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비전완다 _ 같은 곳에서 같은 속도로 심장이 뛴다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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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완다 _ 같은 곳에서 같은 속도로 심장이 뛴다면

rabbitvaseline 2016. 12. 26. 16:04










할로윈을 앞두고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는 여러 나무들이 곧 자신들에게 들이닥칠 노화를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게를 돌아다니며 할로윈 물품들을 고르거나 노천카페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커피를 마셨다. 건조한 공기 속에서 먼지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모두들 가끔씩 부는 선선한 바람에 곧 짧게 사라질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완다 막시모프는 동료들이 자리잡고 있는 벤치에 앉아 미지근한 허브티를 마셨다. 일부로 미지근하게 주문했던 차는 생각보다 맛이 약했지만 그래도 향기를 즐기는 정도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가로수에 둥지를 튼 새들은 시끄럽게 울어댔고, 가끔씩 하늘 너머에서는 철새들이 V자를 이루며 편대비행을 했다. 그녀는 어서 오라는 동료들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의 센트럴파크의 공기는 맑고 하늘은 파랬기에, 조만간 가족들을 데리고 산책이라도 올까, 하고 생각하며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20여분 뒤, 훈련도중 갑작스레 사라진 안드로이드는 뉴욕 도심지의 어느 사거리에서 TV뉴스를 통해 발견되었다. 아주 가끔씩 일어나던 교통사고 현장에서, 트레일러가 평범한 중형차를 덮친 그 사고현장에서 안드로이드는 이미 찌그러지다 못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바닥에 눌려진 자동차의 잔해를 뜯어내고 있었다. 사고현장에 달려왔던 구급차와 경찰차, 아이언맨은 그런 그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분주히 손을 놀려 간신히 찾아낸, 손으로 추정되는 부위를 끌어안는 모습을 봐야 했다.

 


몇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던 남자가 등장한 영화는 근미래를 다루고 있었다. 인간형 로봇이 보편화된 세계, 커다란 현관문을 가진 저택에 어느 안드로이드가 가사도우미로 오게 되면서 시작한다. 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 테이블에는 칠리가루를 넣은 팝콘과 콜라가 하나씩 놓여져 있었다. 안드로이드는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켜나가고,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인간으로 남으며 숨이 멎게 된다. 그렇게 200여년을 살았던 사나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완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분명 감동을 받은 것이리라, 그는 차마 휴지를 찾지도 못하고는 서툴게 자신이 입고 있던 스웨터의 소맷자락으로 완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무 거칠게 닦았던걸까, 아이라인이 번져서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소매에도 화장품이 묻어버렸다. 결국 그걸 본 그녀는 미소를 짓고서는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 소맷자락이 너무나도 소중했기에 결국은 가위로 잘라서 상자에다 간직했다. 굳이 그 일이 있었던 날을 메모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 날은, 처음으로 단둘이 영화를 보았던 날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나중에 그 천조각을 발견한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결혼을 하고 근교의 저택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난 뒤, 산더미같은 짐을 정리하던 도중이었다. 그녀는 그 때 짙은 청록색 드레스에 가디건을 걸쳤고, 머리카락은 정수리 위에 동그랗게 말려있었다. 아무 글자도 없는 A4용지 크기의 크라프트 상자. 완다가 상자를 든 모습을 보았을때 그는 당황해했다. 어찌보면 부끄러워한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얼굴색이 이 그냥 고구마색이라 그녀가 알아볼 길은 없었다. 만약에 그가 심장을 갖고 있었다면 분명 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안드로이드였기에, 사랑이 담긴 눈으로 그동안 완다와 있었던 일들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상자 안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처음으로 키스를 하고 바르려다가 떨어져서 부러진 립스틱, 반지를 살 상점의 카탈로그, 처음으로 밖으로 데이트를 나갔을때 보았던 영화 티켓, 외국에서 같이 샀던 외국어로 쓰여진 작은 가이드북...... 이 세상에 나타나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의 수많은 편린들. 몇개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었고 몇개는 그가 설명해주어야 했지만 결국 하나하나마다 반응은 똑같았다. 부끄러움과 기쁨, 남편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다가 볼에 입을 맞추었었다. 이건 기억나, 감색 스웨터 천조각에 묻은 붉은색과 살색의 화장품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그 때 바이센테니얼맨을 같이 봤었잖아. 그녀의 눈은 마치 그 안드로이드와 그가 비슷한 처지란걸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도 결국은 사랑하는 인간과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너는 200년은 훨씬 더 오래 살겠지. 마치 먼 미래를 상상하는 것처럼 그녀의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그녀가 상상하고 있는 것이 짐작이 갔던지라, 그는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제가 태어나고나서 당신이 세상에 없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올거야, 그래도 난 네가 로빈 윌리암스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200년을 넘어서 1000년이라도 더 넘게 살아야되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세요.

