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알렉스레니 _ 너의 어린, 09 본문
크리스 돈-루치아노는 지금 헬코코아를 끓이고 있다. 그는 주방에서 무언가 마실 것을 찾아 헤매다, 멸균포장된 우유와 아직 뜯지도 않아서 상자채로 있는 코코아를 발견했다. 다행히도 유통기한은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밀크팬에 우유를 붓다가 조심스레 거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성이 오갔지만 이제는 모두 진정했는지 자그맣게 대화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다시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그는 이 별장에 들어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버지들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고, 그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방은 그야말로 먼지투성이였고, 똑같이 그 방에 있던 시민들도 먼지와 소음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늑대인간 아이 둘은 서로를 껴안고 울고 있었으며, 레널드 헬하우스는 검은 고양이를 부축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늑대인간인 아버지들은 방안에서 아주 미약하게 풍기는 피냄새를 맡고는 적잖이 흥분했었다. 그들은 우선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들이 어디 다친 곳은 없나, 하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이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았다는걸 깨닫고나서야 너무한다고 소리치는 알렉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헬코코아 잔들을 들고 거실로 갔을 때엔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새 울었는지 눈이 벌개진 아이들은 각자의 아버지 품에 안겨있었고, 레널드 헬하우스는 매우 고심하는 표정으로 검은 고양이의 팔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통증을 호소하며 꼬리를 바닥에 파닥파닥 치다가 다시 몸을 수그렸다. 사실 제랄드와 애머릿이 맡은 피냄새는 잘못 맡은 것이 아니었다. 그 미약하지만 비릿한 냄새는, 각목으로 내리쳤던 꼬리에서 난 것이었다. 알렉스는 괜찮다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상당히 아팠는지 꼬리가 바닥에 닿을라치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꼬리의 모양이 멀쩡한걸 보면 골절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저기... 코코아 갖고 왔는데요..”
크리스는 조심스레 저마다 짝을 짓고 가족들에게 안겨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그는 이 광경이 너무나도 익숙했지만 동시에 낯설기도 했다. 그도 과거에는 저렇게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다닐 때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도 그 당시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최고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하는 일들을 알게되고 나서는, 그에게 그 기억은 후회만을 불러일으키는 씁쓸한 조각으로 남아버리고 말았다.
소파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코코아를 올려놓기가 무섭게 시민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는 잔을 가져갔다. 레널드는 알렉스에게 잔을 건네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고맙다고만 말하고서는 베란다가 있을 정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는 안절부절해가며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기를 몇분이 지났을까, 알렉스는 다시 한번 크리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지 꼬리와 팔이 쓰렸지만, 그의 일을 생각하면, 그리고 몇 달전에 당했던 그 사건을 생각하면 그다지 아픈 것도 아니었다. 알렉스가 기지개를 펴는 것을 보며 크리스가 말했다.
“...저기, 조금 더 쉬시는게...”
“아, 괜찮아요, 괜찮아! 아프긴 한데 못움직일 정도는 아니니까. 애들 힘이 거기서 거기지, 뭐 늑대인간이라 그런지 세긴 했지만.”
동생과 나란히 앉아 코코아를 마시는 늑대인간을 쏘아보자, 그의 아버지가 또 알렉스를 쏘아보았다. 둘의 눈싸움은 사태를 알아챈 헨리가 사과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야?”
알렉스는 애머릿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애머릿은 붉어진 눈을 간신히 뜨고는 아주 조금씩 잔에 입을 대고 있었다. 그는 수면부족과 감기기운, 긴장이 풀린것까지 겹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는 그나마 마법으로 먼지를 털어낸 주변을 둘러보고는 미간을 구겼다.
“뭘?”
“오늘 돌아갈 수 있겠어? 보니까 둘이 싸운 것 같은데 이참에 화해해버려. 이혼은 했다지만 친구로는 지낼 수 있잖아?”
“...레널드씨에게 아무것도 못 들었어?”
알렉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지옥개는 공무상의 일을 쉽사리 발설할, 입이 싼 지옥개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겁다면 무겁겠지, 미묘하게 거리를 두는 둘의 분위기를 몰랐다면 둘이 싸우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역시 단순히 애들이 가출한게 아니네. 걱정마, 아저씨는 내가 졸라도 안가르쳐주니까.”
