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냇배너 _ 라벤더 _ 요툰헤임 연작 외전 본문

AVGS/요툰헤임 연작

냇배너 _ 라벤더 _ 요툰헤임 연작 외전

rabbitvaseline 2015. 8. 20. 04:14




그 남자는 항상 7월 5일에 라벤더 꽃을 산다. 독립기념일 파티로 꽤나 피곤한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그는 어김없이 아침에 단골꽃집으로 가서 라벤더를 한아름 사왔다. 피곤한 것은 그 꽃집의 사장도 마찬가지였지만, 벌써 5년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알아서 라벤더 꽃을 미리 준비해놓았다. 다른 인사는 없다. 아침에 그가 들어서면 주인은 꽃다발을 안겨주고 돈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나누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독립기념일 파티에서 유난히 일찍 돌아가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머릿속에 박힌 금속 파편때문에 술은 마시지 못했지만, 언제나 이상하게도 파티가 파할 때까지 남아있곤 했었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는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다. 파티를 개최한 토니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그를 보내주었다.


"내일이 '그날'이야."


토니는 이렇게나 상당히 간단하고도 깔끔하게 그가 독립기념일 파티에서 항상 일찍 사라지는 것과 다음날 아침이면 라벤더 꽃다발을 산다는 것을 설명했다. 7월 5일, 5년전 그가 일했던 칼버대학에서 실험중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한 날이었다. 나로서는 토니가 무슨 기계가 폭주했다느니 어디가 합선되었다느니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날의 사고가 얼마나 컸고 피해자가 많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폭발은 방사능 사고로 번지지 않았지만, 그 때의 폭발로 5명이 사망했고 11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그는 그 연구의 수석연구진이었고, 마찬가지로 수석연구진이었던 아내 베티 로스 배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당시 폭발을 일으켰던 기계의 파편이 자리잡게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치명적인 곳은 피했기에 생명에도, 일상 생활에도 지장은 없었다.


다만 그는 이따금씩 자신의 몸을 들쑤는 분노를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몇년동안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토니의 연구실에 정착했다.


이게 내가 토니에게 들었던 과거였다, 예전의 그라면 절대로 내게 말해주지 않았을.



그 이후 어느날 저녁식사에서 그에게 죽은 전아내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로서는 상당히 무례한 질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미 우리의 관계가 그정도는 들어도 될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었고 그는 대답을 교묘히 피하고 있었다. 그가 만약 한발자국만 더 나아간다면 연인이라고 불러도 될 그런 관계,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기다리던 나는 그를 그렇게나 망설이게 하고 붙잡고 있던 베티 로스란 사람이 궁금했었다. 그는 나의 질문에 올것이 왔다고 느꼈는지, 잠시 놀라더니 이내 차분하게 그녀와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둘은 1살 차이로 그가 나이가 더 많았다. 방학기간동안 하버드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그 때 만났으며, 그 이후 만남을 지속해나갔다고 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그녀의 아버지인 로스 장군의 제안을 받고 칼버대학에서 연구를 했다. 그는 자신의 파트너인 베티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났죠. 결혼한지 반년만의 일이었어요. 나중에 수사결과를 들어보니, 같이 연구를 하던 제리란 사람이 전날 독립기념일 파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나사를 충분히 조이지 못했다는 게 원인이라더군요. 물론 그 사람도 죽었어요. 폭발하면서 날아온 파편에 머리가 뎅강, 하고 잘렸죠. 그는 순식간에 죽었댔어요, 아쉬운 일이었죠."


그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누가 결혼을 했다느니 하는 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머릿속의 파편을 제거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해서 결국에는 못했다는 것, 자신을 조롱하던 같은 병실의 환자가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가 그제서야 자신의 병증을 알게 되었다는 것, 반년간의 정신병원 생활, 캐나다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거친 여행. 그는 아주 담담하게 사고 이후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때의 표정은 어딘지 앓던 이를 뺀 것 같은 후련한 표정이라, 어쩌면 친우인 토니에게도 말하지 않은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했다.