 

그도 그 영화에 나왔던 안드로이드처럼 인간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이 어떻게 생겨났고, 본인의 구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자신의 몸을 개조한다던가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생활패턴을 인간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바꾸어보기로 했다. 식사시간에는 밥은 먹지 않을지언정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한다. 굳이 씻지 않아도 되지만 마음에 드는 바디워시로 몸을 씻는다. 그리고 남들이 잠에 드는 시간이면, 자신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꿈은 꾸지 않고 그저 그 당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향수를 즐기곤 하는 것이다. 그는 멍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협탁위에 있는 작은 상자에 눈을 돌리며 속으로 잘 잤냐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방문앞에서 놀라고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닮은 두 사내아이에게 말했다. 잘 잤습니까, 토마스, 윌리엄? 아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침을 먹어야한다며 복도로 나갔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전까지 잠을 잤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기를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부엌으로 내려온 아이들은 차분하게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 3개를 식탁 위에 놓았고,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세지 3개를 굽다가 하나를 다시 넣어야 했다. 아침마다 들리던 어머니의 살짝은 가라앉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토마스가 자몽을 자르는 사이에 윌리엄은 계란을 깨서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었다. 그들의 부모는 낮밤이 따로 없었고, 한달의 절반정도는 집을 비웠다. 그때마다 베이비시터가 와서 둘을 돌봐주곤 했었지만, 그렇다고 아침까지 해주는건 아니었기에 둘은 부모의 몫까지 요리를 하곤 했다. 접시를 놓을 때가 되고나서야 그가 나타나 테이블에 앉았다. 평소라면 주스라도 컵에 따르련만, 최근 쌍둥이의 아버지는 아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토스트가 구워지는 냄새, 냉장고에서 잼을 꺼내고 땅콩버터의 뚜껑을 열고,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자는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그는 식어빠진 커피를 가끔씩 입에 대었고 쌍둥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공기속에서 얼어붙듯 맛없는 식사를 끝냈다. 그들의 식사를 즐겁게 해줄 조미료는 이미 한달 전에 사라져버렸다. 그가 접시를 설거지하는동안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켜고서는 양치질을 하며 아침뉴스를 경청하였다. 일주일전 있었던 할로윈데이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너무 구닥다리야, 윌리엄이 말했다. 텔레비전 소리와 양치질소리, 설거지소리만이 집안에 가득찼다. 그가 설거지를 마치자 아이들은 저마다 가방을 둘러메고는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자그마한 인사와 함께 재빨리 집에서 벗어났다. 그는 곧 올 스쿨버스를 향해 달려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마스는 제 외삼촌을 빼닮아 발놀림이 빠르고 유쾌하다. 윌리엄은 어머니를 닮았던지라 섬세했다. 그는 아이들의 모습이 점으로 사라질때까지 바라보다가 머릿속으로 이럴때면 울려퍼지던 목소리를 재생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오늘은 일찍 올게. 완다는 언제나 아이들보다 아침을 늦게 먹었다. 그녀는 그가 끓여준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쌍둥이들의 이마에 입술을 포개고는 지금의 자신처럼 아이들이 점이 될때까지 현관에서 바라보곤 했었다. 눈 앞에 있는 광경에 그 잔상을 덧씌워보았다. 정말 아이들은 빨리 자라는 것 같아,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애롭게 바라보는 그 모습을 그는 너무나도 사랑했다. 구부러진 입가가 가슴속에서 따뜻하게 퍼졌다. 그는 당장에라도 그렇다고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

