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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단 한마디

rabbitvaseline 2016. 1. 6. 22:24



기분이 더럽다못해 시궁창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단정하다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검은 정장을 벗어던지고는 속옷차림으로 보드카를 병채로 들이마셨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며 모든 일들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였던 그녀였지만, 이 숙소, 집 안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들을 던져버려야했다. 독한 보드카가 한모금 넘어가자 다시 한모금을 넘겼다. 알콜이 쓰라린 통증을 남기며 식도를 넘어갔지만 그녀에겐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멀쩡해지면서 자신의 실수가 머릿속에서 다시금 되새겨지다가 바스라졌다. 그 때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작전은 예상치 못한 요소들때문에 길게 늘어져갔다. 보다못한 나타샤의 후배는 자신이 상황을 보고 오겠다면서, 그녀가 채 만류를 하기도 전에 바깥으로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은 이거지,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장례식용 정장을 보고는 쓴미소를 짓고 다시 술을 넘겼다. 빨리 알코올이 제 몸을 집어삼켜주기를 바랬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몸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배너는 방의 상황을 보고는 혀를 찼다. 지독한 알콜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던 바닥에는 옷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의 연인은 속옷차림으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식탁에 상반신을 눕혀 술병을 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끝낸 병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식탁에 있던 병도 반은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일단 소파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포근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려는 찰나, 배너는 입을 열었다.

"감기걸려요, 옷이라도 어서 입어요."

"...어째서인지 모르겠어요. 취하고 싶은데, 도저히 취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얼굴은 술기운에 약간 붉어져있었고 숨에서는 술냄새가 풍겨나왔다. 하지만 배너는 그녀의 정신만큼은 더더욱 또렷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술에 잘 취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러시아인인 혈통탓인지 술에 강했던데다가 레드룸에서의 훈련은 왠만한 양으로는 술에 취하지 않게 해주었다. 물론 다음날 숙취는 다른 누구보다도 강하게 그녀를 공격해댔다. 내일이 되면 분명 엄청 괴로워할 것이 뻔한 것을 그녀도,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배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타샤를 강타하는 이 슬픔을 쉽사리 달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지 그 슬픔을, 친한 친구이자 후배이자 동료를 잃어버린 슬픔을 혼자서 이겨내려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슬픔을 그가 공유하기를, 그녀가 허락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어떻게 말로 표현해낼지 생각해내는 것이 어려웠다. 몇번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지만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일단 옷좀 가져올게요. 이러다 진짜로 감기에 걸릴거에요."

반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애써 손으로 정리하고는 그녀의 옷장에서 잠옷을 가져와 억지로 입혔다. 그녀는 재빨리, 하지만 실이 풀린 인형처럼 힘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다시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는 보드카에 손을 뻗었다. 안돼요, 배너는 그녀의 손을 가로막고는 재빨리 병을 찬장위에 올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다시 무너지듯이 의자에 앉아 식탁에 몸을 기대었다.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듯한 기분 속에서도 후배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서 생생히 일어났다. 몸은 떨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동공이 아주 약간 동요를 보였다. 나타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난 이만 갈게요. 내가 더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요."

그는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금 연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신발을 갈아신기 직전, 그는 마치 흘리는 투로 말하였다.

"만약 가지 말라고 한다면 여기 있을게요."

나타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와 슬픔을 공유한다는 것이 상당히 서툴렀다. 몇번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 때에도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결연에 가득차 있었고 당당했다. 지금처럼 반쯤은 무너진 모습은 누군가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배너였기에 긴장이 풀렸던 탓이었을테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그의 앞에서 완벽히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배너는 그녀의 강함을 사랑했다. 그걸 나타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나도 괴롭고 쓰라려서, 알코올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순간에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라면-

현관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문 틈사이로 새어들어왔다. 배너의 발이 천천히 바깥을 향해 움직였다. 한발자국, 이제 한발자국만 더 나아간다면 그는 손잡이에서 손을 뗄 터였다. 순간 나타샤의 마음은 혼란으로 가득찼다. 괴롭고 슬픈 이 심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바깥으로 나가고 손잡이에서 손가락이 떼어지려는 찰나였다. 그녀는 도저히 가슴의 통증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가지마."


그녀는 곧 문이 닫힐 것이라 생각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미약해서 그녀의 귀에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리라고 그녀는 의심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덜컥, 문이 크게 열리면서 차가운 공기가 다시금 그녀를 급습했다. 나타샤는 몸을 일으키고는 눈을 떴다. 현관등 아래에서 배너가 쓰지만 달콤한 미소를 짓고는 서 있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나타샤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배너는 작게 팔을 벌렸다.








갑자기 가지마라고 말해달라는 박사님이 생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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