"토니를 만난건 인도에서였어요. 거기서 돌팔이의사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찾아왔죠. '같이 일을 해보지 않겠어요?' 라고 얼마나 정중하게 말하던지. 물론 토니 스타크란 이름은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난 그를 개인으로 만나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사실은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몰랐던겁니다. 만약 알았다면, 저 먼 다른 나라로 도망쳤을거에요."


하지만 토니 스타크는 그를 붙잡았다. 도망갔을 거라는 그 얘기에, 나는 진심으로 토니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만약 그 때 그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와 함께 밥을 먹는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는 토니를 악우라고 표현했다. 그런 것 치고는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아보였다.




그렇게 저녁식사를 끝내고 그는 이런 나여도 괜찮느냐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에게 베티 로스라는 인물이 얼마나 큰 존재이며 얼마나 깊게 심장에 박혀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녀를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가 죽을때까지 그 여자는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 파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일은 정말로 끔찍하고 또 비참했지만, 그것들을 다 잊을 수 있을 정도로 그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달콤했고 포근했다. 마치 마약같아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난 그런 당신도 좋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울것같이 얼굴을 잔뜩 찌뿌리며 고맙다며, 간신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피트니스 클럽에서 보았을때, 손에 잔뜩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아마 화가 치밀어올라 집안을 잔뜩 부수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날 토니와 함께 그를 설득해서 병원에 데려갔다. 그는 뉴욕에 정착하면서 집안의 모든 물건을 철저히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바꾸었다. 행여나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면 위험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지만, 정작 그가 포겱을 휘두르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날 집안에는 유리상자안에 담긴 트로피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었다. 그는 분노에 빠져 트로피가 든 상자를 집안에 내던지며 난동을 부렸다. 분노가 가라앉자마자 진정제를 먹고, 손에 소독제를 들이부은 뒤 소파에서 잠을 잤다고 했다.

그의 전문의는 요즘 그의 분노발작이 잦아지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헬렌 조, 라고 동양계의 여성이었는데 그 이유를 나에게서 찾고 있었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했지만 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12살은 많은 데다가 잘생긴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분노발작때문에 내가 다칠까봐 걱정이 되어서라고 했다. 앞의 두가지 이유야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마지막 이유에 대해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치료를 끝내고나서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이런 나여도 괜찮느냐고 다시 물었다. 당신에게 손찌검을 할지도 모르는 이런 쓰레기같은 나여도 괜찮느냐는 함의가 있었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그의 분노는 조절하기 어려운 병이었다.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쓰레기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매우 지쳐있었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해도 그는 다시금 그걸 분노로 풀어낼 것이 분명했다.


"괜찮을거에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물이 떨어질 것만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헬렌은 나에게 경고했다. 만약 그를 완전히 내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빨리 손을 떼어버리라고, 그것이 그의 정신건강에 더 유익할 거라고 말이다.



나는 당분간 손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그에게는 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한달을 만나면 한달을 연락을 끊는 격월만남을 갖게 되었다. 아무런 스킨쉽도 연애표현도 하지 않고, 그저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로서 그렇게 한달을 지내고 다음 한달간은 아예 연락을 끊고, 피트니스 클럽에서도 모른 척을 했다. 그리고 그리워졌다싶으면 다시 한달, 위험해질것 같으면 다시 한달. 우리는 그 관계에 익숙해져갔고, 나름 괜찮았기에 나도 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3번, 약 6개월동안 우리는 그런 말도 안되는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런 만남이 끊긴 것은 정말로 우연히도, 그가 다시금 라벤더를 사고나서 얼마 안되어 터진 일 때문이었다.




그날 클린트는 점심에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그가 요새 연애문제때문에 큰 골치를 썩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친우의 모습에 절로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로키가 나에게 날 위해서라면 왕위계승권도 포기하겠다고 했어."


클린트는 그 바보같은 머저리 왕자에게 결국 청혼을 받았다. 총상을 회복하자마자 받은 프러포즈에 클린트는 정말 바보처럼 기뻐했다. 특히나 그 왕자나리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겠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 그는 로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긴, 나로서도 그 야심많은 남자가 왕위계승권이나 자신이 가진 특권을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연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심을 먹었다. 베이컨과 핫케이크, 샌드위치와 커피가 곁들어진 식사로 근처의 단골식당에서 자주 먹곤 하던 메뉴였다.

