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비전완다피에트로 _ Barbershop Requiem 下 본문
1년여만에 돌아온 조국은 여전히 폐허로 가득했다. 수도 노비그라드가 있었던 곳은 커다란 구멍이 되어 있었다. 구덩이 주변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져있어 아무도 그 주변에 갈 수 없었다. 가장자리에 위치한 주택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몇몇은 사고 당시에 떨어진 파편들로 인해 반파되어 있었고, 몇몇은 아예 집이 있었다는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히도 어벤져스는 울트론의 손에서 지구를 구해냈다. 하지만 대신 소코비아의 시민들은 그들의 추억이 서려있는 집과 교회와 가족들을 잃었다. 이제 내전의 상처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려하던 때였다.
토니가 1주기를 추도하는 추도사를 읽기도 전에 엉망이 된 것을 보고나서 남매는 우선 그들의 부모가 묻혀져있을 곳을 찾았다. 시장에서 간신히 싸구려 꽃을 산 뒤에 찾아간 공동묘지는 집들과 마찬가지로 폐허로 변해있었다. 그나마 노비그라드 인근에 위치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시내에 위치하였더라면 이마저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을 그나마 안심해야했다. 비석과 십자가의 일부는 덩굴에 휩싸여있었다. 전에 왔을때보다도 무덤사이의 간격은 좁아져있었으며, 사람들은 어떻게든 시신을 다 묻으려 작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백, 수천구의 주검이 이 곳에 묻혔다.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뿐만이 아니라 작년에 있었던 참사로 인한 사망자까지 묻히자, 이 곳은 죽음의 향기를 풍기는 곳이 되어버렸다. 며칠전 1주기를 맞아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가족, 친구를 보기 위해 이 곳에 찾아왔다. 무덤 하나하나 앞에 위치한 꽃다발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향기만은 품고 있어서 처음에 그들이 공동묘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꽃밭에 온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막시모프 부부의 묘비에는 잡초와 덩굴들이 수북했다. 덕분에 아무도 이 묘지의 주인공들을 알지 못했으며, 덕분에 단상에 올랐던 토니와 같은 처지는 면할 수 있었다. 부부의 자식은 죄인이었다. 쌍둥이는 울트론을 도와 그들의 조국을, 이 지구를 멸망시키려 하였고, 결국 소코비아에게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큰 상처를 안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어벤져스의 멤버가 되어버린 쌍둥이들의 일가친척을 찾으려 했다. 몇몇 친척은 이미 그들은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했으며 몇몇은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소수는 똑같이 이 쌍둥이들을 욕하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쌍둥이의 부모가 묻혀져있는 곳은 몰랐다.
"Дошли смо овде, мама, тата."
완다는 부모가 나란히 잠들어있을 묘비에 꽃을 바쳤다. 둘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가슴깊이 슬픔이, 죄책감이 그들의 폐부를 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추억이 서려있는 그 장소들로 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향을 부서뜨린 것은 바로 자신들의 손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한 그리움과 회한에 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둘은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우두커니 계속해서 그 장소에 서 있었다.
"미안해."
먼저 사과의 말을 꺼낸 것은 완다였다. 피에트로가 그녀를 찾았을 때는 저녁식사를 앞두고서였다. 완다는 평소 멤버들이 자주 모여있던 홀의 소파에 나홀로 앉아있었다.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키곤하던 비전은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해주려는 의도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만히 제 쌍둥이 여동생이 앉아있을 소파근처에 모습을 나타내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에게 말하였다. 얼굴을 직접 보고 사과하기에는 겸연쩍었는지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는 투가 꽤나 새침했다.
"미안했음 됐어."
그걸 알아차렸는지 피에트로도 일부러 소파 뒤에 섰다. 완다의 뒤통수에는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가위로 자르는 시늉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완다가 만약 머리카락을 자른다면 어떨까, 부모님이 죽고 난민캠프에서 괴로운 생활을 했을 때에도, 나라가 간신히 진정이 되어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했을 때도, 하이드라의 연구소에 들어가 죽을 것 같던 실험을 견뎌내던 때에도 완다는 자신의 긴머리를 고수했다. 갈색의 탐스런 머리카락은 전쟁통에서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여성스러움이었다. 피에트로는 이 쌍둥이 여동생의 여성스러움을 사랑했다.
"장난치지마, 피에트로."