“그럼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제머슨이 말했다.
“애들 앞에서 얘기할만한 거리가 아닌 건 알아. 그리고 아저씨가 법정까진 안갔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도.”
알렉스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제법 이 일이 흥미로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크리스는 이 분위기가 매우 이상했다. 마치 곧 터져버릴것만 같으면서도 아이들의 눈빛으로 강제로 눌러놓은 것 같은,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아마 아저씨도 말해주진 않을테지만, 만약 아이들이 얽혀있는거라면 충고 하나만 할게, J, P. 애들한테 숨기는 건 좋지 않아, 얽혀있는 거라면 아이들한테도 의논해. 부모 마음대로 애들의 일을 정하지마.”
마치 빈정거리는 것 같이 게슴츠레 눈을 뜬다. 크리스는 상당히 낯선 알렉스의 모습에 더더욱 당황했다. 어쩌면 레널드가 봤더라도 당황할만한 모습이었다. 그 알렉스가, 그 경박한 검은 고양이가 남에게 충고를 한다니. 애머릿과 제머슨도 그 말에 잠시 넋을 잃다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헨리는 결의에 찬 눈으로 제머슨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고, 소송의 당사자인 스콧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도 하지 못한 채, 형만을 바라보았다.
“얘기해주세요, 아빠, 아버지.”
아버지, 라는 말에 애머릿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혼하고나서 헨리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걸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제머슨이 답을 머뭇거리자 이번에는 스콧이 나섰다.
“응? 얘기해줘요, 아빠. 왜 싸우는거에요? 설마 나때문이에요?”
제머슨과 애머릿은 시선을 피했다. 둘은 차마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스콧은 아예 애머릿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무슨 일이냐고, 빨리 말해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만약 자신 때문에 싸우는 거라면,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애를 쓰며 말했다.
“그건 네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애머릿은 난처해하면서도 나지막히 아이에게 말했지만, 아이는 그 대답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빨리 무슨 일이냐고 아버지들을 향해 물었다. 둘은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이에게 너를 사이에 두고, 누가 널 기를것인가에 대해 다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상황을 바라보는 크리스도 안절부절해가며 과연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는 이윽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과 같이 헨리도 무슨 일이냐고, 빨리 실토하라는 듯 제 아버지를 재촉했다.
그런 아우성들을 멈춘 것은 갑작스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그 바람속에서 담배냄새를 찾을 수 있었다. 레널드가 가끔씩 피곤 하던 담배다. 레널드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조르고 있던 스콧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슨 상황인지를 알아챘는지, 스콧이 자신을 바라보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스콧군, 스콧군은 두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나요?”
“잠깐, 이보쇼, 애한테 지금 무슨 소리를-”
제머슨이 날선 목소리로 말하다 막혔다.
“어차피 법원으로 가도 이런 얘기가 나올겁니다. 미리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스콧군,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묻고 있는겁니다. 스콧군, 만약 두 아버지중 한 시민을 고를 수 있다면 어디로 갈거죠?”
스콧은 당황한 눈으로 레널드를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두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황한 것은 제머슨과 애머릿도 마찬가지였다. 저절로 애머릿의 손이 아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지금요?”
“..눈치도 보지 말고, 그냥 스콧군이 좋을대로 하면 됩니다.”
레널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스콧도 결국은 결심한 듯, 다시 두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헨리는 당장에라도 일어날 것 같은 제머슨을 붙잡고 있었고, 알렉스는 상당히 흥미로운지 레널드의 곁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제 아버지의 옷자락을 더욱 힘주어 붙잡았다. 파란 눈동자가 커다랗게 떨렸고, 모두의 시선이 스콧을 향해 집중했다. 아이는 무언가를 고심히 생각하다 레널드와 눈을 마주치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난...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어요. 아빠가 싫은건 아니에요, 하지만 큰형도 없어서 아버지 곁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제머슨의 눈이 가느다랗게 떨린다.
“..하지만 스콧, 네 아버진 네 곁에 자주 없잖니. 외롭진 않겠어?”
“원래부터 아버진 집에 잘 없었는걸요. 외롭기는 했지만 롭이 있어서 괜찮았어요. 작은 형이랑도 통화하면서 지냈었고요. 그리고 아버진 얼굴은 잘 못봐도, 가끔씩 전화통화도 해주는걸요.”
