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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완다 _ 발렌타인기념썰 _ 발렌타인 아포칼립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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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완다 _ 발렌타인기념썰 _ 발렌타인 아포칼립스

rabbitvaseline 2016. 2. 14. 23:52





완다 막시모프는 지금 곤경에 처해 있었다. 지금 그녀의 앞에는 살짝 짜증을 부리고 있는, 옛날 그녀가 인생을 또 한번 망쳐주었던 인물이 서 있었다. 브루스 배너, 그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완다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완다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타워 창 밖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거리에는 연인들이 손에 손마다 선물상자와 선물봉투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하트모양 탈을 쓴 사람도 보였다. 바깥의 날씨는 2월답게 쌀쌀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곧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까지 있었지만 연인들의 날에만큼은 전혀 방해가 되지 못할 사항이었다. 그랬다, 완다 막시모프가 쭈뼛거리며 배너의 '부탁'을 듣고 있던 날은 2월 14일, 연인들을 위해 순교를 했다는 성 발렌티누스의 날, 발렌타인 데이였다.

"타워 안에서 날 데리고 나갈 사람은 그쪽밖에 없으니까."

여전히 '그쪽'이라고 호칭을 부를 정도로 쌀쌀맞았지만 배너의 자세는 묘하게 저자세였다. 그는 완다를 향해-행여나 눈이 마주칠라 보지는 않고- 자신을 타워에서 데리고 나가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타워를 나가, 뉴욕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모 백화점에 가서 연인의 동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제압할 수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완다는 그 제약을 만든 근본적인 당사자였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배너의 나타샤를 미행해야겠으니 같이 나가달라는 말에 당황해하면서도 수락할까 말까 하고 고민하였다. 만약 나타샤에게 들킨다면-만약이 아니라 결국이겠지만- 그녀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너의 말을 거절하기에도 그녀가 그에게 벌인 죄가 너무나도 컸다. 무엇보다 타워에 유폐되게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토니가..."

"미안하지만 타워에 도착하자마자 페퍼에게 갔어. 이럴때만 도움이 안된다니까."

그는 혀를 차며 캘리포니아로 날아간 친구를 떠올렸다. 발렌타인 데이에 열린다고해서 수많은 물리학도들을 경악하게 한 핵물리학학회는 학회장의 불륜스캔들로 파토났다. 연인들의 날 답게 애인과 아내가 호텔방에서 마주치자, 분을 못이기고 늙은 학회장에게 총을 쏜 모양이었다. 배너도 잘 알고 있던 깐깐한 노연구소장이 병원에 입원하자, 결국 다음날에 열리기로 한 학회는 당일취소되었다. 토니는 학회가 취소되자마자 배너를 타워에게 데려다주고 곧바로 캘리포니아에 출장을 떠난 페퍼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발렌타인 데이 오전부터 타워에 갇히게 된 남자였다.

물론 배너는 오후에 스케줄이 있었다. 학회를 마치고 타워에 돌아오면 나타샤와 함께 달콤하다못해 씁쓸한 저녁데이트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할 발렌타인데이 선물도 이미 준비해두었으며, 토니의 도움을 받아 직접 레스토랑과 호텔까지 예약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달달한 데이트에 대한 기대가 부숴지다못해 가루로 변한 것은 타워로 돌아오고나서 이어진 세건의 전화통화 때문이었다. 오전에 시간이 생겼으니 미리 데이트를 앞당기자는 말에 나타샤는 선약이 있다며, 저녁에 보자고 거절했다. 물론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타샤에게도 나타샤 나름대로의 사생활이 있었고, 배너도 그것을 잘 이해하며 보장해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캡틴, 즉 스티브 로저스의 통화에서 그는 데이트에 대한 기대가 산산조각이 되는 것을 느꼈다.

"어떤 남자랑 같이 가던데?"

