 헬렌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비전을 향해 돌아서면서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내가 동물도 가까이 하면 안된다고 말했어. 비전, 네 몸상태는 한국에 있을 때하고는 같지 않아. 지금은 뭐든 다 조심할 때라고. 말했잖아, 넌 지금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라 약한 세균이라도 치명적이라고.”

“하지만 헬렌, 단순히 텔레비전이나 책으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수술 전에라면 도저히 하지 않을 소리였기에, 헬렌은 캐리어에서 손을 떼고는 비전을 제 품에 안았다. 그녀는 비전이 변했다는 것이 두려웠기도 했고 안심스럽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감정에 대해서는 자각조차 못하던 아이가, 이제는 모든 것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그동안 비전과 같이 살아오면서 답답한 일들도 많았고 화나는 일들도 있었고 분명 너무나도 감동적인 일들도 많았다. 하지만 비전은 그 일들을 그저 ‘일’로만 치부하였고 자기 위신에 관련된 사항이 아니면 행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기뻐할줄도 슬퍼할줄도 몰랐고 분노, 연민, 희망, 절망도 몰랐다. 그저 기계처럼 움직였을 뿐이었다. 헬렌은 그를 곁에 두면서 자신의 감정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웠다.

하지만 수술 이후 비전은 변했다. 마취에서 풀려 정신을 차렸을 때, 비전은 인공호흡기에 호흡을 의지한 채로 울부짖었다. 계속해서 아버지, 아버지라고 소리쳐 부르다 ‘무섭다’고 말하곤 헬렌의 품에서 잠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엔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은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마치 악몽을 꾸다 깨어난 아이처럼 자신을 꼭 껴안고는 덜덜 떨었다. 여기있어, 걱정마, 비전. 헬렌은 몇 번이고 비전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말하였다. 15살의, 아직 청소년일 아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나중에 무엇 때문에 무서워했느냐, 라고 묻자 낮게 깔려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사라지는게 무서웠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죠, 하지만 헬렌. 저는 제 숨이 점점 끊기고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건 분명 무섭다, 라는 감정이겠죠. 전 죽는게 두려웠던 겁니다.”

그 말에 헬렌은 그저 비전을 품에 안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헬렌의 따뜻한 품속에서 비전은 포근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매우 행복하다고, 그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느꼈다. 헬렌은 점점 변해가는 비전이 두려웠다. 마치 바깥세상을 보는 강아지처럼 비전은 모든 것에 호기심을 느꼈다. 어째서 저 여자 간호사는 저렇게 웃어대는걸까요? 저 커플은 매우 행복해보이네요. 아이를 잃다니 어머니가 불쌍하군요. 그는 감정을 스펀지처럼 미친듯이 흡수했다. 처음에 그런 모습을 볼 때엔 마치 예전의 비전이 죽고 심장이 그를 지배해버린 것만 같아서, 그녀는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주워온 막둥이 동생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감정’을 느낀 소년은 퇴원하자마자 헬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뉴욕 시내를 쏘다니게 되었다. 처음에 관심을 가진 곳은 센트럴 파크였다. 그곳에서 차가운 가을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맞는 것을 그는 좋아하게 되었다. 오늘 완다, 라는 여자아이를 만난 것도 센트럴파크에 딸려있는 동물원으로 가는 길목에서였다.

“...완다, 라고 했지?”

“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경호원들이 데리고 있었습니다.”

“...토니가 소코비아에서 여자아이를 데려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런데 널 보고 오빠라고 그랬다고?”

오빠, 라는 소리에 다시금 비전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머릿속에 짧은 영상을 비추었다. 새카만 담요를 둘러싼 채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품에 들어올리자, 아이는 품에서 결국 울고 말았다. 그걸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토니 스타크가 보고 있었다.

“...Sir?"

"응?“

갑작스레 터져나온 단어에 비전도 놀랐는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했다. 수술을 받고 난 뒤로 비전은 여러 가지 환상속에서 떠다니는 경우가 많아졌다. 부모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의 기쁨이라던가 새로 산 강아지를 만났던 것 같은, 그에겐 절대로 있지도 않았던 그런 일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 환영은 달랐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을 기억하듯 흐릿한 환영이었다면, 이번 환영은 모든 것들이 세세히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안타까운 마음이 그의 몸 속에서 일었다.

