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로키바튼 _ Home _ 요툰헤임연작 05 본문
최근 클린트 바튼이 제일 불만을 가질 대상을 꼽는다고 한다면, 아마 일순위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노트북이나 두드리고 있을 약혼자일 것이다. 바튼의 사랑스러운 약혼자, 북유럽의 작은 강국 아스가르드의 제 2왕자 로키 오딘슨은 자신을 바라보는 바튼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한창 논문작성을 하고 있었다. 닷새뒤에는 졸업논문 중간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여드레 뒤 부터는 지옥을 달리는 중간고사가 펼쳐질 예정이었다. 이미 어깨 아래까지 길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고 눈에는 안경을 쓴 채, 그는 몇시간이나 노트북에 매달리고 있었다. 로키가 앉아있는 식탁주변에는 이미 로키가 자신의 저택으로부터 가져온 책들과 서류가 한가득 쌓여있었고, 식탁 위에도 그가 보고 있는 자료들이 A4에 담겨져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조기졸업을 원한다 하지만, 바튼은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비워져있는 로키의 커피잔에 따뜻한 물을 따라주자, 로키는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빠르게 들이키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바튼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난장판이다. 문제는 이 난장판이 로키가 살고 있는 아스가르드 왕국 소유의 저택이 아니라 바로 클린트 바튼의 집, 1LDK인 좁은 집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튼의 집은 혼자서 살기에는 상당히 아늑했다. 양궁 대표팀에서 퇴출당한 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바튼에게 나타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괜찮다며, 마침 옆집이 이사를 갔다며 이 곳으로 옮겨오기를 권유했다. 뉴욕 브룩클린의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는 방이 1개에 거실과 부엌, 식당이 딸려 있는 집이었다. 둘 이상이 살기에는 살짝 불편하지만, 독신자가 살기에는 그야말로 적당한 크기였던 데다가, 집주인이 나타샤에게 약점이라도 잡혔는지 특별히 월세도 싼 편이었다. 채광도 잘 되었고 겨울에는 햇빛이 집 안에까지 들어왔다. 베란다에 서 있노라면 시에서 만든 공원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전망도 좋아서, 바튼은 흔쾌히 집을 정하였다. 그러니, 이 혼자 살기에 적당한 집에 두명이서 아웅다웅하며 사는 것이 문제라고, 저녁으로 먹을 파스타를 만들며 바튼은 생각했다. 이미 식탁은 약혼자의 서류들로 한가득이라, 이번에도 식사는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서 치루게 생겼다. 로키는 맛있다는 칭찬만 한 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결국 설거지와 뒷정리는 바튼이 하게 생겼다.
학기가 시작되자 로키는 유난히 바튼의 집에서 머무는 기간이 늘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바튼의 집에다 살림을 차린 것 같았다. 저택에는 옷가지와 책을 가지러 왔다갔다 할 뿐, 이미 잠과 식사, 공부같은 일상생활은 바튼의 집에서 치루고 있었다. 따로 서재가 없는 작은 집이기에 식탁을 책상으로 삼고는 그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로키는 공부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던 데다가, 조기졸업을 노리고 있어 이번 학기는 특히나 살인적인 스케쥴을 수행해야 했다. 즉, 그는 약혼자의 집에서 먹고 잤지만, 그 시간의 대부분을 공부에 쏟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로키가 어지른 흔적들은 공부로 바쁜 그가 아니라,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남는 약혼자가 떠맡게 된다는 뜻이었다.