그리고 다시 나타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지금 혼자 있어요."라는, 그야말로 그녀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서 그 기대라는 것이, 산산조각이 되다못해 믹서기에 갈려 가루가 되었다. 그는 심각하게 자신의 연인을 '의심'하고 있었다. 물론 나타샤는 연인으로서는 상당히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으며 배너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배너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새삼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의심의 싹이 그의 머릿속에서 돋아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나타샤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그 사랑에 대해 의구심이라던가 의심을 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나타샤에게 전화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는 직접 눈으로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게는 허가받은 인간과 동행하지 않으면 타워 밖을 나갈 수 없다는 제약이 걸려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미행을 하자고 다른 멤버들을 타워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전전긍긍하던 그의 눈에 검사중이던 비전을 만나러 온 완다가 어떻게 보였을지는 안봐도 뻔하리라.

그래서 완다는 비전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런 말도 안되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 죄책감이 송곳처럼 그의 몸 구석구석을 쑤셔대다 결국은 그 목까지 구부리게 만들었다. 

"....알았어요."

그녀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대답을 듣자마자 배너는 미행용 의상으로 갈아입으러 자신의 방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커다란 홀에서 완다는 바깥을 내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브루스 배너는 항상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 틈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기를 잘했다. 그건 어벤져스 멤버들에게도 마찬가지라, 모임을 갖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사라져있기가 부지기수였다. 그가 사라졌다는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토니와 나타샤뿐으로, 기실 배너가 마음만 먹는다면 둘을 속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인상이 흐릿한 편이라 한번 봐서는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는건 힘든 일이었다. 그는 평상시보다 짙은 색의 점퍼를 입고 굵은 뿔테안경을 쓰고서는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넘겨, 만약 완다가 모르고 봤다면 다른 누군가라고 착각했을 터였다. 살짝의 소품과 머리스타일만 바꿔도 인상이 달라지는 모습에 언젠가 나타샤는 장난스레 스파이를 권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완다는 비전의 후드티를 빌려입고 숏팬츠로 갈아입은 것으로 끝이었다. 완다는 배너에게 팔이 붙잡힌 채로 같이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공기는 한겨울답게 차가웠으나 비가 내리고 있던 탓인지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한 채, 나타샤가 향했다던 백화점으로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그녀는 매우 초조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대로 숨도 쉬기 힘들어서 몇번이고 심호흡을 해댔지만, 옆에 앉아있던 배너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창밖으로 변해가는 풍경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슈가대디와 트로피애인처럼 보이지만 매우 어색한 분위기에 택시기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엑셀을 밟았다.

나타샤가 수상한 남자와 향했다는 백화점 내부에는 그야말로 사랑의 풋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뉴욕의 모든 연인들이 집결했는지 매장마다 커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풋풋한 학생커플에서부터 수상하게 보이는 나이차가 많이 나보이는 커플-이들처럼-, 심지어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았을법한 아이들까지 손을 잡고 분수에 앉아있었다. 완다는 말도 안되는 풍경에 아연실색하며 배너를 바라보았다. 그도 이렇게 백화점이 사람들로 가득찼다는 것을 예상치 못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5층규모에 꽤나 대규모 백화점, 이런 곳에서 나타샤를 발견하기란 그야말로 모래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었다. 하긴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완다가 필요했던거지만.

"...찾을 수 있지?"

마치 엄청 쉬운 수학문제를 내어놓고 풀라는 식의 말이었다. 완다는 경악하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소리지를뻔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배너의 침울하다못해 땅이 꺼져갈 정도로 우울해하는 표정을 보자 다시금 죄책감이 그녀의 몸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결국 완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을 감았다. 백화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뒤지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어서,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나타샤의 모습을 찾았다. 붉은색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가진 20대 후반의 여성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건 그 모습이 흔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뒤져야 할 사람들의 수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오붓하게 데이트를 나온 노년부부의 머릿속에서 나타샤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십여분이 지난 뒤였다. 나타샤는 후드티를 뒤집어쓴 남자-뒷모습만 보여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와 함께 액세서리 매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2층에 위치한 저가형 쥬얼리숍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입밖에 내놓자마자 배너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이마에서 흘리는 식은땀을 제대로 식힐 새도 없이 나타샤는 그렇게 질투에 미친 남자에게 끌려가야 했다.

