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로키바튼 _ 나를 생각해주세요 _ 요툰헤임연작 01 본문
"애석하게도 너랑은 결혼할 수 없어."
사귀고난지 2년만에 들은 고백은 이처럼 상당히 처참하고도 굴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사랑한다는 열렬한 고백 뒤에 들은 것이라, 클린트 바튼은 주먹이라도 한대 날려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제 연인의 생각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신도 그것때문에 연인과의 관계가 너무 깊어지는 것을 주의해왔었다.
바튼의 곁에서 나신으로 책을 읽고 있는 연인, 로키 오딘슨은 북유럽의 작은 강국, 아스가르드의 제2왕자였다. 즉 왕위계승권 2위로 만약 그의 형인 토르 오딘슨이 죽거나 왕위를 포기하거나 하게된다면 다음 왕위는 그가 물려받게 되어 있다. 토르가 만약 왕위에 오른다 하더라도 자식을 낳지 않는 경우에도 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그런 그가 남자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남기지 않는다면-혹은 대리모로 아이를 낳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여파는 상당히 클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기에는 생각보다 야심이 가득 찬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당부분 예상하고는 있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직접 들으니 울화통이 순간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로키는 언제 자신이 그런 말을 내뱉었냐는 듯 새침거리는 표정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 모습이 어쩐지 모르게 짜증을 일게 해서, 바튼은 거칠게 책을 빼앗아들고는 무슨 내용인지 보자 하고 제 코 앞에 들이댔다. 하지만 왠 이상한 문자로만 가득했고, 로키는 비아냥거리며 웃음을 흘겼다.
"아스가르드어를 알 리가 없잖소이까, 미스터 바튼."
명백히 비꼬는 투였다. 하긴, 정장 자체가 상당히 고급진 것이 꽤나 비싸보였는데 아스가르드어로 적혀진 것을 보면 아예 집에서 갖고 온 것인지도 몰랐다. 바튼은 아스가르드인과 3년을 알고 지냈고, 그 중 2년을 연인관계로 지냈지만 아스가르드어는 간단한 인사밖에 아는 말이 없었다. 로키는 능숙하게 길다란 손가락으로 바튼에게서 책을 빼내고는 특유의 웃음소리로 웃었다. 킥킥킥, 거리는 소리가 생각보다는 거슬리지 않았다.
"무슨 내용이야?"
"호오, 드디어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가져주는건가?"
로키는 경영대에 다니고 있어, 바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초반에는 몇번 읽으려고 시도는 했지만, 어려운 용어에 쉽사리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어째서인지 그쪽에 대한 책은 아닌지, 평소에는 진지하게 읽던 로키도 입가에 미소가 올라가곤 했다.
"평소의 너랑은 다르니까."
"그렇군. 이 책은 예상했겠지만 집에서 갖고 온거야. 옛날 아스가르드의 전설을 실은 책인데, 대략 300년전에 나온거야."
300년?! 순간 바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고보니 로키의 '집'이라 하면 수도인 이그드라실에 있는 왕성이거나 요툰헤임에 있는 개인 소유의 성을 일컬을 것이다. 대략 5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서재에 그만한 책이 있는 것도 당연하였다. 그는 그제서야 제 옆에서 실실거리며 책을 읽고 있는 연인이 한 나라의 왕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은 내 고향인 요툰헤임에 관한 내용인데 말이야, 거기는 헬도 두려워하는 추위로 악명이 높은 곳이지. 겨울에는 최하 영하 30도까지는 내려가니까 말이야."
"많이 춥겠네, 거기서는 어떻게 사는거야?"
"사실 나도 여름에나 가는거라 겨울에는 간 적이 없어. 그렇지만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곳이니 춥긴 춥겠지."
"그래서 그리고는?"
"우리 바튼군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걸 잊고 있었군."
