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비전완다 _ 죽은 왕자를 위한 파반느 5. 본문
그녀의 품은 어둡고 따뜻했다. 가슴 사이에서 뿜어져나오는 향수섞인 체취와 목걸이 체인의 서늘한 기운이 그의 감각을 자극시켰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를 하나도 듣지 않게 하겠다는 듯, 그녀는 그의 귀를 손바닥으로 막고서는 나지막이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에서는 방금 마셨던 포도주의 알콜향이 나고 있었다. 그저 게임이었을 뿐이었다. 내기에 져서 벌칙을 받게 될 비전이 불쌍하다는 듯, 완다는 그를 품에 안고는 괜찮다고 속삭였다. 무엇이 괜찮다는것인지 비전은 알 수 없었으나, 그저 술에 취한 완다가 자신에게 술주정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그동안 수백번은 들어왔을 그 목소리가 그의 안에서 조심스레 어떤 파동을 갖고 울렸다. 그는 다시금 그녀의 향기를 느껴보았다. 술에 취해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그 둘을 중심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비전은 조심스레 완다의 등에 손을 올리고는 괜찮냐고, 정말이지 자신이 봐도 이상할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자 완다는 싱긋 웃으며 벌칙을 받는건 너무하다고 모두에게 말하였다. 그녀의 품에서 떨어진 순간, 바깥의 공기와 뒤섞인 그녀의 향기를 맡고,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애써 정리하던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에 어린 그녀의 살갗을 인식한 바로 그 순간. 비전은 자신이 품고 있던 감정을 다른 쪽이 아닌가, 그제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완다가 잠들어있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제에도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달콤한 말들을 내뱉었다. 그녀는 그 달콤하다 못해 목이 아린 그 말들을 모두 받아마시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행복해하던 모습이, 길다란 머리카락을 땋으며 나누었던 대화들이 다시금 그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에라도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그건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완다 막시모프에게만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울트론입자가 사라진다면 그녀에 대한 사랑마저도-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는 하루하루 자신의 몸을 차지하려는 울트론과 싸우면서도 절망에 휩싸였다. 그는 울트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전적으로 울트론 입자에서 비롯되었으니, 울트론을 제 몸에서 물러낸다면 그녀에 대한 사랑도 그와 동시에 삭제될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녀와 사랑이 없는 관계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것인가.
아니, 비전은 스스로 그건 변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완다의 앞에서는 한명의 남자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도 질투를 하는지라, 도저히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또다른 자신이 그녀에게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내뱉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건 안드로이드로서는 하기 힘든 치졸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이 감정이 질투임을, 그리고 완다에 대한 사랑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완다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 감정은 두뇌가 전자로 이루어진 그에게는 너무나도 사라지기 쉬운 것이라, 곧 그의 정신과 함께 사라질 터였다.
“완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사랑을 담아 이름을 부를 수 있는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전에 그는 그녀에게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죽음을 앞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었다. 그는 다시금 그 달콤한 이름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다시는, 절대로 다시는 부를 수 없을 것임을 확신하듯이.
비전이 몽롱한 상태에서 눈을 뜬 것은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는 심장한켠이 아린듯한 느낌에 역시나 꿈을 꾸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번 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꾸었는지 잊어버렸다. 그저 행복하지만 쓰라린 내용이라는 것만을 기억해낼뿐,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엇이 펼쳐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내용은 처절할 것이다. 그는 제 눈가를 만져보고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눈가를 닦은 손가락에는 여태껏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거라 생각하였던 물기가 어려있었다.
▒ ▒ ▒
CCTV에서 완다의 모습은 평소와 똑같았다. 비전은 소파에 앉아 체스말을 만지작거리며 애써 평온을 가장했다. 나타샤가 괜찮다싶어 둘의 만남을 허락한 것이 3시간 전의 일이었다. 옆에 앉아있는 샘은 꽤나 긴장했는지 헛기침을 하다가 물을 마셨다. 애석하게도 로디와 스티브는 급한 일이 있어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고문인 토니도 마찬가지라, 이 어색한 모임에 모이는 사람은 고작 4명 뿐이었다.
“긴장돼?”
이상하게 침묵이 깔린 거실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샘이 입을 열었다. 비전은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노라고 말한 뒤, 곧 완다가 열고 들어올 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이미 한번 그녀를 만나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때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매일 밤 그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에 번민하며 괴로워하다 그녀를 드디어 만난 순간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행여나 자신이 그녀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지 않을까, 스스로 몸의 작동을 제어하려 노력하며 앉아있어야했다.
“하지만 그렇게 갑자기- 오.”
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문에서는 미약한 바람이 불었고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다. 비전은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대충 아무자리에나 체스말을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다의 고개가 샘을 향해 돌아갔다. 그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친근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완다 막시모프.”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방금 전 샘에게 보여주었던 미소와 똑같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비전.”
그녀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을 담은 애칭이 아닌, 모두에게 알려져 있는 그 이름으로.
“네, 휴가는 잘 다녀왔습니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또한 평소와 마찬가지인,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어줄 수 없는 그런 형식적인 미소였다. 그는 나타샤가 그 때 자신에게 한 말을 이해하였다. 완다가 다정하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자, 그도 그에 화답하여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창백한 얼굴, 손은 피가 잘 안통하는지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가웠다. 순간 커다란 송곳으로 심장 이곳저곳을 후려파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애써 얼굴표정을 고정시키고는 통증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통증은 금방 가셨다. 가볍게 몇 번 움직임이 지나더니 둘은 손을 떼었다.