나타샤의 모습은 쉽사리 확인할 수 있었다.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허탕을 쳤다는 표정으로 나타샤가 먼저 매장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둘은 행여나 들킬새라 급히 몸을 돌리고는 스마트폰을 만지는 등 딴청을 피웠다. 나타샤와 동행한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자 이 미행초보자들은 둘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나타샤와 남자는 상당히 친한 사이인지 나타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몇번 남자의 팔을 주먹으로 가볍게 때리는 식의 장난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른 악세사리를 보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기도 하였다. 남자는 후드를 깊게 눌러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다가 배너와 제법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타샤가 꽤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녀와 꽤나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 것 같은 스킨쉽을 하지는 않아, 그나마 가루가 되어있던 브루스 배너의 기대를 날려버리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완다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배너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언제 둘이 돌발행동을 보일까 긴장하고 있었다. 완다의 등에서 다시 초조함과 불안함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언제 이 남자가 폭발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이쯤되어서 솔직하게 나타샤에게 전화를 거는게 좋지 않을까, 화분뒤에 몸을 숨기며 완다는 생각했다.

"걸음 멈추지마, 지금 레코드숍에 들어갔으니까."

4면의 벽으로 둘러쌓인 음반가게로 나타샤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완다는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폈다. 그녀는 빨리라도 나타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냥 전화를 걸어서 백화점에 왔는데 어디냐고 묻기만 해도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 있던 남자가 그것을 허락해줄리 없었다. 완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배너의 시선은 완다의 핸드폰이 들어가있는 주머니를 향했다. 그 무언의 압박에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 말아야했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누가 보면 수상하다고 여길법할 정도로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자 다시 나타샤가 가게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둘은 다시 몸을 돌리고는 엘리베이터쪽을 향해 걸어가다 다시 나타샤와 남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나타샤가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들어주더니 그녀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올렸다. 그 모습에 완다는 급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배너에게 안된다며 고개를 저으며 무언의 달래기를 시전해야했다.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여기서 터지면 정말 상황이 주옥된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간신히 배너는 마음을 안정시켰다. 나타샤와 남자는 정말로 이 상황이 기쁜지 환하게 웃으며 꽃가게로 들어갔다. 만개한 장미와 프리지아, 국화와 여러 꽃들 사이에서 나타샤의 모습은 그야말로 두각을 보이고 있었지만 배너의 시선은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남자에게 가 있었다. 그의 눈은 이름모를 남자를 향한 질투심에 불타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나타샤가 점원을 향해 무어라 말하고 꽃 여러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점원은 급히 꽃송이들을 하나하나씩 화분에서 빼내어서는 능숙한 솜씨로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어내었다. 사랑의 증표인 분홍색장미가 부각되어있는, 어여쁜 꽃다발을 완성하자마자 나타샤는 그것을 품에 안고는 코를 갖다대었다. 그녀의 입가에 너무나도 아름다워 꽃도 고개를 숙이게 할법한-만약 나타샤가 듣는다면 기함하겠지만- 미소가 지어졌다. 남자가 계산을 하는동안 나타샤의 품에서 장미꽃다발이 떨어질 틈은 보이지 않았다. 완다는 급히 배너의 팔을 붙잡고는 심호흡을 하는 척 하며 그의 안정을 도왔다. 나타샤는 꽃다발을 몇번이고 감상하면서 꽃가게에서 나왔다. 그리고 둘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아래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남자와 당황해하는 여자도 시간차를 두고 그 뒤를 따랐다.

완다는 스스로 브루스 배너를 '제어'하는 일에 상당히 공을 들인다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나, 미행대상들이 팔짱을 끼며 하하호호거리며 오드리햅번이 불러댔던 티파니 매장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진심으로 능력을 써야하나 고민해야 했다. 가뜩이나 그녀에게는 그다지 잘생겨보이지 않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속으로 타워에 있을 비전을 불렀다. 이미 배너의 인내력은 한계점에 도달해가고 있었고, 그의 얼마 안남은 기대마저 보석이라는 폭풍에 쓸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저기.."

"....카페라도 갈까."