그 때,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어떤 연락을 받았던가. 스콧은 제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그가 자식에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울먹거리면서도 제머슨을 향해 아빠도 많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역시 아버지를 혼자 둘 수는 없노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애머릿의 눈가에도 눈물이 어렸다. 그는 조심스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서는 그동안 외롭게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제머슨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착잡한 눈이었다.
“...이럼 된거 아냐?”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레널드를 보며 말했다. 레널드는 그 말에 자신을 물 아래로 끌어내렸던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크리스와 알렉스를 데리고는, 부디 가족만이 있을 수 있게 거실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폴 제머슨은 일단은 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스콧이 원하지 않는다하니 억지로 데려올 생각은 없으며, 다만 예의주시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에 남겼다. 그리고 스콧이 자신의 털로 만든 목도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꽤나 안타까워하며, 다시 털을 모아 목도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레널드가 거기까지 말하고나서야 알렉스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 깨달았다. 그는 그나마 마법으로 깨끗하게 청소한 싱글 침대에 앉아있었다. 레널드는 바닥에 이불을 깔아놓고는 제 털을 말리고 있었다. 라디에이터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방에는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잡아먹혀서 결국 자고 가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송이라니, 그게 가능하긴 해? 인간계에서야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는 들었지만, 난 처음인데 그런거. 게다가 P랑 J라고! 둘이 얼마나 서로 죽고 못살았는데...!”
“아주 소수지만 사례는 있었어, 전부 다 친아버지의 양육권을 인정했었고. 하지만 문제는 이게 언론으로 퍼져나가면 골치아팠단거지.”
“...그건 아저씨네 아버지의 생각인거지? 참, 왜 그렇게 세간의 눈을 신경쓰는거야?”
그 말에 수건으로 귀를 닦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레널드는 몇 번 숨을 고르다가 다시 평소처럼 물기를 닦아냈다.
“글쎄...”
레널드는 샤워가운 사이에서 보이는 제 하얀 가슴털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차에, 그의 삼촌들이 그가 태어났을 때의 일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네가 태어나고나서 형은 무언가를 고민했었다고, 너의 하얀털을 보고 탄식을 했었다고. 물론 그들이 그런 말을 했든 안했든 그는 어차피 회사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세간의 눈에 예민한 것과 그 때의 일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것들을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을까. 아버지의 심경이 어쨌든 간에, 이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크리스의 치유마법 덕분에 꼬리는 급한 상황은 면했다. 하얀 붕대가 꼬리의 절반을 감싸고 있었는데, 이제는 통증도 적어졌는지 평소처럼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 여기서 자도 되는거야? 피곤한걸로 치면 아저씨가 더 피곤할텐데, 며칠사이 힘든 일밖에 없었잖아. 그냥 바꾸면 안돼?”
그러자 레널드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안돼, 넌 오늘 다쳤잖아. 그리고 피곤한걸로 치면 너도 같이 밤을 샌거니까 피차 마찬가지야.”
자신은 조금이나마 눈을 붙였지만, 제 앞에서 이불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검은 고양이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밤을 새고 일을 나가기까지 했으니 더 피곤할 터였다. 하지만 알렉스는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더 쌩쌩하다며 침대로 레널드를 올려보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널드는 끝내 단호하게 호의를 거절했다.
“치잇...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여긴 난방도 제대로 안되는 것 같던데 추위에 벌벌 떨라구. 난 분명히 바꾸자고 했어, 말 바꾸긴 없는거야.”
“...그래.”
레널드는 그렇게 대답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알렉스는 침대에 모로 누워서 레널드의 벗은 몸을 찬찬히 감상했다. 짧은, 검고 흰 털이 가득한 몸은 세간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다부졌다. 군더더기없지만 너무 얇지도 않은 몸에 작은 꼬리가 달려있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가슴팍에서 배에까지 이르는 하얀 털은 회색기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고, 마치 양말이라도 신은 것처럼 발가락부위만 하얬다. 알렉스는 레널드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가 레널드 헬하우스라는 시민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그것을 자각하기 전에도 몸이 괜찮다는 생각은 하곤 했었다.