“비전?”

수술을 받고 난 이후로 이렇게 비전이 무아지경으로 빠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헬렌은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캐리어로 돌아갔다.



▒   



서재 안에는 담배연기가 너무나도 가득해서 옷에 배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배너는 노크없이 문을 열었지만, 토니는 이미 발소리로 누군지를 알아맞춘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궐련을 입에 가져갔다. 한번 연기를 빨아들이니 끄트머리에서 불똥이 작게 빛났다. 매케한 연기에 배너는 거짓기침으로 환기를 할 것을 나타내고는 문을 스토퍼로 고정시켰다.

“평소에는 담배의 담자도 꺼내지 않던 인간이. 끊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완다가 있을 때 한정이야.”

완다는 현재 쉴드의 에이전트인 클린트 바튼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갓 태어난 막내아이의 이름에 피에트로가 붙여졌다는 이야기에 한시라도 빨리 보고싶다고 토니를 재촉했고, 토니는 아이의 응석에 지쳐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종알종알거리는 목소리가 없어서 오히려 시원하다고 말하면서도 토니의 시선은 책상위의 액자에 머무르고 있었다. 액자 안에는 자신과 페퍼, 자비스와 완다가 찍힌 사진이 걸려져 있었다. 자비스가 죽기 한 달전쯤에 완다에게 선물한 드론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평범한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이 사진이 결국 자비스의 마지막 사진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뭐 때문에 온거요, 배너박사?”

배너는 토니가 앉아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 서류들이 엉망진창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아마 자비스가 보았다면 타박을 하면서 급히 치웠을 것들이었다. 배너는 제일 위에 있는 서류를 들어올렸다. 환자의 기록이었다.

“아직도 찾지 못했던 모양이군.”

그 말에 토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금 연기를 빨아들였다. 니코틴이 핏속을 돌아 머리가 진정되었지만 초조해지는 마음만은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도저히 마지막 파편, 심장을 찾을 수 없었다.

“폴 베타니라니, 그런 가당찮은 가명을 사용한 인간이 누군지 알 수 있어야지. 아무래도 FBI까지 관련이 되어있는 것 같아. 일단 쉴드쪽에 얘기는 해봤는데, 당장 돌아오면 해주겠다고 하더군.”

자비스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15세 남성이었다. 이름은 폴 베타니, 라고 하지만 토니가 찾아본 결과, 최근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그런 이름의 15세 남성은 찾을 수 없었다. 더욱 더 정보를 파고들어가려했지만 그를 막아선 것은 FBI의 독수리였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국방부라도 해킹이 가능한 토니였지만, 문제가 너무 커지는 것 같은 불길함에 손을 뗴었다. 토니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곤 책상을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서류를 쳐다보고 있던 배너의 입이 열린 것은, 초조함을 이기다못해 서랍에서 다른 궐련을 꺼내려 할 때였다.

“...찾은 것 같아.”

서랍을 열던 손이 멈추었다. 토니는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지만 배너의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누구야?”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이야, 자비스도 알고 있고.”

계속 뜸을 들이며 자신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자 토니는 배너의 어깨를 붙잡았다. 말해보라고, 어깨에 닿은 손바닥에서는 식은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셀룰러 메모리라고 알아?”

“그딴 사이비 말고, 어서 말하라고.”

“알고 있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그럼 헬렌은?”

헬렌 조, 몇 달전까지도 토니와 함께 연구를 했던 한국의 젊은 생명공학자였다. 그녀가 만든 요람시스템은 천재라 불리우는 토니가 봐도 감격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토니는 어째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헬렌은 지극히 건강했고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었다. 아니, 그녀의 동생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헬렌의 동생...?”

배너는 고개를 저었다.

“헬렌은 여동생만 있고 남동생은 없어.”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브루스 배너.”

