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llaby of Birdland 9.

메리켈을 진정시킨 뒤에 내보내서야 그도 간신히 침대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꽤나 몸에 쌓였는지 온 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아이는 아마도 타고 왔을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는 돌아갈 장소를 생각해보았다. 대학시절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유년시절에 살던 집? 대학에 다닐 때 살았던 자취집? 아니면 칼버에서 근무할 때 살았던 아파트?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엔 자신의 집은 서재로, 베티의 집에서 주로 살았으니 베티의 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그는 옆으로 돌아누워 팔을 베개 삼아 베고는 여러 상념에 허우적댔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지 토독거리며 빗방울이 지붕과 차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서늘해지자 그의 몸에도 소름이 돋았다. 배너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만한 옷가지를 찾다가 신부의 낡은 셔츠를 발견했다. 역시나 토르를 연상시키는 사람답게 생각보다 사이즈는 커서, 오히려 헐렁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는 창문가로 다가갔다. 창 밖에는 어둠과 더불어 빗방울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어둠 사이에서 주홍빛 키 큰 램프가 구름으로 가려진 달을 대신하고 있었다. 창문을 여니 습기찬 공기가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화장실을 찾으려 밖으로 나가자마자 보인 것은 머그컵을 든 채 복도 한편에 쭈그려앉은 나타샤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문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고개를 돌렸는지, 배너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는 매우 피곤해보였다. 반쯤 감긴 눈과 머그컵 안에 든 커피는 그녀가 수마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요.”

“알아요, 덕분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죠.”

나타샤는 행여나 커피가 쏟아질라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셉은 제법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지지 않았는지 사제관 안에는 싸구려 인스턴트커피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모금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 끝에 위치한 창문가에 컵을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비가 거세네요. 이래서는 퀸젯이 몰래 뜨는 것도 힘들겠어요, 뭐 클린트라도 부르면 가능하겠지만...”

“난 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타샤는 배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낡은 전등 아래에서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또 도망갈 건가요? 모든 걸 버려둔 채로?”

“난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고 버리지도 않을거에요.”

애매한 대답에 나타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너의 말에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감지했지만 그것을 대놓고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도망치는 남자였으니까. 배너는 그런 나타샤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그녀의 곁으로 살포시 다가갔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마치 곧 폭풍이라도 불어닥칠 것만 같았지만 이 시기에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걸 배너는 잘 알고 있었다. 몇시간만 지나면 그쳐버릴 소낙비소리는 아주 요란하게 숲속에 있던 모든 소리를 묻어버렸다. 둘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눠지지 않았다. 적막을 깬 것은 자그만 새가 우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배너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메리켈이 ‘그’ 노래를 부르더군요. 당신이 가르쳐준 거죠?”

그녀는 그가 말하는 노래가 무언지 알아차렸다. 그녀가 메리켈에게 가르쳐준 노래는 연가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왜 이제야 그걸 언급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돌리기인가, 몇 번인가 중요한 대목에서 말을 돌리고하던 것이 생각나 순간 짜증이 일었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네, 여기는 그 노래를 부르기에는 안성맞춤이잖아요? 숲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고 새들은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죠. 내가 알고 있는 노래 중에선, 그 노래만큼 이곳과 어울리는 것도 없을거에요.”

“난 당신이 그 노래를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요, 내가 항상 듣고 있어서.”

나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노래를 흥얼거릴 때마다,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브루스 배너라는 사랑하는 이를 담은 노래를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물론 배너의 말도 이해가가 갔다. 그녀는 어째서 배너가 그 노래를 주구장창 들었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배너도 간파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 배너에게 다시금 사랑을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에게 당면한 최우선목표는 무사히 브루스 배너를 뉴욕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오히려 좋아해요, 난 그 노래 꽤 좋아해요. 그래요,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죠. 브루스, 난-”

“오늘 아침에 했던 말, 꼭 지킬 거죠?”

“...아?”

