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냇배너 _ 노곤노곤 본문
유난히 찬바람이 부는 12월 초, 헬렌 조는 어벤져스 타워로 향하는 내내 입고 있던 코트의 깃을 올려세웠다. 그렇게나 강하고 무섭다는 서울의 추위로 어떻게든 이겨냈었지만 그건 한국에서의 일, 미국에서는 미국 나름대로의 추위에 기가 질려 있던 참이었다. 그녀의 한손에는 커다란, 공항에서나 쓸법한 캐리어만한 가방이 들려있었다. 한손으로 거뜬히 드는 모습을 보면 분명 무게는 가벼웠을 것이나, 그 크기때문인지 타워에 들어서서 경비원의 신분확인을 받고 짐검사를 받는 내내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모두들 그녀를 마치 이 타워에 살고 있는 '그' 사람처럼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로 보는 듯 했다. 가뿐히 검사를 마치고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자마자 그녀는 이 타워에 찾아온 목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나에요, 배너박사님. 네, 방금 게이트 통과했어요, 물건은 확실하니까 걱정마요.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요. 저도 처치곤란이었거든요."
곧 엘리베이터가 브루스 배너의 주거지역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면, 언제나처럼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그가 자신을 반겨줄 터였다. 그러면 그녀는 그와 몇마디의 대화와 더 많은 수다, 간단한 티타임을 겪고 선물을 건네주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가 이 선물을 매우 반길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목표층에 도달했다는 부저음이 울렸다.
▒ ▒ ▒
데이트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렇게나 보고싶어서 한달전에 예약했던 뮤지컬은 공연도중 사고가 발생하여 중단되었고, 시간이나 벌자고 들어갔던 카페에서 먹었던 디저트의 과일에는 곰팡이가 슬어있었다. 저녁식사는 또 어떠했는가, 나름 잘 나간다던 스타 쉐프가 내놓은 스테이크는 너무나도 질겨서 제대로 자르기도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말다툼이 시작되어서 트집을 잡고 비아냥대는 일들이 반복되다가 채 절반도 먹지 못하고 곧바로 나와야했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살벌해져있었다. 배너는 심각한 표정으로 계산을 마쳤고, 평소대로라면 그를 기다렸을 나타샤도 급히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애써 미간에 새겨진 주름을 풀지 못하고 주차장에 당도한 배너가 제일 먼저 본 모습은 시동이 걸리지 않는 스팅레이에 계속해서 열쇠를 돌리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몇번이고 시도를 했지만 그녀의 애마는 결국 작동하지 않았다. 나타샤가 수리회사에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하는 동안 배너는 주차장 한구석에서 한숨을 내쉬며 이 말도 안되는 불운들이 한시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머피가 그들을 떠나갈 리는 없었다. 화룡정점이라고 했던가, 나타샤가 배너를 타워에 데려다주러 가는 길에, 정말이지 기상청에서도 확인하지 못했던 비가 쏟아졌다. 겨울비는 너무나도 차갑고 시렸다. 둘은 급히 몸을 움직이며 우산을 팔만한 편의점에 들어갔지만, 갑작스런 비를 대비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들처럼 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습격했던지 남은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타워로 가죠."
그녀의 얼굴은 심히 일그러져있었다. 여태껏 배너가 보았던 그녀의 얼굴 중에서는 가히 최악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추위에 열이 올라 얼굴 주변이 발갛게 올라왔고 구불거리던 머리카락은 물기로 인해 축 쳐져있었다. 그는 그러겠노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잡는 스킨쉽은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레스토랑에서의 말다툼은 격했고 서로에게는 큰 상처만 안겨주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스페셜리스트일 배너조차도 쉽게 진정하지 못할 정도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타샤가 앞서로 배너가 뒤를 따라가는 형식으로 타워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도저히 뛰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이 차가운 빗방울이 서로의 열기를 식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배너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둘이 맨 먼저 한 일은 말없이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이었다. 둘이 마치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어버렸다는걸 엘리베이터에서부터 확인한 프라이데이는 친절하게도 수건과 여벌옷을 먼저 준비해주었다. 얼굴과 머리카락, 몸의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나서야 둘은 엄청난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배너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은 나타샤에게 두꺼운 담요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편의점에서 말을 끝으로 그동안 아무 말도 내뱉지 않은 입을 열었다.