“마이애미는 엄청 좋은 곳이었어. 샘도 가본 적이 있던가요?”
“거기는 내 동네니까.”
“또 허풍은.”
샘의 웃음소리가 그나마 어색하면서도 떨떠름하던 둘 사이의 공기를 풀어주었다. 비전은 어서 커피를 끓여야겠다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완다는 비전이 앉았던, 즉 샘의 옆자리에 앉아 아까까지도 그가 만져댔던 체스말을 똑같이 만지작거렸다. 안도했다는 듯, 아까부터 심하게 굳어져있던 나타샤의 표정이 풀어지자 이유모를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타샤와 샘은 애써 둘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완다도 그에 부응하듯, 아주 활기차게 휴가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볶은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고, 그걸 프렌치프레스에 넣는 동안, 비전은 기계적으로 그 과정들을 수행하면서 방금 전에 있었던 ‘공식적인’ 만남에 대해 생각하였다. 완다는 상당히 사무적인 태도로 비전을 대했다. 나타샤의 말이 맞았다. 비전과 완다 막시모프는 헤어졌으며, 완다도 그걸 이미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지금와서 다시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해도, 이미 이별의 과정이 처참하고 충격적이었기에 그녀가 그에게 사랑을 품을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나 그녀를 배신하였기에 그녀는 이제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유리용기안에 뜨거운물을 붓고 프레스기를 누르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는 그 어떠한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랑은 보답받을 수 없다.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완다, 전처럼 우유를 넣어드릴까요?”
비전이 무심결처럼 내뱉은 말에 시끌벅적했던 분위기에 순간 정적이 일었다. 그는 분위기가 매우 이상해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와 연인이 되기 이전처럼 평소처럼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설탕은 어떻게 하실겁니까?”
“..응, 둘 다. 고마워, 비전.”
“아닙니다.”
커피를 잔에 내리는 동안 그는 비참했다.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마저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부담이 가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 되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하였다. 게다가 그녀와 관련된 추억을 떠올리기만해도 심장에는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견뎌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완다에게 상처를 입힌 자신에게 주는 형벌이었다.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넷은 헤어졌다. 완다와 샘은 각자의 방으로, 비전과 나타샤는 나타샤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비전은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그 애매한 시간동안 계속해서 괴로워하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일부러 입은 열지 않았다. 분위기는 화목했고 완다의 입가에서도 따뜻한 미소와 웃음이 넘쳐나왔다. 다시는 자신이 저렇게 만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자, 그는 자신의 표정이 굳어지지 않게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쏟았다.
“다행이군요.”
소파에 앉자마자 비전이 내뱉었다. 나타샤는 맞은 편에 앉아서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었다.
“난 괜찮으리라 봤어. 그래서 허락한거고.”
“그럼 앞으로도 계속 보는게 가능하겠군요.”
“그래, 네가 이상한 일만 하지 않는다면. 물론 난 믿고있어, 넌 그다지 감정적은 아니잖아?”
“네.”
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완다를 감정적으로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다.
“큰 문제로 번지지 않을거라고 믿어.”
“네, 그리고는요?”
분명 나타샤가 자신을 부른 것은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비전의 추궁하는듯한 말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상태는 어때? 검사결과는 아직도 안나왔나?”
“그건 배너 박사님에게 직접 듣는게 좋지 않을까요? 분명 그라면 정확한 대답을 알려줄텐데요.”
“난 당사자에게 듣고싶어.”
물론 이유는 함부로 비전에게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비전의 일로 배너와 연락을 나눴고,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연인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뿐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본인에게서 듣는게, 배너에게나 자신에게나 큰 상처가 되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이상이 생긴 것은 제 심장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부분이죠. 정확히는 이 보석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분배해주는 역할을 해주는 곳입니다만, 여기에 바이러스가 숨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이 곳을 새로 만들어서 교체를 하겠다는군요. 저도 드디어 성장이라는걸 하나 봅니다.”
“장기이식과 성장은 다른 말이야. 그리고 교체라니, 거기서 데이터를 곧바로 삭제시키는 수는 없는거야?”
“이 경우, 이미 뿌리박듯 데이터가 숨어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나 이 바이러스는 제 심장 밖으로는 나가는 모습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희쪽에서 데이터로 접근하려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죠.”
“그래서 아예 통째로 떼어낸다, 인가?”
“고장난 부위를 갈아끼우는건, 수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넌 수리하는게 아니잖아.”
네? 비전은 순간 나타샤의 말에 물음표를 던졌다. 나타샤는 의아해하는 눈으로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경우는 ‘치료’한다는 말이 맞아. 단순히 수리한다던가 그런 류는 아니지. 넌 기계도 아니니까. 그렇게 무언가를 쉽게 없애고 갈아끼운다는게 가능할까? 아, 미안. 난 이쪽으로 전문가도 아닌데... 그래, 알았어.”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의 감정중 어떤 것은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그 감정은 자칫잘못하면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고맙다고,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차마 나타샤에게 그 감정이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나타샤도 그 이상 별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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