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리퀘스트] 레오하양이 _ 부어오른 손 본문

기타/DOOMSDAY CITY

리퀘스트] 레오하양이 _ 부어오른 손

rabbitvaseline 2017. 3. 30. 20:48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빛이여, 내가 그대를 보는 것도 지금의 마지막이 되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서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음이라.

 

 

 

천천히 돌아가는 원형의 판 위에는 색색깔의 플라스틱 마물들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물들 위에는 주민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앉아서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쾌한 음악소리, 아이들이 시끄럽게 웃어대는 소리. 광장 한복판에 있던 스피커에선 조금 더 차분한 음악이 흐르다가 이내 미아를 찾는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날은 눈이 부실정도로 따사로웠다.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아이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마물을 즐기면서도 자신을 두려움과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불편해했다. 또래보다도 크고 하얀 몸집을 자랑하는 아이는 애석하게도 이런 시선에 꽤나 익숙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간혹 어린 아이가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보며 미안하다고 사과할 때엔 매번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조금 나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펜스에 반쯤 몸을 기대고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식과는 달리 하얀 털이라고는 한 터럭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평소 일할 때 입던 정장을 입고는-아이의 요청이었다.-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가 탄 마물이 한바퀴를 돌아올 때마다 셔터를 눌렀다. 그의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포즈로 사진기를 든 아버지들이 나란히 펜스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는데, 그들은 자식들이 손을 흔들 때마다 사진을 찍다가말고 손을 들었다.

아들과 같이 오셨나봅니다.”

, 뭐 그런 셈이죠.”

아버지는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악마를 향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는 이렇게 천천히 돌아가는 놀이기구보다는, 옆에서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롤러코스터 쪽이 더 취향이었다. 음악은 점점 잦아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플라스틱 마물의 움직임도 느려졌다. 이윽고 출구로 시민들이 걸어나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악마는, 이제야 갓 초등학교에 들어갈 법한 아이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 아버지는 문득 차가운 손이 자신의 손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검은 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하얀 손가락이 조심스레 손가락 두어개만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이 수줍은 행동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었냐?”

“....”

그야 재미있는 게 당연하다. 아버지는 그가 처음으로 회전마물을 탔을 때를 떠올렸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소풍을 갔을 때, 그의 아버지-그러니까 아이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을 위해 하루 동안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렸더랬다. 대략 200여명의 학우들밖에 없던 놀이공원은 상당히 을씨년스러웠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탔던 놀이기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음악,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빙빙 돌아갔고 얕게 부는 바람이 짧은 털을 흩뜨렸다. 처음으로 맛보았던 별세계가 그의 아들 앞에서 펼쳐졌을 터였다.

안타깝게도 그 별들은 곧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뭇 흐뭇해했다. 자식 또한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지겹고 온순한 놀이기구보다는 격렬한 것들도 타고 싶었다. 그는 자라면서 여러 놀이기구들을 섭렵했고, 심지어는 인간계에까지 놀러갔었던지라 앞으로 펼쳐질 느린 놀이기구를 지루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도를 보면서 새로 생겼다는 롤러코스터에 과연 아이를 태울 수 있는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키는 또래보다는 거의 3배가 넘었으며 몸무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생긴 것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아이를 끌고간다면야 어떻게든 탈 수는 있을 테지만, 문제는 아이는 이제야 첫 놀이기구를 회전마물로 때웠다는 점이었다. 그는 아이에게 솜사탕을 사주며, 덜컹거리는 굉음과 함께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그리폰을 가리켰다. 시민들의 비명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자 덩달아 아이의 몸이 움츠려들었다.

저거 탈 수는 있는거냐?”

그 말에 아이의 반쯤 겁먹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내버려두고 자기만 좋자고 혼자서 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아이는 법적으로는 미성년자였고, 그는 보호자로서 아이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이는 다른 또래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아이의 커다랗고 하얀 몸은 모든 시민들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화두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 아이를, 이렇게나 시민들이 넘쳐나는 곳에 혼자 두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팸플릿을 커다랗게 펼치고는 아이에게 가고 싶은 곳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재빠르게 지도를 훑더니, 이내 한군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위에는 붉은 자전거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지옥불 자전거 위에서 아버지의 눈길은 계속해서 옆에 위치한 배를 향해 돌아갔다. 그는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배가 흔들리는 모습을, 그리고 그 배에 탄 시민들이 손잡이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나무배는 마치 침몰할 것처럼 위아래로 격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는 아버지가 멍한 눈으로 배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서는 언젠가 그와 함께 보았던 영화를 떠올렸다. 커다란 범선이 바람과 폭풍우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침몰해버린, 그래서 주인공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이 전부 다 죽어버렸던 영화였다. 낮이었지만 구름 때문에 햇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어두운 하늘 아래, 천둥소리를 배경음악삼아 배가 위 아래로 사정없이 마구 흔들린다. 갑판에는 파도가 계속해서 쳤고, 등장인물은 저마다 무언가를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애석하게도 파도는 한명한명 자신의 뱃속으로 악마들을 집어삼켰다. 아이의 눈에는 그때 죽어버린 악마들이나 저 배에 타고서 비명소리를 지르는 시민들이나 비슷하게 보였다. 그런 무서운 광경을 재밌겠다고 바라본다니, 아이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전부 원했다.