로키가 장난스레 말하자 바튼은 심통을 터뜨리며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알았어. 요툰헤임은 원래는 거인들의 땅으로, 서리거인인 이미르가 지배하던 곳이었어. 그런데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찾아와서는 이미르를 죽여버렸어. 그때 그가 흘린 피가 넘쳐서 다른 서리거인들도 많이 죽었지. 일부는 땅에 남겨졌고 일부는 하늘로 올라가 끊이지 않는 눈이 되어서 내렸어. 이미르의 머리는 커다란 얼음산이 되었지. 실제로 이미르산이라고 있어, 너도 들었지? 내가 매년 가는곳. 모든 서리거인들이 죽은 건 아니었어. 이미르의 후손도 살아남았고, 그 후손들은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혹은 미드가르드의 인간들과 교접하여 후손을 남겼어.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 후손들은 서리거인의 힘을 쓸 줄 알아서, 위험한 순간이 오면 눈과 바람을 조종하여 자신과 가족들을 지켰다고 해."
"헤에, 역시 신화의 나라답네. 그 후손들은 지금도 남아있어?"
그 말에 로키는 바튼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그 후손이라는 듯이말이다. 그 모습에 바튼은 로키의 출신을 다시금 생각해냈다. 로키는 사실 요툰헤임 영주의-
"그 이후로 요툰헤임의 지배자들은 귀족으로 편입되었어. 왕족은 여전히 신의 피를 이은자들이었지만, 서리거인의 후손들도 나름 우대를 해줬던거지."
"너...지?"
그 말에 로키는 살짝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튼은 가끔씩 옛날의 부모가 떠오른다던 로키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키는 그 아주 어릴적의 그 때를 분명 떠올리고 있으리라.
"그럼 너도 그 얼음능력을 쓸 수 있는거야?"
그 말에 로키는 회상에서 깨어나 실소를 터뜨렸다. 신화상의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멍청한 바튼군, 이라며 비웃기까지 했다. 어쩐지 아이취급당했다는 생각-분명 나이는 저가 훨씬 더 많은데도-에 얼굴을 붉히며 약하게 가슴을 올려쳤다. 로키의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고 더욱 커져서, 나중에서야 들은 말이었지만 옆집의 나타샤는 그 소리가 자기집에까지 울렸다고 불평했다.
▒ ▒ ▒
로키는 새벽에 은밀하게 자신의 뉴욕 집으로 돌아갔다. 한 나라의 왕자, 그것도 잘 생겼다면 잘 생긴 왕자와 은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언제나 파파라치들이 로키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밖에서는 어디까지나 친구관계를 유지하여야 했다. 과도한 스킨쉽도 일부러 피했고, 로키는 일부러 여자를 꾀어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밤중의 밀애도 언제나 로키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즐기고는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갔다. 바튼은 아침에 일어나보면 침대 옆이 싸늘하게 식어있는걸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이어나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나 힘들게 남들의 시선에 눈치를 보이면서도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키의 형인 토르의 암묵적인 허락과 그들의 사랑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말에 화가 난걸지도 몰라, 바튼은 제가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로 차를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비록 바튼 자신은 왕자와 연애를 한다는 것이 조심스럽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너무 깊은 관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었다만,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연애문제였다. 만약 로키와 헤어진다면, 아님 로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지조차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만큼 바튼은 로키에게 미쳐있었고, 로키도 마찬가지란 것을 알고 있었다. 2년이라는 기간은 사랑에 대해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고, 그만큼 사랑도 식어야 할 것이 분명한데도 로키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더 강해져 있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서까지도 바튼의 머릿속에서는 로키의 그 말이 계속해서 떠다녔다. 덕분에 그는 고등학교의 양궁장에 들어가면서도, 동료교사인 나타샤가 화살로 제 옆구리를 찌를 때까지도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또 그 장난꾸러기 때문이야?"
"앗, 냇! 깜짝 놀랐잖아."
"어제 그 인간 웃음소리가 우리집에까지 울렸어."
나타샤 로마노프는 바튼의 친우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우정을 쌓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튼보다 바튼이 생각하는 바를 눈치채는 데에 능했으며, 덕분에 바튼이 로키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로키를 고까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 무슨 촉이 와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고 했다.
"로키는 새벽에 돌아갔어."
"그럼 그렇지, 왕자가 그럴 수밖에 없지. 그래, 그래서 우리 프린세스는 무슨 걱정이래요?"
"프린세스라니, 무슨."
바튼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오늘따라 심기가 불편해보이는데."