어깨를 잡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아팠는지 배너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토니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제 친우를 압박했다. 후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헬렌이 2년전에 울트론의 연구소에 잡혔다가 풀려난건 알고 있을거야. 그리고 그 때, 울트론의 아들을 자신이 맡았지. 그 때가 아마 13살이었을거야. 비전, 자네도 들어본 적이 있을테지. 울트론의 감정을 못 느끼는 아들 말이야.”

울트론, 이라는 말에 순간 온 몸의 힘이 풀렸다. 그게 무슨, 마치 머릿속을 망치로 때린 것처럼 엄청난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울트론, 그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2년전 토니와 쉴드의 협력아래 검거하여 결국 사형집행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 인간을,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잔당들이 토니와 자비스가 타고 있는 차를 공격했던 것을.

"....그래서였군, 증인보호 프로그램 때문에 가짜신분을 만들어야했을테니."

비전은 FBI의 보호아래 헬렌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헬렌이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도 고향을 떠나 낯선 타국에서 생활을 이어나갔다. 토니는 비전의 사진을 기억해냈다. 자신이 봐도 놀랄 정도로 자비스를 닮은 아이는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여주며 자비스 또한 상당히 놀랐다면서, 만약 한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남동생삼아줄 수도 있었을거라고 아쉬워했다. 그 수줍게 웃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 서재 한켠에 자리했다.

“원래부터 심장이 안 좋았는데 결국 9개월쯤 전에 입원했대. 뭐, 그쪽도 알겠지만 헬렌의 기술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거지. 그래도 결국은 자네한테 가려고 했었대. 울트론의 아들인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동생만큼은 살리고 싶었던거야. 만약 자비스한테 그런 일이 생겼다면 자네도 똑같이 했을테잖아?”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목숨을 바치라고 한데도 바칠 각오까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알게 된거지? FBI가 뒤에 있다면서, 나도 찾기 힘들었던 정보를 어떻게 알아낸거야?”

“간단해.”

배너는 그제야 읽고 있던 서류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바로 뒤에 위치한 창문에서 찬 바람이 새어나오는 소리가 서재에 울렸다. 그는 몇초쯤 뜸을 들이다, 언제나 짓곤 하던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헬렌이 말했어, 아까 내가 셀룰러 메모리라고 말한 이유 때문에. 토니, 비전은 지금 자비스의 기억을 갖고 있어. 그리고 그 감정을 느끼지 않던 아이가, 이제는 감정이 풍부해져서 제어하기도 어려워질 지경이야. 헬렌은 그게 두렵댔어. 자비스가 비전을 잡아먹을까봐.”


배너는 그 말만 남기고 저택을 떠났다. 토니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는 다시금 궐련을 입에 물고서는 불도 붙이지 않은 채, 인공지능이 가져다 준 비전의 프로필을 보았다. 최근에 찍은 듯한 여권 사진을 보았을 땐, 정말로 담배를 떨어뜨릴뻔한 충격에 빠졌다. 그는 재빨리 손으로 담배를 잡고는 담배꽁초가 수북한 재떨이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자비스를 처음으로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교통사고로 가족들을 잃고 그는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입에 차고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15세의, 이제 막 청년으로 자라나고 있는 소년은 피폐한 모습으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그 때, 그 흐릿한 눈동자가, 흐릿한 푸른색 눈동자가 지금 토니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허, 절로 탄식이 터져나오고 나서야 그는 사진의 주인공이 자비스가 아님을 인식했다. 무엇보다 머리카락색이 달랐다. 자비스는 백금발이고 비전은 더티 블론드였으니까. 하지만 그 얼굴, 그 표정만큼은 15살의 자비스와 똑 닮아있어서, 그제서야 그는 동생을 삼고싶다던 자비스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휴대폰을 꺼내 헬렌의 전화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 자비스의 파편의 마지막을 장식할 차례였다.


이틀만의 여행을 마치고 완다가 스타크가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넘어서였다. 그녀는 세단에서 내리자마자 아마 토니가 일하고 있을 연구실부터 찾아갔다. 하지만 연구실의 어둠은 그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딨어?’

그녀는 텔레파시로 토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서재에 있어. 잘 다녀왔냐?’

‘응, 재밌었어. 곧바로 거기로 갈게.’