갑작스레 클린트의 핸드폰이 울려, 그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로 머저리 왕자의 형인 첫째 왕자의 목소리가 살짝씩 들렸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클린트의 점차 창백해지는 얼굴에서 나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점점 크게 뜨여지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클린트? 하고 내가 부르는 소리에도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전하. 지금 로키 거기에 있지 않나요? 지금 장난치시는겁니까?"


클린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식당 한켠에서 조그맣게 소리내고 있던 텔레비전의 화면 밑으로 글씨가 흘러갔다. 아스가르드 왕국 제 2왕자 로키 오딘슨, 산사태로 실종. 들고 있던 커피잔이 떨어지면서 큰 소리를 냈지만, 내 신경은 텔레비전에 꽂혀있을 수 밖에 없었다. 급히 클린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무너지기 직전인 그가 보였다.




▒ ▒ ▒




클린트는 곧바로 아스가르드로 떠났다. 나는 그가 일하고 있던 고등학교에 연락을 해야 했고 피트니스 클럽의 일들도 있었기에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스가르드로 비자가 신청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클린트는 토르가 왕자의 신분으로 곧바로 허가시켜줬다고 한다.- 내가 그를 다시 본 것은 한달 뒤에서였다. 그가 아스가르드에서 머물러있는 동안 나는 매일 전화를 걸었다. 클린트는 그 지옥속에서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채 하루하루 견디고 있었다. 목소리는 전에보다 힘이 없어졌으며 심지어 어떤 날은 떨고 있었다. 아스가르드로 가는 비자가 수락되자 그에게 가겠다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그는 굳이 올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동안, 나 또한 뒤에서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둘 다 맨발이었다.

당연히도 '그'에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 자신과 클린트에 대한 일들로 정신이 없었으며, 차마 그에게 연락할 여유도 없었다. 나의 모든 정신과 시선들은 모두 다 나의 친우를 향하고 있었다. 그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별 다른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그걸 확인하면서 씁쓸해했었고, 피트니스 클럽에서조차도 그가 자취를 감추자 이대로 끝인건가 라고 낙담했었다.




클린트는 쫓겨나듯 뉴욕으로 돌아왔다. 실종된 왕자의 아비인 아스가르드의 왕비는 아들의 연인을 견딜 수 없어했다. 그녀가 딱히 호모포비아라던가 아들의 동성연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어했고, 클린트는 그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돌아온 클린트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라서, 나는 학교에 연락하여 결국 대신 병가를 신청하고 그를 근처 병원에 입원시켰다. 제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지 위기능은 바닥을 쳤고 근육마저도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클린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단련은 게을리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의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몸을 본 그 순간, 그제서야 나는 로키가 클린트의 일부를 앗아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걸 바라보는 나도 속이 쓰려서, 정말로 클린트를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수색은 난항을 겪고 있었고,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에서도 비극적인 아스가르드의 왕자의 실종이 잊혀져갔다. 카운슬링을 받으면서 클린트는 회복해나갔다. 몸도 예전처럼 양궁선수의 몸을 되찾았고, 실력도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침울해했으며 때때로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보면 항상 평소에는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입에 달고 있었다. 그래도 곧 회복되려니, 하면서 나는 초조하게 곁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다시 만난 것은 클린트가 퇴원하고 며칠 지나서였다. 그는 얼굴과 팔에 붕대를 두른 채로 피트니스 클럽의 입구에 서 있었다. 아마 퇴근할 시간에 맞춰 나를 기다린 모양이었는데,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뺨을 때렸다.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면서 흘러나왔다. 그에게 심한말을 내뱉었는 것 같았는데, 그런 말들을 다 쏟아내고나서 정신을 차리자 그가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나도 슬슬 무리라고 깨달았다.


"실은 폭력사건에 휘말렸어요. 매스컴에는 비밀로 했지만 토니가 납치될뻔 했었거든요."


그러고보니 토니 스타크도 요새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나와서 자세를 교정받곤 했었는데 말이다.


"그것때문에 꽤 많이 다쳐서, 이것도 겨우 회복된거에요."

"어째서 말하지 않았어요? 연락은요?"