잠에서 일어나니 로키는 기절한 듯 옆에서 자고 있었다. 행여 숨이라도 제대로 쉬나, 하고 그의 호흡을 확인하고나서야 바튼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아마 오늘도 로키는 새벽이나 되어서야 잠에 들었을 것이다. 어젯밤보다 난장판이 된 식탁위에는 차마 뚜껑이 닫히지 않은 만년필이 한쪽에서 굴러다니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바튼은 로키가 피로에 급히 잠자리에 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라버린 촉을 미지근한 물에 담그고는 그는 기지개를 켰다. 아침조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개수대 안에는 시리얼을 먹은 흔적이 남아있는 그릇이 말라가고 있었다. 그는 혀를 차고서는 물을 틀었다. 결국 그 날의 청소도 설거지도 바튼의 몫이 되었다. 그는 욕실 수채구멍에서 다량의 검고 길다란 머리카락을 발견했으며, 이미 식탁이라 부를 수 없는 식탁의 정리도 해야 했다. 마치 혼자 살았을 때보다 집안일이 3배는 늘어난 것 같아, 간단히 먹으려고 사온 햄버거 포장을 뜯으면서도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앞으로 2개월은 더 이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숨을 내쉬다못해 폐를 들어내야 할 정도일지도 몰랐다.
-딩동-
그는 콜라를 급하게 머금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 너머에는 포장된 중국음식을 들고선 환하게 웃고 있는 토르 오딘슨, 결혼을 앞둔 신랑이자 바튼에게는 곧 시아주버니가 될 로키의 형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 바튼. 이제 슬슬 로키의 옷을 가져갈 때가 된 것 같아서 왔네만. 아, 이건 오다가 구매한 것인데, 꽤나 맛이 있어보여서 말이네."
그는 바튼의 허락도 받지 않고는 포장을 뜯었다. 요즘 결혼식 준비에 바쁘다고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다며 들고온 중국음식 특유의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에, 초라한 햄버거가 바튼의 눈에 찰리 만무했다. 바튼은 나무젓가락을 뜯고는 볶음면 상자를 들어올렸다.
"그래서 로키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가? 거의 한달가까이 집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으니..."
"그야말로 공부에 미쳐서 살고 있어요. 집에 오기만 하면 공부만 하고, 다른 집안일은 도저히 할 생각을 안해요."
"그건 어쩔 수 없지..."
토르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는 왕자이니 왠만한 정리정돈은 시녀들이 해 주었지. 그래서 동생이나 이 몸이나 청소하는건 약한 편일세. 물론 이 몸이야 여기서 혼자 몇년을 살았으니 왠만한 건 할 줄 알게 되었지만, 로키는 그런 적이 없었으니 당연할테지."
하긴, 바튼은 로키가 식칼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비웃었던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곱게 자란 도련님, 아니 왕자님답게 로키는 집안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에 비하자면 똑같은 왕자이자 그의 형이기도 한 토르는 오히려 바튼을 능가할 수준으로 집안일을 잘해서, 약혼녀인 제인의 집의 집안일을 도맡아해주다가 어머니인 프리가의 경악을 살 때도 있었다. 그거야 미국으로 단신으로 쫓겨나 개고생을 했던 경험 덕분일테고, 그런 개고생을 한 적이 없는 로키-물론 마음고생은 심했지만-는 빨래 하나 설거지 하나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딱히 바튼의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세나 전기료같은 공과금을 반씩 부담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누가 보면 기둥서방이냐고 하니까 문제인겁니다..."
"이제 2개월 남았네. 조금 더 수고하게나, 혹시 너무 힘들다 싶을 때에는 내게 도움을 청하게. 사람이라도 불러서 보내주겠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로키의 어마어마한 빨래를 들고 토르는 사라졌다. 아마 왕자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최고급 세탁소로 들어갔음이 분명할 빨래들이 사라지니, 바튼은 후련한 마음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날도 바튼이 학교에서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 로키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식탁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미 다크서클이 눈밑까지 침범해있는데다가, 오늘은 급기야 에너지 드링크까지 가져다 마신 모양이었다. 식탁 다리 밑에서 굴러다니는 몬스터 캔에 바튼은 질겁하며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약혼자에게 갔다. 이미 눈의 초점이 반쯤은 잃어버린 듯 해서, 그는 재빨리 노트북을 닫아야했다.
"...왔어?"
평소처럼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화내지도 못하는 연인을 보고 바튼의 속이 쓰렸다. 그렇게나 낮에 험담을 한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일단 좀 쉬어, 로키."
"아냐, 이것만 더 보고."
"어차피 다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거잖아."
"그래도 확인을 더 할거야. 클린트, 제발 손좀 떼."