"먼저 씻어요."
툭툭 던지는 투의 말은 분명 너무나도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나타샤는 고맙다고 대충 대꾸를 하고는 여벌옷과 수건을 챙겨 먼저 욕실로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그의 방에 딸린 욕실을 이용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샤워기에서 뿜어져나오는 물소리가 배너의 귓가를 스쳤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졌기 때문에 배너는 몇번 욕실앞을 서성이다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언가 속을 데울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 물이 담겨져있는 전기포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스위치가 내려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끝났어요?"
"네."
나타샤는 배너가 건네어준 컵을 받아들고 소파로 향했다. 오늘 여러모로 있었던 불행덕택에 그녀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고 평상시보다도 힘이 없어보였다. 아무 말도 못하고 차마저 넘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레스토랑에서 험담을 나누던 일이 마치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나타샤, 평상시처럼 상냥하게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반응이 느린 것이, 그의 눈에는 왠지 심상치 않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나타샤는 유난히 피곤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것이 말도 안되는 머피의 법칙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배너는 그녀를 향해 걸어간 다음,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하얀 이마에 손을 올렸다. 나타샤는 딱히 제지할 아무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자신의 상태를 대충 눈치챘으리라.
"...열이 있잖아요?"
설마 알고 있었냐는 무언의 추궁에 그녀는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아까 카페에 갔을때부터 몸이 이상하긴 했어요. 하긴, 최근에는 일이 많았으니까."
최근 그녀는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일들이 얼추 정리가 되고나서야 그녀는 오늘같은 귀중한 휴식의 시간을 얻어낼 수 있었다. 배너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미 망친 데이트를 더더욱 망칠 수 없었노라고 순순히 말하였다. 그의 입에서 다시금 한숨이 터져나왔다. 평소에는 자기 몸을 끔찍히도 아끼는 주제에 배너와 관련되면 그만큼 하찮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게 해열시트를 붙이고나서 이마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뭐에요, 갑자기."
"침대에 가 있어요. 오늘은 그냥 있는게 낫겠어요."
"네?"
그녀는 황당함이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순간 자신이 맞는 말을 들은건가 싶은 의심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밖에 아직도 내린다고요, 그냥 자고 가요 나타샤."
"...그 말 진심이에요?"
의아해하는 나타샤의 눈빛에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와 연인이 되고나서 단 한번도 자신의 침실에 그녀를 들인 적이 없었다. 애당초 키스 이상의 스킨쉽을 바랄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데이트도 주로 밖에서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집 거실에서 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몇번이나 침실 풍경이 궁금했기에 가끔씩 주변을 서성이긴 하였으나 배너의 사정을 알고 있는 터라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하진 않았다. 그런 그가, 단순히 연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침대를 내주다니. 나타샤는 상당히 감동을 받았으나 자존심때문인지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놀란 것은 사실이기에 그걸 드러내보인 것 뿐이었다. 물론 배너는 다른 쪽으로 해석한 듯 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하더니 우물쭈물 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걱정마요, 나도 아픈 사람을 건드리는 심보는 아니니까... 게다가... 알잖아요, 내 몸이 어떤지..."
"잠깐만요, 그런 의미 아니었어요."
그의 말이 조금 더 섹슈얼한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걸 간파한 나타샤는 재빨리 제지했다.
"난 그저 당신의 침실에 들어가는게 처음이라 그런거에요..."
열이 올라서인지 아니면 살짝 부끄러워진건지는 몰라도 그녀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익었다. 마치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색처럼 익어버린 얼굴에 배너도 아무 말 못하고 곧바로 욕실로 사라져버렸다.
배너가 욕실로 사라지자마자 나타샤는 그의 침실 문을 열었다. 그의 침실은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연구실이나 서재는 항상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있었지만 이 공간만큼은 프라이버시한 공간이라 그런지 잡동사니 몇개가 이곳 저곳에 퍼뜨려져 있었다. 침대 위의 이불은 각을 맞춰서 정리가 되어 있었으나 정작 베개의 위치가 삐뚤어져있는데다가 협탁 위에는 잡지와 학술서로 난잡했다. 협탁 옆에 있던 작은 책꽂이도 그다지 질서정연하게 책들이 꽂혀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마 보다 만 DVD가 반쯤 빠져나와 있었다. 옷장 문에는 도대체 왜 나왔을지 모르는 보라색 넥타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래도 동년배의 남자들보다는 나은건가, 그녀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자신의 무거운 몸을 침대로 눕혔다.