배너는 일그러진 표정을 펼 생각도 하지 않고서는, 완다의 승낙을 얻지도 않은 채 어째서 티파니 맞은편에 있는지 모를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그는 커피 두잔을-완다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주문하고서는 자리에 앉고서는 완다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내 바리스타가 커피 두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마자, 그는 뜨겁디 뜨거운 갓 나온 커피를 들이켰다. 완다는 순간 자신의 머리털이란 모든 머리털들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손을 대기도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간신히 식히는, 긴장감에 그저 커피만 식히고 있는 이 상황에서 배너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평소에는 유순한 표정으로 사람좋아보이는 미소를 짓고서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이었지만, 유독 완다 앞에서만은 온갖 짜증과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나타샤는 그 모습을 부러워했다. 진심으로 솔직한 브루스 배너를 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까지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은 무서웠다. 다른 사람들과 있을때 보여주던 그 미소가, 완다는 새삼 그리워지고 있었다.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와중에도 나타샤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매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배너의 시선은 매장을 향해 있었다. 어쩌면 매장에 쳐들어가 난장판을 만들어 토니 스타크의 통장에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인출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완다는 정말로 나타샤에게 모든 상황을 밝혀야하는게 아닌가 했다. 그녀가 알고있기로는 나타샤 로마노프는 브루스 배너를 배신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 어떤 이가 이 통제하기 어려운 괴물의 뒤통수를 친단 말인가. 역시 그만두어야 한다고, 그냥 솔직하게 나타샤에게 말하자고 완다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배너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커지자 완다는 등을 돌려 입구를 보았다.

나타샤의 손에 작지만 확실히 존재감은 가볍지 않은 종이가방이 들려있었다. 배너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타샤와 남자를 따라가려고 하자, 완다는 재빨리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진정해요, 변하겠어요."

나름 절박하다면 절박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완다도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것은 쉽게 알아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시한폭탄이 어떻게든 터지지 않게 조정해야하는건 자신뿐이었다. 솔직히 그것을 위해 이 자리까지 그를 따라온 것이었고. 완다의 단호한, 하지만 겁에 질린 목소리에 배너도 정신을 차렸는지 그대로 멈춰섰다. 아쉽게도 나타샤의 모습에 가려 남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배너는 도대체 왜 나타샤가 자신을 속였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좋은 연애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섭섭하게 만들 일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었다. 물론 연애초반에는 스킨쉽을 제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자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고 믿었건만,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펼쳐지는 이 상황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말았다. 침울해지다 못해 심해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려는 침울한 기분을 간신히 수면으로 끌어올린건, 그토록 증오하던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뭐해요, 어서가야죠. 엘리베이터를 탄다고요."

완다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남자의 손목을 잡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급하게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하니 나타샤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었다. 염력이라도 써서 멈춰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옆에서 기대가 폭풍에 사라지고 있는 남자 옆에서 능력을 쓰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대신 미행대상들이 타고 있을 엘리베이터의 목적지를 살펴보았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는 최상층부에 있는 어느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완다는 충격에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남자는 무시하고서 버튼을 눌렀다.


나타샤와 남자가 들어갔을 레스토랑은 백화점에서 명소로 내밀고 있을만큼 고급스러운 음식을 고급스러운 가격에 낸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만 그런 고급컨셉도 발렌타인데이라는, 그야말로 특성수기에는 약간 변질되기 마련이라 레스토랑 입구에는 발렌타인데이 이벤트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그야말로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팻말임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은 하나같이 손에 손마다 꽃다발과 종이가방을 들고서는 레스토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완다 막시모프, 즉 연인은 타워에서 검사나 받고 있는 여자는 애인을 미행하는 남자와 함께 레스토랑 입구에 서 있었다. 레스토랑은 백화점 최상층부의 1/4이나 차지할만큼 대규모였기에 웨이팅을 하는 시간은 짧았다. 그녀는 정신이 반쯤 나간 배너의 손목을 붙잡고는 나타샤에게 어떻게 된거냐고 따질 생각을 하며 식당안에 들어섰다. 연인의 외도를 목격한 배너도 완다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그녀를 따랐다. 갈색톤으로 디자인되어 침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하지만 핑크빛 기류가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식당 안으로 웨이터의 안내를 받으며 발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축하합니다!!!"