"너 이러다 쓰러져. 이러다 쓰러져서 날 과부로 만들 셈이야?"
걱정어린 타박에 과부라는 단어가 섞이자, 로키는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몬스터 캔을 쓰레기에 넣었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걸까, 바튼은 말이 너무 심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로키의 원래부터 가느다랬던 몸이 살짝 흔들리다가 소파 위로 무너졌다. 그는 눈이 아픈지 팔로 눈을 가린 채, 정말이지 피곤하다는 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지금 너무 피곤해. 이대로는 과로로 쓰러지겠군."
"로키, 침대로 가."
"아냐, 조금 눈 좀 붙이다 다시 볼거야."
바튼은 억지로 로키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살짝 칭얼거리는 투로 로키는 싫다고 하였지만 발걸음이 침실로 향하는 걸 보면 결국 수마와 피로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그른 것 같았다. 어차피 그동안 개고생했으니까 괜찮다고 말하며 바튼은 로키를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로키는 안경을 벗을 새도 없이 휘프노스의 수마에 휩쓸렸다. 살짝 코까지 고는 모습에 바튼은 착잡한 심정으로 로키를 바라보아야 했다. 사실 집안일을 안한다고 사람들에게 불평한 것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가 제일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연인이 제 몸을 챙기지 않고 공부를 했고, 그로 인해 이제 막 약혼한 커플의 정다운 생활도 사라져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는 원래도 창백했지만 최근에는 더 창백해진 연인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냈다. 그리고는 행여나 연인이 깰까, 조심스레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날 로키는 바튼의 일어나란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밝은 바깥을 본 순간 든 생각은 아뿔싸, 였다. 그는 심장이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 느낌에 당장 잠에서 깼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허둥지둥대며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휴대폰의 액정부터 확인했다. 8시 15분, 평소대로 씻고 자전거를 타고 나간다면 분명 9시 강의에는 늦을 시간이었다. 젠장, 그는 아스가르드어로 나지막히 욕을 내뱉고서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어째서 깨워주지 않았느냐는 타박을 던져지자 바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늘 9시에 그 망할 샌더슨 교수라고!"
샌더슨은 로키가 숙적이라고 부르는 교수로, 지난번 강의를 제외한 나머지 강의에서 로키에게 A 이상을 준 적이 없었다. 간신히 지난번에야 A를 받았다고 기고만장했건만, 이대로 지각해버렸다가는 모든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릴 터였다. 그는 재빨리 면도와 세수를 마치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택시를 타고 가야 할 판이었다.
"어째서 깨워주지 않은거야? 보니까 알람도 꺼져있잖아?!"
그는 신경질을 내며 책과 노트북을 챙겼다. 아침을 먹을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바튼이 손잡이를 잡고서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로키가 1층에 내려가 로비의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장난스레 클락션을 누르고 있는 약혼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애차인 폭스바겐 골프의 클락션을 몇번 울리더니 운전석의 창을 내려 로키에게 소리쳤다.
"어서 타시지요, 요툰헤임공! 오늘은 소인이 바래다드리겠나이다."
순간 로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붉어졌다. 그는 이미 거리와 아파트 주민들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며 재빨리 조수석에 앉고선 안전벨트를 매었다. 그리고 바튼의 옆구리를 몇번 주먹으로 때리면서 빨리 출발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내가 못살지..."
"뭐 어때. 덕분에 오늘은 평소보다 1시간 늦게 일어났잖아.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앞에 봉투, 아침이야. 어서 먹어."
그제서야 허기를 느꼈는지, 로키는 제 앞에 놓여있던 갈색봉투안에 손을 뻗었다. 베이글은 갓 구운것이었던지 상당히 따끈했고, 그 사이에 발라져있던 크림치즈는 이미 늑진하게 녹아져있었다. 질깃질깃하면서 짭쪼름한 빵을 먹으며 로키는 능글맞게 웃고 있는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억지로 재웠을때부터 알아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따뜻한 커피를 입안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 날, 바튼은 퇴근하자마자 상당히 멋진 마법을 경험해야 했다. 식탁이 식탁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수많은 서류들이 갑작스레 생긴 책장에 모조리 정리되어 있던 것이었다. 주방 한켠에 자리잡은 책장안에는 서류들과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언제 이 곳이 난장판이었던가 새침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책들의 주인장은 그 자리에 없었다. 식탁위의 쪽지-그동안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로키답지 않은 간지러운 말들이 적혀 있었다.-에서, 그가 옷을 가지러 저택에 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는 김에 자기 차도 갖고 오면 좋을텐데, 로키가 사랑하며 아끼는 재규어 스포츠카를 떠올리며 바튼은 물을 끓였다.