"내가 왜 머리카락을 자르려는지 알겠어?"
완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스마트폰 액정 속에서 뉴욕에서 잘 나간다는 미용실을 검색하고 있었다. 결국은 그런 쪽인가, 피에트로는 살짝 허탈해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풀었다. 헤어밴드를 손목에 감고 길다란 머리카락을 세갈래로 갈랐다.
"그날 그 꼬맹이를 만났어. 왜 코스텔 있잖아."
그 말에 완다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그녀는 절대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클린트와 그 아이를 구하려고 피에트로가 총에 맞았던, 그리고 한순간이나마 생명이 꺼졌던 그 순간을. 언제나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히던 피에트로의 심장박동이 멎은 그 순간, 그녀는 제 심장의 반쪽이 뜯겨져나가는 통증에 괴로워해야했다. 그 때를 떠올리는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는 것을 알아채자 피에트로는 재빨리 땋기를 멈추고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었다. 체온이 이마에 전해지자 완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 어디 안가니까. 그래서 그 꼬맹이를 만났어, 꽤 많이 자랐더라고."
아이는 1년새에 머리 하나만큼 더 커져있었다. 토니가 추도식을 준비하는 동안 노비그라드의 시민들은 새로 생긴 광장에 모여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참사의 범인이 올라설 단상에 집중되던 때에 코스텔은 자신을 구해준 형을 알아보고 옷을 끌어당겼다.
"난 못봤는데."
"네가 알아채지 못하길 빌었어, 어쨋거나 우리를 알아본거니까."
"그래서?"
완다의 긴장이 풀린 것을 알아채자 피에트로는 다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평소 비전이 공들여관리해서그런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사이에서 뭉쳐지다가 풀어지곤 하였다.
"..그냥 고맙다고 하더라. 정말이야, 그 말만 하고는 그냥 사라졌어."
"...의외네. 우리가 소코비아 사람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건."
둘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둘은 소코비아에서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비단 나라 안에서만은 아니었다. 소코비아 참사로 인해 가족을 잃은 소코비아인들은 전 세계에 널리 있었고,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뉴욕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얼굴은 이미 어벤져스로서 전세계에 알려져있었고 특히 뉴욕 내의 소코비아인들은 둘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칭찬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코비아어로 듣는 욕설이 좋은건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 아이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정말이지 사막에서 발견한 물 한방울과도 같았다.
"Хвала! Хвала, 라고 말하는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우린 여태껏 듣지 못했잖아."
"그래. 앞으로도 무리라고 생각했지."
"...이제 이해되었지? 왜 내가 머리카락을 자르려하는지 말야."
피에트로 막시모프에게 자신의 하얀색 머리카락은 단순히 실험실에서의 날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건 둘이 행한 악덕을 상징했다. 그걸 잊지 않도록,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는 일부러 그 하얀 부위만큼은 남겨놓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져내리는 돌덩이에 죽어간 소코비아 사람들을 위해서, 내전에 힘없이 죽어가야 했던 그들의 친구들과 부모님을 위해서 그는 그 때의 그 순간을 자르지 않고 있었다. 완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피에트로가 죄책감을 아주 약간이나마 내려놓기 위함을 알아차렸기에, 죄의 증거인 머리카락을 자신이 자르겠다고 떼를 쓴거였다.
"만약 자르겠다면 나말고는 아무도 안돼."
"야, 네가 자르면 개판이 된다니까."
피에트로가 땋아내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항의하자 붉은 선이 그대로 피에트로의 팔목을 붙잡았다. 졸지에 잡혀버린 그는 설마 또인가, 불안해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만약 네가 그걸 자르겠다면 같은 짓을 했던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돼. 네 머리 전부를 자르겠다는게 아냐, 네 흰머리만 내가 정리할게."
"그건 괜찮아. 단 네 개떡같은 솜씨를 보이지 않게 이발소에서 자른다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를 얽매었던 염력이 사라졌다. 피에트로는 이제 슬슬 마무리되어가는 땋기에 손을 놀렸다. 완다가 괜찮은 미용실을 찾았다고 말하자 유치하게 무슨 소리냐며 남자가 미용실에 간다는게 말도 안된다고 응답했다. 그렇게 말하고나서 그는 땋은 머리 끝을 헤어밴드로 묶었다. 그리고 그제야 완다는 고개를 돌려 제 쌍둥이형제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어렸던지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있었지만 그는 그것도 모른채 하며 완다가 들고있던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스티브에게서 봐뒀다면서 그가 단골로 다닌다는 이발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를 돌려내!"
