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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배너 _ 공작새

rabbitvaseline 2016. 1. 29. 20:31



뉴욕의 바람이 점점 열기를 띄워가는 6월의 어느 하루, 브룩클린 외곽에 위치한 웨딩숍에서는 한참 난리통이 벌어져 있었다. 설립한지 50년이 다 되어간다는, 나름 미국에서도 고풍스러운 결혼 의상을 자랑하는 숍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이유는 며칠전 어느 부자가 전세를 냈기 때문이었다. 숍의 오너인 제니퍼는 40대를 넘긴듯한 중년의 남자가 30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슈가대디들과 그들의 어린 연인들을 지겹도록 보았으니 그정도 나이차는 애교였던데에다 둘은 진짜로 연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둘이 아이를 세명이나 데리고 온 것도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형과 누나가 유모차에서 곤히 자고 있는 동생을 보는 것이 꽤나 귀여웠던 데다가, 그녀의 숍에 오는 손님들 중에는 늦은 결혼이나 리마인드 웨딩을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미 20년 넘게 웨딩숍을 운영하면서 온갖 커플의 산전수전-중혼이라던가 동성결혼이라던가 알고보니 맞바람을 피는 커플이라던가-을 겪은 그녀로서는 왠만한 일에는 제법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오늘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다름아니라 오늘의 커플 뒤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토니 스타크였기 때문이었다.

토니 스타크, 결혼과는 담을 지고 쌓을 사람이라고 웨딩업계에서는 말하곤하는 희대의 '전직' 플레이보이. 비록 현재 페퍼 포츠와 사귀고 있다고는 하나, 인터뷰에서도 둘은 결혼의 가능성은 최대한 부정하곤 했다. 토니는 자식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중압감과 두려움에, 페퍼는 결혼으로 인해 스타크가에 자신의 몸이 붙잡힐 것을 우려하고 있는 듯 했다. 아무튼 덕분에 이런 웨딩숍과는 인연이 없어보일 인물이 직접 등장했으니 제니퍼가 놀랄 수 밖에. 더군다나 더 놀랐던 것은 이 웨딩숍을 전세낸 사람이 바로 토니 스타크였다는 점이었다. 그는 제 친구의 늦은 결혼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결혼식 전체를 일체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친구에 대한 사랑에 매우 큰 감동을 느끼며-물론 토니 스타크에게 결혼식 비용은 껌값이겠지만- 전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헌신적인 우정에 그녀가 감동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토니의 뒤를 이어 들어오는 또다른 커플은 발견하지 못한 채 오늘의 주인공인 클린트 바튼과 로라 바튼에게 매달렸다. 

"고모, 고모! 고모는 뭐 입을거야?"

아이가 나타샤에게 매달리며 들러리 드레스로 뭘 입을것인가를 물었다. 그녀는 결혼식에서 흔쾌히 들러리를 해주기로 약속했고, 그에 따라 신부와 함께 드레스를 맞추기로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들러리 드레스는 신부의 드레스보다는 수수한 것을 택해야했기에 나타샤는 너희 엄마가 먼저 고르고난뒤라면서 말을 아꼈다. 드레스와 온갖 반짝이는 소품이 가득한 공간속에서 아이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행여나 손상이라도 갈까,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보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 나타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이들의 부모는 오너의 지도 아래 열심히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불편해요?"

그녀는 옆에서 쭈뼛거리며 불편하게 서 있던 연인을 향해 말했다. 배너는 이런 곳,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었는지 곧장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조금... 불편해서요. 이런 분위기도 처음이고. 나타샤는 익숙해보이네요."

"난 이런 곳에 몇번 왔었으니까요. 물론 오해하지 말아요, 단순히 임무때문이었어요. 여자 스파이를 굴리는 가장 흔한 방법이 남자를 꼬시는거잖아요. 결혼식도 몇번 해봤었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마치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하는 가볍게 내뱉었다. 하지만 배너로서는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였다. 그는 나타샤의 과거가 꽤나 파란만장하다는건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결혼까지 했을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애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에 순간 흥미가 돋았는지 그녀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서는 말을 이었다.

"역시 제일 좋았던건 크루즈에서 치뤘던 거였어요. 유명가수들도 부르고 스타크도 해주지 못할 정도로 초호화결혼식이었죠. 미안해요, 브루스. 잠깐 놀린거에요. 그 남자는 정보만 빼고 곧바로 갈라졌어요."