마법으로 불러낸 잠옷을 입고나서야 레널드는 바닥에 깔린 이불에 누울 수 있었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돌아갈 수 있고, 또 마음만 먹는다면야 근처의 별장을 빌려서 따로 잘 수도 있었다. 이렇게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방에, 일부러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것은 단지 알렉스와 같은 방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춥지 않아? 아저씨 피곤한데 감기라도 걸리지 않겠어?”
“..괜찮다니까. 불이나 꺼.”
그 말에 알렉스는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널드의 머리를 지나 스위치를 누르자, 이내 그들이 있던 방은 깊은 어두움에 잠겼다. 푸른 이빨모양 달과 가로등불빛만이 창문 너머로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알렉스는 다시 침대에 앉아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밤을 새었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제 앞에 누워있는 지옥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말 J랑 P가 헤어질 줄은 몰랐어. 둘이 결혼했을 때엔 정말로 대단했거든. 어땠는지 알아? J랑 옛날에 사귀었던 시민들까지 다 모아서 결혼식을 했었어.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예전에도 결혼식은 하기 힘들었잖아. 그런데 둘 다 턱시도까지 차려입었던 거 있지? 나는 그때 가진 못했는데 아무튼 대단했다고 하더라고.”
“..정말 대단하네.”
“그렇지? 게다가 J는 P 때문에 알콜중독도 치료했잖아. 워낙 P 때문에 마음고생해서 결국 잘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J도 인기는 많았으니까.”
레널드는 턱시도를 입으며 환하게 웃는 애머릿과 제머슨을 떠올린다. 말이 결혼이지, 법에서는 가족결합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지극히 인간계의 말을 써서 함께하기로 했지만 결국 둘의 끝은 이별이었다. 이별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레널드가 변호사일을 하면서 여러차례 만났던 유성애자들 중 적잖은 수가 이별을 경험했고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우정보다는 깊은, 그리고 가족애와는 다른 종류의 사랑은 생각보다 깨지기 쉽다고 그들은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 때 아저씨가 J와 같이 있던거구나. 왜 그 회사건물에서 마주쳤을 때 말야.”
“..역시 넘어가진 않았구나.”
“그냥...”
알렉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상하게도 목에서 무언가가 걸린 것 같았다. 알렉스는 순간 튀어나오려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과연 그 말을 해도 될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냥 뭐?”
레널드의 목소리는 반쯤 잠겨있었다. 알렉스는 보는 시민도 없는데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신경이 쓰였다고... 알잖아, J는 꽤 인기가 많아. 왠만한 종족도 가리지 않았고, 그리고 저번에도 잡지에 나왔잖아. 지옥개를 꼬셨다고... 알아, 아저씨가 아니란거 나도 알고 있어.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걸 어떻게 해. 게다가 지금은 싱글이잖아? 혹시라도 나선다면 알아? 아저씨도 넘어갈지도?”
“푸훗.”
갑작스레 터져나온 웃음소리에 알렉스는 아연이 실색했다. 자신으로서는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었건만, 레널드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몸을 뒤척거렸다. 무엇이 저리도 웃기다는걸까, 그는 뚱한 표정으로 아직도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지옥개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어린 것이 정말로 웃긴 모양이었다.
“그 잡지는 나도 봤어. 애머릿씨는 칭찬이라고 좋아하던걸.”
“역시 J답네.”
비꼬는 말투에 다시 레널드의 입가가 올라갔다. 이렇게 대놓고 보이는 질투의 기미가, 그는 생각보다는 싫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알렉스의 얼굴을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지금 누워있을까 아니면 앉아있는걸까, 과연 꼬리는 어떤 상태일까. 어쩌면 썩은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다.
“정말이라니까. 옛날에 P를 만나기 전까진 J가 얼마나 다양한 종족의 시민들을 꼬셨는지 알아? 심지어는 도깨비까지 꼬셨다니까? 얼굴이 붉은 놈이었는데, 자기는 결혼반지에서 태어났다고 청혼까지 했었어. 물론 J는 애가 있다고 거절했었지만, 꽤나 대단했다고.”
“그리고 거기에 검은 고양이도 있었고?”
순간 알렉스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레널드가 말한 ‘검은 고양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수긍했다.
“..걱정마, 난 그런 일은 없을테니까.”
