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로키바튼 _ 요툰헤임의 아이들 _ 요툰헤임 연작 06 본문
약혼자가 갑자기 콘서트 티켓을 던진 것은 이른 양궁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대학원 준비와 새로 살 집 준비를 하느라고 몸이 여러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던 로키 오딘슨, 즉 클린트 바튼의 약혼자이자 아스가르드 왕국의 제 2왕자이자 요툰헤임 지방의 영주인 이 남자는 최근 바튼의 집에서 거의 반쯤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옷을 가져다 입을 때를 빼고는 모든 생활을 그의 집에서 보내고 있었고, 최근 친구들 사이에서 돌곤 하던 기둥서방 가설을 파훼하기 위해서 집안일은 하지 않는 대신 하루 3시간동안 일해줄 가정부를 고용했다. 확실히 덕분에 바튼은 최근 쾌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방과후 양궁교실을 끝내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6시 쯤 되었는데, 퇴근하자마자 식탁에 차려진 화려한 음식들과 먼지 한톨없이 정돈된 집안을 보며 감동에 젖은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약혼자인 로키는 같이 저녁을 먹으면 곧바로 침대에서 골아떨어졌다. 최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나눈 기억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바튼은 약혼자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어야 했다.
그걸 눈치채고 있었을까, 장난을 좋아하는 자신의 신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바튼에게 티켓을 건네었다. 티켓에는 Gjallarhorn이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적혀있었고, 날짜와 시간, 좌석의 위치가 아래에 나열되어 있었다. 바튼은 콘서트 시간이 바로 오늘 7시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순간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로키 오딘슨이라는 남자는 이렇게나 갑작스런 데이트를 제안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로키는 놀란 자신의 약혼자를 향해 뭘 그리 놀라냐며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제 3시간 남았어."
"나도 오늘 갑자기 받은거라 어쩔 수 없었어. 어떻게든 꼭 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게다가 어머니에게 말했더니 꼭 가서 앨범을 사오라고 하던걸."
"앨범?"
"응, 앨범. 어머니가 이 밴드 팬이야."
그러고보니 로키는 평소보다도 더 단정한 정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큰 행사가 아니고는 입지 않는 스리피스 수트에 의자에는 녹색 비단 스카프가 걸려져 있었으며 식탁 위에는 공작가문의 가보라는 뱀이 또아리를 두르고 있는 지팡이가 올려져 있었다. 그제서야 바튼은 이 콘서트가 로키에게도 크고 중요한 행사란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콘서트 티켓은 매우 섬세한 북유럽 장식들이 세세하게 새겨져있고, Gjallarhorn을 쓴 폰트도 고풍스러웠기 때문에 저절로 이 걀라르호른이라는 밴드에 대해서 상상을 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일국의 왕비가 팬이라고 한다면 어느정도 고풍스러울 것이 분명했고, 로키가 저렇게나 정장을 차려입었다는걸 보면 분명 격식을 차릴 수 밖에 없는 공연을 하는 밴드일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페라하우스나 고급 공연장에서 멋들어지게 재즈와 민속음악이 혼합된 연주를 벌이는 빅밴드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걀라르호른이라 한다면 아스가르드의 신화에 나온 나팔의 이름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그런 상상은 더욱 날개를 타고 머릿속에서 확장되었다.
"혹시 뭐 민속음악같은걸 접목한 그런거야?"
"눈치가 빨라졌군, 맞아. 그래서 노인들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실 요툰헤임에서 만들어졌는데 마침 미국에서 콘서트를 한다길래."
"아스가르드 민속음악은 처음인데."
"별로 그런걸 따지지 않아도 돼. 오랜만의 데이트잖아? 레스토랑에서 밥이나 먹고 가면 시간이 맞을거야."