그 말에 배너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그는 연인의 과거에 대해 딱히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제법 이름을 날린 여자 스파이, 남자를 유혹하는 데에는 그야말로 도가 텄을 터였다. 그런 상대의 과거를 질투하다니, 도저히 스스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마치 그녀에게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단어에 적잖이 당황한 것은 사실이었다. 

"안심해요, 진심은 없었으니까."

그 말은 마치 앞으로도 진심으로 인생의 반려자를 얻겠다는, 그런 꿈만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 말하려던 배너의 입을 가로막은건 토니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분위기를 읽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는 신랑과 신부가 옷을 다 갈아입었노라며 커텐이 쳐져있던 단상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단상위에는 로라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야말로 신부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부케에는 색색깔의 장미꽃이 한가득이었고 어깨선을 살짝 드러내는 머메이드라인 웨딩드레스는 그녀의 글래머한 몸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하얀색 턱시도를 입은 바튼이 면사포를 들어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둘은 배너와 나타샤를 발견하자마자 이리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어때?"

바튼이 그렇게 말하자, 나타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신부는 예쁜데 신랑이 영 안받쳐주네. 신부님, 이참에 신랑좀 바꾸시지요?"

짓궂은 농담에 바튼의 얼굴이 찡그려졌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로라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타샤는 정말로 드레스가 예쁘다고, 이 옷을 고르라고 그녀에게 종용하고서는, 이내 자신의 들러리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웨딩드레스가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한 종업원들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 어울리면서 신부의 드레스를 압도하지 않을 드레스를 이것저것 골라주기 시작했다. 연한 하늘빛 드레스가 잘 어울린다더니, 헤어스타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예쁘고 하는 식의 말들이 오갔고, 몇몇 드레스가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소파에 앉아서 흥미롭게 쳐다보던 배너에게 옆에 앉아있던 토니가 말을 걸었다.

"어째 신부보다 더 요란한것 같단 말이야."

"그야 신부보다 예쁘니까 당연하지."

"그래, 누구 눈에 콩깍지가 안씌였겠어."

토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랑과 신부는 웨딩드레스차림으로 아이들의 치수를 재는 것을 도우고 있었고, 다른 종업원들은 분주히 나타샤와 아이들 주위를 서성거렸다. 부모와 세트로 옷을 맞추겠다며 오너는 열성적으로 아이들의 의상이 담긴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며 바튼과 로라에게 보여주었다. 어찌보면 바쁘고 분주한 숍 안에서, 그와 배너 둘만이 여유로울 것이다.

"나중엔 포츠양도 데려오지 그래."

"난 결혼생각 없어. 그건 페퍼도 마찬가지고. 둘다 아이는 낳겠지만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주의라, 훌륭한 독신주의자 커플이지.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다음에 로마노프를 데리고 와보지?"

"미안하지만 나도 그쪽 부류라. 말은 고맙지만 아마 나타샤도 싫다고 할거야."

"페퍼는 내가 앤소니 포츠가 되면 생각해보겠다고 하더군."

"아까는 독신주의자 커플이라면서."

두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나누고는 다시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바튼과 로라는 아이들의 의상을 정했는지 종업원들이 아이들과 로라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야 간신히 왠만한 일이 끝났는지, 상의를 벗은 바튼이 한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준비가 이렇게 많은지, 훌륭한 독신주의자들께서는 안겪어서 좋겠군."

토니와 배너가 나누었던 대화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호크, 옷들은 어때? 부담간다고 일부러 비싼 곳은 안골랐는데."

"이게 비싼게 아니면 어디가 비싼지 모르겠군요, 스타크씨. 아냐, 마음에 들어, 로라도 그렇고. 고마워, 결혼식이라니 전혀 생각도 못해봤는데 말이지."

쉴드에 입사하곡 난 뒤로부터 그의 생활은 철저히 쉴드에게 공개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로라를 만나고 결혼까지 했지만, 쉴드의 요원이라는 입장상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비밀로 붙여야했다. 가족끼리 어딘가로 나갈 수도 없었고, 딸을 품에 안고 시내를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최근에야, 그나마 쉴드가 해체되고 어벤져스 소속이 된 지금에서야 그는 세상에 조금씩 자신의 가족을 내보였다. 결혼식은 그런 '공개'의 상징적인 절차 중 하나였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드레스도 얼추 정해진 것 같고, 뭐 신랑의 턱시도는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해주겠지."

"턱시도가 어울리지 않아서 미안하네. 그나저나 냇은 왜이리 오래 걸리는거야? 신부보다도 더 오래걸리는거 아냐?"