완다는 몇 번을 넘어질뻔한 위기를 모면하고는 토니가 있을 서재로 달려갔다. 당장에라도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다. J오빠의 마지막 파편을 찾았어. 머릿속을 훔쳐본 결과 이름이 비전이라는 것도 알았고, 그녀가 몇 번 보았던 헬렌과 같이 사는 것도 알아냈다. 그녀는 이 큰 선물을 어서 토니에게 전하고 싶었다. 이 선물이라면, 그의 지긋지긋한 불면증도 곧 사라질 수 있을 터였다.

“토니!”

서재의 문을 열자마자 느낀 것은 차가운 겨울공기와 서재바닥 곳곳이 흐트러져있던 서류들이었다. 토니는 추위따위는 모르는지 겨울공기를 맞으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의 손에는 비전의 신상에 관한 자료가 들려있었다. 울트론의 교육으로 인해 감정이 없는 상태로 자라남, 이라는 항목은 나타샤가 작성한 것이었다.

“토니, 나 토니에게 해줄 말이 있어.”

“오, 나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꼬마 마녀님.”

완다는 당장 토니의 무릎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고는 허벅지에 올라타면서 토니의 목을 팔로 안았다. 토니의 목 언저리에서 나는 스킨과 향수냄새가 그녀의 신경을 더욱 더 자극했다.

“누가 먼저 말할까? 나? 아님 우리 아가씨가?”

토니는 완다를 품에 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꺄르륵, 거리며 완다가 웃자 그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차가운 공기도 완다의 품안에서는 그저 스르륵 녹아내릴 뿐이었다.

“내가 먼저 말할래!”

그러자 그는 완다를 땅에 내려놓았다. 붉은색 카페트 위에 빨간 구두가 내려앉자 곧바로 높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 자비스 오빠를 찾았어!”

“오.. 그것 참 우연이군. 나도 찾았어, 완다. 이제 마지막이란다.”

그는 완다의 눈에 맞추어 허리를 굽혔다. 아이의 적갈색 눈동자가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토니도 잘 수 있는거야? 그동안 밤에 못잤잖아.”

“아니, 그래도 난 잘 수 없을거야. 내가 한 잘못이 너무나도 커서.”

그대로 자비스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뇌사상태라 하더라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간절한 희망이 장기기증서약서를 볼 때까지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바빴을까, 도대체 무엇에 홀렸던걸까. 이제는 익숙해진 꿈속에서 왜 죽였냐고 말하는 자비스를 보며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난 무엇 때문에 너를 포기했던걸까. 배너의 말 그대로였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널 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완다, 난 자비스를 죽였어. 내가 죽인거나 마찬가지야.”

사고는 과거의 업보 때문에 일어났다. 뇌사상태였던 자비스의 심장을 멈추게 한 서명도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토니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완다는 황망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죽였어. 완다, 그 때, 내가 사인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야! 아냐! 그게 아냐. 토니, 잠깐만, 내 말을, 들어줘. 아냐, 아니라고!”

갑작스레 고개를 마구 저으며 소리치는 완다에 토니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주위로 빨간 선들이 마구잡이로 움직여대며 바닥에 흩어져있던 서류들을 공중에 띄웠다. 그는 잠시동안 멈춰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이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냐, 아니란 말야. 아이는 그 작은 손으로 토니의 옷자락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내 울부짖음은 흐느낌으로 변하였다. 토니는 제 어깨 한쪽이 젖어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더욱 더 완다를 끌어안았다.

“아냐, 아니라고. 오빠는, 오빠는 이미, 오빠는 이미 그 때 하늘나라로 갔어. 난 알아, 안다고. 오빠는 이미 여기 없어. 오빤 병원에 가기 전에 이미 하늘나라로 간거야. 난 알 수 있었어. 그야 피에트로도, 피에트로가 하늘나라로 갔을 때와 똑같았으니까. 그때와 다른게 없었으니까.”

토니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완다가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머릿속이 마치 부풀어오른 것처럼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흐윽... 더 이상 괴로워하지마. 아빠가 괴로운건 싫어.”


아빠. 아버지.