스쿨버스의 클락션음이다. 그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나서부터 방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이 소리를 들어왔다. 그는 여태껏 소리라는 것을 증오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커다란 클락션음과 함께 제 눈앞에 서 있던 완다의 모습이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현관문 너머로 아이들이 타고 있을 스쿨버스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사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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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그런거면 문제가 있는거야, 헬렌이 요람에서 일어나는 그를 향해 담요를 주며 말했다. 반년에 한번씩 받곤 하던 정기검진일이었다. 이번에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계속해서 완다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관에서의 일 이후로, 자신이 원하지 않을 때에도 완다의 잔상을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대로 완다는 행동하고 말하였고, 그것은 꿈에서까지 이어졌다. 그는 밤에 무의식적으로 꿈을 꾸고 있었다. 예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모든 기능은 정상입니다, 박사님, 어느것 하나 이상이 생긴 적이 없습니다. 아냐, 그동안 너에게 이상이 하나 생겼잖아, 이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그는 뜸을 들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다는 경험이 제 뇌에 이상 징후를 새겨넣었단 말입니까? 헬렌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시고는 반년전에 만났을때까지만 해도 활짝 웃으며 아이들 이야기를 늘어놓던 완다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그렇기에 완다와 그의 사이에서 나온 아이들을 그녀에게도 손자와 같은 존재였다. 언젠가 같이 식사를 하자며 약속을 했었건만, 그녀가 그 아이들을 다시 본 것은 장례식이 열리는 성당에서였다. 관의 안면창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몸-만약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은 시체백에 담겨 관에 들어갔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5명이 무참히 으깨어진 사고현장에서 그녀의 몸만을 수습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반인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경험을 그는 겪었다. 오히려 인간이었다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정도로 끝난게 다행일지도 몰라, 넌 네 문제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잖아,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미쳤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 내가 미쳤다는겁니까. 미안, 말을 잘못했어, 미쳤다기보다는 그냥 뇌가 아픈 거라고 생각해. 헬렌은 그가 흔히 쓰곤하던 고장,이라는 단어로 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을 즐거워하는 동시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이 보는 완다의 환영이 사라지기를 원하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기를 원했다.

어쩌면 네가 완다의 죽음을 애매하게 받아들여서인지도 몰라. 헬렌은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과연 그에게 해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였다. 장례식을 열면 원래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우린 그걸 보고 그 사람이 죽었다고 인정해버려. 죽은 사람의 모습이면 시체 말입니까? , 시체를 봄으로서 그 사람이 죽었다는걸 인정하고, 산 사람들의 세계에서 죽은 사람을 밀어내지, 하지만 완다는 달랐어, 솔직히 말하자면 난 아직도 완다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박사님,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건 마치, 미안해,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게 좋겠어. 그녀는 그가 갖고 왔던 것은 솔직히 고깃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헬렌이나 다른 인간들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무언가를 누군가의 시체라고 곧바로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세포 하나하나마저 완다의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는 장례식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주 쉽게 관안에 있는 것이 완다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게 이유일지도 몰라, 헬렌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아직도 그의 눈에는 완다가 보일까, 그의 시선이 멍하니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헬렌은 그가 보는 완다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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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어둠속에서 울린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게 어느 때인지를 떠올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일어나지 않은 일,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영상. 실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너무나도 놰쇄적이면서도 풍만한 몸이 그의 아래에서 떨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제 위에 반쯤 누워있는 그의 얼굴을 감쌌다. 볼에 닿아오는 미지근한 손가락과 그녀가 자주 네일을 하던 손톱이 그의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시키며 이것은 꿈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 무엇을 말이죠. 그녀가 그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배에 덮게 했다. 따뜻하면서도 몽글한 감촉에 그는 전율을 느꼈다. 얇은 복부너머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 세개의 심장박동이 엇박자를 내며 그의 손으로 전해졌다. 예전에도 이런 기묘한 음악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심장 말고도 작은 심장 두개가 그녀의 뱃속에서 엇박자로 뛰고 있었다. 그때엔 그녀의 배에 귀를 기울이고는 정말이지 즐거운 기분으로 그 소리들을 머릿속에 새기곤 하였다. 알고 있었어. 다시 그녀가 말한다. 무미건조하던 목소리는 이제 자애로운 어머니의 목소리로 변했다. 네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다 알고 있었어, 비전. 박동을 즐기던 그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경악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눈을 감고 평온하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자주 불러주었다는 자장가다. 완다, 무엇을 말이죠. 콧노래가 끊긴다. 그녀의 입가에 달처럼 균형적인 호선이 그려진다.