레스토랑이라는 단어에 바튼은 데이트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왕자님의 모습을 한 약혼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옷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로키가 선물한 정장이 어디에 있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미슐랭 3성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셰프가 내놓은 일류 요리는 너무나도 맛있었기에 종반에는 씹어넘기기 아까울 정도였다. 로키는 먹는 속도가 차츰 느려지는 연인의 모습에 결혼하면 질리도록 먹을거라고 말하며 와인을 넘겼다. 저 와인도 분명 0자리가 많이 붙은 물건이라고 확신하며 바튼은 농밀한 돌체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둘은 택시를 타고 오늘의 콘서트가 있을 콘서트홀로 향했다.
"그나저나 왕비전하가 사오라고 하는걸 보면 정말로 유명한가봐."
"요툰헤임에서는 국민밴드라고 불릴 정도야. 내가 10살때쯤 생겼다고하니 벌써 15년은 넘었겠군."
브룩클린 외곽에 위치하였다는 콘서트장은 바튼도 몇번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현재 가르치고 있는 고등학교의 학생 몇몇은 종종 그 콘서트장에서 록콘서트를 즐기다 부모에게 잡히곤 하였다. 나타샤의 말로는 난장판이라는 말을 그대로 3D화한 곳이라던데, 굳이 그런 곳을 콘서트장으로 고른 것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비록 택시 바깥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점차 수상하게 흘러가더라도 말이다.
"옆에도 콘서트장이 있던가?"
어째선지 크롬도금을 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들이 나타났고, 은 액세서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긴 머리의 남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길가에서 담배를 태우며 잡담을 떠들고 있었다. 과격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화장을 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택시가 점점 콘서트장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그런 수상한 무리들이 점점 늘어났다. 바튼의 순수한 질문에 로키가 대답하였다.
"아니, 그냥 단독 콘서트야."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괴상하다고-바튼이 보기에는- 할 수 밖에 없는 차량들이 늘어서 있었다. 몇몇은 넝마주이같은 옷을 입고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콘서트장 건물 주변에는 그야말로 수상한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다. 바튼은 점점 더 당황해하는 눈빛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연인은 이런 광경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계산을 치르고 있었다.
"저기 로키, 여기 정말로-"
"나가지."
로키가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기타소리가 들려왔다. 바튼은 순간 자신이 있는 곳이 과연 로키가 말한, 고풍스럽고 일국의 왕비가 제일 좋아한다던 국민밴드의 콘서트장인가를, 그제서야 의심하기 시작했다. 둘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기타소리를 제외한 사람들의 소음소리가 일순간에 멎었다. 그들은 정장을 차려입은 두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며 누구인가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바튼은 마른 침을 삼키며 로키의 곁에 붙었다. 이 남자는 이런 순간에도 뱀처럼 여유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로키가 천천히 콘서트장을 향해 걸음을 떼자마자 한 무리에서 소리가 터져나왔다.
"요툰헤임공 전하다!"
그 말이 끝나고 몇초의 정적이 흘렀을까,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로키를 향한 함성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하라고 부르는 소리가 커지자 바튼은 점점 당황해하며 로키의 곁에 붙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로키가 왕자란걸 알아서인지는 모르나, 무릎까지는 꿇어도 다가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떻게좀 해봐."
"뭘 어떻게 하라고?"
"여기선 네가 가장 지위가 높잖아."
평상시에는 지위를 숨기고 다니라고 말하는 바튼으로서도 이 순간에는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연인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로키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이 상황이 꽤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제발, 바튼이 슬쩍 그의 옆구리를 치자 그제서야 로키도 제 지팡이를 고쳐잡았다.
"이렇게 이 몸을 성대히 맞이해주다니 기쁘기 그지 없소. 그대들의 그 염원은 잘 알겠으니, 이 몸도 이 성대한 연회를 즐기도록 하겠소! 하지만 그러기 전에 이 연회의 주인공들을 만나보고싶으니 이만 길을 비켜주는게 옯다고 보오."
평소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웅장하게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사귀고난 이후로부터는 절대로 자신에게는 쓰지 않으려했던 고귀한 말투, 낮아진 목소리, 온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듯한 기품에 바튼도 순간 넋을 잃고 연인을 바라보아야 했다. 로키의 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저마다 전하라고 부르며 로키를 향하여 길을 비켜주었다. 아스가르드가 아닌 미국에서는 도저히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바튼은 다시금 자신의 연인이 일국의 왕자이자 고위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해, 가지 않고."