"그것도 벌써 3개월전의 일이지."
바튼의 친우이자 옆집의 주인인 나타샤 로마노프가 이상한 글자가 적힌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말하였다. 그녀의 곁에는 브루스 배너가 임신의 여파로 부어가는 그녀의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토니 스타크는 참으로 짠돌이라고 로키를 욕하며 맥주병을 들이켰다.
"그건 아니네, 내 동생은 사실 나보다도 돈이 많네. 나는 왕위를 물려받아야 재산을 물려받지만, 이미 그 아이는 친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거든."
그러면서 토르는 요툰헤임에 있는 성에 대해서 모두에게 말하려다 핀잔을 들어야 했다. 사실 이 자리, 즉 바튼의 아마추어대회 우승을 기념하는 자리에 있던 세사람-나타샤, 배너, 토니-은 이미 그 요툰헤임 성에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아스가르드는 왕권이 강하기로 유명한데다 국영기업들의 투자자들은 왕족이 맡는 경우가 많아서, 내탕금이 많기로도 유명하였다. 당연히 로키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바튼의 집에서 살았던 4개월동안 집세와 수도세, 전기세 같은 공과금을 한푼도 내지 않았으니 토니가 쪼잔하다고 말해도 부정하기는 어려우리라. 심지어 식비도 내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오지 토니의 야유가 더 커졌다. 토르는 제법 당황해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로키도 나름 생각이 있을걸게. 요즘은 계속 돌아다니고 있고."
"아무리 그래도 그 인간이 기둥서방짓을 했다는건-"
"누가 기둥서방이라고?'
갑작스런 날선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현관으로 향하였다. 매우 뾰루퉁하면서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로키 오딘슨이 현관에 서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신발장에 기대어 세우고는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떤 천한 입이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거지? 이 아스가르드의 로키 오딘슨이 감히 기둥서방이라고? 그리고 집주인은 어딨어? 형은 또 왜 여깄는거야? 제인을 데리고 아스가르드로 가야하잖아. 결혼식까지 이주 남았어."
그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신발을 벗었다. 오른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나타샤가 그 안에서 과자상자를 꺼내며 말하였다.
"집주인은 자. 그리고 그동안 네가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기둥서방이지. 게다가 끝나자마자 도망쳤잖아."
"도망친거 아냐, 일 끝나고 바빴다고. 하긴 너희같은 일반인들은 이 몸의 고충은 몰랐겠지만."
저걸 확, 하면서 한대 쥐어박으려는 손을 배너가 중간에 잡았다. 그는 로키가 불편해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바튼씨는 자고 있어요. 아무래도 서부까지 왔다갔다 하느라고 피곤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왕자님도 피곤하지 않나요? 아스가르드에서 곧바로 온걸로 아는데."
"..난 괜찮아, 갑작스레 먼저 미국으로 간 누구때문에 기분이 언짢긴 하지만."
로키는 제 형을 째려보며 말하자 토르는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워댔다. 이주전, 대한민국 정부에서 아스가르드 국왕 내외를 초청하여 오딘과 프리가, 토르와 로키는 가족여행 겸 방문을 하게 되었다. 태어난지 1년도 안된 어린 발더, 즉 토르와 로키의 막내동생은 너무나도 어렸기에 유모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고, 제인은 연구때문에 바튼도 전국대회에 학생들을 인솔해야 했기에 빠져야 했다. 덕분에 네명은 상당히 긴장되면서도 묘한 가족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아스가르드로 돌아가자마자 토르는 제인을 데리러 와야겠다며 미국으로 도망갔고, 로키는 며칠 더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바튼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기둥서방이라니,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선물이라고 특산과자까지 사왔건만, 이래서는 좋은 소리는 듣긴 글렀다.