 

내 뱃속에 무엇을 넣었는지 알고 있어.

 

그는 눈을 뜸과 동시에 주위를 바라보았다. 베드테이블에서 나오는 등만이 넓은 침대의 한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바로 옆자리를 확인해보았다. 그녀가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호선을 그리고 자신을 골몰히 쳐다보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곤 그녀의 몸에는 얇은 캐미솔이 입혀져있다는 것 뿐이다. 길다란 머리카락을 침대에 반쯤 흐트러뜨리고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만다. 하얀색 캐미솔 사이에서 그녀의 풍만한 유방이 비쳐보였다. 그는 재빨리 베드테이블의 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 그리고 협탁위에 있던 작은 상자에 손을 뻗고서는, 옆을 쳐다보지 않은 채 상자속을 확인했다. 상자속에서는 회백색가루가 담긴 유리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 유리병을 품안에 안았다. 아무런 심장고동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당신의 몸에 제 가슴을 포개본다. 다시 침대 옆자리를 바라보니 야살스럽게 자신을 유혹하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은 잔상처럼, 혹은 유령처럼 그의 주위를 배회했다.

 

토마스 막시모프와 윌리엄 막시모프, 그녀가 십여년전에 낳았던 쌍둥이. 그녀의 임신과 출산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모두들 그녀가 임신했다는 말에 경악을 했으며, 출산을 해서 나온게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놀랐다.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과 선명한 갈색 머리카락. 아이 둘의 이목구비는 삼촌을 빼닮아있었으며 다행히도 그들의 몸은 초능력을 행하지 않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말에 완다는 당연히 그가 아니냐며, 자신이 바람을 피겠냐는 식으로 웃으며 넘어갔지만 모두들 그녀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잠정적인 결론으로는 그가 정자은행에서 갖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으므로 그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괴악했다. 게다가 그녀는 정말로 그가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고 그도 아이들의 아버지로 의무를 수행했다.

비전. 평소처럼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우고 돌아오니 알몸에 화려한 스웨터만 입은 그녀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곧있으면 크리스마스잖아. 그녀가 입은 스웨터에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알록달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의 체격에는 맞지 않을 정도로 커서, 허벅지 중간에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그 스웨터는 지금도 창고에 있는 상자안에 있었다. 저 스웨터는 그의 것이다. 그녀는 몇번 핫초코를 마시더니 그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비전. 저 모습이 담겨져있던 때는 벌써 15년도 전이었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치고 그의 방으로 갔다가 처음으로 몸을 섞었을 때였다. 그는 자신의 체온을 일부러 높였고, 그녀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마치 새처럼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의 피부가 닿는 곳마다 홧홧해지는 느낌에 꽤나 놀랐었다. 신음소리,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쾌락에 살짝 찡그리는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달콤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는 육욕을 이해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마음만은 그녀와 닿아있다는 생각에 욕정했다. 파정이라는 단계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절정에 도달할때까지였다. 그는 성기를 그녀에게서 빼내고 그녀와 후희를 즐겼다. 노곤해진 표정으로, 피로에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만큼 그녀가 마녀로 보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그의 스웨터를 입은 건 다음날이었다. 시트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새겨졌고, 그는 손수 시트를 빨았다. 이번에는 스웨터를 찾으러 창고에 다녀와야하나, 싶었는데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텔레비전에서는 록펠러타워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준비하는 과정이 담겨진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도 그녀와 함께 매년 열리는 점등식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쩐지, 그 때의 광경이 꿈으로 나타날 거라고 예지했다.