"아... 알았어."
로키는 친히 약혼자의 손을 잡고는 당당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걸음걸이로 콘서트장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튼은 자신을 향해 폭풍처럼 밀려들어오는 시선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연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콘서트장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밴드의 멤버들을 만날 수 있었다. VIP중에서도 VVVIP였던 모양인지는 몰라도, 경호원들-정말이지 바튼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은 그들이 입구에 모습을 보이자마자 그들을 대기실로 보냈던 것이다. 감시가 삼엄한 대기실안에 들어서자, 로키는 공식자리에서나 쓰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은색장식이 치렁치렁 달린, 허술하고 넝마주이같이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은 그야말로 농촌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기쁨과 환호에 찬 눈빛으로 로키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이 말도 안되는 광경에 당황한 것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는 바튼 뿐이었다. 반면 로키는 이런 일이 매우 흔하던지 아주 능숙하게 아스가르드어로 멤버들 하나하나에 인사를 건네었다. 멤버는 대략 6명이었고, 보이쉬한 인상의 여자도 하나 끼어있었다. 인사가 끝나자 로키는 어안이 벙벙한 바튼을 데려왔다.
"부군, 이들은 요툰헤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걀라르호른이라 하오. 왕비전하와 국왕폐하께서도 꽤나 아끼시는 인재들이지. 여기는 자네들도 알고있다시피 곧 나와 결혼할 클린턴 프랜시스 바튼이오, 공작부군이라 불러주었으면 좋겠소."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흔들리는 동공을 진정도 못한 채로, 뱀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요툰헤임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밴드를 소개시켜주는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부군이라니, 손발이 오글거리다못해 그대로 불속에 뛰어들어 한마리 두족류 구이가 되어도 될 판이었다. 물론 로키가 바튼을 부군이라 칭한 적은 몇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는 바튼 자신을 '부군'이라고 부르며 배우자취급을 하지는 않았다.
"부군, 인사하시오. 친히 우리들을 초대해준 사람들이외다."
하하, 바튼은 자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공인으로서 누군가의 앞에 서 있는 상황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누가 무어라해도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3번이나 땄으며, 전세계에 신궁이라고 이름을 알리고 Hawkeye라고 별명까지 붙여졌던 명사수였으니까. 실제로 금메달을 따고나서 몇년간은 스폰서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 아래서 토크쇼라던가 여러 행사에 참여했던 적도 있었다. 그것도 거의 10년전 일이었지만, 이라고 자조하면서도 그때를 떠올리며 살짝은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미소를 지으며 바튼은 입을 열었다.
"요툰헤임공에게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공이 가끔씩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죠. 이번 공연에 저희 부부를 초대시켜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부디 이번 공연이 이미르 산의 축복 아래에서 무사히 치뤄지기를 빌겠습니다."
그는 토르가 가르쳐준 관용어-이미르 산의 축복 아래에서-까지 써가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들은 한낱 미국인인줄만 알았던 예비 부군이 그런 용어까지 쓰자 매우 기뻐하며 바튼의 손을 맞잡고는 열성적으로 흔들어댔다. 하하, 이미 넋을 반쯤 잃은 바튼은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싸인CD-가족들과 나눠들으라고 무려 10장을 받았다-를 챙겨받고서는 경호원의 경호 아래 VIP석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어딘가에 앉아있는가를 알아차린 것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던 순간이었다. 콘서트장은 이제 막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다. VIP석에는 로키와 바튼, 그리고 그들의 경호를 맡은 몇몇의 사람들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헤비메탈 밴드의 콘서트에서 누가 얌전히 좌석에 앉아 음악을 즐기겠는가.
"핫!"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튼은 제 옆에 앉아 코트를 벗어서 경호원에게 전달한 로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전 품위가 넘치던 귀족의 모습을 어디로 내다버렸는지, 상당히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다. 로키, 바튼이 말하려는찰나 스마트폰 안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요툰헤임공에게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
"이러지말죠, 공작님."