아무래도 역시나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말이 나올 것을 예상했건만, 김이 빠지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절대로 당신 혼자서 모든 걸 떠안게 하지 않겠어. 그 말은 뉴욕에 돌아가서도 배너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맹세였다. 그 말을 갑자기 지금 꺼낸다는 것은, 아마도 돌아가겠다는 뜻일 것이라고 나타샤는 추측했다.

“...그 말 진심이에요?”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나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 배너는 교묘하게 말을 꼬거나해서 속이긴 했지만,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돌아가겠다는 말임을 확신하자마자 나타샤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이미 밤은 깊어 사제관안에서 깨어있는 이는 배너와 나타샤밖에 없었다. 요셉은 손님방에서 자기로 했다고 나타샤는 말해주었다. 그럼 당신은요? 라고 배너가 묻자 그녀는 부엌 한켠에서라도 자야겠다고 말하였다.

“농담이에요, 사실 신부님이 당신과 같이 자라고 했는데 말이 되어야 말이죠. 사귀지도 않는 사람들끼리 같은 침대를 쓰다니, 로라랑 비슷해서 솔직히 놀라기도 했어요.”

부엌에 도착하자 나타샤는 형광등을 켰다. 곧 꺼질 것만 같은 형광등은 몇 번 깜빡깜빡 거리다가 이내 켜졌다. 낡은 주방에는 LPG가스가 달린 가스렌지와 싱크대, 냄비 몇 개와 역시나 낡아서 곧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하게 하는 테이블과 의자가 다였다. 나타샤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고서는 테이블 한켠에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자신의 오두막에서 꺼내었던 태블릿의 모습에 배너의 시선이 자연스레 테이블로 옮겨갔다. 그녀는 능숙하게 테이블의 버튼을 몇 번 만지다 커다란 지도를 하나 화면에 띄었다.

“여기 섬의 지도에요, 당신도 몇 번 본 적이 있겠지만. 나는 일단 돌아갈 때엔 해변가를 중심으로 퀸젯과 접선하려고 했어요. 물론 당신과 함께 시드니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여기서 곧바로 뉴욕으로 가는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죠. 뭐,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니까. 지금으로선 퀸젯을 부르는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이미 내가 친 사고로 인해 해변가에는 경찰들이 깔렸을 거라는 거에요.”

마을이 한바탕 뒤집어진 것을 메리켈이 전해주는 바를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그로 인해 급히 마을을 떠나야겠다고 미리 토니에게 알려주었다. 바다로 가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남들의 시선이 드러나지 않게 배너를 데려가고 싶었다.

“게다가 지금은 비까지 오고 어두우니까 더더욱 무리에요. 나 혼자서라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당신을 데리고 가야하니까요.... 무언가 좋은 수 없어요? 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 말이에요.”

배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 옆 위성사진 속에서의 섬은 온통 푸른색 물결에 둘러싸여 있었다. 바다에 둘러쌓여서는 천천히 떠다니는 초록색 나뭇잎 덩어리. 그리고 그 중앙에는 마치 치즈의 구멍처럼 한가운데에 연두색 구멍이 나 있었다. 배너는 그 구멍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부활절을 앞두고 매년 성녀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는 축제가 벌여지곤 했으니까.

“성녀의 나무.... 나타샤, 이곳은 어떨까요?”

그는 연두색 구멍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처음에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눈치를 보이다가 이내 알아차렸다.

“성녀 로사의 나무로군요...”

“하지만 여긴 너무 유명한 곳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외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에요. 숲속 가운데에 있어서 정말로 길이 밝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마을사람들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거든요.”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자신을 이끌었던 어린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메리켈이 뛰어난 거였구나, 라고 생각하며 배너의 말을 들었다.

“올두르의 일당들도 주로 마을이나 해변을 중심으로 돌아다니고, 웬만해서는 숲쪽으로 오진 않아요. 게다가 여기는 나무를 중심으로 풀밖에 없으니 착륙하기도 편할거고...”

