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Lullaby of Birdland 11. 본문
푸르른 나뭇잎으로 가려져있던 햇빛이,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들에게 쏟아졌다. 처음에 나타샤는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보았다. 방금 물리쳤던 무리들이 전부였는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몰라 조심스레 평원에 널리 자라잇는 풀에 몸을 숨기며 나무를 향해 나아갔다. 고목은 언제 숲속에서 그런 난동이 있었느냐, 시치미를 떼는 것처럼 고고하게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럽게 주위에서 울렸다. 하늘은 너무나도 맑아서 구름 한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며 나무에 도착한 것은, 성당을 나서고 2시간이 넘어서였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며 안정권 내에 온 것을 자축하고서는 나무에 도착하자마자 한편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주저앉은 곳은 성녀가 죽었다던 바로 그 자리, 검붉게 나무 밑둥이 물들어버린 자리였다. 입고 온 하얀 셔츠의 군데군데에는 나무 밑둥과 비슷하게 검붉은 색이 점점이 널려 있어, 배너는 순간 악취미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검붉은색 자리에 검붉은 옷을 입고 붉은 머리카락을 한 여자가 피곤해하며 등을 기대며 앉아있었다. 그는 근처의 웅덩이에 다가가 손수건에 물을 묻혔다. 나타샤는 배너가 다가가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며 긴장감이 완전히 풀리지 않게 조심하고 있을 뿐.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마치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배너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핏덩어리들을 닦아 내었다. 축축한 손수건이, 배너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닦아대는 중에도 나타샤는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급박해하지 않은걸 보면, 아무래도 안정권이 아닌가 하면서 배너는 생각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퀸젯을 그들을 마중하러 이 곳에 강림할 것이다.
“당신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요.”
그는 나타샤의 몸에 생긴 생채기를, 갖고 온 약으로 소독하였다. 진한 알코올냄새가 물에 젖은 비린 풀냄새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그는 혹시라도 몰라 챙겨두었던 약들을 가방에서 꺼내 솜에 묻혔다.
“따끔할지도 몰라요.”
마을사람들에게 상투적으로 하는 말을 내뱉으면서 그는 생채기 하나하나에 솜을 갖다대었다. 그녀는 통증이 익숙하다는 것을 자랑하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충 상처를 다 닦고, 붉은 피가 맺힌 솜을 버리려던 찰나였다.
찰칵, 낯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왼쪽 손목을 감쌌다.
“잡았다.”
나타샤는 눈을 뜨며 씨익 하고 웃어보였다. 배너는 황당함에 가득 찬 눈동자로 제 손목을 얽매이고 있는 수갑을 쳐다보았다. 나타샤? 심지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잡았어요, 이젠 도망치려고 해도 무리에요.”
그녀는 배너의 왼쪽 손목과 연결된,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들어올리고는 흐느끼듯 웃었다. 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길다란 체인이 쇠소리를 내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어깨의 힘이 빠지며 다시 나무 밑둥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새들이 나타샤의 웃음에 화답하듯 여기저기서 울어댔다. 배너는 시끄럽다고 생각하며 나타샤가 채운 수갑을 어떻게든 풀려고 손을 대었다. 갖고 온 가위로 이곳 저곳을 쑤셔보았지만 수갑에는 이음새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무딘 가위로는 체인을 끊을 수도 없었다.
“토니 스타크만이 풀 수 있는 특수 수갑이에요. 당신이 빅가이로 변한다해도 무리일 거에요.”
나타샤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끝났다. 휴가치고는 정말 최악의 휴가였지만 수확물은 나름 쏠쏠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최고의 것을 얻었다. 배너는 어느새 포기했던지 조소를 터뜨리며 나타샤의 옆에 앉아, 자신도 마찬가지로 나무 밑둥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수갑을 들어올려 나타샤의 손가락과 손을 확인하였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전투로 인한 생채기가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토니나 캡틴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굳은살은 만져지지 않았다. 프로 스파이는 그런 것에 정체가 파악되면 안된다면서 손을 가꾸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그는 양손으로 나타샤의 손가락과 손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엄지손가락 끝마디의 도톰한 부분부터 뿌리까지, 어떤지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 같아서 나타샤는 몇 번 헛기침을 해야했다.
