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냇배너 _ 박사님 생일축하썰 _ 스튁스의 요람 본문
비행기는 2시간이나 공항에 내리지 못했다. 고질적인 눈보라는 계속해서 남자가 탄 비행기를 상공에 잡아두고 있었다. 슬슬 위험할 것 같다는 기장의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말하였다. 그 말에 친구가 빌려주었다는 전용기는 다시금 하늘을 돌아야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자신들처럼 착륙하지 못하는 항공기들이 갈 곳을 잃은 채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구름 아래에서는 눈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흐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착륙허가가 났습니다. 이제 착륙하겠습니다.”
방송이 끊겨진 것과 동시에 하강감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는 눈을 감고 손안에 쥐고 있던 종이쪽지에 힘을 주었다. 종이는 구겨지겠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무의미한 숫자와 글자의 조합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푸르래서 눈이 시릴 것만 같은 하늘 아래, 만년설이 그 뽀얀 자태를 자랑하며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떨쳤다. 스위스, 그에게는 처음인 스위스 여행이었다.
▒ ▒ ▒
장례식은 간촐했다. 평소 종교를 믿지 않던 그녀답게 목사도 신부도 부르지 않고, 그저 친하게 지냈던 몇몇의 사람들을 모으고는 추모사를 읊고 묘지에 관을 묻었다. 한때 영웅이라 불렸던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장례식이었지만 그것이 고인의 뜻이었다. 그녀는 죽기 전, 억만장자인 친구에게 자신의 장례식을 주도할 것을 부탁하며 되도록 초라하게 치러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그녀의 당부답게 간단한 장례식을 주문했지만, 관이나 묘지를 최고급으로 맞추고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며 생색을 내었다.
“이제 끝이군.”
억만장자 친구이자 장주였던 토니 스타크는 6피트 지하에 안치된 관에 꽃을 던지며 말하였다. 색색깔의 꽃들이 관위에 쌓였고, 그녀의 친한 남자친구들이 그 위로 흙을 뿌렸다. 토니는 남자에게도 삽을 들라고 권했지만 그는 애써 거절하고는 한켠에서 울고 있는 페퍼를 위로했다. 날씨는 살짝 추웠고 건조했지만, 하늘은 너무나도 맑고 높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은 야속하게도 비 한 방울도 내려주지 않았고 바람마저 불지 않았다. 훌쩍이는 어른들 사이로 대여섯 살은 되었을까, 하는 꼬마가 걸어왔다. 나타니엘,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은지 아이는 흙을 뿌리던 아빠에게 냇고모는 어디에 있냐고, 아주 천연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몇몇은 간신히 숨을 삼키며 울음을 참았고, 남자 또한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바튼은 아들에게 고모에게 안녕이라고 말해야지, 하면서 아이를 들어올렸다. 아이는 다음 주에 놀러오라면서 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분위기는 더욱 더 침울해져,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친구에게서 배운 서툰 독일어로 지명을 가르쳐주자 택시기사는 알았노라고 엑셀을 밟았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 베른은 눈보라가 언제 불었냐는 냥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녁거리를 사는 여자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청년, 어떤 여자는 딸과 함께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남편의 옆으로 임산부가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평범하게 살아버린 사람들의 틈 사이를 연인을 잃은 남자가 탄 택시가 지나가고 있다. 택시 안에서는 독일어인지 프랑스어인지 모를 낯선 언어로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가수는 무언가를 호소하듯 부르고 있었지만 남자의 귀에는 전혀 알아먹을 말이 없었다. 아마 그녀였으면 무슨 말이었는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귀에 어떤 뜻인지를 속삭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도 결국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봅니다.”
택시 기사는 능숙하게 영어로 남자에게 말하였다. 관광객들 상대로 장사를 하려다보니 영어가 늘었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내뱉고 싶지 않은 심정을 드러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애인이 죽었어요.”
“..아, 유감입니다.”
택시 기사는 무안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이제 바뀌어, 여자가수가 신나게 댄스곡을 부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애매해져버린 분위기에 기사가 라디오를 꺼버리자, 그제야 바람소리만이 살짝 곁들어진 적막이 그들을 찾아왔다.