"말 돌리지 말고."
"나야 언제나 왕자님이랑 안풀리니까. 그리고 프린세스라니, 남자는 프린세스가 될 수 없어."
"그 새끼가 약혼녀가 생겼다고 말하든?"
그 말에 순간 로키가 부모와-정확히 말하자면 아스가르드의 왕비전하-와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로키의 어머니는 로키가 빨리 정착했으면 하는 눈치였고, 로키는 학업을 이유로 거부하고 있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버려서, 언젠가는 진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아직은."
"클린트, 정말 충고하는데, 네가 힘들어할거란건 알지만 그 새끼와는 빨리 정리하는게 좋아. 이대로 계속 이어나가기에는 서로에게 힘든거 알잖아."
"고마워, 냇. 서로 잘 알고는 있어. 하지만 마음대로 잘 안되더라."
둘은 중간에 두번을 헤어졌다. 한번은 파파라치에 의해서 식당을 나가던 둘의 사진이 찍혔을때. 다행히도 친구관계라고 기사가 실려서 관계가 탄로나지는 않았었다. 아스가르드의 왕자와 양궁 금메달리스트가 설마 사귈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다. 하지만 로키는 잡지가 나온 다음날 전화로 관계를 그만두자고 말했다. 결국 일주일도 못가서 재결합했지만. 두번째는 토르의 약혼문제때문이었다. 토르는 미국에서 사귀었던 제인이라는 천체물리학자에게 청혼했고, 제인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서민신부라는 이름은 나름의 논란은 있었으나, 사실 서민층이 왕가에 편입되는 것이 유럽왕가의 추세이기도 해서 반발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바튼은 그제서야 로키와 자신의 관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로키도 그걸 의식했던지 깔끔하게 이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토르가 첫번째 이별이 사실은 바튼을 위해서 로키가 내린 결단이라고 얘기해줬을때, 바튼은 로키에게 달려가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자신들이 하는 사랑이 미친 사랑이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도저히,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되는 마약같이, 둘은 서로에게 미친듯이 빠져들어갔다. 벗어나야 하는걸 알면서도 차마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바튼은 나타샤를 향해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양궁 코치로서 일을 하기 위해 탈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아주 미약한 총성음이 건물 내에 울려퍼졌고, 다시금 다시금 반복되었다. 양궁장 옆에 있는 학교건물에서 비명소리가 번져나갔다.
▒ ▒ ▒
로키 오딘슨은 여태껏 운동을 제외한 상황에서 뛴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급한 일이 있더라도 빠른 걸음으로 걸을뿐, 천박하게 뛰어다니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차가 멈추자마자 달려나가려는 것을 형인 토르가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아우여, 진정하거라."
로키의 눈은 토르가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 차서 넘쳐버릴것만 같은 그 모습에, 토르는 순간 동생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뺄 뻔 했다. 토르, 라고 간절히 자신을 부르는 모습에 다시금 힘을 주었지만.
"클린트는 무사할거야. 그는 전사였잖나."
"활하고 총이랑 어떻게 비교를 해. 게다가 병원에 있다는 건 다쳤다는 얘기잖아!"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져 짜증을 냈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놀라워, 순간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토르는 다시금 인내심을 가지고 동생에게 말했다.
"그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게 다쳤다면 그의 뉴스가 더 크게 나왔을거야."
"젠장."
로키는 나지막히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토르가 제 어깨를 붙잡고 쉽사리 내보내려하지 않는 이유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지랄같은 파파라치들에게 연인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분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분했다.
토르가 문병신청을 하는 동안에도 로키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바튼의 핸드폰에 몇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전화가 꺼져 있다는 여자의 무심한 음성만이 남을 뿐이었다. 반쯤 매스컴에 아수라장이 된 병원 속에서, 로키는 행방을 알 리 없는 연인을 걱정하고 있었다.
"로키."
"토... 형님."
카메라가 있으니 평소처럼 편하게 부르지는 못했다.
"바튼에게 가자구나."
"네."