타고 싶으세요?”

아냐! 아드님이 타고 싶은걸 타야지. 이거 타고나서 괴물새보트도 타고 싶댔잖아? 같은 배니까 꽤나 재미있을거야.”

하지만 비명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는걸 숨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만 괜찮다면-”

아니, 정말로 괜찮대두. 아드님을 위해서 온거니까 아드님이 원하는대로 가야해요.“

누가 봐도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는 아마도 호수가 있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도 하품을 짓는 것을 보면 꽤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그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면서도, 아버지가 이리도 자신을 아껴준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결국 세차게 흔들리던 배는 멈추었고, 다행히도 선원들은 무사히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버지의 고개도 자연스레 아래를 향해 떨구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이 지겨운 곳을 벗어나고 싶은 페달질만은 재빨랐다.

 

아버지는 하늘자전거 출구에서 나오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되씹었다. 발단은 친구인 악마가 놀이공원 할인권을 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아버지였던 친구는 자신의 아들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리고 할인권의 대상이 아버지와 아들뿐이라는 이유로 할인권을 친구의 아이에게 양보하였다. 아버지는 처음엔 거절하려고 했지만, 아이가 티켓을 받아들고선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텔레비전 속에서만 보았던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의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그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쩌다 생긴 자식이었다고 해도, 법적으로든 도의적으로든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의 흉내를 내가며 아이를 돌봤다. 그는 자신이 여태껏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놀러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물론 자신도 아버지와는 그런 기억은 없지만-, 지극히 아버지다운 심정으로 가자고 말하였다. 그 덕분에, 그는 오랜만의 운동에 허벅지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호수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아이는 아버지의 손가락 몇 개를 잡고 있었고, 그 덕분인지 시민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비슷한 시선을 어린 시절부터 느껴왔었는데, 다른 점이라고 하면 어린 시절엔 하얀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벽한 지옥개에 대한 경탄이었다면, 지금은 검은색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옥개에 대한 공포라는 점이었다. 그는 혀를 찼다. 아들을 향한 이런 시선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냐?.. 뭐라도 사줄까?”

호수로 향하는 길목에는 노점이 줄서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노점에서 파는 팝콘이 먹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달라붙었고, 승리한 아이는 의기양양해가며 다른 아이들에게 자신의 전리품을 자랑했다. 펌킨이 팔고 있는 호박요리에는 달콤한 내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아버지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솜사탕을 향해 가리켰다.

다 큰-물론 겉보기로만- 지옥개 두 명이 커다란 분홍색 솜사탕을 먹으며 걸어가는 모습은 어딘가 웃겼지만, 지나가는 시민들 모두 그런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곁눈질을 하다가 자식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기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그들이 보내는 시선이 더욱 불편했기에, 그나마 아이가 옆에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아들이 옆에 없었더라면 대놓고 화를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놀이공원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런 시선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더더욱 아들을 보호하면서, 재미가 없어서인지 아무도 줄을 서지 않은 대기 줄을 건너갔다. 그나마 그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말이다. 물론 자신들을 수상한 눈으로 훑어보는 직원의 눈길은 심히 불쾌했지만 말이다.

다행이 아니라는 점을 꼽자면 또 페달을 밟아야 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페달을 밟던 때를 떠올렸지만,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전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호수 주변의 풍경을 보고 경탄어린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살갗대신 뼈만 남은 모양의 보트에서는, 늑골 사이로 주변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신 제대로 관리는 되지 않았는지 이곳저곳 도장이 벗겨 플라스틱 골재가 드러났고, 앉는 자리도 매우 딱딱했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도 아이의 눈에는 일렁거리는 붉은색 얕은 파도에 전부 삼켜지고 말았다. 괴물새 몇 마리가 마치 보트가 어미인것처럼 주변을 돌아다니다 날아갔을 때엔 아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루하고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아이의 입에 커다란 웃음이 맺힌 모습에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재밌냐?”