커다란 팡파레소리와 함께 둘을 향해 폭죽과 함께 색실들이 터져나왔다. 웨이터와 웨이트리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나오면서, 무슨 상황인지 아직 눈치도 채지 못한 가짜 슈가대디와 가짜 트로피애인을 환대했다. 그들은 완다에게 커다랗지만 고급스러운 꽃다발을 선물하며, 배너의 점퍼를 손수 벗겨주면서 끊임없이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어댔다. 어디선가 불러왔는지 로맨틱한 현악4중주까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둘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어서서 그들에게 박수를 치자, 소란은 더욱 더 심해졌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둘에게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손님. 오늘 저희 레스토랑에서는 214번째로 입장하신 커플손님을 축하하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습니다! 저희 레스토랑에서 자랑으로 여기는 별실에서 최고급요리를 맛보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처음에는 둘 다 이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다. 지배인은 몸소 직접 메뉴를 보여주며 오늘의 최고급메뉴를 보여주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연인들은 부럽다면서도 행운의 기회를 거머쥔 연인-가짜지만-을 향해 기뻐해주었다. 상황을 알아챈 완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갔고 사진사가 둘의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댔다. 그리고 다시 찰칵찰칵대는, 살짝은 경박한 스마트폰 셔터음을 향해 배너와 완다는 고개를 돌렸다.

사악한 미소를 지은채로 나타샤 로마노프와 클린트 바튼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채 1분도 지나기 전에 어벤져스 단체 연락방에 사진이 업로드되었다. 완다의 스마트폰 액정 너머에서 자신들의 바보같은 사진이 떴다는 것을 알아챈 브루스 배너의 이마가 점점 푸른 색으로 변해갔다. 그의 입가에서 말도 안된다는, 허탈하지만 상당히 빡친 미소가 지어졌다. 하하, 거리며 마음없이 내뱉는 미소에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목소리마저 어려있었다. 아. 완다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정신놓아버린 미소를 지으며 급히 배너의 눈가에 손가락을 놀렸다. 붉은색 기운이 레스토랑 안에 빠르게, 마치 큐피트의 화살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브루스 배너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발렌타인데이가 끝나기 한시간 전에서였다. 그는 어둠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스마트폰을 찾았는데, 예상대로 단체 연락방에는 당황해하는 자신과 완다 막시모프의 사진이 떠 있어 이 모든 순간이 꿈이 아니란 것을 가르쳐주었다. 스마트폰 액정을 스탠드삼아 안경을 끼고나서야 오늘 하루동안 있었던 일들을 반추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나타샤의 장난이었을 뿐이란걸, 바튼과 함께 웃고 있던 모습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확실히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껏 의심에 자책감까지 들어가며 온갖 기대란 기대가 무너지고 바스라져가면서 미행을 했건만, 이미 나타샤는 알아채고 즐겼던 것이다. 아마 바튼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자신을 놀리며 즐거워했을 것을 생각하니 허탈한 웃음만이 터져나왔다. 하하,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가다가 이내 한숨으로 변했다. 까딱하면 레스토랑에서 대형참사가 일어날 뻔 했다. 이번에는 그 마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브루스?"

웃음소리에 배너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나타샤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예상대로 이 곳은 어벤져스 훈련소에 위치한 그녀의 숙소였던 모양이었다. 익숙한 거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셨다. 그렇게나 사랑하던 사람이건만, 오늘같은 일을 겪고나니 왠지 얄미워보이기도 했다.

"...오늘 데이트 즐거웠나요?"

순간 나타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해하며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과 완다가 붙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놀려주고 싶어서."

"그래서 즐거웠군요, 아 미안해요. 내가 쓰러져있느라 결국 호텔과 저녁식사도 취소겠군요, '우리'의 발렌타인보다는 재밌었겠네요, 결국."