로키는 토르의 뒤를 따랐다. 제 뒤로 엄청난 플래시 세례에, 이렇게 힘없이 형의 뒤나 따라야 하는 게 분하고도 또 분해서, 그 속을 밖으로 내밀지만 않은 채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 ▒ ▒
바튼은 허리에 붕대를 두른 채로 병상 침대에 누워있었다. 로키는 문을 열고 바튼이 보이자마자 달려가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뒤에는 플래시가 가득했고, 병상 내에서도 간호사가 옆에 붙어있었다. 간호사는 링거를 연결하고 있었기에, 그저 몸은 괜찮은가 하고 말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어렸다.
"전하, 여기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바튼은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바튼이 존댓말을, 로키가 하대를 하는 것이 그들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게 중요한 것인가? 침대에 누워있는 바튼은 상당히 지쳐보였고, 잘생긴 얼굴에도 거즈가 붙여져있었다. 당장에라도,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냐고 묻고싶었다.
"미스터 바튼, 그대가 크게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왔네. 몸이 상당히 많이 다쳤군."
로키는 조심스레 바튼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새 토르가 간호사에게 자리를 피해달라는 말을 했고, 그 말에 간호사는 너무 무리하게 다루면 안된다는 말과 함께 방에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로키는 바튼을 품에 안았다. 더운 숨이 제 가슴에 닿자, 그의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체취를 들이키자 그제서야 그가 살아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연인을 안는 것 하나도 남들 앞에서 떳떳이 할 수가 없다는게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어떻게 된거야? 어떤 새끼야?"
"뉴스 안듣고 왔어?"
"너한테 전화거느라고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 핸드폰은 어디다가 놔둔거야? 내 전화는 꼭 받으라고 얘기했었잖아."
"핸드폰은 양궁장에 있어. 그리고 그 새끼는 지금쯤 시체안치소에 있을거야. 날 쏘고 자살했거든."
"응?"
그 말에 로키의 온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총격사건의 용의자가 자살했다는 것보다 그가 바튼을 쐈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바튼은 한숨을 내쉬고는 로키의 허리에 팔을 둘러 쓰다듬었다.
"괜찮아, 옆구리에 약간 스친 정도야. 설마 내가 몸에 맞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로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오, 로키. 아냐,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고 몇주일만 입원하면 된댔어. 정말이야, 정말이라고. 걱정하지마, 나 양궁선수야. 지금도 현역이고, 만약 그 자식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내가 눈에 화살을 꽂아줬을거야. 괜찮아, 널 두고 죽지 않을게. 약속할게."
바튼은 속사포처럼 괜찮다는 말을 쏟았다. 하지만 로키의 표정은 쉽사리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로키는 몇번이고 크게 쉼호흡을 했다. 그는 도저히, 도저히 바튼이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생겼었다면-
"로키."
"..."
"괜찮아."
바튼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애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연인의 모습에 로키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제 연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토르가 곧 면회시간이 끝나간다고 말했다.
"퇴원하면 꼭 연락해. 핸드폰은 찾아서 보내줄게. 부디 몸 조심해."
"..연락할게, 오늘 볼 수 있어서 좋았어."
둘은 이마를 맞대고 이별의 말들을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는 토르는 왠지 모르게 착잡해지는 심정에 주머니에서 손을 뺄 수 없었다.
▒ ▒ ▒
퇴원일에 로키에게 전화를 거니 알았다는 짧은 대답만 있었다. 바튼은 나름 속상해하면서도 나타샤-다행히도 나타샤는 다치지 않았다-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시간은 2시였고 마침 점심도 먹지 않은 참이라 나타샤와 함께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상처부위가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몸을 놀리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인간은 딱 한번 병문안을 왔을 뿐이라고?"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전에 한번 당했었잖아. 파파라치고 기자고 잔뜩이었다고."
"그래도 애인이라는 작자가 그럴 수 있냐고."
"대신 전화는 질리도록 했으니까 괜찮아."
얼굴을 볼 수 없는 대신 목소리만은 계속해서 나누었다. 로키는 끊임없이 바튼을 걱정했고 사랑한다고 말하였다. 얼굴을 마주할때는 그렇게 부끄러워했던 말이 그렇게 쉽사리 나오는 것을 보고, 바튼은 이런 관계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오늘 오전에 퉁명스럽게 알았다, 라고 말할 줄이야. 순간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너야말로 괜찮은거야?"