“...당신과 여기 오는건 처음이네요.”
“..맞아요... 사실 나도 몇 번 와보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이군요, 다시는 이런 일은 없겠죠.”
정말로, 고작 며칠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모든 일에 눈과 귀를 닫고 도망치려고, 낙원속에서 히히덕거리던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졌는지 그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은 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이 마을에서, 사랑하던 정다운 사람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왔다. 그는 언젠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던 일이 갑작스레 눈앞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애석하지만 내가 들었던 말 중에서는 두 번째로 기쁜 말이네요.”
“첫번째는요?”
“....아까 날 두고 도망칠 수 없었다는거요. 녹음이라도 해서 가보로 간직할까봐.”
네, 배너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숲속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렇게 그녀와 단둘이 이렇게 바람을 맞으며,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짧은 평화인지를 그는 똑똑히 잘 알고 있었다. 수라장을 벗어나오면 그보다 더 한 수라장에 빠져들어가야 했다. 만약 뉴욕으로 돌아간다면,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그것이 무서웠다. 모두가, 전 세계가 그를 핍박하고 그에게 살의와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미움과 증오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받아내는 쓰레기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그걸 피하기 위해 도망쳤다. 하지만 그는 예전부터, 이 섬에 도착하고나서부터 언젠가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계기,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한걸음이 없었다는 것.
“...돌아갈 시간이에요.”
“...그렇네요.”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벌였던 숲에는 초록이 가득했다. 그는 제 왼쪽 손목을 흔들어 다시 수갑을 확인하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노래를 불러줘요, 나타샤.”
“네?”
“난 당신이 그 노래를 부르는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니, 애초에 당신이 노래를 부르는 걸 상상도 해본적 없었어요.”
“어머, 난 노래부르는거 좋아해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결국은 안듣게 되었잖아요.”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에요. 자요, 어서요.”
배너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자, 그녀는 능숙하게 Lullaby of Birdland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뚜루뚜루뚜뚜- 전주를 흥얼거리다 조심스레 허스키한 목소리로 작게 노래하였다.
“Lullaby of birdland that's what I
Always hear, when you sigh,
never in my wordland could there be words to reveal
in a phrase how I feel.“
살짝은 갈라진 목소리가 생각보다는 듣기 좋았다. 노래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주위에 퍼지다가 사그라졌다. 그는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나타샤는 갑자기 놀라 눈을 떴지만 노래를 멈추지는 않았다.
“And there's a weepy old willow
He really knows how to cry
That's how I'd cry in my pillow
If you should tell me farewell and goodbye-“
한창 절정으로 향하던 노랫소리를 막은 것은 그의 수줍은 입맞춤이었다. 버석거리는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것 뿐인데도 그녀는 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답지 않게 적잖게 놀라며 몸을 뒤로 눕혔다. 그러자 배너는 그녀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제 몸으로 생긴 그림자 속에 나타샤를 감추었다. 응달속에서 배너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살짝은 거칠어진 숨소리가 평소와는 살짝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놓았던 긴장의 끝을 다시 부여잡았다.
“...그 때,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죠?”
아마 소코비아에서의 일이었을 것이다. 배너는 천천히 나타샤를 향해 몸을 숙였다. 차마 닦지 못한 핏자국에서 풍겨오는 비린내가 그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는 나타샤의 오른손을 붙잡고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입술을 맞대었다. 새가 마지막으로 크게 지저귀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타샤는 배너의 한쪽 팔을 세게 붙잡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느꼈다.
“..미안해요.”
오른손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분위기가 이상해져간다고 느끼자마자 그녀는 급히 배너의 입술을 깨물었다.
“!!”
나타샤는 급히 배너의 몸을 밀쳤다. 손목에 연결된 수갑이 시리게 금속음을 내었다. 그녀는 제 왼쪽 팔뚝에 꽂혀있는 작은 주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하며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배너를 쳐다보았다. 그는 수갑이 연결되어있지 않은 손을 들어올리며 평소에 잘 짓곤 하던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역시 스파이 일을 너무 쉰게 아닌가요? 이정도는 알아차리길 바랬는데.”
“브루스!”