“뭐.. 아저씨가 그렇다면야 그런거지. 그래도 그 때...그 비꼰건 미안해, 그러려고 한건 아니었어.”
“그래, 그건 어쩔 수 없었어.”
그는 검은 고양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검은 고양이에게 자신의 일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나마 둘이 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그는 알렉스가 그를 향해 반쯤 조롱했을 때를 떠올렸다. 스콧은 불안해하고 있었고, 애머릿은 독감에 시달려 괴로워하고 있었다. 애머릿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추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속에 빠져 허우적댔던-. 갑작스레 온 몸에 오한이 들어 그는 더욱 더 이불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불에서는 먼지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건 마치 알렉스의 방을 처음으로 방문했을때의 냄새와도 비슷했다. 드디어 몸이 피곤하다고 자각했는지, 퀘퀘한 냄새 사이에서 몸은 점점 나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가 저렇게 걱정하는 꼴을 보니, 무어라 말을 해야할 것도 같았다. 그는 감기려는 눈을 뜨곤 조그맣게 말했다.
“...걱정하지마. 내가 사랑하는 시민은 너뿐이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거야.”
“그렇지? 그런 일은 없을.....!”
순간 알렉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방금 전, 레널드가 내뱉은 그 단어가 갑작스레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어버버, 하는 소리가 알렉스의 입에서 계속해서 튀어나오고나서야, 레널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순간 온 몸의 피가 식었다가 빠른 기세로 달아올랐다. 심장소리가 귓가에서 쿵쿵거리며 자신이 흥분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더욱 이불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저... 저기 레너드씨? 저기요?”
알렉스의 목소리는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바닥에 누워있는 지옥개에게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게 더더욱 그를 피말리게 했다. 그는 다시 레널드에게 말을 걸었다.
“응? 아저씨? 아까 한 말 있잖아... 그러니까.... 그게...”
머릿속이 다시 그 단어에 점령당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무슨 단어를 꺼내 그것을 조합하고 다시 레널드에게 돌려줘야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조심스레 이불더미를 붙잡고는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결국은 입을 다물었다.
“...샌디?”
레널드는 조심스레 이불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울려야 할,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이불 밖으로 얼굴만을 꺼내 알렉스가 있을 쪽을 보았다.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한껏 숙이고는 마른 세수를 하고 있었는데,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통해 보이는 귀는 빨갛다 못해 검붉어져있었다.
“...샌디.”
말이 터져나오자마자 알렉스는 급히 이불을 뒤집어쓰곤 침대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렇게나 부끄러운걸까, 레널드는 이불속에서 꿈틀거리는 형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나마 바깥으로 튀어나온 꼬리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미소를 지었다.
“잘 자.”
의외로 어쩌다 한 고백에 당황한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레널드는 적어도 알렉스는 매우 쿨하게 받아줄거라 생각했건만, 저렇게 당황해하는걸 보면 알렉스는 짐작도 못한 모양이었다.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꼬리만이 살랑살랑 흔들릴 뿐이어서, 레널드로서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몇 번 그 흔들리는, 반은 붕대로 감겨있는 꼬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후회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너무 늦게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는 그 단어가 그렇게나 뜨거운 단어일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뜨거운 감정이 바깥으로 불연 듯 튀어나왔을때엔 오히려 상쾌한 해방감마저 느꼈다. 그 때, 알렉스가 자기에게 고백하려고 했을 때에 그렇게 말린 것이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꼬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전보다는 느려졌지만 그래도 8자를 그리며 흔들리고 있다. 아버지는 절대로 이런걸 내게 줄 수 없어. 그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기... 아저씨.”
평소라면 절대로 들을 수 없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꼬리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침대 바닥에 고정되었다.
“..역시 춥지 않아? 그러니까 여기 불도 잘 안오니까...."
마치 중대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다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내려갈까, 아님 아저씨가 올라올래?”
아마 지금쯤 알렉스는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바닥은 추워.”
이불에서 벗어나자 차가운 공기에 오한이 들었다. 조심스레 이불 속으로 손을 갖다 넣자 검은 고양이의 등이 움찔거리는 느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치 갓 태어난 아이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잔뜩 둥글게 만 어깨에 팔을 두른다. 그러자 알렉스도 재빨리 몸을 돌려, 이불속으로 사랑하는 이를 끌어당겼다.