20여분 만에 도착한 은행에는 직원을 제외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늦지 않았던 모양인지 아직 업무가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낯선 시선으로 외국인을 경계하는 경비를 애써 무시한 채, 은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행 내부에는 에어컨이라도 켜놓았는지 상당히 따뜻했고, 덕분에 남자가 쓰고 있던 안경에 김이 서려 벗을 수밖에 없었다. 고풍스러운 공간의 분위기는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깨졌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젊은 남자 은행원에게 걸어갔다. 그는 처음에는 독일어로 몇 마디 하다가 다시 프랑스어로 말하였지만, 남자가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아채자 서툰 영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남자는 김이 사라진 안경을 쓰고는 주머니에서 열쇠와 구겨진 종이쪽지를 건네었다.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만, 대리 수령도 가능합니까?”
“아, 대리수령이라면 본인 외 지정한 사람만 가능합니다. 우선 보관한 본인의 이름을 아십니까?”
“...나타샤, 나타샤 로마노프.”
남자가 힘겹게 이름을 토해내자, 은행원은 열쇠와 종이쪽지를 가지고 안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은행장인 듯하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배너에게 왔을 때는 열쇠와 쪽지는 사라진 뒤였다.
“혹시 신분증 갖고 계십니까?”
“여권도 됩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는 초조한 심정으로 여권을 건네었다. 혹여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이곳에 무사히 있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직원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는지 무사히 신원을 확인했고, 대리수령인이라는 것도 확인했다고 말하였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직원은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시계의 초침은 너무나도 느리게 움직였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지,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하고 긴장되어 속이 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옥같은 몇분이 흘렀을까, 의외로 직원이 들고 온 것은 아주 작은 갈색 봉투 하나였다. 수령인란에 서명을 하고 그것을 들고 나왔을 때엔, 오히려 허탈하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문을 열고 은행에서 나오자마자 봉투를 뒤집어드니 내부에서 나온 것은 작은 USB 하나였다.
여자는 자신의 병을 알자마자 남자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이별을 고했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여자의 병은 암이었고, 그 원인에 남자도 들어있을 가능성이 컸다. 남자의 몸에서는 일반인들의 몇 갑절은 많은 방사능이 뿜어져 나왔다. 남자와 입을 맞추고 몸까지 섞었으니 그녀의 몸에도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분명했을 터였다. 그리고 남자가 그것을 알아버리면 큰 자책을 했을 것이니,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관계를 끊어야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별이라는, 비교적 작은 스트레스를 그에게 안겨주기로 했다. 남자는 수긍하는 듯, 그동안 고마웠다면서 악수까지 나누었다. 정말로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너무나도 깔끔하게 관계가 끝나니 오히려 아쉬워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이별을 하였지만, 둘은 여전히 좋은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녀는 속으로는 사랑에 불타는 마음을 숨긴 채, 그의 앞에서 웃었고 얼굴을 찌푸리고 타박을 하기도 했다. 치료를 하는 와중에도 암세포는 그녀의 몸을 하나하나씩 갉아먹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어서 죽을 기회가 오기로, 어떻게든 그의 앞에서 병이 아닌 임무 중 타살이나 사고로 죽을 수 있기를, 그 기회를 기다릴 뿐이었다.
변화를 먼저 알아챈 것은 토니였다. 그는 눈치빠른 작자답게 여자의 병원기록을 해킹했고,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알아내었다. 그리고는 여자를 찾아가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자신이 여자에게 할 수 있는 폭력 중에서는 가장 강했다. 무슨 생각이냐며, 그것 때문에 배너와 헤어진 것이냐고 묻자 그녀는 당연하게 아니냐고 그에게 되물었다.
“이미 늦었어요, 미스터 스타크. 이미 내 몸은 치료하기에는 글렀어.”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 헤어졌다? 배너가 자기 때문에 걸린 게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싫어서?”
“연인이 죽는 것보단 친구가 죽는 게 덜 스트레스 받지 않겠어?”
그 말에 토니는 다시 한 번 손을 올렸다가 이내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여자의 그 당돌하던 표정이, 이제는 고통과 피로로 인해 퇴색되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뺨을 내리치는 대신, 그는 여자의 몸을 껴안았다. 남자가 좋아하곤 했던 향수냄새가 그의 코끝을 찌르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이건 아냐.”