"어쨌든 식비까지 안낸건 너무 한거 아냐? 집세를 안냈다는 것도 놀랐지만."
"애초에 약혼자끼리 그런건 무슨 신경이야? 게다가 식비는 낼 틈이 없었어. 클린트가 틈틈이 채워넣었으니까."
"그래도 집안일도 하나도 안했다고-"
"..이젠 할 필요가 없으니까 괜찮아."
그 말에 순간 모두의 시선이 로키에게 돌아갔다. 응? 모두들 궁금증에 가득 찬 눈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나름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소파의 빈자리에 앉아서는 주인없는 맥주캔을 따고서는 한모금 들이켰다.
"형은 알고 있겠지만, 졸업후에 대학원에서 공부하기로 되어있어. 그리고 이건 형은 모르는거지만, 대학원에 들어가면 따로 집을 얻어서 살게 될거야."
"응?"
토르는 정말로 처음에는 이해를 하지 못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머리가 돌아갔는지 경악에 가득찬 비명을 질렀다. 로키는 어떻게 졸업한건지 의문을 표하며 다시금 맥주를 들이켰다.
"아니, 그건 정말 내게 말해주지 않은게 아니더냐! 거기다가 독립이라니, 나는 처음 듣는 소리다, 아우야."
"그야 당연하지, 이게 처음으로 말하는거니까. 그래서 그동안 집을 알아보러 다녔고, 후보지 몇군데를 고른거야. 이번에 여행이 끝나면 클린트에게 말하려고 했어. 이사가자고, 이제 약혼도 했으니 같이 살아야하지 않겠냐고."
나타샤가 과자포장을 뜯으며, 그런 로키의 진중한 고백에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집안일을 안하고 기둥서방같은 일을 벌인것은 지워지지 않아, 왕자님."
왕자님,이라는 말에 상당히 비아냥이 섞여있었지만 모두들 나타샤의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래서 집 구하는데로 마사아주머니는 내가 데리고 갈게."
더이상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로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인이 자고 있을 침실로 향했다. 애인한테 도망치는거냐고 나타샤가 놀렸지만 애써 무시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인이 자고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커튼 너머로 저녁놀이 미세히 비추어나왔다. 옅은 주황빛을 맞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로키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렸고 작은 숨소리만 방안에 들렸다. 고생했는지 피부가 푸석거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가도 작게나마 미소짓고 있는 얼굴에 안도하기도 했다. 로키는 조심스레 바튼의 곁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몇번 소리를 내다가 바튼은 눈을 떴다. 반쯤 감긴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마저 사랑스러워서, 로키는 눈에 입맞추려는 충동을 간신히 멈추어야 했다.
"...로키?"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어쩐지 그 목소리마저 그리워서, 로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언제 온거야? 방금 왔어?"
"그래. 다녀왔어, 클린트."
그는 조심스레 클린트를 품에 안았다. 체취가 방의 냄새와 섞여 기묘한 향기를 자아냈다. 우승 축하해, 나지막히 말하자 바튼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고작 아마추어대회라면서 실없이 웃었지만 협탁 위에 트로피가 있는걸 보면 적잖이 기뻤던 모양이었다.
"잘 다녀왔어, 로키. 보고 싶었어, 내 장난의 신."
바튼은 로키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로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같이 살자, 클린트. 우리 같이 살자."
마치 오로라 아래에서 다시 청혼을 하던 그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며 나름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바튼의 아무렇지도 않게 터져나온 웃음에 모든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저녁놀이 방안을 붉게 물들였다. 바튼의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로키. 우리 이미 같이 살고 있잖아.... 잘 다녀왔어."
다시금 바튼의 웃음이 터졌다. 낮고도 감미로운 그 목소리에 로키도 웃음을 터뜨렸다. 곧 가을로 넘어가는데도 그들의 집은 시끄럽고도 따뜻한 공기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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