"...바튼씨가 큰 어려움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연인이 실종되었다면서요. 당신에게 짐을 주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는 클린트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저 동성연인으로 꽤나 까다로운 성격의 경영대 학생이란 것만 토니와 내가 알려줬을 뿐이었다. 나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는 그 말에 나는 섭섭함을 느끼는 한편 고마움도 같이 느꼈다. 그의 말대로 만약 그가 다쳤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었다면 확실히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바튼씨의 상태는 어때요?"

"...솔직히 좋지 않아요. 계속 잠을 제대로 못자는 것 같아요. 덕분에 출퇴근할때마다 제가 운전하고요. 그리고 매일 자물쇠를 열어놓고 자요, 아마 그 연인이 언제라도 돌아올것 같다고 생각하나봐요."


자기 전에는 클린트의 집에 들러서 문이 잠겨져있나 확인했다. 우리가 사는 맨션의 자물쇠는 번호키로 되어있기 때문에, 항상 나는 조용히 집의 번호키를 잠금 표시로 하고 다시 문을 닫곤 하였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3달? 그정도밖에 안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나타샤, 3개월은 상당히 짧은 시간이에요. 어쩜 그는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걸수도 있어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더군다나 제 눈앞에서 본 것도 아니고 시체조차 보지도 못했으니 힘들게 당연해요."


그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말했다.


"하지만 바튼씨도 알게 될거에요. 아직 남은 시간은 기니까, 그 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결국 연인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겠죠. 시간이 흐르면요."


당신은 결국 인정했느냐, 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마치 오래전 일을 회상시키는 듯한 눈빛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갑작스레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런 때일수록 나타샤가 곁에 있어줘야돼요. 물론 나타샤가 힘든건 알고 있어요. 정말로, 정말로 견디기 힘들다 싶으면 나에게 연락해요."

"네?"

"솔직히 남의 일 같지도 않고, 또 나타샤가 때리는거 엄청 아프거든요. 봐요, 아마 내일쯤이면 멍이 들지도 모른다고요."


그는 환히 웃으면서 방금 전 내가 때렸던 오른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과연, 공격으로 인해 벌개진 손자국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리고는 알았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클린트는 악몽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날이 갈수록 커졌다. 어느 날은 내가 그의 집에 쳐들어가 그의 상태를 확인한 적도 있었다. 결국 나는 그런 밤이 올때마다 억지로 클린트에게 수면제를 먹였다. 그는 나에게 위험한 일이라 만류했지만, 클린트의 상태를 보자 인정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약은 자주 먹이기에는 너무 위험한 약이에요."


그는 다음날 클린트에게 먹일, 어느정도 안전한 수면유도제를 나에게 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틈틈히 그가 악몽을 꿀 때마다, 괴로워하며 잠에서 깰때마다 그에게 그 약을 먹였다. 빈도는 점차 적어져갔고, 어느날에는 급기야 로키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이 집에서 사라져있었다. 그 이후로 그가 악몽을 꾸는 일은 사라졌다.

나는 클린트의 일들을 그에게 털어놓았고, 우리의 관계도 살짝은 진전되어갔다. 우리는 틈틈히 같이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았다. 가끔씩은 바에 가서 그는 논알콜 음료를, 나는 칵테일을 먹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전처럼 이런 나라도 괜찮겠냐는 뉘앙스로 말하지 않았으며, 나도 그 사실에 안도하며 자주 그에게 마음을 기댔다. 그는 그 나이, 즉 40대 중반의 남자답게 그리고 그 역시 연인을 잃어버린 사람 답게 나에게 충고를 해주었고, 때때로는 수면유도제를 주었던 일처럼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가끔씩은, 정말로 가끔씩은 베티 로스가 죽고나서 생겼던 트라우마라던가 PTSD를 말해주기도 하였다.


"토니와 같이 일하면서, 가끔씩 연구실에 사람이 오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 갈색에 긴 머리카락인 사람을 보면 일단은 쫓아내죠."

"베티가 긴 머리였나요?"

"네. 밖에서는 괜찮은데, 역시나 안에서는 안되더라고요. 쫓겨난 사람은 머리를 묶고서 들어와야해요."

"그럼 난 괜찮겠네요. 난 빨갛고 또 머리도 단발이니까."