그는 나지막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나타샤, 이건 아니라고. 다른건 다 괜찮아도 이건 숨겨선 안돼. 나중에, 나중에라도 다 알게 되면 그때가 더 문제라고. 안돼, 난 못할거야. 무리야, 난 브루스에게 다 말하겠어.”
“안돼, 부탁이야. 말하지 마.”
여자는 애써 토니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그 모습에 토니는 여자를 안았던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병마가 얼마까지 그녀를 집어삼켰는지 비참해하며 소리없이 울었다.
결국 모든 것이 밝혀지고 토니의 강권 아래 병원에 입원했지만, 이상하게도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모두들 병을 숨긴 여자를 타박했지만, 이상하게도 남자만은 평소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하였다. 그녀는 그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고 죄책감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남자가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붉은색 머리카락은 죄다 빠져버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원래부터 가발이 익숙했노라고 말하였지만, 바튼은 그녀가 적잖이 속상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약을 먹고는 제대로 밥을 넘길 수 없었다. 그러니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했다.
옷사이즈가 줄어들었노라고 완다의 앞에서 웃어넘겼더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고통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날에는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몇 번이고 새겨지다가 이내 흐릿하게 사라졌다.
남자는 여자의 앞에서 항상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그것이 억지미소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타박할 수도, 그렇다고 무어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자신도 애써 고통을 숨기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 훈련소에서 일어났던 스캔들, 요즘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어떻더라 하는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둘은 시간을 보냈다. 남자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그녀를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점차 야위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아야했다.
그 날도 남자는 여자의 병실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찾아갔을 때엔 이미 손님이 그녀를 방문하고 있었다.
“왔어요?”
“그 쪽은-”
“아, 이쪽은 변호사인 맷 머독씨에요. 오늘 작성할 것이 있어서요.”
짙은 선글라스를 쓴 변호사는 여자에게 잘 알아들었노라고, 성실히 처리하겠노라며 말하고는 하얀색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남자는 변호사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에 놀라기 앞서 여자가 무슨 이유로 변호사를 불렀는지 궁금해했다. 병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물었더니, 여자는 마치 내일 무슨 밥을 먹겠다는 식의 투로 말하였다.
“유언장이에요. 가능할 때 빨리 처리해야하니까. 머독씨는 훌륭한 변호사에요, 아마 내 의향대로 처리해줄거에요.”
유언장, 이라는 말에 남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반면에 여자는 전에 없던 의연한 태도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무슨..”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봐요, 난 이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다고요.”
여자의 손목은 그가 보았던 그 어느때보다도 얇아져 있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여자가 곧 죽을 것이란 걸 실감하고 말았다. 그동안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었지만, 결국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직면하고 나서야, 어째서 여자가 자신과 헤어지려고했는지조차 이해가 갔다.
“...나 때문인건가요?”
여자는 차마 고개를 젓지 못했다.
“내 몸 때문이군요.”
여자는 가픈 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한마디 한마디 말을 꺼내놓을때마다 그녀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그는 번민에 휩싸여 병실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 저렇게 야위었지? 눈 밑은 퀭해져있고 피부는 윤기를 잃었다. 잦은 구토로 목소리마저 제 음색을 내지 못한다.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만든거지? 무엇이 사랑스러운 그녀를-
“괜찮아요, 브루스. 물론 당신의 영향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적어도 난 당신을-”
말이 채 끝까지 나오기도 전에 멈춘 것은, 그녀의 심장이 너무나도 떨려서 말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품에 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기계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낮게 흐느끼는,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가 병실안을 가득 채웠다. 하악, 심장이 미친듯이 자맥질을 하며 그녀의 입가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소리로 터져나왔다. 그의 품에서는 평소에 좋아하던 향수냄새와 스킨냄새가 섞여 그녀의 코에 닿았다. 이걸 얼마나 맡고 싶어 했던가, 여자는 남자의 몸에 가느다란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 작아진 몸이 가늘게,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떨렸다.
