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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GS/HL

냇배너 _ 잿빛 희망

rabbitvaseline 2016. 3. 26. 22:57




막 수건으로 닦은 머리카락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브루스 배너는 피곤함에 몰려오는 잠과 사투를 벌이며 침대에 제 몸을 않혔다. 샤워를 막 끝내고와서인지 한기와 온기가 뒤섞여 그는 당장에라도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헤어 드라이어를 든 연인이 그것을 막았다.

"머리 안말리고 자면 더 안좋아진다니까요. 요즘 머리카락 많이 빠지는거 같지 않아요?"

"급성 탈모는 피폭의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에요,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나름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었지만 나타샤로부터 대답이 나오지 않는걸 보고나서야 그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성급히 해명을 하려고 했으나 연인은 그 해명도 기다리지 않고 기계의 버튼을 올렸다.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는 방안에 울리던 모든 소리들을 지워버렸다. 결국 그는 망연자실한 채로 연인의 손길에 제 머리카락을 맡기기로 했다. 나타샤는 스파이라는 일의 특성때문인지 다양한 일을 해본 경험이 많았다. 미용사도 몇달동안 해보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녀는 머리카락을 다루는 데에는 능숙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배너의 두피를 마사지해주거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면서 천천히 머리를 말려나갔다. 모터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덕분인지 그도 다른 감각은 무시한 채, 그녀의 손가락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가느다랗지만 강인한 손가락이 몇번 그의 머리카락을 몇번 쓰다듬다가 헤집었다. 따뜻한 온기가 바람을 타고 그의 두피로 전해지자, 그는 더욱 더 노곤해져 급기야는 몇번 눈을 감기까지 했다.

공기는 점점 더 따뜻하게 데워졌다. 결국 드라이어가 꺼지자 배너는 나른한 기운에, 당장에라도 침대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아얏!"

배너는 경악에 가득 찬 눈길로 연인을 뒤돌아봤다. 나타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냥 능숙하게 어깨를 들썩거렸지만, 그녀가 잡고 있던 족집게를 감춰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막 티슈를 뽑아 침대 바닥에 놓았던 참이었다.

"..나타샤?"

머리카락이 뽑힌 그가 했던 생각은 설마, 였다. 머리카락 체취라는 아주 훌륭한 DNA수집방법을 연인이 했을거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배신으로 읽어야 하나, 라고 혼란에 겪으려는 찰나 나타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돌아봐요, 이제보니 은근히 흰머리가 많잖아요."

"..네?"

"이것봐요, 전에는 보이지 않았을텐데."

그녀는 배너의 몸을 억지로 돌리고는 다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다시금 따끔거리며 무언가가 뽑혀졌다. 배너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기도 하고, 흰머리가 난 자신이 안쓰럽기도 해서 쓴웃음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흰머리라니, 토니가 자신의 머리에 흰머리가 났다고 기겁하며 염색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브루스 배너 자신에게까지 난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흰머리라니, 그러고보니-

"그러고보니 나도 이제 늙었군요. 노안이 왔을때에도 그다지 충격이 크진 않았는데."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 노안은 이미 옛날에 찾아왔다. 요즘들어 비가 오는 날이면 관절이 쑤시고 일어나기가 힘들다. 다행히도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한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흰머리라니. 명백히 그는 늙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노화라는 단어를 써도 괜찮은 나이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씁쓸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기쁜 일이었다.

"당신이 늙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나타샤는 핀잔을 주면서, 일부러 화풀이를 하는지 검은 머리카락도 같이 뽑아냈다. 그 말에 배너는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맛보는 환희여서 더욱 더 감추기 어려웠다. 그는 늙어간다, 그러다 곧 다른 이들처럼 생에 안녕을 고하고 스튁스의 요람에 올라탈 수 있을 터였다. 그 모든 과정이 그에게는 정말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실낱같은,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총탄을 온 몸에 막고 지상 수백킬로미터에서 떨어지고, 심지어 총을 제 입에 물고 쏘았는데도 심연으로 갈 수 없는 남자의 유일한 방법에 그는 행복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샤도 충분히 알아챘다. 그녀는 그것을 알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다만 투정을 부리듯 몇번이고 멀쩡한 머리카락을 뽑을 뿐이었다. 배너의 환희에 가득찼던 얼굴이 그런 투정에 몇번씩 찡그려졌다. 

"나타샤, 너무 멀쩡한것까지 뽑는 것같은데요?"

"시끄러워요."

몇번이고 손이 헛나간 것을 빙자하며 그녀는 마음껏 화를 풀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뻐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고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라도 자신의 생각을 알릴 수 밖에. 배너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따가움에 급기야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순간 말이 나오기도 힘들 정도로 공기가 가라앉았다.

"나타샤."

혹시라도 질책의 말이라던지 짜증이 났느냐는 말이 나올까봐 그녀는 은근히 긴장을 하였다. 하지만 연인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런 말은 아니었다.

"...조금 살살 해주면 안될까요?"

배너는 자주 짓곤 하던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티슈 위에는 이미 흰머리보다 검은머리카락이 더 많이 보일 정도였다. 그는 그걸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나타샤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그를 돌려앉혔다. 딱히 그에게 사과의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배너의 미소가 쳐진 눈썹이 결국 투정을 부릴 의욕도 같이 앗아가버렸다. 그녀는 차분히 정확한 손길로, 이번에는 통증도 줄인채 흰머리카락을 뽑기 시작했다. 비록 정도는 약해졌지만 줄어들지 않는 숫자에 배너는 진심으로 난감해하였다.

"설마 아직도 멀쩡한걸 뽑는건 아니죠?"

"애석하지만 정말로 많아요."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들려오는 나타샤의 목소리는 얼핏 들어서는 차가워보였다. 하지만 조심스레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가락의 온기는 따뜻했다.









늙는 것이 기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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