그건 좀 다른 이야기에요, 라고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베티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분위기는 점차 누그러졌다. 처음 아내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했을때의 어느정도 경직된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몇번 손을 떼려 움직이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 심장이 아주 조심스럽게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클린트는 회복되어가는 것 처럼 보였다. 정말로. 사고가 일어나고 9개월이 지나자 그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가끔씩 아스가르드어를 뽐내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내 착각으로, 사실 그는 속이 매우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썩어빠진 음식물들로 가득찬 냉장고를 확인하고는, 그와 함께 주방에서 울부짖었다. 로키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스테이크, 1개월간의 지옥에서 돌아오고난 뒤에야 냉장고에서 발견했었는데 차마 그것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그는 냉장고 통채로 버렸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겨서는 안될 무언가가 끊겼다고 경고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그 후 약 3개월 뒤, 나는 그와 함께 라벤더 꽃다발을 들고는 베티 로스의 묘소에 갔다. 내가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흔쾌히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아침에 포장한 라벤더 향기는 매우 짙었으며, 그가 운전하는 SUV안에 가득 퍼지고 있었다. 묘지는 뉴욕 근방에 있는 공동묘지로, 그의 아버지인 로스 장군에 의해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름의 공동묘지는 상당히 더웠지만 하늘은 매우 맑았고, 바람도 한점 불지 않아 그야말로 청량한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베티 로스의 묘지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자리잡고 있었다.


"꽤나 명당자리였어요. 베티는 수목장도 해보고 싶었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죠. 그래서 대신 나무 아래에라도 묻은거에요. 사실 묻은거라도 별거 없어요. 옷가지와 결혼반지 뿐이었죠. 폭발이 너무나도 커서, 기계 근처에 있던 그녀는 증발하듯 사라져버렸거든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그 때의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오랫만이라고 인사를 하고는 묘지석 밑에 라벤더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묵념했다. 젊고 똑똑하고 예뻤던 사람, 그녀는 그의 가슴을 그렇게나 찢어놓고도 그의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갈 터였다.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는 상대가 아닌가.



순간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바람과 함께 라벤더의 향기마저 내 콧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베티 로스 다운 향기였다.




▒ ▒ ▒



클린트의 책상 위에서 아스가르드의 지도를 발견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순백색과 회색으로 표현된 지도 위에 붉은 글씨로 서쪽 한구석이 표시되어있었다. 요툰헤임, 이라고 영어로 쓰인 그 곳은 나도 잘 알고 있던 곳이었다. 나는 급히 방 한구석에 먼지나 쌓이고 있던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날짜에 휴가,라고 붉은 글씨가 쓰여져있었고, 그 다음날에는 그저 붉은색 동그라미만 쳐져있을 뿐이었다.



아뿔싸.



나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토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기다리는 몇초동안 내 심장은 곧바로 말라붙을 작정이었는지 박동소리에 박차를 가했다. 제발, 부디.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여보세요, 라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아마 그도 갑작스런 소리에 놀랐던 모양인지, 무슨 일이냐고 크게 소리냈다.


"클린트! 클린트가...하아... 토니, 부탁이에요. 영국의 히드로공항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고?!"

"오늘 휴가를 간다고해서, 영국에 간다길래... 내가 바보였지, 미친년이지, 젠장."

"진정해, 로마노프. 영국의 히드로공항이라고? 잠깐, 오늘은... 오, 이 미친자식이!"


그는 내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급히 제 인공지능 집사에게 당장 히드로공항으로 가는 아스가르드행 항공기편과 CCTV를 수색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괜찮다고, 곧바로 토르에게 전화를 걸겠노라고 말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만약에, 만약에라도. 그 만약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클린트는 결국 제 냉장고까지 다 버렸고, 로키가 그의 집에 있었던 모든 흔적들을 버렸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그동안 내가 했었던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나는 클린트에게 한시빨리라도 그 머저리를 잊으라고 주문했었지만, 사실 '그'의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무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시간이 지나도 잊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미치도록 사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난 클린트와 로키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클린트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리가 없다는 것도.



정신을 차린 것은 초인종소리때문이었다. 낮시간대에 클린트를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인영이 나에게 쏟아졌다. 나타샤! 내가 사랑해마지 않은 목소리로 그는 나를 제 품에 안았다. 숨이 점점 가빠져가고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간신히 눈물을 참으려 애를 쓰는 수밖에는.