빛을 등지고있어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타샤의 움직임을 보면 그녀도 꽤나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너가 나타샤를 조롱하는 건, 그다지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만큼 꽤나 화가 났다는 것을 나타샤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배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미안해요. 덕분에 캡한테 엄청 깨졌어요, 도대체 제정신이냐면서 말이에요. 정말 무서웠다니까요, 시말서도 쓰라고 하던데요."

조심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지만, 한번 삐친 마음이 쉽사리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배너의 귀에 속삭였다. 그의 마음을 한번 갖고 논 것이, 그에게는 꽤나 큰 충격인 모양이었다. 그걸 새삼스레 다시 깨달으며 그녀는 배너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배너는 평소와 달리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입을 열었다.

"묻잖아요, 즐거웠나요?"

"...클린트가 로라에게 선물을 주겠다길래 같이 간거에요. 마침 나도 살게 있었고, 로라한테 줄 팔찌도 같이 봐줄 생각이었죠... 정말이에요,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아까 전화걸었을 때에는 혼자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때엔 클린트가 화장실에 가있어서 그런거였어요. 만약 당신이 다른걸 물었다면 솔직히 말해주려고 했죠. 그런데 당신하고 완다가 이상한 꼴을 하고 미행을 하니까, 그래서 한번 놀려주자는게 일을 키웠네요."

"꽤 즐거운 데이트였겠군요."

나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마치 새가 지저귀듯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여전히 배너는 화를 풀지 않고 심통을 부렸다.

"...결국 모든게 다 허사가 되었잖아요. 나타샤, 당신도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미안해요, 나타샤는 다시금 배너에게 속삭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타워의 자기 방에서 잠들어있을 선물상자를 떠올렸다. 그녀에게 어울릴 것 같아 산 팔찌는 결국 발렌타인데이에는 개봉도 못하게 생겨버렸다. 그는 흑진주가 장식되어있는 그 팔찌를 떠올리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녀가 꽤나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브루스."

나타샤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었다. 배너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여전히 화가 난 척을 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이미 많이 풀어진 상태였다. 동그란 주머니의 끈을 풀고 그 안에 길다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TIFFANY&CO.라고 적혀져있는 것을 보니 바튼과 함께 티파니 매장에 들어갔던건 배너의 선물을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둘이 다정하게 매장에 들어는 모습을 보고 힘들어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려고까지 했다. 나타샤가 주머니에서 들어올린 건 심플한 플래티넘 링 두개였다. 큰 것과 작은 것, 마치 연인들처럼 같이 있는 반지에서 나타샤는 큰 반지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원래 당신은 이런걸 안한다는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체인까지 같이 사왔으니까."

나타샤는 조심스레 배너의 왼손을 쓰다듬다가 약지에 입술을 맞추었다. 갑작스런 스킨쉽에 언제 화가 났나, 싶을 정도로 배너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평소라면 그걸 즐기기도 하건만,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나타샤는 미소도 띄우지 않은 채 행여나 부서질라 약지에 반지를 밀어넣었다. 미리 사이즈를 재고갔던지 헐렁하지도 그렇다고 꽉 끼지도 않을 정도로 반지는 그의 손가락에 들어맞았다. 그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올려 심플한 반지를 빛에 비춰보았다. 오늘 있었던 고생이 사르륵 녹아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예쁘고 기쁜 선물이었다. 

"정말로 몇번이고 사과해도 할 말이 없어요, 정말로 미안해요 브루스."

나타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하자 배너는 저도 모르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남들앞에서 지어보이곤하던 사람좋은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기분좋을 때 짓는 작은 미소였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나타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배너는 이미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화가 많이 풀려있었다. 역시나 선물의 힘은 대단했다.

"...미안하다는 걸로는 끝나지 않아요."

나타샤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나타샤의 왼손을 들어올려 약지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가 놀라기도 전에 재빨리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넣었다. 그리고 반지를 낀 손끼리 깍지를 끼고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직 한시간이나 남았어요, 나타샤.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데이트를 즐겨야죠."

그 말에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어렸다. 배너는 느리게 키스를 했다. 짧은 키스가 끝나자 역시 사진은 삭제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둘이 멘붕하는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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