“퀸젯을 우습게보지 마세요, 브루스, 하지만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무엇보다도 그들이 항구와 해변가를 점령한 것도, 사실은 우리가 배로 이 곳을 탈출하리라고 보았기 때문일거에요. 하지만 우리는 하늘로 튈 거죠.”

그녀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메리켈의 말을 들어보면 경찰과 일당들이 주로 돌아다니는 곳은 마을과 해변쪽이었다. 상식적으로도 헬기까지 동원해서 그들이 도망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타샤는 괜찮은 제안이라 말하며 성 로사의 나무 근처의 좌표를 찍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깥을 바라보며 도대체 언제가 되어서야 비가 그칠 것인가를 생각했다.

“...이제야 모든 게 마무리가 되는군요.”

“...아뇨, 아직 남은 일이 있어요.”

“네?”

배너는 비가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우리가 도망치면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할 거에요.”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주던 마을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메리켈, 그 아이는 일당들과 경찰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는 자신들이 도망치고 난 뒤의 후폭풍을 생각하면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걱정마요, 스타크와 어벤져스의 힘이라면 그 쓰레기 녀석을 감방에 쳐넣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녀는 매우 자신감 있게 말하였다. 이곳에서 썼던 얕은 수는 아주 가볍게 깨지고 말았지만, 그녀는 돌아가기만 한다면 올두르에게 당했던 치욕을 제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다시는 이 마을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그렇게 해서 메리켈과 마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그렇게 함으로서 아직까지도 마을에 미련을 갖고 있던 배너를 위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곧 있을 일이나 생각하도록 해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나타샤의 목소리는 매우 지쳐있었으나 근거있는 자신감과 확신에 차 있었다. 해가 뜨면 배너와 함께 돌아갈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가지면서. 그녀는 빨리 비가 그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것은 옆에 앉아있던 배너도 마찬가지였다.

비는 새벽이 되어 그쳤다. 나타샤는 싸구려커피를 홀짝거리며 무기를 점검하고는 담요만을 덮은 채, 진짜로 부엌 바닥에서 잠을 청하였다. 배너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곧 자신에게 닥칠 상황들을 생각하며 나타샤가 남긴 커피에 입을 대었다. 나타샤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왜냐면 그녀가 그에게 아직도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까. 그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아 속이 쓰렸지만, 그런 확신이 없이는 뉴욕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뉴욕에 돌아가면 자신이 벌였던 짓에 대해 청문회가 열릴 것이고, 자신이 속죄하는 방법에 대한 방향이 정해질 것이다. 토니와 나타샤, 어벤져스가 도와준다면 생체실험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도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보다 이하의 것이라면, 그는 평생을 자신은 기억나지도 않은 죄를 갚아나가며 조용히, 그야말로 없는 듯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쁘지도 않군.”

같이 있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큰 위안을 얻었다. 사람들로부터의 시선을 감당해내야겠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두렵기는 하지만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낙담을 무시하며 그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새벽이 안개를 타고 엷게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메리켈이 안개를 뚫고 사제관에 도착하자 맨 먼저 아이가 본 것은 짐을 정리하고 있는 어른 셋의 모습이었다. 배너는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약을 챙기고 있었고, 나타샤도 요셉의 도움을 받아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요셉은 부디 살인이라는 죄악을 범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나타샤가 봐도 능숙한 솜씨로 총기를 만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난 뒤 특유의 비린내는 땅에서 올라와 창문을 타고 부엌에 전해졌다. 넷은 빵을 먹으며 이후에 있을 일들에 대해 논의했다.

“나와 브루스는 성 로사의 나무로 갈거야. 가능만 하다면 네 도움을 받고 싶지만... 이곳까지 헤매지 않고 갈 방법이 없을까?”

“부활절 축제를 할 때마다 쓰는 길이 있습니다. 보통은 방치해두기 때문에 풀숲이 우거져 있어서 일반인들은 알아보기 힘들지만요. 사실 나도 몇 번 헤매었기 때문에, 초행자들에게는 권유하기는 힘들군요.”