피에트로를 향해 던진 돌은 그의 눈앞에서 붉은 기운에 휩싸여 멈추었다. 완다의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리며 돌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악을 쓰며 돌덩이를 던진 중년의 여인은 그 모습에 아연실색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완다의 염력에 겁이라도 먹은 듯 몸을 덜덜 떨어댔다. 그러다 완다가 괜찮냐고 물으며 다가가려하자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양팔로 가렸다. 오지마! 괴물!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며 무슨 일이 벌어졌냐며 물어댔다. 몇몇은 아예 스마트폰을 꺼내 상황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피에트로는 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재빨리 완다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이 순간에마저도, 품속의 완다의 온기를 느끼는 이 순간에 어째서 그렇게나 소리를 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가득한걸까. 아니었다, 이건 비단 그 여자의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다양한 성별의 사람들이, 다양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둘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마치 송곳처럼 찔러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죽였느냐고, 왜 울트론을 도왔느냐는 말들이 튀어나와 그들의 주변을 감싸댔다. 이제는 어디를 달리고 있는건지 알아차리기도 어려웠다. 그가 걷고 있는 바닥은 이미 깊은 어둠속에 꺼진지 오래였다. 더이상 달릴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는 추락하였다. 이미 품속의 완다는 붉은 빛이 되어, 마치 잉크가 물속에 퍼져나가듯 대기로 사그라들었다.
"완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째서인지 한쪽 손이 허공을 향해 뻗어있었다. 숨은 도저히 주체하기 힘들정도로 격했으며 심장은 매우 거세게 뛰고 있었다. 마치 완다의 환영이 거기 위치한다는 듯, 눈앞의 어둠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완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허공을 향해 뻗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하여 그의 머리카락까지 적시고 있었다.
"...하아..."
그제야 모든 것이 악몽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피에트로는 모로 누웠다. 심호흡을 하며 숨을 진정시키고나서야 발밑에 떨어져있던 이불을 추스를 수 있었다. 과연 잘 하는 일일까, 그는 침대위에 제멋대로 흩어져있는 머리카락들을 손으로 매만지기 시작했다. 코스텔의 말로부터 희망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과연 자신이 이 죄의 흔적들을 그렇게 쉽게 끊어내도 되는것인가 하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약간의 약과 상담, 심호흡만으로도 이 불안을 어느정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RRRRRRRRRRR-
그는 갑작스레 울리는 기본알람음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스마트폰의 액정에는 그가 사랑해마지 않은 여동생의 얼굴이 떠올라있었다. 다시 심호흡, 평온을 가장하며 그는 수신버튼을 누르고는 전화기를 제 귓가에 갖다대었다. 완다 또한 자다 깨었는지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괜찮아?"
이럴 때 뭐라고 대답을 하는게 최선일까, 그는 한순간 바튼을 떠올리며 그에게 어떻게하냐고 묻는 상상을 했다. 어쩌다보니 쌍둥이의 멘토가 되어버린 이 젊은 가장은 이런 순간에 무어라 말할까. 아니, 이건 바튼의 일이 아니다. 완다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을 한 것은, 분명 자신이 악몽을 꾼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거짓말을 해봤자 결국에는 추궁에 추궁을 이어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 뻔했다.
"..아니."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그 한마디만을 털어놓자마자 전화는 꺼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의 잠금쇠를 풀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듯, 아주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복도의 바람이 방안에 들어왔다. 피에트로? 아주 작지만 너무나도 선명한 목소리로 완다가 침대안으로 들어왔다. 비전이 그렇게나 가꾸던 머리카락에서는 이름모를 꽃향기가 선명히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감고, 제 품속에 기어들어오는 여동생의 체취를 즐겼다. 그녀가 조심스레 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어서 일어나라고 타박하자 그제야 그는 눈을 뜨고 자던 척을 멈추었다.
"자는 척 하지마."
"아냐 자고 있었어."
"그럼 아까 전화받은건 누구야?"
"글쎄, 유령일까."