몇 번의 흐느낌이 지나자 완다는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토니의 품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떼었다. 그리고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토니의 얼굴은 심히 일그러져있었다. 그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장례식에서도 관을 운구할 때도, 그리고 그 이후까지 절대로 보인 적이 없는 눈물이었다.

“...토니?”

목에서 무언가가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크고 무거운게 심장언저리에서 얹힌 느낌이었다. 그러다 간신히 소리를 내면 그저 흐느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개운한것 같아서 토니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자비스, 아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딸을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에 멍해졌던 머리가 다시금 돌아왔다. 입이 크게 벌려지고 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완다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로 서재가 시끄러울동안, 바람마저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했다.



▒   



슬슬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센트럴 파크의 오후는 여전히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겨울 햇빛을 쬐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비전은 헬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헬렌은 비전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환영의 주인공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애써 비전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에드윈 자비스, 2년전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본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말끔한 인상을 가진 남자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심장을 기증한 주인공이란 말에 무언가 기분이 묘해지면서도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보았던 환영들이 그가 겪었던 일들이라 하니 신기하면서도 애처로워지기도 했다.

“네 심장을 기증한 사람을 아들처럼 여기던 사람이 있었어. 너는 만나지 않았겠지만 유명한 사람이야. 토니 스타크, 라고 나와도 몇 번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너를 만나고 싶대.”

토니, 라는 이름을 듣자 다시금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다시금 머릿속에서 선명한 환상이 떠올랐다. 어떤 넥타이색이 좋겠느냐며 그가 두가지 넥타이를 내밀고 있었다.

“...Sir... 헬렌, 이건...”

너무나도 그립고 안타까웠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오던 주인공을 알아내자 당황스러우면서도 착잡한 심경이었다. 문득 다른 환영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여자친구의 집에서 자고 왔다는 것을 들키고는 토니에게 놀림받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어느 여자가 그것을 타박했다. 붉은기가 도는 금발, 페퍼 포츠, 미스 페퍼. 다시 그리운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실제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지만 너무나도 그리웠다.

“헬렌, 이게 뭐죠? 왜 난... 난 이 사람들을 알고 있고 그립고 만나고 싶어지는 겁니까? 이건...”

순간 비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헬렌은 복잡한 심경을 애써 숨기고는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그게 그녀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비전의 눈물은 더욱 더 그치지 않았다.

“...이건 헬렌에게는 좋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하지만 난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헬렌,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이 너무나도 만나고 싶어요.”

헬렌의 입가에 미약한 미소가 걸렸다. 사랑하는 동생의 부탁을 그녀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응, 도와줄게.”


센트럴 파크의 입구에서 몇백미터 떨어진 포플러 나무 옆의 벤치, 라고 토니는 장소까지 명확하게 이야기하였다. 과연, 비전이 도착해보니 그 주위로는 사람들이 그다지 다니지 않아서 유명인사인 토니 스타크가 와도 눈치채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약속시간까진 대략 10분 정도 남은 것 같아서 스마트폰을 보려고 했지만 익숙하고도 낯선 발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고 말았다.

“안녕.”

순간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지나쳤다. 비전은 몇 번 기침을 한 뒤, 마스크를 벗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을 자극하고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쓴, 너무나도 낯익지만 낯설고 그리웠고 가슴아프게 했던 사람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스타크.”

“토니라고 불러. 아, 선글라스는 신경쓰지마. 어제 딸아이랑 많이 울었거든. 그래서 눈이 퉁퉁 불어서, 벗기 힘들어졌어.”

토니는 비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악수를 하니 다시금 머릿속에서 환영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토니 스타크, 네 증조부 덕을 많이 보았어.”

“..토니...”

비전의 초점이 사라진 것을 느끼자 토니는 그제서야 헬렌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가끔씩 자비스의 일을 기억해내요, 그 말을 들었을때는 반신반의했었지만 지금 비전이 보여주는 표정과 반응은 정말로 처음 자비스와 악수를 나누었을 때의 모습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가끔씩 이런 일을 겪을 때가 있어서요.”

그는 무안해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헬렌의 말이 진짜였군. 정말 자비스의 기억이 있는거야?”