그녀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렇게나, 저렇게나 사랑스러웠던 얼굴이 가증스럽게 보이다니.
“그때 날 속인 대가라고 쳐요, 물론 디아더가이가 갚았다고 하지 말고요. 미안해요, 나타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될까요?”
나타샤는 급히 왼손으로 배너의 어깨를 붙잡았다. 배신감이 그녀의 몸을 크게 강타하고 지나갔다. 머릿속에서 마치 피가 끓는것만 같았다. 숨이 거칠어지며 또다시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몸서리쳤다.
“도망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맞아요, 난 남몰라라 하고 도망만 치는 남자에요. 그리고 이제는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뉴욕에는 돌아갈거에요, 돌아가서 그가 지었던 죗값을 치러야겠죠.”
“그럼 어째서?!”
“아직은, 아직은 너무 급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나요? 난 당신에게 끌려서 가는게 아니라, 내 발로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이 날 데리고 가는건 의미가 없어요, 적어도 자수라는 형식으로 돌아가야 더 좋게 끝나겠죠.”
나타샤는 그런 그의 말에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비웃었다. 그따위 다 변명같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치사하다고까지 하였다면 그는 화를 내는 표정도 없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만은 서글프게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브루스!”
그는 나지막이, 마치 그녀가 그에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소름이 끼칠 것 같은 대사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제 해가 질 시간이에요, 나타샤.”
배너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느렸다. 그제서야 그녀는 그가 자신의 팔에 박아넣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점점 그녀의 정신은 아주 천천히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안개가 그녀의 머릿속을 아주 빠르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몸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배너의 어깨를 붙잡고는 안되다고 도리질쳤다. 머리의 연산 자체가 점점 속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있어요! 절대로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거에요, 같이 돌아가요. 돌아가요 브루스...!”
“고마워요, 절대로 그 말 잊지 말아요. 난 그 말만 믿고 돌아갈테니까.”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타샤는 어떻게든 배너를 제압하려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의 품에 넘어지자 경악과 함께 절망이 그녀의 전신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보니 아까 내가 그 노래를 듣지 않았다고 했죠. 당신도 그 노래가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잖아요.”
“브루스!”
“어째서 그 노래를 듣지 않았는지.”
배너는 다시금 조심스레 나타샤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너무나도 짧아서 느끼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틀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 몸이 무너지고 말거라는 확신에 그녀는 근히 홀스터에 있던 권총 한정을 손에 쥐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알아챈 배너가 급히 안전장치에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해도...!”
노랫소리가, 절대로 들어본 적 없던 그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댔다. 시끄러워, 그녀는 소리치면서 제 품안에서 단검을 꺼내었지만 배너가 단검을 잡아 땅에 던졌다. 평소라면 쉽사리 제압할 수 있을 것을, 이미 온 몸에 힘이 빠진 그녀로서는 무리였다. 그녀는 배너의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대면서도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노랫소리가, 사랑을 갈구하는 노랫소리가 정말이지 그녀의 모든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가사구절들이 그녀의 뇌를 점점 채워나갔다.
“나타샤.”
그는 행여나 그녀가 자해를 시도할까, 양손을 붙잡았다. 도저히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녀는 몸부림을 칠 수도 없었다. 절망감, 경악, 자책감, 수치심, 배신감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방금 단검을 잡아 생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손바닥을 타고 흐르다 땅바닥에 ᄄᅠᆯ어졌다. 바람이 아주 미지근하게 하지만 아주 거세게 소리를 내며 그 둘을 휩싸고 지나갔다. 배너는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나타샤, 당신이-”
새들이 노니는 정원에서 자장가가 들려요. 내게 달콤하게 키스해줘요, 그리고 함께 가는 거에요. 그 정원에서 높이, 하늘 위로 날아가죠. 모든건 결국-
“당신이, 당신만이 내 자장가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다른건, 다른건 아무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금 나타샤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거칠없지만 또한 다정했다. 나타샤는 어떻게든 배너를 밀치려고, 그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그 지겨운 울음소리가 그 지겨운 노랫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 못해 그녀의 몸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들 가운데 그녀의 힘이 빠진 몸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가 손을 흔들며 흐느끼고 있었다. 빛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그에게로 향했다.