"들러리의 애인이 신부보다 더 예쁘기때문에랍니다."

토니의 고자질에 바튼은 도끼눈을 하고는 배너를 바라보았다. 배너는 애써 이 당황스러운 순간을 아무 말없이 다른 곳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으로 피하려하고 있었다. 다시 바튼이 입을 열어 추궁하려던 때, 갑작스레 나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루스, 이리좀 와봐요!"

갑작스런 호출이 이렇게나 기뻤던 적이 있었을까. 바튼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배너는 한달음에 나타샤가 있을 방으로 달려갔다. 이런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준, 그야말로 천사가 내뱉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 모습을 한심스럽다고 바라보는 토니에게 바튼이 말했다. 이번에는 심히 장난꾸러기 아이같이 교활하면서도 악랄한 미소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매니저에게서 들었는데, 웨딩촬영 스튜디오도 있다고 하던데요, 스타크씨."

바튼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어느새 토니의 입가에도 사악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둘은 상당히 재밌겠다는 듯 악랄한 웃음을 내뱉었다. 마치 좋은 장난감이라도 생겼는지, 둘의 장난기어린 시선은 배너가 달려간 방을 향하고 있었다.


나타샤와 배너는 들러리 드레스를 정하고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수상한 무리에게 붙잡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타샤는 여자들에게, 배너는 남자들에게 붙잡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헤어졌다. 로라는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숍에 들어왔을 때의 옷차림을 한채 나타샤를 붙잡고 자신이 들어갔던 웨딩드레스룸으로 끌고 갔다. 배너도 형편은 다를 것이 없어서 바튼과 토니에 의해서 턱시도룸으로 붙잡혀들어가야했다. 더군다나 로라가 자신의 딸과 나타니엘을 무기삼아, 어느정도 인도적으로 손목을 끌고 들어간데에 반해, 그는 정말로 팔다리가 포박된 채로 심지어 입까지 가려진 채로 끌려들어갔다. 종업원중 몇명은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다 오너에게 경고를 받아야했다.

"이게 무슨!"

화가 치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키고는 배너는 조곤조곤히 무슨 망할 짓거리냐고 토니와 바튼에게 말했다. 그런 배너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토니는 종업원에게 일단 치수부터 재라고 말하였다. 종업원은 능숙한 솜씨로 아직도 무슨 일인가 판단이 서지 않는 배너의 몸에 줄자를 대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미스터 스타크."

"오, 닥터 배너. 걱정마세요, 잠시 커플을 위한 이벤트에 돌입한거니까요."

"그 이벤트는 당신에게 더 어울리겠는데요."

명백히 비꼬는 투였지만 토니는 그마저도 무시했다. 그제야 배너는 토니와 바튼이 사악한 미소를 지은 채 꾸민, 귀엽다면 귀엽지만 조금은 짜증나는 계획을 눈치챘다. 애초에 나타샤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부터 오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였지만, 이미 다리치수까지 잰 마당인데다 남자 둘의 감시속을 피해 달아날 수도 없었다.

"좋잖아, 아마 이후로도 이런 일은 없을텐데."

"그러니까 불편하다는거야.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을테니까."

상체치수를 재는 와중에 배너가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몸이 이렇게 변하고 난 뒤, 그리고 베티 로스와 헤어지고 난 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결혼이라느니 가정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다. 그의 몸은 애초에 연인을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위험했고, 이성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가질 가능성도 없었다.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감마선은 결코 그의 씨앗들이 살아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토니는 아이를 입양하면 되는 문제이지 않겠느냐고 말하였지만, 자신이 불임이 되었다는 충격은 세월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를 입양한다 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크나큰 스트레스를 유발했고, 부모와 자식사이에는 더더욱 클 것이 분명했다. 언제 베티에게 프러포즈할까, 하면서 가정에 대한 꿈을 가졌던 청년은 그렇게 그 단어에 담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샤를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타샤도 결혼이라느니 가정이라느니 하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럼 그냥 이벤트로 받아들여. 뭐, 혹시나 알아? 진짜로 될지?"

"그건 정말 불쾌한 농담인데, 토니."