그날 꿈속에 나온 장면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온통 검은색과 흰색밖에 보이지 않는 설산이었다. 침엽수들은 제 머리를 하늘로 내밀고 있었고, 대원들의 입에서는 한기로 인해 입김이 흘러나왔다. 패딩점퍼를 입은 그녀의 손 끝이 붉었다.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야한다며 손에만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몇번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 온기를 나눠주었다. 그녀는 손난로가 생겼다며 기뻐했고 그는 그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머릿속에다 그 모습을 저장했다. 폭풍은 지나갔는지 합류장소에서는 눈이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이미 쌓인 눈때문에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바닥에 새겨졌다. 하얀 바탕에 구정물묻은 발자국들, 사이즈도 모양도 다른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타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테러단체 소탕, EMP폭탄, 핵물질저장소, 그동안 지겹도록 들어왔던 말들이 다시 한번 나타샤의 입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녀의 총명한 눈은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작전대로 아이언 리전들과 같이 선두대를 맡아줘. 그는 수긍했다. 그 날, 그는 예상외의 거친 반격에 한쪽 팔과 왼쪽 안구를 잃은 채로 귀환했다. 전장에서 제 부위들을 되살릴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얼음이 어는 것처럼 서서히 팔과 안구를 만들어내는 그를 품에 안았다. 네게도 영원이 있을까? 그녀의 손가락이 차갑다 못해 붉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체취를 맡고, 목도리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을 느끼며,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의 맛을 보며 그는 말했다. 내 영원의 한조각을 떼어드리겠습니다. 난 언제 죽을지 몰라. 그녀가 품에서 속삭인다. 그럼 당신의 영원을 저에게 주세요. 내 삶은 너에 비하자면 굉장히 빨리 지나갈거야. 상관없습니다, 비록 찰나가 될지라도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을테니까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하고 축축한 숨을 그의 어깨에 내뱉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이 추위가 아니라 다른 이유때문에 붉어졌음을 짐작했다.