브루스, 난-
그의 방을 치우던 중이었다. 청소부가 따로 있었으나 배너는 자신의 물건에 대해 어떤 결벽증을 갖고 있었다. 칫솔만 들고 다니던 사람답지 않게, 그는 항상 누군가 자신의 물건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울트론사태가 일어나고나서 한번도 주인이 몸을 눕히지 않았던 집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나타샤는 자원해서 방을 치우기로 했다. 주인이 돌아와 항의를 한다고 해도, 치우기 전의 사진을 보여주면 반박도 그대로 들어가리라.
서재에는 온갖 논문들, 연구자료들, 연구서적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한편에는 토니가 선물해주었던 클래식음반 LP들이 꽂혀있었다. 종류는 다양했지만 손때가 탄 것은 오페라의 아리아종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카스타 디바가 반쯤 빠져나와있었다. 나타샤는 카스타 디바를 뽑아 마리아 칼라스가 멋드러지게 찍혀져있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와 함께 브라운관을 통해 카스타 디바가 나온 노르마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카스타 디바가 마음에 들었던지 가끔씩 그 노래를 꺼내어 듣곤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이끈 것은 상당히 많이 헤져있는 LP커버였다. 책장에서도 구석자리에 있던 LP들 중에서도 가장 끝에 머물러있던,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꺼내보니 아주 익숙한 문장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Lullaby of Birdland
흑인여가수가 마이크를 들고 열창하는 모습이 담겨져있는 사진 맨 아래에는 필기체로 누군가가 썼을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사랑을 담아, 생일축하해. Betty Ross.
“일어났어?”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벽면, 친우의 얼굴, 링겔, 병실의 풍경이었다. 낯익은 소독약냄새가 1인용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이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훈련소 내에 위치한 병실, 그녀도 몇 번인가 신세를 져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이, 분명 바누아투의 작은 섬에 있어야 할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는 뻔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답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클린트 바튼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브루스는?”
바튼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런 건가, 그녀는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국 임무는 실패했다, 퀸젯이 발견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수갑은 어떻게 풀었대? 그거 스타크가 만든 거잖아.”
“변했어. 근처에서 감마선이 변화한 양상을 감지해냈어, 헐크로 변했으니 당연히 풀 수 있었던거지. 우리가 널 발견했을 때엔 이미 사라져 있었지만, 발자국과 뜯겨진 수갑을 찾아냈어. 마을을 뒤져봐도 배너를 찾을 순 없었어.”
“아마 마을사람들이 숨겨주었겠지,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를 사랑하고 아끼던 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결국 배너가 선택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다시금 배신감을 느끼며 치를 떨었다. 그렇게나 믿었는데, 그렇게나 기뻐했건만 결국 돌아온 것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배너가 살았다는 오두막, 우리가 가보니까 장렬하게 불타고 있더라고. 아마 그 치가 한걸테지만.”
결국 그렇게 정리한건가, 나타샤는 그가 잠에서 일어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분에 못이겨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녀가 꽤나 화가 나있다는걸 알아차렸음에도 바튼은 입을 열었다. 말해줄건 말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 치도 많이 바빴나봐, 네가 당한 그 약, 아마 배너가 자신에게 쓰려고 만든걸테지. 상당히 독해서, 만약 조금이라도 더 들어갔다면 영영 못 일어날뻔 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너 답지 않잖아.”
“그래, 나답지 않아.”
그녀는 쿡쿡거리며 작게 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멈추었다.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결국 목표를 놓치다니, 스파이 경력에서도 상당히 큰 오점을 남긴 셈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수치심이 들다가 이내 다시 배신감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건조하게, 하지만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개새끼.”
진짜로 뉴욕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 때엔 정말 면상을 한 대 갈궈주리라. 그녀가 나지막히 내뱉은 욕설에 바튼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그녀에게 녹즙을 건네어주었다. 씁쓸하고 풀비린내가 풍기는 녹즙에서, 그날 성 로사의 나무에서 건네었던 키스가 떠올랐다. 그녀는 몇 번 빨대로 녹즙을 빨다가 이내 협탁에 올려놓았다.
“젠장.”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날, 그의 고백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기뻐했을 만큼. 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전혀 기뻐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결국 배너는 다시 자신의 곁에서 도망쳤다. 그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괴로웠다.