로키의 입가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내가 가끔씩 이야기를 했다? 난 분명히 오늘 처음으로 말한것 같았는데."
"그래, 오늘 처음으로 말해줬지. 메탈밴드 콘서트에 간다고 말이야. 난 네가 옷까지 다 열심히 차려입길래, 정말로 클래식,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재즈라던가 그런 쪽인줄 알았지."
"원래 초대받은 콘서트에는 정장을 차려입고 가는게 예의야. 게다가 내 신분을 봐, 여기 있는 사람들을 보라고. 올때도 봤잖아, 내가 어떤 취급인지. 오히려 캐주얼한다던가 노래에 맞는 옷을 입고가는게 더 문제가 아닌가?"
로키의 말에 바튼은 차마 반박할 점을 찾지 못했다. 둘은 이 콘서트의 단순한 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걀라르호른의 밴드멤버들이 국가원수급으로 생각하며 모신 손님들이었다. 그런 손님인만큼 오히려 허술하게 입고 가는 것이야말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자신이 오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진상을 알려주지 않다니, 바튼은 정말이지 제 옆에 앉아있던 약혼자의 순수했던 옛 모습을 그리워했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아냐, 원래부터 이랬어. 원래 요툰헤임 사람들은 장난을 좋아한다지, 특히나 나의 어머니는 장난의 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까지 했다고."
그는 깔끔하게 바튼의 말을 반박하며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스탠딩석에는 이 헤비메탈밴드에 푹 빠진 팬들로 꽉 차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바튼은 살짝 시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능숙하게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연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좋아하던 경제학책을 보던 눈빛이라, 그는 정말로 로키가 이 밴드를 기다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메탈을 좋아할줄은 몰랐는데."
"너도 알겠지만 아스가르드는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에 있어. 오히려 메탈을 좋아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지."
"아무리 그래도 프리가 전하까지는..."
"어머니가 발더를 가지고 있었을 때, 태교용으로 자주 들으셨대."
"....그건 거짓말이지?"
글쎄, 로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는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오고가니 어느새 콘서트가 시작될 때가 되었는지 조명이 어두워지며 멤버들이 무대위로 올라왔다.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환호성이 무대에 울려퍼지자, 갑자기 로키가 바튼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3M 제조 주황색 귀마개였다.
"소리가 클테니까."
바튼은 군말없이 그것을 받아 제 귀에 꼈다. 그리고 이렇게 퉁명스럽게 물건을 내놓는 약혼자를 바라보며, 슬쩍 아주 슬쩍 그의 어깨의 몸을 기대었다. 바튼답지 않은 애정표현에 로키 또한 아무 말도 못한채 그대로 얼어버렸다.
▒ ▒ ▒
공연은 꽤나 괜찮았다. 민속음악을 접목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어서, 정말로 바이올린이 북유럽의 전통적인 맛을 살리고 있었다-라고 로키는 표현한다.-. 거기에 역시나 유명한 밴드답게 악기 하나하나의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물론 그중에서 제일인건 보컬의 미친듯한 노래로 그가 무언가를 입밖으로 내뱉고 기타가 화답하면 이 메탈헤드들은 전부 다 영혼이 빨린 듯 소리를 질러대고 긴 머리카락을 흔들어댔다. 바튼은 어찌보면 로키가 머리를 자르지 않은게 이것때문인가, 라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로키는 그런 웃긴 생각은 눈치채지도 못한 채, 바튼이 봐도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노래에 푹 빠져있었다.
"잠깐, 로키. 나 화장실좀 다녀올게."
"곧 노래 끝날텐데 그때가지."
"미안, 곧바로 올게."