"뭐가?"
나타샤는 바튼이 꺼내는 말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를 했다. 최근 그녀는 토니 스타크가 주최한 파티에서 만난 남자에게 맹렬히 대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심한 핵물리학자라고 하던데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던지 요새들어 한숨이 잦아진 참이었다.
"그 물리학자나으리 말야."
"이번주에 데이트하기로 했어."
"성공하길 빌지."
바튼은 냉수를 들이키고는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들도 그만큼 잘 풀리기를 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금 로키의 그 퉁명스러운 단답이 생각났다.
나타샤는 할 일이 있다고 빌라 앞에까지만 데려다준뒤 어딘가로 사라졌다. 친구사귀어봤자 좋은 것 없다고 중얼거리며 자신이 살고 있는 3층까지 올라갔다. 입원했던 한달새 자그마한 아파트는 변한 것이 없어서 오히려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번호키를 누르고 손잡이를 돌리자마자 아주 익숙한 인영이 자신을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바튼은 순간 숨을 멈추고 그 인영을 넘어뜨리려다가, 얼굴이 상당히 일그러진 것을 보고는 몸을 굳힐 수 밖에 없었다. 로키? 입 밖으로 연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인영이 손을 내밀어 문을 닫고는 급히 체인까지 걸어잠궜다. 그리고는 다시 바튼의 몸을 현관문으로 밀었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뒷통수가 쇠문에 부딪혀서 꽤나 아팠다.
"로키! 이게 지금 뭐하는-"
화를 내려는 바튼의 목소리는 로키의 입술에 삼켜져버렸다. 입원하고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로키의 입술은 평소보다도 진하고 달콤해서, 이내 화를 냈던 것도 잊은 채 키스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의 혀를 맛보고 입술을 맞대었다. 간신히 얼굴을 떨어뜨렸을 때에는 머릿속이 황홀경에 빠져있어서, 차마 침대로 가자는 말조차도 꺼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로키의 입술이 바튼의 귓가로 향해 그의 귀를 희롱했을 때엔 오히려 질척거리는 신음소리가 현관에 퍼졌다. 혀로 핥기도 하고 잘근잘근 씹어보기도 한다. 그러는 동시에 어느새 셔츠안에 손을 집어넣어 연인의 유두를 애무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갑작스런 쾌감에 바튼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흐읏, 로키.... 간신히 로키의 이름을 부르자, 로키는 그것에 보답이라도 한다는 듯 얼굴을 바튼의 가슴으로 옮겼다. 그가 좋아했던 배에는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로키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로키?"
갑작스레 움직임이 멈추자 바튼은 눈을 가느랗게 뜨고 제 밑을 쳐다보았다. 로키는 붕대를 찬찬히 바라볼 뿐,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로키, 이젠 정말 괜찮아."
"만약 이게 몇센티미터만 옆에 났어도 넌 위험했을거야."
"로키.. 맹세할게."
"응?"
"널 두고 먼저 죽거나 하지 않을게."
그 말에 로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맞춤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생각해보니까."
마치 내일 아침은 어떻게 먹을까, 하는 가벼운 말투였다. 결국 현관에서 한번, 침대에서 두번을 하고나서야 둘의 열기는 가라앉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샤워를 했고, 로키는 따끔거리는 상처에 다시 붕대를 매어주었다. 로키는 붕대를 고정시키고는 다시금 말했다.
"어차피 아스가르드에서도 2년전에 동성결혼이 허용되었다는 말이지."
그 말에 바튼은 통증을 잊고 벌떡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연인을 바라보았고, 연인은 시치미라도 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하더라도 어차피 살아남은 왕족이 있을테니 물려주면 되고."
"로키, 그게 무슨-"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더라도 요툰헤임은 내거니까."
"로키!"
결국 바튼은 연인에게 큰 소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도저히 연인이 하는 소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성결혼, 왕위계승권 포기. 로키는 어느정도 돌려서 말하긴 하였으나 그 뜻은 명확했다. 설마 청혼을 이런 식으로 받게 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고, 또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돼. 이건 안돼, 로키."
"...역시?"