“그래, 망할 놈이야.”
차마 눈물을 흘리지 못한 채 분해하는 나타샤를 껴안으며 바튼이 말하였다. 그녀도 다시 나지막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다 다시 몸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노랫소리가, 그날 불렀던 노랫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 울렸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이제는 지겨워지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 ▒ ▒
“그래서 휴가는 잘 다녀왔나?”
닉 퓨리가 모습을 보인 것은 그 일이 있고 몇 달이 지나서였다. 나타샤는 그 일의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며 더더욱 일을 늘려, 다른 멤버들의 원성을 샀다. 말도 안되는 배신은 그녀를 옭아맸다. 그녀는 틈틈이 그의 행적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이미 한번 정체를 들킨것 때문인지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계속 피지 근처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해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렇게 바쁠 때 갑작스레 사무실에 쳐들어온 닉 퓨리의 존재에 그녀가 놀라면서도 아주 약간의 기대감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터였다. 그는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다주는 산타클로스처럼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였다.
“최근 이상한 게 도착해서 말이야.”
“이상한 거요?”
나타샤는 닉에게 어떤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들의 일은 위험했고, 덕분에 그들에게 도저히 사람이 받아서는 안될걸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폭탄은 예사였다. 생화학무기까지 가면 골치가 아프다못해 우편물 담당 직원의 안부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 메리가 수상해하면서 말이야. 여기 없는 직원에게 온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그게 뭔데요?”
닉은 살짝 뜸을 들이며 입을 열지 않았다. 나타샤의 채근에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정말로 아주 예상 외의 인물의 이름이었다. 정말이지, 우편물 담당인 메리 스펜서가 모를 수 밖에 없는, 그런 인물 말이다.
“받는 사람이 에이프릴 린드만이라고, 분명 주소는 맞게 적었는데 여기엔 그런 사람이 없잖나. 그런 4월에나 어울릴만한 이름이라니.”
에이프릴, 이라는 이름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악에 가득 찬 눈빛이 점차 희망으로 물들어갔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모습에 닉은 미소를 짓고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작은, 엽서크기의 종이였다, 아니 그것은 엽서였다. 한쪽 면에는 피지의 지도가 총천연색으로 그려져있었고, 반대쪽에는 아주 익숙한 글씨체로 무언가가 적혀져 있었다. 그녀는 급히 닉의 손에서 엽서를 빼앗아서는 뒷면을 바라보았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데이비드 블레인, 그가 바누아투에서 썼던 가명이었다. 엽서의 내용은 달랑 몇글자밖에 없었다. 날짜와 시간만이 내용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피지의 꽃이 그려진 우표와 그 아래에 쓰여진 주소를 보고 있었다. 엽서에 적힌 시간까지는 이제 이틀밖에 채 남지 않았다.
“어때, 자네가 그녀에게 전해줄텐가? 난 여기 사람들은 잘 몰라서 말이야.”
닉은 아주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나타샤또한 미소로 화답하며 대답하였다.
“좋아요, 그녀에게 잘 전해줄게요.”
닉은 그 말에 알았다고 말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타샤는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엽서에 눈길을 돌렸다. 배너의 필체로 적혀진 글씨는 너무나도 질서정연해서, 그의 상황이 나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
그렇게나 미웠건만, 그렇게나 뺨을 때리고 싶었건만 어째서 지금 순간만은 기쁜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조심스레 엽서를 이마에 갖다대었다. 마치 성녀의 나무에 앉아있었던 그 때처럼, 풀과 나무의 비린내,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들의 구애소리, 벌레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와 풀들이 흔들리는, 그 한여름밤의 꿈같은 풍경이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졌다. 그리고 자장가가, 그가 그렇게나 좋아했고 자신이 좋아하고 말았던 자장가가 다시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모든 건 결국 내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마지막 박사님 고백 장면을 쓰기 위해서 반년을 왔습니다;;;;;;;;;; 나 정말로 어떤 의미로는 미친것 같아요 ㅠㅠㅠㅠㅠㅠ
여기까지 봐주신 분들 정말로 고맙습니다 ㅠㅠ 정말로 고맙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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