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냇배너 _ 소중한 사람 _ 요툰헤임연작 외전 본문
수술실 바깥의 복도에는 냉기와 함께 병원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다. 간헐적으로 켜져있는 형광등 덕택에 복도는 사뭇 어둑어둑했다. 공기또한 침체되어 있는데다 밤이니만큼 돌아다니는 사람도, 소리가 날만한 일도 없었다. 그 덕분에 나타샤는 자신의 5살배기 딸을 보호자소파에 눕히고 무사히 잠을 재울 수 있었다. 아이는 수술대에 올라가 있는것이 누구인지, 왜 자신이 이곳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할지도 모른채 소파위에서 새근새근 잠들고 있었다. 아이의 자그마한 몸 위로 덮힌 유치한 애니메이션담요가 조그맣게 오르내리는걸 보고 있는 나타샤의 기분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브루스 배너가 격심한 두통을 호소하고 입원한 것이 닷새 전, 뇌에 박혀있던 파편이 문제를 일으킨 것을 확인한게 이틀 전이었다. 갑작스레 정해진 수술에 놀라기는 배너도 마찬가지라, 그는 만약에 발생할 사태에 대비하여 급히 자신의 유언장을 수정해야했다. 그 전부터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갱신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진지하게 모든 내용들을 수정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과 나타샤의 딸, 로베르타 프랜시스 로마노프에 대한 사항도 당연히 있었다.
나타샤는 아이의 갈색머리카락을 조심스렇게 쓰다듬고서는 다시 수술중이라고 밝혀져있는 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술에 들어간지 벌써 5시간째였다. 그가 사고를 당할 때까지만 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술이었던데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상당히 고난도라는 것은 토니의 입을 통해 들었다. 배너는 자신을 안정시키려고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워서, 수술을 앞둔 연인을 제 품에 안고 괜찮다고 속삭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수술대로 가기 전, 사랑스러운 딸에게 곰돌이와 함께 놀자며 약속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아빠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겠다고 말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평소 아이의 앞에서는 진중한 모습을 보이던 배너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왔어?"
그녀는 기척도 보이지 않은 채 나타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5시간이라는 시간동안 긴장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모습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평상시보다 수척해져있었다. 보기 힘든 그 모습에 클린트 바튼은 그녀에게 차가운 레드불 캔을 건네었다.
"센스없는 놈, 이럴때는 커피가 좋아."
"브루스의 상태는 어때?"
나타샤는 그럭저럭 괜찮은것 같다면서 캔의 뚜껑을 열었다.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에너지드링크를 한모금 넘기자 그나마 잃어버릴것 같은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바튼은 비닐봉투에서 초코바를 건네었고, 그녀는 무심히 그것을 한입 뜯어먹었다.
"좀 쉬고 오는게 어때?"
"너만 하려고. 괜찮아, 아직 5시간이니까."
"로빈은 내가 봐줄테니까 한숨 쉬는게 어때?"
그는 자신의 질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는 춥고 불편한 것도 아랑곳 않는다는 듯, 아주 편안히 잠들어있었다. 나타샤는 고개를 젓고서는 오히려 아이를 데려가라고 말하였다. 이런 곳에서 고생하는건 자신으로도 충분하리라 본 것이다.
"엄마도 가야지. 애가 일어났을때 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바튼이 퉁명스레 내놓은 말에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제 어미의 품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뱉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뻐근했던 근육이 풀리는 느낌에 멍해있던 머리도 점차 맑아지는 것 같았다. 수술이 언제 끝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제 사랑스러운 연인의 곁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아이야 고생스럽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미안하게도 자신의 욕심을 따르기로 했다.
"미안, 그럼 로빈도 못가겠네."
그 말에 바튼은 한숨을 내쉬며 나타샤의 곁에 앉았다. 가방안에서 두터운 담요를 꺼내어서는 그녀와 자신의 몸에 덮었다. 한기를 가려주는 친우의 방어막에 그녀는 몸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약간 풀렸다.
"...누가 보면 부부로 보겠다."
"기사에 실리면 로키가 기자를 죽여버릴거야. 가뜩이나 논문때문에 신경이 곤두세워져있으니까."
그 말에 나타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 신경질적이고 성격 더러운 둘째왕자님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로키 오딘슨은 아이들-입양한-을 돌보며 논문에 매진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잘 안풀리는지 히스테리를 부리는 일이 늘어나서, 바튼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샤의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고마워."
나타샤는 천천히 바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부디 그 이의 수술이 무사히 마치기를, 그래서 그가 딸을 안아볼 수 있기만을 바라면서.
안개가 어려있었다. 그는 어둡고 앞길 하나 보이지 않는 풀길속을 헤매고 있었다. 습한 공기가 폐에 달라붙어 불쾌했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발은 맨발이었고 찐득한 진흙이 발바닥에 달라붙었지만 그에겐 '무언가'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는 장소에 다다르자 그의 걸음도 멈출 수 있었다. 여자가 책상에 앉아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서는 샴푸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틀어올리고는 컴퓨터에 코를 박고는 연구를 하곤 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 너무나도 사랑해마지 않았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는 자신도 그 노래를 따라불렀다. 간지러워, 브루스. 상냥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그리웠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갔다. 보고싶었어, 만나고싶었어, 베티. 입밖으로는 꺼낼 수 없던 그 단어가, 그 이름이 얼마나 이렇게 쉽게 나오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있던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안돼, 돌아가.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슨 소리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브루스, 돌아가.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다른 목소리로 변해갔다. 살짝은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그녀의 길다란 갈색 머리카락도 점차 짧아지고 구불거려지다가 이내 붉어졌다. 태양을 닮은 색깔, 밤을 함께 보내고 같이 아침을 맞이했을 때의 아름다운 일출의 색깔. 그 색깔에 넋을 잃고있다가 누군가가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것에 자신의 아랫쪽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브루스."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은 자그마한 천사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빨리 테디랑 같이 놀자."