"...아..."
침대 시트에서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몇번이고 시트위에서 그의 냄새를 즐겼다. 토니가 선물해주었다던 시트러스 향이 나는 향수냄새라던가 스킨냄새, 쉐이빙크림 냄새도 살짝 나는 것 같았다. 그런 모든 향기가 한데 섞여서 브루스 배너의 냄새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시 그 냄새를 받아들이고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랜만의 데이트는 최악으로 끝났다. 머피의 법칙이 둘을 강타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게 가장 괴로웠다. 자존심과 아집때문에 그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상처입고 시무룩한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다가 사그라들었다. 침대 시트 너머에서는 이유모를 온기가 스며올라오고 있었다. 감기기운과 피로에 노곤노곤한 온기마저 합쳐지자 곧 그녀는 침대 시트에 코를 박고는 조용하고도 천천히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오, 나타샤."
그는 땀에 젖은 나타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가라앉은 배너의 목소리에 나타샤는 나지막히 눈을 떴다. 온 몸의 모공이란 모공은 다 열렸는지 땀에 옷이 젖어있었다. 그녀는 멍한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쩐지모르게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이상한게 다 있네요."
"미안해요, 내가 나갈때 안껐던 모양이에요. 이래서야 샤워를 한 보람이 없네요."
그녀는 찬찬히 난감한 표정을 짓는 배너를 바라보았다. 그가 샤워를 하고나서의 모습을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게다가 바튼의 집에 있었을 때와는 분위기도, 둘의 관계도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이 섹시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반쯤은 초점이 나간 머릿속에 있었던지라 입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내 방에 있는것보다도 센데요."
그녀는 시트 아래에 손을 넣었다. 확실히 침대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자신이 갖고 있는 전기 매트보다 따뜻하다못해 뜨거울 정도였다. 그는 당황해하며 스위치를 껐다.
"한국제라 그래요."
"한국제?"
"....헬렌이 줬어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기에는 애매했으나 한국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매우 헬렌 조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지고보면 오늘 다툰 이유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타샤는 헬렌을 질투했다. 헬렌이 학술적으로 배너와 교류하는 것을 매우 견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이니 이름이 나오자마자 나타샤가 심통난 표정을 지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해 말아요, 헬렌도 우연히 여벌이 생긴거라니까. 그러니까 한국에서 주문을 했는데 회사측에서 두개를 보내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이 너무 많아요."
그녀는 도끼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붙여져있던 해열시트가 열기에 곧 떨어지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그것을 떼내고서는 협탁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는 살짝 열기가 식은-그러나 역시나 뜨거운-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나타샤, 다시 씻고 자야죠, 배너의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미 수마는 다시금 그녀를 습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배너가 있는 쪽을 등지고는 옆으로 누웠다. 그가 쓰는 베개는 생각보다 높아서 불편했으나 지금 그녀에겐 아무 상관도 없었다.
"...미안해요."
"네?"
"오늘 당신에게 시간많아서 좋겠다고 한거요."
나타샤는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부끄러워하는게 아닐까, 그는 내심 자신의 연인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나타샤-"
"...실은 보고싶어서 그런거에요. 난 그동안 바빴으니까."
그녀의 귀가 끝까지 붉은 것은 감기때문인걸까, 아니면 진짜로 부끄러워서인걸까. 평소라면 절대로 볼 수 없을 색다른 면모에 배너의 입술이 올라갔다.
"알아요. 나도 보고싶었어요."
그러자 침대속에서 몇번 웃는 소리가 울리다가 그쳤다. 나타샤? 배너가 몇번이고 나타샤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이미 수마에 사로잡혔는지 규칙적인 숨을 내쉴 뿐 대답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리고 침대에 들어갈까 말까를 걱정하다 시트를 들어올리고는 나란히 나타샤의 옆에 누웠다. 여전히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자고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숨소리가, 그 체취만으로도 그를 매우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침마저도 삼키기 힘든 상황에 그는 방의 불을 꺼달라고 프라이데이에게 말했다. 협탁위의 스탠드만이 주홍빛으로 둘을 밝혔다.
처음으로 둘이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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