“...자비스, 라고 한다면 이 심장의 주인이겠군요.”

그는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가끔씩 환영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릅니다. 즐거웠던 일들, 슬펐던 일들, 힘들었던 일들, 너무나도 행복했던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게 자비스씨의 기억이었군요.. 그는 정말로 행복했던 모양입니다. 당신을 보고있자니 저도 행복해지고 그리웠던 마음이 사라지는걸 보면, 그는 정말로 당신을 많이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목소리마저도 자비스와 닮아서, 마치 어렸을 적의 자비스가 말하고 있는 묘한 느낌이었다. 말투가 더 딱딱하고 세세한 점이 다른 걸로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파악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은 확실히 자비스를 닮아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심장도 기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뇨, 확실히 기뻐하고 있어요. 토니, 완다, 페퍼, 해피. 낯설은데 낯익은 이름들입니다.”

청년의 입에 호선이 그려졌다.

“...Sir.. 주인님...”

기분이 흐뭇한지 그의 미소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토니는 마치 자비스가 미소를 짓는 것같은 착각을 하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세차게 뛰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혹시 그때는 떠오르지 않아? 그러니까... 미안, 이 말은 잊어줬으면-”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수술을 받고 일어났을 때, 헬렌이 말하기를 많이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는 감정이란걸 모르고 살았는데 아마 그걸 느꼈다면, 그건 자비스씨가-”

토니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비전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그는 청년을 제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비전은 놀라서 입을 열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마치 터질것처럼 미친듯이 뛰었다. 미안, 울음섞인 목소리로 토니가 말했다.

“미안.. 정말로 미안해... 하지만, 있지 부탁이 있는데...”

품에서 떨어지는 토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려있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괴로움이 토니의 심장을 두드렸다. 비전의 무서웠다는 말, 아마도 자비스가 마지막으로 느꼈을 감정에 토니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자비스는 무서워했다. 죽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구하려고 몸으로 막았다. 내 사랑하는 아들, 네가 이렇게 가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네 심장소리를 들려줄 수 있을까?”

네, 비전의 작은 목소리가 토니의 귓가에 스치자, 그는 곧바로 청년의 가슴에 귀를 갖다대었다. 평소보다 심장은 빠른 심박수로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두근두근. 커다란 자명종소리처럼 절대로 잊혀지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는 그 소리. 그는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자비스와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너의 옷을 처음 사주었을 때, 너의 고등학교 성적서를 봤을 때, 네가 친구와 싸워서 다치고 왔을 때,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대학에 합격했을 때, 너의 대학교 입학식에 난입했을 때, 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사로 일하겠다고 하자 싸웠을 때, 페퍼에게 청혼하기 전날 밤에 너에게 입양서류를 건네었을때, 완다를 구출하고나서 그 애를 품에 안은 너를 봤을 때. 난 네 미래를 보고 싶었어,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걸.

“미안해, 미안해 자비스.”

비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토니가 얼마나 슬퍼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자비스의 심장이 울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꽤나 뿌옇게 서려있어서 눈이라도 오나 싶었더니 아니나다를까, 그해의 첫눈이 자그맣게 내리었다. 그리고 비전의 옷을 붙잡고 있는, 떨리고 있는 토니의 손에 닿아 녹아내렸다.













"...아버지.."

자비스가 토니를 만나고나서 처음으로 그에게 내뱉은 단어였다. 그는 미친 듯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을 하지 말라고 급하게 말하였다. 자비스의 눈동자가 김어린 렌즈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자비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차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

다시금 내뱉어진 아버지란 소리는 전과는 다르게 날이 서 있었다.

“...어째서 절-”

“미안해.”

자비스의 입이 천천히 닫혔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의 눈가에서 천천히 눈물이 내려와 자비스의 볼에 떨어졌다. 아들의 입가에 살포시, 언제나처럼 상냥한 미소가 지어졌다.

“네가 있어서 행복했어. 정말 널 만나길 잘했어.”

“...아버지.”

“응, 내 아들.”

자비스는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이별의 순간이야.

“..안녕히계세요.”

토니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는 조심스레 식어가는 제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안녕,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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