턱을 서로의 한쪽 어깨에 두고, 맹렬히 뛰는 맥박을 느끼며 둘은 서로의 몸을 얽었다.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듯 팔은 서로의 등을 어루만졌고,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이 서로의 다리를 얽었다. 마치 실타래처럼, 서로에게서 절대로 풀리지 않으려고. 레널드는 제 심장이 뛰는 소리와 함께 알렉스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어긋나는 것을 들으며 더욱 더 팔에 힘을 주었다. 텅 비어있던 무언가가 따뜻한, 아니 그것보다는 뜨겁고 쿵쿵 뛰는 무언가로 채워지는 느낌에 전율했다. 이불 안에서는 알렉스의 체취와 함께 바디클렌져 냄새가 났다. 그는 그 향기를 즐기며, 저도 모르게 볼을 알렉스의 목에 비볐다. 까칠거리는 털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꼬리가 맹렬히 이불을 펑펑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좋은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순간 그의 머릿속에선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던 스콧과 헨리가 떠올랐다. 그렇게나 바랐던 온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옥죄는 기분마저도 그에게는 희열이었다. 알렉스의 손이 자신의 어깨뼈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입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날 정도였다. 얇은 살갗에 자신의 모든 피가 집중된 것만 같았다. 그러면 다시 알렉스의 목에서는 더더욱 빨리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 뽀뽀해도 돼?”
조심스레 알렉스가 레널드를 밀어내며 말했다. 이불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알렉스의 뜨거우면서도 축축한 숨이 느껴졌다. 그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코 끝에 축축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났다. 알렉스의 하얀 코가-물론 보이지는 않지만- 살짝 비비는 느낌은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코 끝에서 새어나오는 숨결이 참을 수 없었다. 이미 이불 속은 뜨거운 숨결로 가득했고, 더 이상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했다. 하지만 그런 것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알렉스는 더더욱 코를 비벼댔다. 코의 결 하나하나까지 느껴질때에서야 레널드는 알렉스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간지러워.”
그 말에 알렉스의 꼬리가 레널드의 다리에 감겨왔다. 바지의 천과 붕대가 마찰되는 소리에 레널드는 알렉스의 품에 파고들어갔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했지만, 이상하게도 너무나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귓가에 알렉스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날 밤처럼, 레널드는 정수리를 알렉스의 하얀 가슴팍에 비비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크리스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는-누가 하라고 시킨것도 아니면서- 레널드와 알렉스를 깨우러 방에 온, 지금같은 상황 말이다. 어느새 스콧이 옆에 달라붙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의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일단 노크를 하고 대답이 없어 문을 열었더니, 침대에 두 시민이 서로의 몸을 마치 넝쿨처럼 얽혀 자고 있는 광경 말이다. 마치 보물상자를 몰래 열어본 아이처럼, 크리스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하얀 시트 사이에서 두 시민의 발이 튀어나와 있었고, 서로의 몸을 꼭 껴안고 자는 그 모습은 어린 형제끼리 안고 자는 모습과 비슷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더 위험했다. 크리스는 반사적으로 봐서는 안될 것을 봐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은 스콧도 마찬가지였다. 스콧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마치 아침메뉴로는 어느 것이 더 좋다는 것처럼 닫힌 문을 보며 말했다.
“큰형도 그랬어요. 아버지네 침실에는 허락없이 들어가면 안된다고요. 그렇지만 가끔씩 저렇게 껴안고 다녔는걸요.”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털어놓았다. 저렇게 서로를 품에 안고 자는 일은 예사였다. 물론 그걸 듣는 크리스는 더더욱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 이건... 비밀로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침대에서 검은 고양일 껴안고 자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레널드 헬하우스다. 만약 이 광경을 남들에게 말해버린다면 소문은 곧 전 도시에 퍼지고 말 것이었다. 그 말에 스콧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이런 쪽으로 교육을 잘 받았는지, 당연하다고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형도 이런거 밖에서 내색하면 안된다고 그랬거든요.”
아이는 환한, 그러나 살짝은 씁쓸한 미소를 보이고는 계단으로 뛰어내려갔다. 크리스는 다시 한번 그들이 자고 있을 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얕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스콧의 뒤를 따랐다.
오늘은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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