"왜 나 때문에 네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냐고?! 포기하는걸로 끝나지 않을게 뻔하잖아."
로키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연인과 저의 뜻이 엇갈리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로키가 청혼을 망설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연인인 바튼의 안전때문이었다. 왕족의 동성결혼은 자신이 처음일테니, 분명 바튼은 날카로운 매스컴의 비수에 노출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를 향한 말도 안되는 유언비어가 그의 심장을 마구 찌를 것이 분명했고, 그는 그것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바튼은 달랐다. 바튼은 로키를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너희 아버지가 화나시면 너한테 그 영주자리도 빼앗을거라고. 로키, 이건 아냐. 나때문에 네가 갖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마."
어느새 바튼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려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롭고 사랑스러워서 로키는 조심스레 바튼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스가르드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의 왼손 넷째손가락에 입맞추는걸로 청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바튼은 전에 토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로키의 입술이 천천히 자신의 넷째손가락을 향하는 것을 보고 바튼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이 로키를 끌어내리는 것 같아서였다.
"눈 떠, 클린튼 프랜시스 바튼."
"로키, 제발..."
어느새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클린트."
"안돼."
"...네가 걱정되서 그러는거야 아니면 내가 걱정되서 그러는거야."
그 말에 바튼은 슬며서 눈을 뜨고는 게슴츠레 로키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쓰지 않아 얼굴표정은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아마도 자신처럼 울기 직전인 것만 같았다.
"당연히 너지, 바보야."
"에드워드 8세는 심슨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렸다지. 어렸을때엔 그것이 너무나도 웃겨서 비웃곤 했었는데, 지금의 나를 비웃는 꼴이 되어버렸잖아."
"로키."
"어차피 왕자자리는 원래부터 내것이 아니었고, 영주자리도 그냥 위에서부터 물려받은거야. 생각보다 포기하는건 쉬워."
"너의 그 모든 특권을? 그걸 왕자님이 버틸 수 있겠어?"
로키는 말없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인을 제 품에 안았다. 로키의 심장소리가 평소보다 더 빨라서 바튼은 눈을 감고 로키의 나긋한 목소리와 심장소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총에 맞았다고 연락을 들었을때, 내가 총에 맞은 기분이었어."
"미안해."
"파파라치들 때문에 다른 여자랑 밤을 보내는 것도 얼마나 곤욕이고 구역질나는 짓이었는지 몰라."
"미안해."
"널 잃는다고 생각하니까, 순간 내가 쥐고 있던 모든 황금들이, 권력들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어. 미안해, 그 때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심이 아녔어."
"로키."
"네가 총에 맞아서 입원했을때, 그 옆에서 너를 간호하고 싶었어. 너의 보호자이고 싶었지. 그제서야 깨달은거야, 네 곁에 있고 싶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로키, 나도, 사실은 그 때 네가 보고 싶었어. 총에 맞았을때엔 정말 네 생각밖에 안나더라."
"거짓말."
"음... 아마 90%정도?"
로키는 그 말에 슬며시 웃음을 흘겼다. 심장소리는 점점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바튼은 로키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로키는 울고 있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약속해. 왕위계승권은 안돼. 그건 절대로 포기하지마."
"클린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 가족들과 왕족들과 국민들을 설득시켜. 결혼은 그 다음의 일이니까."
"...아마 토르는 이해해줄거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큰 일이군."
"약속해."
"그래, 약속하지. 대답은?"
그 말에 바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토르가 청혼법을 얘기하였고, 그 뒤에 제인이 승낙법을 말해주었는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로키의 입가가 씩 하고 올라갔다. 그리고는 연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내 왼쪽 눈에 키스해."
"응?"
"어서."
바튼은 조심스레 연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서는 아래로 끌어내렸다. 입술이 제 왼쪽 눈에 닿는 것을 느끼자, 로키의 입가가 환하게 벌어졌다.
요툰헤임 연작. 작중에서 토르는 20대 중반으로 정치학을 전공하고 MBA수료중, 로키는 토르와 1살차이로 경영대 졸업반. 바튼은 양궁금메달리스트로 현재는 고등학교와 이런저런 곳에서 양궁을 가르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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