!”

아이의 눈이 파랗게 번뜩이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친구들을 잃은 괴물새가 보트 위로 날아오르자 다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저 새를 보았느냐고 옷깃을 붙잡는 모습에 아버지도 안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트안에선 호수 근처의 시민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 곳이라면 적어도 그런 시선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렸다. 아이의 손이 다시금 조심스레 아버지의 손가락을 붙잡자, 그는 자식이 꽤나 감동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2.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괴물새가 알에서 태어나 성체가 되기까지의 기간이었다. 아마 태어난 지 2년은 넘었을 괴물새가 커다란 날개를 자랑하며 날아오르던 순간이 되고나서야 아버지의 표정이 풀렸다는 사실에 아이는 안도했다. 아이는 약하게 페달을 밟으며, 호수 주변가를 걸어 다니는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흐릿하지만 몇몇 시민들이 어린 아이, 혹은 아이들 혹은 친구와 함께 호숫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은 거리낌없이 아버지의 품에 파고들었고, 아마 그런걸 당하는 아버지의 표정도 상당히 밝을 것이다. 아마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옆에 앉아있는 자신의 아버지도 불편하긴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손가락을 붙잡았다. 까칠한 짧은 털이 얽히는 느낌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서, 당장에라도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고 루시퍼에게 기도했다.

손을 잡는다는 행위는 뭘까, 아이는 언젠가 아버지의 친구인 스켈레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렸다. 어느 날 뉴스에서 유성애자에 대한 소식을 듣고나서였는데, 아이는 뭐든지 다 알고 있던 삼촌에게 과연 사랑이 무엇인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아이가 보았던 뉴스 속에선, 시민들이 피켓을 들며 애인금지법 폐지를 외치고 있었고, 반대 측에선 사진을 찍어 고발해버리겠다고 난리통을 쳤다고 했다. 같은 성별의, 비슷한 나이대의 시민들이 당당하게 손을 잡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늙은 스켈레톤은 망측하다고 루시퍼의 저주가 있을 거라고 욕을 했다. 애인, 직역하자면 사랑하는 사람. 아이는 그 광경이 너무나도 이상했기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행복해지기 원하는 마음, 이라고 삼촌은 설명했지만 그런 짧은 답변이 아이의 호기심을 채워줄리는 만무했다.

흔히 부모가 자식을, 자식을 부모가, 친구를, 연예인을, 스포츠 스타를. 물론 종류마다 조금씩은 성격이 달라.”

물론 그보다는 더 확장된 의미도 있었지만 그는 그 말을 아이 앞에서 꺼내기를 두려워했다. 아이는 삼촌이 일부러 대답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뉴스를 보면 애인이라는 말이 나오던데요, 그건 사랑하는 시민이라는 뜻인가요? 그럼 왜 그걸 금지해야 하죠?”

삼촌은 몇 분동안 고심하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이는 나이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컸고, 또한 지나치게 똑똑했다. 얕은 수로 아이를 속여 넘기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도 있어. 부자간의 사랑이라 친구간의 사랑과는 종류가 달라. 대신 그런 종류는 빨리 식는 편이라고들 하는데, 인간이면 2년 만에 식는다고들 해. 대신 그만큼 환하고 강하지. 그런 종류의 사랑은 지옥에서는 소수만이 해왔고, 주로 인간들이 나누는 사랑이었기에 배척해오고 있었어. 그래서 애인을 만들면 안된다고 법이 만들어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신고를 하는 시민도 없고, 설사 하더라도 경찰들도 무시하고 지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법이 되어버린거야.”

뉴스 속에서 앵커는 최근 들어 애인금지법을 실제로 효력을 발휘한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이는 삼촌이 말하는 것을 애매하게 이해하였다. 하지만 2년이라니, 고작 그 짧은 시간이 지나면 재가 되어버리는 감정이라니, 그건 너무나도 서글펐다.

그런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삼촌의 말투는 어딘가 이상해보였다. 평소와 달리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마치 풀이 죽은 것 같은 목소리에 아이는 삼촌도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물어보는 것은 크나큰 실례라는 것을, 아이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손을 잡는다는 행위, 그것에 얽힌 의미를 아이는 오늘에서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뉴스 속에서 연인들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검은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이 얽히는 광경을 상상했다. 그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예전에 아저씨가 갖고 와서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절름발이 남자는 결국 스핑크스를 이기고 왕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 오늘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불편한 시선들은, 단순히 자신이 하얀 지옥개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몇몇 어른들은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며,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만약 그가 혼자 돌아다녔다면 전혀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단지 어른의 모습을 한 아이가 어른인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 시민들의 시선은 어딘가 변질되고 말았다. 아이는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뉴스속 퍼레이드를 비판하던 시민들의 눈빛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을 떼지 않은 것은, 정말 비참하게도 그 시선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다음엔 또 어디가고 싶으세요?”