예상외의 낮잠이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잠을 이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꿈에서 깼고, 텔레비전에서는 뺑소니범이 붙잡혔다는 시시한 뉴스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매우 섭섭하게도 그녀의 환영은 보이지 않았다. 뺑소니범의 우락부락한 인상이 화면에 떠올랐다. 낯선 얼굴에 아나운서들의 적대심이 집중된다. 그는 남자 앵커가 뺑소니사고로 인해 일가족이 죽었다는 말을 하는 걸 듣는다. 공정성을 펴야 할 앵커의 미간에는 분노로 인한 주름이 어려 있었다. 비전. 그는 환영이 자신을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로 통하는 입구에서 들려왔는데, 정작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후각세포는 그녀의 환영이 그곳에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윌리엄이 선물한 조잡한 싸구려 향수냄새와 함께 비릿한 철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는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핏자국이 카페트에 번져 이상한 무늬를 자아내고 있었다. 너무 아파. 환청이다, 그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녀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죽었다. 같이 차에 동승해있던 동료가 마지막으로 나눴던 전화대화에 의하면, 그녀는 며칠동안의 철야가 힘들었는지 차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잠에 들었다. 수마에 취해 정신을 잃고있었으니 갑작스레 일어난 사고에 대처할 수 없었다. 철근을 싣고 있던 트럭이 과속에 미끄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너무 아파, 어디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피가 흘러나오는 곳의 근원에는 손목에서 잘린 잔해가 놓여 있었다. 이미 손가락 몇개는 곤죽이 되어버렸고, 그녀의 밝은 피부는 검댕과 상처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고현장에서 그것이 그녀의 파편이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몇시간을 가게에서 고심하여 고른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져있다. 그러니 아마 왼손일 것이다. 구해줘, 비전, 너무 아파. 손가락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말을 한다. 완다, 난 그럴 수 없었어요. 알고 있어,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대화는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끝났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리자 그와 동시에 그의 후각세포에 걸려들던 비릿한 피와 조잡한 싸구려 향수냄새도, 그의 뇌가 인지하던 손의 환영과 환청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다녀왔어요. 쌍둥이들은 멍하니 서 있던 그를 향해 인사했다. 둘은 배가 고프다며, 간식이 있냐고 이야기를 나누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너무 배고파. 토마스가 투덜거리며 냉장고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니 아마 아이스크림을 꺼내서 먹을 것이다. 윌리엄은 아이스크림보다는 케이크를 좋아했다. 애석하게도 그가 사놓은 케이크는 없으니 아마 제 형제와 함께 투닥대며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겠지. 그는 쌍둥이들에게 다녀왔냐는 인사를 하러 부엌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쌍둥이들은 피칸버터맛 아이스크림을 뜨려고 찬장에서 스쿱을 찾고 있었다. 토마스가 위험하게 의자에 올라가 찬장을 뒤지려고 했다. 토마스, 내가 꺼내주겠습니다, 물러서세요. 아버지의 말에 토마스는 순간 그를 향해 뒤돌아섰다. 오른쪽 발이 의자의 쿠션에서 미끄러진다. 그는 그걸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아이에게 달려갔다. ! 윌리엄의 외침과 함께 토마스와 그의 몸이 동시에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쌍둥이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전까지 그와 아들의 몸을 감싸던 붉은 실타래같은 빛들이 서서히 사라져가는걸 보았다. 빌리, 방금 그거 뭐야, 그거 어머니의 마법이잖아. 몰라, 난 몰라, 네가 넘어진다고 생각해서 손을 뻗었는데, 그랬는데. 윌리엄은 몇번 손가락을 구부려댔지만 그저 허공에 손놀림을 하는 것 뿐이었다. 그는 재빨리 당황해하며 울먹거리고 있는 아들을 향해 다가가 품에 안았다. 이게 뭐에요, 아버지, 내가 왜 마법을 쓰는거에요? 괜찮습니다, 윌리엄,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윌리엄의 손가락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당신이 완다의 자식이라는 증거에요, 그러니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버지, 왜 나만 그런거죠? 윌리엄은 그의 가슴에 눈물을 부비고는 흐느꼈다. 토마스의 눈에서도 이유모를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아들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난 네가 나에게 뭘 심었는지 알고 있어. 뒷좌석에서 쌍둥이들이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하고나자 조수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다. 풍만한 가슴 아래로 배가 커다랗게 부풀어있었다. 양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서는 힘겹게 안전벨트를 맨다. 한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카락, 레이스로 짠 가디건. 