그는 차마 말로 못할 정도의 안도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머릿속이 가벼웠다. 그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천사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오."
설마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이 연인의 퉁퉁 불은 얼굴이라니, 그는 이 얼굴을 두어번 더 본 적이 있었지만 언제봐도 낯설었다. 코와 입에 붙어있는 인공호흡기가 상당히 불편해서 목을 몇번 돌리다가 이내 포기하니 다시 연인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얼마나 많이 울었으면 눈두덩이가 부어있는데다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도 번져 있었다.
"지금 모습 귀여운데요?"
그 모습에 나타샤는 발끈하다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엄마, 걱정에 찬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빈, 자신의 이름을 따 로베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더니 활짝 웃었다.
"일어났어, 브루스?"
"응, 잘 있었어, 로베르타?"
그는 가까스로 한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머리카락은 구불거리고 윤기가 흘렀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한올한올씩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이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병실안에는 나타샤와 로베르타만이 배너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토니의 호의덕에 얻어낸 1인실 병실침대 근처에는 여러 기계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배너는 고개를 들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나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화장이 번진 것을 눈치챘는지 급히 눈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져 있고, 피부도 푸석해졌다. 머리카락도 살짝은 헝클어진 것이 꽤나 장시간동안 자신의 수술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아이는 잠이 온다며 배너의 침대로 올라가려고 애를 썼다. 로베르타는 항상 배너가 자신을 어둡고 진지한 표정으로 보았는데도 그의 품으로 파고들기를 좋아했다. 아이는 그에게 평생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으나 아빠의 냄새를 좋아했고 배너도 마찬가지였다. 안된다고 만류하려던 나타샤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침대에 올라간 것이 성공한 로베르타는 신발을 벗고는 배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선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 브루스를 낫게 해주는거니까."
"알았어요, 엄마."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그렇게 말하고는 곧 잠에 들었다. 한손으로 배너의 허리를 껴안고 잠든 모습이 꽤나 귀여워서 다시 배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나타샤는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옆에 있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배너는 가슴이 저렸다.
"...나 몇시간동안 누워있던거죠?"
"거의 하루요. 수술은 7시간 걸렸어요. 걱정말아요, 당신 머릿속의 그건 확실히 빼냈으니까."
나타샤는 침대 옆 협탁에 올려져있던 작은 비닐봉투를 가리켰다. 정사각형의 작은 봉투 안에는 직경 3cm 크기의 자그마한 쇳조각이 들어있었다. 그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분노를 참지 말라고 부추겼던 괴물의 실체는 생각보다는 너무나도 작고 하찮아서 배너는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저것때문에 그는 세계를 방황했고, 저 하찮은 물건때문에 그는 연인을 거부했으며, 저 괴물때문에 그는 자신의 딸아이 곁을 지켜줄 수 없었다. 나타샤는 배너와 로베르타를 절대 둘이서만 있게 하지 않았다. 둘은 아이를 가졌음에도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의 성은 로마노프가 되어야 했다. 물론 그런 일은 둘에게도 크나큰 상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가정폭력범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 괴물이 이제는 사라졌다. 그동안 있었던 여러 일들이 떠올랐고, 뭔가 씁쓸하지만 시원했다. 이제 머릿속에서 그를 부추기는 괴물은 죽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타샤는 배너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고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을, 그녀는 너무나도 사랑했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검사만 몇개 더 받으면... 그래서 괜찮아지면 퇴원해도 된대요."
배너는 그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순간 그녀는 그를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토니가 주최한 파티였다. 그곳에서 배너는 토니와 함께 저런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그마한 탁구공으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에, 나타샤는 정말로 자각도 못한채 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퇴원하면.. 브루스,"
나타샤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무언가 긴장되는 상황이란걸 알아챘는지 배너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않았다.
"...내 곁에서 살아주세요. 내가 당신 아픈 기억은 다 잊게 해줄테니까."
나타샤의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그녀의 심장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친듯이 뛰고 있다고 느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붉어져 있어서 귀엽기까지 했다. 부끄러워하는 연인의 모습을 보니 낯설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안도가 되었다. 배너는 인공호흡기를 벗고선, 조심스레 나타샤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 하나하나씩 입을 맞추었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병실에 울렸다.
"..당신과 로빈이 아니었다면, 아마 난 행복이 뭔지도 몰랐을거에요.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내가..."
그는 뜸을 들이다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얼굴도 새빨갛게 물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다가 사그라졌다. 나타샤는 귀끝까지 붉어져, 역시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연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아주 천천히, 느리게. 특히 네번째 손가락에서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공기마저 부끄러워 홍조를 띄는 것 같았다. 심장소리가 상대방에게 들킬 것 같아서 더더욱 부끄러웠다. 둘은 이 상황이 정말로 말도 안되게 난감하고 기쁘고 행복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에 그도 고개를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한동안 둘은 그렇게 움직이지도 못한 채, 새근히 잠자는 아이의 숨소리와 심장소리,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찬찬히, 분홍빛 공기속에서 즐겼다.
공작새에서는 풀지 못했던 프러포즈썰 드디어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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