아버지의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굵은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조차도 몇몇 시민들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걸 더더욱 알고 있었기에, 아이는 아버지에게 못할 짓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굵은 손가락이, 짧고 꺼끌거리는 털이 제 손아귀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생각보다는 기분이 좋았다. 아이는 몇 번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그 감촉을 즐겼다. 그러다 갑작스런 파도에 배가 크게 휘청거리자 아버지의 손을 꽉 쥐었다. 입에서는 비명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괜찮냐고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아이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온 몸의 열기가, 피가 아버지가 잡고 있는 어깨에 집중된 것만 같았다.

괜찮니? 보트에서 나갈까?”

아마 자신의 얼굴은 형편없이 붉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어리석게도 아버지는 그것을 아들이 멀미를 한다고 오해를 할 것이다. 그의 걱정하는 말 하나하나가 아이의 심장을 쥐어뜯었다. 심장은 계속해서 피를 만들어내고는 어깨에 계속해서 격동을 불어넣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이제는 귀에마저 들려오는 것 같다.

? 괜찮아, 아드님?”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밑에서 일렁이는 물을 향해 시선을 아래로 꽂았다. 이 일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어리광을 부리는 이 행위가, 단지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때, 그 영화에서 절름발이 남자는 자신이 죽인 왕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왕이 되어서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곧 재앙이 그가 다스리던 나라에 내려졌고, 그는 그 이유를 결국 찾고야 말았지만-

인간들은 부모자식의 사랑에 다른 의미가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지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다른 의미, 손을 잡고 품에 안고 싶으며,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문제는 그런 의미의 사랑을 아이도 하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걸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어서 나가자며, 괜찮냐고 끊임없이 물으며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아이의 모든 신경과 기억을 장악한, 그런 철없는 지옥개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가 이를 악다문 모습을 보았다.

오이디푸스는 과연 어떻게 되었더라?

다행히도 보트에서 내리자 심장도 조금은 진정된 모양이었다. 아이는 벤치에 앉아 아버지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멍하니 자신들을 흘낏거리며 지나가는 시민들을 보았다. 아버지가 괜챦냐며 몇 번 조심스레 등을 두들기자, 동시에 아이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진동에 하얀 아이스크림은 처참히 바닥에 떨어졌다.

“..어디 몸이 안좋은건 아니지?”

, 괜찮습니다, 아버지.”

오히려 당신이 더 피곤해보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쓰다듬자 그런 생각도 몽글몽글 사라져버렸다. 슬슬 집에 갈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의 머리가 양 옆으로 흔들렸다. 그는 짧은 시간이나마 이 공간을, 이 들뜨면서도 불편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그게 비록 아버지에겐 좋지 못한 일이더라도, 아이는 어리광부리는 심경으로 더 이 별세계를 같이 즐기고 싶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리하지마, 쓰러지면 네 손해니까.”

아무래도 아버지는 아이가 꽤나 긴장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시선이 부담스러워서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아이는 제 정수리에 아버지의 손바닥이 닿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미안하게도, 스스로가 생각해도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의 손가락을 꼭 붙잡았다. 미지근했던 온도는 그의 손에 닿자마자, 마치 화상이라도 입을 듯 뜨거워졌지만 아이는 손을 놓지 않았다.

 

홍차컵 놀이기구에 도달할 때까지, 아이는 시민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감기를 의심했지만, 아이는 이 흔치않은 기회를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했다. 사랑하는 시민과 사랑하는 사이로 보일 수 있다는, 그런 기회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게다가 연인간의 스킨십이 아니라 아이가 아빠에게 할 수 있는 접촉이라는, 매우 보기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아이는 그 핑계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무도 그들을 향해 욕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애석하게도, 하지만 기쁘게도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탈 수 있는 기구만을 찾아 몇 시간을 돌아다녔을까, 아이는 그 순간마다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시민들의 시선을 즐긴다는 사실과 아버지에게 그걸 숨기고 있다는 것에 괴로워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른들은 자식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걸 자식이 하얗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못마땅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는 아버지가 타고 싶어 했던 놀이기구로 그를 끌고가서는 억지로 태웠다. 아이로서는 상상도 못해볼 롤러코스터니 바이킹을 탄 아버지를, 이번엔 자신이 펜스 밖에 보는 일은 즐거웠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고 싶었다. 그의 비명소리며 무서워하는 모든 것을 즐기고,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불연 듯 아이의 뇌리에는 어떤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남자의 비명소리, 그리고 허연 핏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끊임없는 신음소리 속에서 운명을 저주하는 모습이 루시퍼의 벌을 받게 될 거라는, 뉴스 속에서의 늙은 남자의 외침과 오버랩 되었다.