완다는 천천히 피에트로의 볼에 얼굴을 부비었다. 수염이 따끔하며 아프다고 불평을 하자 모두 멋이라고 그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완다는 이번에는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턱수염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레 완다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공기는 어느새 온기를 띄고 있었고 포근한 느낌이 둘을 감쌌다. 그렇게 서로를 품에 안고 온기를 나누는 것을 즐기길 몇분이 지났을까, 피에트로는 입을 열었다.
"무서워."
"..뭐가?"
"잘라도 될까, 하는. 오히려 편해지려고 모든 걸 다 무시하려는게 아닐까."
"갑자기 왜 그래, 천하의 피에트로 막시모프가. 또 무서운게 꿈속에서 나왔나보죠?"
그는 고개를 내려 자신을 바라보는 완다의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완다는 이번에는 피에트로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흡사 고양이의 애정표현같아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증거는 남아있어. 걱정마, 피에트로. 우리가 저지른 일들은 증거가 엄청 많아, 우린 그걸 절대로 잊을 수 없을거야. 평생 벗어날수도 없을테고. 우리는 평생 벌을 치뤄야 돼, 그러니까 괜찮아."
어차피 평생 속죄의 길을 걸어야 할 터였다. 다시는 소코비아어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도 없을테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얼굴을 숨겨야 할 것이다. 고향을 파괴한 사람들로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여버린 범죄자로서 둘은 그 벌을 아주 달게 받고 있었다. 그러니 괜찮다고, 아주 조금 내려놓는다고해서 그 모든 죄를 잊을 수 없다고, 완다는 그렇게 피에트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주 사소한 증거일뿐, 결국 둘을 둘러싼 모든 상황들이 그들의 죄를 말해주고 있었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못했던 일들을 하는거야."
그녀는 더욱 피에트로의 품으로 파고들어갔다. 목소리는 점점 물에 젖어갔다. 네가 있기에 이 가시밭길도 아주 기쁘게 걸어갈 수 있다. 설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손을 잡아준다면, 어떤 지옥의 불길이라도 버텨내리. 힘든 히어로 훈련을 견뎌낸 것도 서로가 있었기에, 그리고 둘의 죄책감이 그만큼 견고했기 때문이었다.
"...내일 나타샤가 데려다주기로 했어. 같이 가자."
"...응, 좋아."
피에트로는 아주 살짝 완다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서로의 품에서 너무나도 아득한 온기를 느끼'm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래서 왜 비즈가 따라오는건데?"
조수석에 앉아 스쳐지나가는 시내의 풍경을 보고 있던 피에트로는 난데없이 불평을 토해내었다. 물론 운전면허와 자동차가 있는 나타샤가 데려다준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설마 비전이 따라올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뒷좌석, 완다의 옆에 앉아있던 비전은 자신을 힐끗 쳐다보는 피에트로를 향해 상큼하게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저 미소는 무슨 뜻인가,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꽁냥꽁냥 서로의 손을 만지고 있는 비전과 완다를 바라보았다. 마침 아침에 완다가 제 방에서 나오는 것을 들킨터라 더더욱 비전을 보기 불편한 점도 있었다.
'분명 질투야.'
그는 남자의 직감으로 확신했다. 비전은 정말 노골적으로 완다의 손목과 손등을 어루만지며 손가락이 정갈해서 예쁘다고 칭찬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소에는 입지도 않을 자켓까지 차려입어서, 누가 옷만 보았다면 스포츠셔츠나 입은 피에트로가 아니라 비전이 이발소에 가는 것처럼 봤을 것이다.
"뭘 그리 바라봐?"
피에트로는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타샤는 앞의 신호등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행여나 뒷자리에 들릴새라 나타샤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야 저자식이-'
"비전도 손님이야, 확실히 예약했다고."
"네?"
그는 다시 한번 뒤에 앉아있는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예 완다의 손바닥을 펼쳐놓고 손금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점을 보고 있었다. 완다가 꺄르륵 거리며 웃자, 자연스레 안드로이드의 입가에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예약이고 손님이라니. 모발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저 로봇이 이발소라니. 피에트로의 수상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완다가 뾰루퉁하게 말하였다.
"왜 그리 비즈를 바라봐?"
"아무것도 아냐."
어쩌면 나타샤가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팔짱을 끼웠다. 하지만 역시나 시선은 뒤로 향하기 마련이어서 몇번이고 둘이 손을 맞대고 노는 것을 훔쳐보았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운전석에서 들려왔다. 또 뭐에요, 마치 시비라도 걸듯이 살짝은 높아진 언성으로 피에트로가 속삭이니 안타깝다는 듯, 나타샤는 작게 말하였다.