결국 클린트는 로키가 실종되었던 산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아스가르드로 향하는 토니의 개인기에서였다. 다 끝난건가, 지난 1년동안 클린트가 고생하는 꼴을 보니 오히려 그게 더 잘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머릿속에서 뚝, 하고 끊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대로 그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둘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보육원에 새로 들어온 녀석은 덩치는 작고 약해서, 부모가 저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것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괴롭힘 당하는 클린트를 감싸주고는, 누나가 되어주겠노라고 소리쳤다. 클린트가 눈물로 벌개진 눈을 초승달처럼 휘면서 웃었다.



눈을 뜨니 창밖에는 어느새 짙푸른 하늘이 펼쳐져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려다 여기가 미국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내가 깨어난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나긋하게 말했다.


"지금은 새벽 2시에요."

"밖이 너무 밝은데요?"


아마 내 목소리에는 힘이 다 빠져있었을 것이다.


"백야라고해서, 원래 극지방에서는 해가 지지 않기도 해요. 아스가르드도 그쪽이니까. 나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걱정마요, 나타샤. 그는 내 눈을 제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그의 손바닥은 건조했고 또한 따뜻했다. 너무나도 따뜻해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꿈속의 세상이 아니라 이 건조한 비행기 안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클린트는 저 먼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랑하는 이의 곁으로. 개자식.

만약에, 만약에라도 클린트가 돌아온다면,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그 머저리가 돌려보내주기라도 한다면 나는 클린트의 뺨을 정말로 여태껏 쏟았던 모든 운동보다도 힘껏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발 내가 네 뺨을 때릴 수 있게 해줘.

나는 클린트가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공항에서 듣고는 기절해버렸다고 한다. 급히 근처의 병원에 이송되었으며, 정신을 차리자 옆에 그가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대고 잠들어있었다. 아침 첫 기차로 요툰헤임으로 가니, 요툰헤임역은 매스컴과 기자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토니가 나에게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스컴들이 그토록 놀라면서 특종으로 다루었던 것은 클린트가 아니라 그들의 잃어버렸던 둘째 왕자였다. 클린트를 설산에서 데리고 내려온 것은 정확히 1년전에 실종된 로키였다.




이틀 뒤에서야 나는 클린트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결심한대로 내 생애 가장 세게 뺨을 때렸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친구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는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을 벌려서 미안, 이라고 말하자 나는 그를 품에 껴안고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몇번이고 반복해서 다행이라고 말하였다. 돌아와서 고마워. 그 말에 클린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클린트가 돌아왔다.





아스가르드에 머문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무렵, 피트니스 클럽의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에게 장기휴가를 너무 급하게 신청한 것이 미안했던 나는 사장의 말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텔레비전을 켜놓았다. 분명 드라마를 하고 있을 시간대라 생각했는데, 몇번 얼굴을 보아서 낯이 익은 흑인이 단상에 서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어라서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가끔씩 터져나오는 로키, 라는 말에 둘째왕자님이 살아돌아온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 영상을 가끔씩 흘겨보면서 그에게 문자는 보냈다. 그는 지금쯤 토니와 함께 왕비전하를 알현하고 있을 터였다. 문자도 보기 힘드려나, 나는 다시금 시선을 텔레비전에 옮겼고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운 그 자세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텔레비전 화면 상단에 클린트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떠 있었다. 어? 어?! 결국 나는 호텔에서 큰 소리를 내면서 놀라고 말았는데, 청소부의 말로는 복도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고 했다.

오딘은 그들의 결혼을 승낙했고, 의회도 국왕의 결정을 존중하였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모르는 전화번호로 문자와 전화가 이어졌다. 거진 90%가 왕족의 최초 동성결혼의 주인공이 된 클린트 바튼의 친구로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질렸기 때문에-그가 금메달을 땄을때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배터리를 빼놓을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상당히 많이 걱정하였다고 했다. 아무튼 덕분에 클린트는 휴가를 더 연장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잠잠해질때까지는 당분간 바깥 외출은 힘들것 같고, 그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매스컴이 달라붙을 것은 안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역시나 걱정한대로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매스컴의 포화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새로운 연구때문에 매우 바쁜 상태여서 가끔씩 전화통화를 나누는 것 말고는 만남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그리워했고,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잠시 얼굴만 보고 가겠다면서 퇴근길에 잠깐 본 적도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너무나도 기특하여 키스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애써 그것을 마다하고는 다시금 연구실로 발길을 옮겼다. 인삿말을 나누는 것이 서글픈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은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미안해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서 그랬어요."