출산예정일에 차에 올라탔던 모습 그대로였다. 빌리는 날 닮았지, 그래서 그 애는 마법을 쓸 수 있는거야, 그러면 톰은, 그 아이는 과연 누구를 닮은걸까?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뒷좌석에서는 토마스가 윌리엄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있었다. 은색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엷은 회색 머리카락, 다리가 빨라 육상대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다 알고 있어, 비전, 내가 궁금한건 왜 그랬냐는거야. 그는 대답대신 헬렌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헬렌은 아직까지 뉴욕에 남아있었다. 갑작스레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아이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헬렌은 직감적으로 상황을 알아챘는지 어서 오라는 말만 했다. 시동을 켜고 어벤져스 타워로 가는 내내, 옆자리에 앉은 환영은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결국 톰도 능력을 발현하지 않을까, 그럼 모두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챌거야. 상상조차 보류하고 있었던 일들, 토마스가 지금보다도 더, 날아가는 총알이라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빨라지는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원하지 않았다. 만약 모두가 알아차린다면 손가락질 받는건 누구일까, 그는 생각했다. 연인에게 쌍둥이형제의 씨앗을 집어넣은 자신, 아무것도 모르고 아이를 낳아버렸던 그녀, 아니면 의도치않은 생물학적 부모를 가지게 된 쌍둥이? 당신은 쌍둥이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나도 당신이 자식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당신이 자식을 가지면 그 자식으로 인해 나는 당신의 조각을 더 끌고 갈 수 있게 되니까요. 그건 너의 욕심일 뿐이야, 결국 일은 터져버렸잖아, 넌 저 아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야. 토마스와 윌리엄은 내 아이들입니다. 아냐, 저 애들은 내 아이들이야, 넌 저 아이들에게 유전자 하나 물려주지 못했어. 누구야? 나지막히 내뱉은 한마디와 함께 그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방금 전부터 혼잣말을 내뱉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던 쌍둥이들의 눈가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넌 완다가 아니야,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뭔가 착각하고 있는거 아냐, 처음부터 완다 막시모프는 없었어.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녀의 환영의 눈초리가 내려간다. 서글픈, 먼 무언가를 바라보는 모양새, 마치 피에트로의 무덤을 보고 있는 표정이다. 완다는 이미 죽어버렸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건 너야.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마저 난 확인했어, 그녀의 살점 하나하나가 과거에 그녀를 이루고 있었어. , 나의 사랑스러운 비전.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그는결국 분노를 터뜨렸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넌 나의 죽음을 너무 애매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빨리 와봐, 빨리 와 비전. 그녀는 급히 그를 불렀다. 흔들의자에 앉아 햇빛을 쬐며 뜨개질을 하고 있는, 마치 책에서나 나올것같은 이상적인 풍경이다. 그녀는 급히 남편의 손을 붙잡고는 제 배에 닿게 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톡톡, 하며 무언가 움직이는게 느껴졌다. 느껴져, 아이들이 발을 차고 있어, 축구라도 하면서 노는가봐.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 번져있었다. 그의 입가에도 사랑스러움에 웃음이 어린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불룩 튀어나온 배에 귀를 갖다대었다. 심장박동 세개가 하모니를 자아내며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쿵쿵대는 박동음 하나가 음표가 되어 그의 머릿속에 날아들었다. 비교적 낮고 느린 박자와 빠르고 높은 박자 둘. 그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쥐고서는 조금 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행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영원을 보장해주는 음악소리에 다른 쪽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춰보기도 한다. 여기에 네 박자도 들어갔으면 좋았을텐데. 그녀가 안타까워하며 말한다. 그럼 너는 사중창을 듣게 되는거야. 지휘자도 꽤 괜찮아요. 가끔씩 너에게 심장이 달려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해. 제가 안드로이드라는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와 같이 있을때마다 나만 두근거리는게 어딘지 억울해. 내 심장은 항상 같은 속도로 당신과 뛰고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로 말하지 말고, 정말로 난 네 심장소리가 듣고싶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정말로 내 심장은 당신과 같이 뛰고 있습니다, 당신의 심장이 내 심장이 되는거죠. 정말로 스타크에게서 배운걸까, 이런 능청스러운건.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이들도 즐거웠는지 배에 발을 차대며 즐겁게 춤을 췄다.