"너도 눈치가 참 없다 싶어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시 한번 말하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차안에 울려퍼진 완다의 목소리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완다는 창밖 너머, 어떤 곳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4중주 이발소, 마치 1940년대에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운 간판을 단 이발소는 그렇게 브룩클린 상가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4중주 이발소, 얼핏 젊은이들이 지나가다 본다면 특이한 이름이라고 인스타에나 올릴법한 이 고급이발소의 주인은 이제 갓 60이 된 노년의 신사였다. 고급스러운 서비스에 나이대에 맞지 않게 현대적인 머리스타일도 곧잘 소화해내었고, 가게 자체의 인테리어도 상당히 고풍스러웠기에 브룩클린 내에서도 숨어진 명소로 불리우고 있는 곳이었다. 스티브 로저스가 이 곳을 알게 된 것도 인스타그램을 통해서였다. 그는 1940년대에 살았던 남자답게 4중주 이발소란 뜻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전화를 걸어 다음날 오전시간에 예약을 했다. 과연 유명한 이발소답게, 이발 후 거울을 보니 제법 만족스럽게 머리가 잘려져 있었다.
만약 간다면 이런 곳도 좋겠지, 우연히 남자들끼리 샤워실에 갔을 때 나온 이야기였다. 분명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는 비싸게 나오겠지만 그만큼 좋은 곳이라고, 스티브 로저스가 말하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가며 피에트로는 나타샤의 도움을 받아 예약했었다. 어벤져스의 대원, 즉 히어로라는 신분의 성격상 피에트로와 비전이 머무는 시간대에는 그 둘을 제외한 손님은 받지 않기로 하였다. 덕분에 돈은 꽤 많이 깨지게 되었으나 토니로부터 받은 블랙카드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어서오세요."
초로의 신사와 젊은 제자가 친절하게 넷을 반겼다. 스티브의 호평대로 내부는 색이 많이 바랬지만 상당히 깔끔하고 단정했다. 이곳저곳에 흔적은 있었지만 오염이 된 곳은 한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이발소에 흔히 날법한 염색약냄새도 나지 않고, 오히려 청량한 스킨냄새와 면도크림 냄새만이 가게안을 채우고 있었다. 주인은 피에트로와 비전이 자신들의 손님이란 것을 알고서는 일단 피에트로를 좌석에 앉게 했다. 흡사 양파와도 같다고 했던 동그란 머리카락뭉치가 풀리자 짙은 갈색과 하얀색의 투톤머리카락이 등 뒤에 펼쳐졌다. 호오, 주인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상당히 관리가 잘 되어있군요,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선 조수에게 피에트로의 머리를 감게 했다.
"그럼 이쪽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비즈, 예약했어?"
"네, 피에트로의 친구로서요.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그리고 비전은 나타샤와 완다로서도 알아듣기 힘든 말을 주인과 나누었다. 꽤나 흥미로운 일인지 주인은 몇번이고 웃음을 터뜨리다가 알았다고 말하였다. 그건 저쪽 손님분께서 끝나시고난 다음에, 라는 말과 함께 이야기가 끝나자 머리카락을 다 감은 피에트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 드라이기 소리와 함께 차마 입으로 말을 내뱉기도 어려운 긴장감이 이발소 내에 퍼졌다. 드라이기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내부를 채웠다. 피에트로는 뜨거운 바람이 제 머리카락을 말리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깊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드라이기가 꺼지고 주인은 그의 어깨에 넥셔터를 두르고는 다시 큰 천을 그 위에 둘렀다.
"손님, 어떤 머리를 원하십니까?"
주인은 자애롭게 미소를 지으며 거울 너머의 피에트로를 향해 말하였다. 이런 이발소는 정말이지 오랜만인-그동안엔 훈련소 내의 이발소를 이용했으므로- 그는 침을 삼키며 아주 더듬더듬, 긴장된 분위기만 아니었음 완다가 비웃었을 그런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이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사실 그 자리에 있던 나타샤와 완다, 비전은 그게 어떤 스타일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요컨대 1년전, 그가 하이드라의 연구실에서 나올때쯤의 길이와 모양새로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의 서툰 설명을 듣고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식인지 모델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맞추었다. 네, 주인은 매우 친절하고 상세하게 그의 요구사항 하나하나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모든 주문이 끝나자 그는 트레이 위에 올려져있던 가위를 아주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그리고 뒤에 앉아있던 다른 세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손님의 머리카락을 자를 분은-"
"아, 저에요."