"...마음의 준비요?"


그 때 나는 손톱에 네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라는 말에 나는 매니큐어를 채 손톱에 바르지도 못한채 가만히 있었다.


"미안해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그의 말 뜻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여태껏 망설이고 있었지만 이제 그 갈피를 잡은 것이다! 나는 순간 놀라서 매니큐어를 쏟아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꿀럭거리며 카펫 위로 떨어지는 붉은색 매니큐어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그의 잘 자라는 인사를 받았다. 머리 위에서 샹투스가 울려퍼지는 기분이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클린트에게 다시 전화를 넣었는데, 그는 막 잠에서 깬 목소리로 잘 되었다고 기뻐해주었다. 네가 빨리 여기로 왔으면 좋겠어. 당장에라도 클린트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그는 붉은 장미꽃다발을 들고 내 집앞에 서 있었다. 그 붉은색 자태에 나는 지난번 베티의 묘소에 갔을때 보았던 라벤더 꽃다발을 떠올렸다. 그때에는 어딘지 처연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들고 있던 모습이 어딘지 쓸쓸하고 어른스러워보였는데, 장미꽃다발을 든 모습을 보니 그가 한결 젊어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는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저가 들고 있던 꽃다발처럼 얼굴을 붉히며 -정말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다시금 미안하고 말하였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고마워요, 브루스."


나는 그 말을 끝내자마자 그의 넥타이를 부여잡고 키스했다. 얼굴을 붉힌 것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차마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몇번 고개를 젓다가 이내 내 키스에 응답하듯 입을 열었다. 살짝 눈을 떠 그를 바라보니 안경 너머로 감은 눈이 살짝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 허리와 뒷목에 팔을 두르고는 서툴게 키스에 응했다. 나는 재빨리 번호키를 눌렀고 자물쇠가 풀렸다는 소리가 나자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날 붙잡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꽃다발이 타일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으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혀와 이와 잇몸을 탐했다. 그는 키스가 오랜만이었는지 상당히 서투른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능숙하게 내 요구를 받아주고 있었다. 얼마나 하고 싶었던가, 얼마나 그와 이러고 싶었던가. 차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벌거진 얼굴로 나는 그의 재킷을 벗겼다. 재킷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눈을 뜬 그의 몸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브루스, 갑자기 왜-"


그의 한손은 내 목에 있었으며 나머지 한손은 내 셔츠를 바지 밖으로 꺼내던 중이었다. 나는 혹시나해서 고개를 돌렸고, 고개를 돌린 순간 주방에서 기묘한 포즈로 허리를 숙이고 손을 모은채로 팔을 앞으로 뻗은 친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옆에는 그의 약혼자가 커다란 하얀색 케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케이크 위에는 붉고 길다란 양초 하나가 꽂혀 있었고, 그 위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촛농이 하얀 케이크 위로 떨어졌다. 그때까지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채 그대로 굳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


그는 조심스레 내 몸에서 멀어진 후에 재빨리 재킷과 꽃다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자동자물쇠를 열려고 버튼을 누르려 했다.


"안돼요!"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또한 그가 들고 있던 장미꽃처럼 붉었다. 순간 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주방에도 이어졌다. 그의 얼굴이 더욱 더 붉어졌다. 이제는 울음을 터뜨리려 하는 것같아서, 나는 재빨리 그를 내 품에 안고는 괜찮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 위로 클린트와 로키까지 합세했다. 그는 다시금 장미꽃을 떨어뜨렸다. 장미향이 내 코에 와닿을 쯤에 가서야, 그의 실없는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원래부터 나타샤는 클린트때문에 힘들었으니 슬슬 행복해지는것도... 그나저나 냇배너로 써놓고 요툰헤임연작을 다시 쓰는 느낌이...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