호텔에 도착해서 노트북을 펼쳤을 때엔 이미 태양이 지고 있었다. 연인의 머리색깔을 닮았다며 좋아하였던 붉은 빛이, 호텔의 책상을 가득 비추었다. 남자는 노트북을 켜서는 USB를 꽂고서는 인식이 되기까지를 기다렸다. 그녀는 남자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평온해서 깊은 잠이라도 들었던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시는 깨지 않을 잠이었다. 그녀의 사망을 확인하고 의사를 부르면서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제야, 열고 그 다음에는 다행이다였다. 만약 그녀가 모든 것을 숨기고 그대로 죽었더라면, 혹은 그녀가 원하던대로 밖에서 죽었더라면,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작성한 유언장은 장례식이 끝난 뒤에 발표되었다. 일부는 대자인 나타니엘 피에트로 바튼에게, 나머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며 연인이었던 남자에게는 스위스 은행 금고의 열쇠와 비밀번호가 남겨졌다.
USB내부에 있는 프로그램에는 락이 걸려있었다. 남자는 일단 여자의 생일을 쳐넣었지만 들어맞지 않았다. 그 뒤로 흔하게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생일과 자신의 생일도 넣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은행금고의 비밀번호를 쳐넣기도 하고, 아무 의미없는 날짜를 집어넣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노트북 화면에는 실패란 글짜가 떠올랐다. 그는 짜증을 내며 키보드를 쾅쾅 하고 내리쳤다. 그러다 정말이지, 갑자기 나타니엘의 생일이 떠올라 그 아이의 생일을 쳤다. 평소에 여자가 자신의 대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아이의 생일을 집어넣으니 곧바로 잠금이 풀렸다.
잠금이 풀리니 내부에 있는 파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첫 번째 문서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그 파일 맨 첫장에 띄워져있는 사진을 보고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몇초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인도에 있을 때를 몰래 찍은 듯한 사진, 그리고 그 밑에 자신의 이름과 특징, 프로필등이 세세하게 나와있었다. 하지만 그 충격에 방점을 찍은 것은 자신조차도 알기 어려울 프로필이 아니었다. 오른쪽 맨 하단에 위치한 마크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지겨우기까지 한 문어였다.
하이드라, 나지막이 속삭이고는 다음 파일을 열었다. 그 파일들을 빠르게 훑어보고난 뒤, 다시 다음 파일을 열었다. 다시 다음파일을, 그 다음파일을- 그는 연거푸 30여개나 되는 문서파일들과 데이터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파일을 닫았을 때, 그는 이 수많은 파일들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를 깨달았다. 하이드라는 헐크를 무력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력화하는 방법 중에는 ‘숙주’인 브루스 배너에게 위해를 가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하하... 나타샤... 당신도 참....”
그는 허망한 웃음을 터뜨리며 파일들의 목록을 보았다. 이 수많은 파일들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다. 그렇게 찾고 싶어하던, 그렇게나 원하던 스튁스 강 너머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브루스 배너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수많은 방법들을 고심한 흔적이 자료들에 곳곳이 남아있었다.
“하...하악...”
남자는 숨을 격하게 들이마시며 파일들을 보았다. 여자는 이 자료들을 입수하고 난 뒤, 어떻게든 쉴드나 어벤져스들에게 숨겼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를 위해서, 그가 죽고 싶어할 때 쓸 수 있도록, 혹은 남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유언장에 남겼을 것이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는 제대로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다. 나타샤, 간신히 여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고맙다고, 그리고 너무나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음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못할 곳이었고,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자 더욱 더 비참해졌다. 숨을 잘게 고르고는 다시금 파일들을 뒤적거려보다가, 우연히 오른쪽 하단의 시계창에 눈길이 돌아갔다. 12:05. 이미 시각은 자정을 넘은 모양이었고, 날 또한 18일로 넘어가 있었다. 당신의 생일을 같이 보내고 싶어요. 죽기 며칠전, 여자는 달력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이미 인공호흡기에 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어 했다.
12월 18일.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김으로 흐릿해진 창가를 손으로 쓰다듬으니 베른의 밤거리가 보였다. 가로등만 밝혀주는 주택가에는 모두들 잠에 들었는지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쓸쓸한 거리에 다시금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고마워요. 그는 거리에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줘서.”
어디에도 닿지 않을 말을 내뱉자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는 그가 여태껏 지었던 것들 중에서는 가장 환했지만, 그만큼 가장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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