완다는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에트로는 전화로 예약을 하며 처음에 흰머리카락만은 제 여동생이 잘라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었다. 주인은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하였다.
"머리카락은 잘라본 적이 있습니까?"
"어릴때 몇번이요."
완다가 수줍게 대답하자 피에트로의 입에서 얕은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미용실 갔죠."
"너 정말."
그 말에 이발소 내에 있던 모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간신히 긴장이 풀렸던지 굳어있던 피에트로의 얼굴도 느슨해져있었다. 완다는 거울너머 차분히 머리카락을 자를 준비를 하는 피에트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곧 다가올 기약없는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팽팽하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그녀는 조심스레 형제의 머리카락에 가위날을 대었다. 한순간의 손놀림으로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의 죄책감이 같이 잘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발판으로 삼아 둘은 다시 서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자를게."
"그래, 원하는대로."
피에트로의 입가에 큰 호선이 그려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가위날과 하얀 머리카락사이로 집중되었다. 싹둑, 그렇게 하얀색 머리카락 다발은 천천히 대리석 바닥위로 떨어져내렸다.
"그러고보니 넌 뭘 받은거야?"
완다가 피에트로의 머리카락 중 하얀 부분을 다 자르자 가위는 곧바로 주인에게 넘겨졌다. 주인이 매우 능수능란한 솜씨로 이발과 면도-물론 완다는 놀랐지만-를 하는 동안, 비전은 제자의 손에 이끌려 어느 비밀스러운 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이발이 끝나 피에트로가 꽤나 말끔해진 짧은 머리와 매끈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고 얼마 안지나서 비전도 아주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비전은 상당히 말끔해진 모습의 피에트로를 보고는 역시 수염이 없으니 5년은 젊어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다. 물론 피에트로가 완다가 따가워하길래, 라는 말을 했을때는 얼굴표정이 살짝 경직된것처럼 보였지만.
"간단한 마사지입니다. 두피와 안면마사지죠."
"너에게 두피란게 있었어?"
"일단은 젬 주위로 신경이 밀집되어있어서 그 부분의 근육들이 경직되어 있었거든요."
과연 진짜인지 아닌지, 비전공인으로서는 알아듣지도 못할-전공인도 알아듣기 힘들- 이야기를 나누며 넷은 디저트를 즐겼다. 하얀 머리카락은 말끔히 주워서 작은 상자안에 넣어놓았다. 언젠가 둘이 소코비아로 얼굴을 내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때 고향에서 처분할 생각이었다. 완다는 마치 보물단지라는 냥 소중히 그 상자를 끌어안고서는 파르페를 즐겼다. 아, 잠깐만, 연인에게서 전화가 왔는지 나타샤가 자리를 떠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완다도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야 피에트로는 한숨을 내쉬며 그때, 비전이 꺼내었던 협박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너 완다에게 교제를 신청하니 마느니 하지 않았던가?"
"네, 만약 당신이 자리를 피한다면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하겠다고 말했죠."
"내가 기꺼이 나타났으니 이제 넌 완다에게 아무 말도 못하겠군."
"네, 맞는 말입니다."
피에트로의 입에 사악한 미소가 둘러졌다. 그는 불쌍한 중생을 바라보는 부처의 마음으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제 여동생을 노렸던 한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눈치가 없는 여동생이 이 안드로이드의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시간은 꽤 걸릴거라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암, 어떻게 지켰는데 암.
"뭐, 어쩌겠냐. 그래도 난 반대 안해, 오히려 너희 둘 보기에는 좋고."
"감사합니다, 피에트로. 저도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비전의 입가에 이유모를 미소가 띄워졌다. 하지만 피에트로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유유자적하며 카페라떼를 마셨다. 머리카락과 얼굴이 가벼워졌고 덕분에 마음도 살짝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완다가 돌아왔으면 하고 빌었다. 그리고 완다가 기꺼이 자신의 볼에 입을 맞춰주기를 바랐다.
그가 나타샤의 눈치없다는 말과 비전의 미소의 뜻을 알아차린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었다.
단순히 피에트로의 똥머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썼다;;;
아마 이게 더 놈팽이스럽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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