쌍둥이들의 검사가 끝났는지 헬렌은 어깨를 돌리며, 방금 전 잠에서 깬 그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몸에 큰 이상은 없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예의를 주시할 수 밖에 없다, 라는 상투적인 말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던건 쌍둥이의 몸상태가 아니었다. 쌍둥이는 헬렌을 보자마자 아버지가 아픈 것 같다고, 어서 치료해달라고 헬렌에게 빌었던 것이다. 헬렌은 아이들은 현재 쉬고 있다며, 이제 네 차례라고 말하였다. 환영이 말까지 해? 그건 단순히 환청일 뿐입니다. 그런 환청에 제대로 대화해주는 너는? 오늘 일은 단지 제가, 감정적이 되어서 일어난겁니다, 다시는 이런 일은 없겠죠. 애들이 네가 아이들의 아빠다, 라는 소리를 했다고 했어, 우린 항상 아이들의 아빠가 누구인지 궁금해했지만 완다가 말을 못꺼내게 했지, 심지어 아이들의 피검사도 하지 못하게 했어, 하지만 난 오늘 애들의 피를 뽑아서 유전자검사를 했어. 헬렌, 그것은 당신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톰이 육상대회에 나간다 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어, 하지만 사실 얘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알아차릴 수도 있었어, 비전, 넌 완다의 환청과 대화를 한거지, 완다는 끝까지 아이들의 아버지는 너라고 주장했어, 하지만 사실은 그녀도 생물학적 아버지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커. 그가 경악한 눈으로 헬렌을 쳐다보았다. 헬렌의 건너편에서 환자복을 입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다는 초능력이 유전될 수 있느냐고 물었지, 나는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라고 했어, 그러자 그녀는 쌍둥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했어. 평소부터 그녀는 쌍둥이를 갖고싶어 했다. 피에트로와 함께 지냈던 세월들을 손꼽으며, 쌍둥이가 태어나면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사랑하고 싶다고도 했었다. 완다는 네가 완다에게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아버지는 너라고 주장했었어. 그는 고개를 숙였다. 헬렌의 말 하나하나가 그의 이제는 사라져버린 심장을 으깨는 것 같았다. 나도 내 영원의 조각을 줄게. 헬렌 너머로 서있던 환영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네 인생도 그다지 느리게는 지나가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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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화창한 6월에 열렸다. 주노의 은총 아래에서 부부서약을 한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마치고는 그들의 신혼집에서 단둘이 누워있었다. 아직 태양도 지지 않았건만 벌거벗은 상태로, 얇은 시트만을 두른 채로 석양빛을 받으며 간간이 키스를 나누었다. 쪽쪽, 거리는 살짝은 부끄러운 소리가 그녀의 배에서 나자 그녀는 웃음을 참았다. 시트자락이 가슴을 간지럽힌다고 그곳을 긁자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긁어 살짝 붉어진 데로 올라갔다. 가슴에서 뾰족하게 솟아오른 곳에 입술을 갖다 대니 다시 간지럽다며 작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렌즈로 이루어진 눈이 행복한 기운을 감추지도 못하고 그녀의 화장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달뜬, 하지만 역시나 행복해하는 표정이었다. 1000년은 더 넘게 살겠지, 지금 같은 순간은 아주 찰나로 흘러갈거야. 아뇨, 완다, 난 이 시간이 되도록이면 느리게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둘은 서로의 손에 깍지를 쥐었다. 그렇게 느리게, 아주 느린 시간을 살다가 언젠가 이별할 때를 상상한다. 어쩌면 그녀가 임무를 맡다가 적의 공격에 당할지도 모른다. 혹은 병에 걸려서, 도저히 나을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병원 침대속에서 모두의 인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주 늙고 또 늙어서 지금처럼 그의 손을 붙잡고 마치 잠들듯이, 피에트로가 먼저 떠난 영원의 나라로 떠날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이 사람의 평생을 함께 있고 싶다. 이 사람의 마지막까지 그는 그 곁을 지키고 싶었다. 사랑해, 비전. 그녀가 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며 작게 속삭였다. 나도 사랑합니다, 완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대었다. 미친 듯이 자맥질하는 심장소리가 그의 뇌를 지나 가슴을 계속해서 같은 속도로 울렸다.

초여름의 따뜻한 공기는 눈을 뜨자마자 12월의 서늘한 공기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스탠드의 불을 켜지도 않고서 협탁 위에 있던 나무상자를 가져왔다. 회백색의 가루가 담긴 작은 유리병의 표면은 매우 서늘했다. 그렇게나 따뜻하던 인간이, 그렇게나 뜨거운 불길을 받아 이렇게나 차가워지는 것을 그는 아직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유리병을 품에 안고 다시 모로 누웠다. 유리병에서는 아무런 온기도 심장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예전에는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자신이 안아줄 때마다 빠르게 뛰곤 했었다. 그때마다 자신의 심장도 똑같이 뛰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지금이야말로 그녀와 자신의 시간이, 심장이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오래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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