“그 길에는 무슨 특징이라도 있나요?”

“붉은 끈으로 나무마다 표시를 해 놓습니다만...”

요셉의 말을 끊은 것은 메리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가 많이 자라있어서 보이지 않아요. 괜찮아요, 누나. 내가 도와줄테니까, 무사히 날 따라와요.”

“하지만 메리켈-”

“선생님도 걱정마세요. 운동회때 1등도 했으니까.”

아이의 활기찬 목소리에 배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던 아이를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메리켈은 배너와 나타샤 사이의 일에 끼어들고 말았다. 아이는 무서움을 애써 웃음으로 감추고는 나타샤에게 말했다.

“무사히 돌아가야 한댔죠? 내가 도와줄게요.”

아이의 웃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악수 뒤에 나타샤는 주머니에서 20달러짜리 지폐를 꺼낸 뒤 메리켈에게 건네었다.

“메리켈, 마지막 가이드야. 우리를 성녀님의 나무로 인도해줘.”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돈은 되었다고, 오히려 그 동안 데이비드 블레인의 존재가 커다란 수확이었다고 말하였다. 나타샤는 고맙다는 말을 말을 전하고는 급히 복도로 사라졌다. 배너도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설마 눈물을 훔치는, 그런 유치한 전개라도 나오는걸까 싶었지만, 복도의 그녀는 매우 날카롭고 냉철한 표정으로 얄팍한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가 아니란 것을 알아채고는, 이윽고 그는 그것이 위성전화임을 알아보았다. 뒷면에 선명히 박힌 Stark Industry의 로고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토니가 만든 물건인 모양이었다. 나타샤는 익숙하게 5자리의 버튼을 눌렀다.

“응, 프라이데이. 연결해줘.”

지금쯤 뉴욕은 한밤중일까, 캡틴은 혹여나 자고 있는걸까. 그는 매체를 통해서 밖에 확인할 수 없었던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 떠올렸다. 긍지높은 군인의 얼굴에 청문회로 인한 피곤과 수척함이 새겨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아, 연결이 되었는지 나타샤의 표정이 바뀐다. 긴장한, 하지만 어느 면으로는 즐기고 있는 ‘스파이’로서의 얼굴이었다.

“일이 조금 생겼어, 지금 당장 데리러와줘. 아냐, 그냥 퀸젯만 보내줘. 좌표는 보냈어, 하지만 마을 내부로 내려보내진 말아줘... 응, 만났어. 아, 지금 옆에 있어, 바꿔줄까?”

나타샤는 배너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2년, 2년만에 통화에 배너는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타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냐, 응. 본인도 괜찮다고 하고... 섬 중앙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 접선지는 그곳으로 하지. 그래 퀸젯으로 하면... 시드니에 대기중이고... 여기서 접선지까진... 응, 그럼 그 시간으로 하지, 난 좋아..... 회포를 풀려면 지금은 안돼, 오지마.... 그래, 스타크에게 연락해줘. 생일선물 하나는 끝내주는 걸로 갖고 갈거라고.... 응, 알았어.”

나타샤는 급히 전화를 끊고서는 시간을 확인하였다.

“한 3시간 뒤쯤에 만나기로 했어요. 곧 출발할거에요. 뭐, 따로 정리할 거 있나요? 오두막은 나중에 정리해줄테니까-”

“아뇨, 괜찮아요.”

나타샤는 배너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자신은 괜찮다고 다시금 말하였다. 곧 출발하자며, 어찌보면 수상하게 보채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라도 나눠야하는거 아니었어요?”

“아뇨, 괜찮아요.”

마치 멍하니, 잡지 못할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평소에 잘 짓곤 하던 난감한듯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메리켈이 있을 방으로 돌아갔다. 나타샤는 어딘가 수상함을 느끼고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수갑을 확인했다. 만약, 만약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면 쓸 최후의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