난 벌을 받게 되는 걸까.”

어떤 종류의 벌일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뉴스에서 말하는 단어들은 너무나도 추상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로서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벌이라면, 그것은 단연코 그의 아버지와 떨어지는 것일 테다. 아버지는 출구에서 나오다 아이의 기분이 시원찮은 것을 알아채고는 잽싸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이럴 때에야 말로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이는, 실은 아버지는 난감해하긴 하지만 자신을 매우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기뻤지만, 동시에 자신의 사랑과는 스펙트럼이 달랐기에 슬픈 일이기도 했다. 아이는 애써 미소를 짓고는 괜찮다고,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괜찮아, 네 아빠는 힘이 세니까, 뭔 놈이든 널 건드리면 인간계까지 쫓아갈 거야.”

“....”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자 다시금 아버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이한 일을 벌이곤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믿을만한 구석은 있는 시민이었다. 정수리부근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타고 내려오는 느낌에 아이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2년이 남았다. 아이는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는 호수 뒤편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커다란 관람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녁놀 아래에서 동그란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관람차로 단둘이 들어가는 동안에도 시민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어졌다. 아이는 피곤해하는 아버지가 검표하는 늑대인간에게 항의하려는 것을 간신히 잡아말려야 했다. 늑대인간은 정말로 굳은 표정으로 둘의 표를 확인하고는 문을 닫자마자 이상한 제스처를 했다.

관람차 안은 좁았으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바깥은 어느새 황혼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지만 관람차 안의 조명은 매우 어두웠다. 아이는 들뜬 눈으로 바깥의 광경을 바라보았는데, 가로등이 켜지며 시민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절대로 다시는 잊혀지지 않을 모습에 아이는 아버지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리를 꼬고선 마주앉아있었는데, 팔짱을 끼고는 무언가를 고심하듯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공기는 미지근했고 산소가 부족했지만, 아이는 그보다는 아버지와 단둘이 이 좁은 공간에 있다는 것에 긴장했다. 오이디푸스는 어쨌지? 그도 자신의 어머니와 단둘이 남겨졌을 때 긴장했었을까?

태양이 점점 산 아래로 제 육중한 몸을 가라앉혔고, 주홍빛 석양이 관람차 내부로 흘러들어왔다. 입구 너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 돌아가면 크리스가 잘 다녀왔냐며 반겨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기회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짧은 순간이 그 무엇보다도 아이에게는 값졌다.

관람차는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느릿하게 올라가는 관람차 안에선 쇠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제야 이미 아버지가 고개를 숙인채로 잠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어제도 억지로 일한다고 꽤나 피곤해했었는데, 그게 지금에서야 터진 모양이었다. 아이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지? 사랑은 2년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고 해. 다시금, 영화 속 장면과 삼촌의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시선의 끝에는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아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느새 관람차는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했었던가. 그리고 뉴스 속에서는.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가끔씩 그의 뺨에 입술을 맞추기도 했었다. 볼에 닿던 부드러운 감각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혀졌다. 하지만 뉴스에서 말하던 사랑하는 이에게는 그것보다는 더 가깝게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이는 제 심장 한켠이 간질거리면서도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안 돼. 이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제 눈알을 뺐듯이, 그도 루시퍼에게 벌을 받을 것이었다. 하지만 2,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도 잿더미로 변해 사그라지고 말지도 몰랐다. 그게 단순한 자기변호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으면서도, 아이는 어떻게든 아버지에게 닿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멈추지 않았다.

행여나 아버지가 깰라, 그리고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저주를 퍼부을 시라 조심스레, 그러나 빠르게 아이는 자신의 입 끝을 스쳐가듯 아버지의 입술에 부딪혔다. 입술 끝에 닿은 부드러운 감각에 아이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질러버렸다, 라는 생각과 함께 더더욱 닿고 싶다는 생각에, 그리고 아버지에게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러버렸다는 생각에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앞으로 2, 2년이라는 짧지만 길 시간동안 얼마나 이런 순간들을 거쳐야할까.

하지만 그 순간순간들은 분명 괴로우면서도 즐거울 것이 분명했기에, 아이는 더더욱 눈물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