그는 자포자기했는지 치수재는 것이 끝날 때까지도 도망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치수를 다 재고, 신부의 드레스에 맞추어 턱시도를 고르겠다는 말에 바튼의 옆에 앉아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건 신부의 드레스가 정해졌다는, 종업원의 말에서였다. 단순히 서프라이즈 사진촬영을 위한 드레스와 턱시도였기에 굳이 신랑이 신부의 드레스를 확인한다는 절차는 없었다. 그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말로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밍기적밍기적거리며 종업원을 향해 걸어갔다. 학회발표때만 하던 분칠을 하고 평소에는 왁스로 대충하던 머리세팅까지 끝내니 어느새 하얀색 턱시도가 대령되어 있었다. 그는 의상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절대로 자신이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자신의 앞에서 상징화되어 나타났다. 언젠가 베티와 함께 웨딩 카탈로그를 봤던 일도 떠올랐다. 너에겐 검정색이 더 어울릴지도 몰라, 자신은 프린세스라인 드레스를 입겠다며 모델과 비교했었다. 수줍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꿈을 불태웠던 시절은 이미 스러져버렸다.

"신랑님, 어서 입어보세요. 신부님이 대기하고 계세요."

절대로 듣지 못할 말이라 생각했던 단어를 듣고있자니 어색해지기까지 했다. 단추를 잠그고 나비넥타이까지 매고나니 정말로 결혼식을 치루는 신랑이 되는 것 같아서, 그는 당황함과 난처함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런 몸으로 변하고 난 뒤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해, 고개를 들어야지 새신랑."

토니는 부끄러움과 착잡함과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배너를 향해 마구 사진을 찍어댔다. 그는 자그맣게 닥치라고 말하였다. 당장에라도 이 옷들을 벗어버리고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재킷 하나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문 너머 스튜디오에서 나타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심경일까, 마치 단두대에 끌려가는 죄수의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단정한 검정색 문이 열리자 순간 눈부심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눈에 보인 것은 어느 어여쁜 신부의 모습이었다. 상아색 실크는 신부의 가슴과 허리, 엉덩이와 허벅지 윤곽을 드러내다가 이내 인어의 꼬리처럼 옆으로 퍼지며 아래로 내려졌다. 실크에는 은실로 작은 꽃송이가 수놓아져있었으며, 가슴위와 어깨, 팔에는 자잘한 레이스가 새겨져있었다. 손에는 옅은 주홍색 꽃들이 동그랗게 모여있었다.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카락 위에는 티아라와 함께 마치 금실로 엮은듯한 면사포각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연인이 정말 빡세게 화장을 할 때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물론 그녀의 화장안한 얼굴도 사랑했지만- 알고 있었지만, 지금 모습은 그야말로-

"왜 아무 말도 안해요?"

순간 입에서 여신이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멈추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한 것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예뻐요."

그는 그 한마디를 내뱉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가리던 면사포를 살포시 들어올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실까요, 여왕폐하."

장난스러운 애칭을 내뱉자 나타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침대옆 난잡한 협탁 위에 액자가 추가되었다. 누가 본다면 정석적인 신혼부부라고 생가할 터였지만,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이벤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진이었다. 신부와 신랑의 친구들이 옆에서 둘을 부추기는 듯한, 살짝은 코믹한 사진이었다. 나타샤는 액자에 그 사진을 넣다가 침대 위에서 태블릿을 만지고 있는 연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잘 준비를 마쳤는지 안경을 벗고 편안 자세로 침대머리에 상체를 기대고 있었다.

"다른 사진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날 둘은 서너장의 사진을 찍고 옷을 갈아입었다. 모두들 너무 적게 찍은게 아니냐고 안타까워했지만, 이벤트로서는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았다. 

"..다른 액자라도 살까요."

"누가 보면 신혼부부라고 생각하겠네요."

사진 속 신부와 신랑은 수줍은듯이 웃고 있었다. 나타샤가 수줍게 웃는 모습은 드물었다. 배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나타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만약에 정말로 우리가 신혼부부가 된다면?'

"지금 프러포즈하는 건가요?"

"아뇨, 내 성격 알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배너는 유순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연인에 대한 사랑이 있었지만 또한 안타까움도 묻어져있었다.

"난 지금이 좋아요. 알잖아요, 나타샤. 내 인간관계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는걸. 난 이 정도, 당신과 함께 하는 이정도가 좋아요,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고요."

그 미소는 씁쓸했다. 스스로 고독을 택한 인간은 졸립다는 듯 눈을 찡그렸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도 이 거리를 즐기고 있다는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 당분간은 이정도로 끝내면 안될까요?"

사실은 더 내뱉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유폐나 다름없는 상황인 자신의 처지라던지 세계를 적으로 돌려버린 상황이라던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부 말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들 전부가 거절을 뜻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나타샤도 이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나타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애정과 연민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다시금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연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이리와요, 자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타샤는 사진들을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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