아무래도 아까 맛있다고 와인을 들이킨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바튼이 급히 자리를 뜨자, 약혼자의 체온으로 덥혀진 빈 의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연주에 눈을 돌렸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자 목이 말랐다. 그는 어째서인지 바튼에게만은 자신의 음악취향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북유럽왕족의 일원으로서 그가 메탈을 좋아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오딘도 프리가도, 그의 형인 토르도 좋아했고 그도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바튼이 잔잔한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되자, 이 시끄러운 음악들을 차마 밖으로 내보이지 못하였다.
그래서, 연인과 함께 이 음악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기뻤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취향을 드디어 바튼에게 드러냈다는 것이 매우 후련하고 시원하다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마치 형에게 커밍아웃, 즉 바튼과 사귀고있음을 밝혔던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바튼은 그다지 썩 내키지는 않아했지만 같이 음악을 즐겨주고 있었다. 깊은 함성에, 진한 기타음색과 비트에 그런 생각까지 곁들어져 음악의 세계에 빠져있던 순간이었다. 결국 노래는 끝을 맺었고 잠시 멤버들이 쉬는 투로 생수를 들이마시다 스탠딩석으로 던졌다. 로키도 잠시 쉬어간다는 의미로 생수를 들이켰다. 멤버들은 각자 돌아가며 멤버소개와 함께 간단한 잡담을 나누었다. 관객석에서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군데군데 터져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잡담을 나누었을까, 리더를 맡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우리의 고향 요툰헤임의 주인이신 로키전하와 부군내외가 납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예 공연전부터 짰던지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로키가 있을 VIP석으로 비추어졌다. 갑작스런 관심에 로키는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관객석과 무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절반은 아스가르드인일 관중들은 고국의 둘째왕자님을 향해 환호성과 휘파람을 날려댔다.
"그런데 부군전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잠깐 자리라도 비우셨습니까?"
그러자 로키는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테니 손으로 복도쪽을 가리켰다. 모두들 그 제스처에 수긍했는지 다시금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분위기는 로키에게 상당히 친절하게, 그리고 열광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에서는 대대로 왕족의 인기가 높았고, 현 국왕인 오딘이 왕위에 오르고나서는 절대적인 충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충성스러운 관객들을 바라보며 다시 손을 흔들었다. 로키를 부르는 소리가 높아져 메아리가 울리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더러운 호모새끼!!"
방금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일던 환호성이 마치 거짓말처럼 갑작스레 가라앉았다.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욕설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로키도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이내 상황을 깨닫자 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손에 대려다가 간신히 떨어뜨렸다. 엄청난 분노에 머릿속에서 입에서 나갈 말을 처리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로키와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린 사람들에 의해서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바튼은 세면대에서 손을 씼으며 무대에서 전해지는 함성에 얼굴을 찌뿌렸다. 로키가 건네어준 귀마개는 확실히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는 유튜브로나 접해봤던 메탈이 이렇게 시끄러운 음악인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선수시절 그것만 주구장창 듣던 동료가 왜 그 음악을 들으며 평상심 훈련을 했는지 알것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니 지금 들리우는, 그리고 계속해서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분노에 찬 함성소리도 그가 듣기에는 엄청난 환호성으로 들릴 수 밖에. 물론 바튼은 최대한 로키의 취향을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다시 주황색 귀마개를 귀에 꽂고 음악을 감상할 수 밖에. 그는 주머니에서 아직도 체온에 따끈따끈한 귀마개를 꺼내었다. 자신의 친절한 약혼자는 이번에도 말없이 제 약혼자를 배려해주었다. 그게 좋은거라고, 차마 밖으로는 내뱉지도 못하는 칭찬을 속으로 계속하며 그가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절대로 컨셉은 아닐 것 같이 찢긴 천들-옷이라 할 수 없었다-을 걸친, 그리고 온 몸과 얼굴에 멍이 현재진행형으로 자리잡은 남자가 갑작스레 화장실문을 박차고 안에 들어왔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수상한 정장차림의 남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수상한 남자가 누군지도 몰랐고, 또한 그런 것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바튼을 향해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올리는, 즉 침묵하라는 제스처를 보인뒤 비어있던 칸에 곧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금쇠가 잠기자마자 분노에 찬 사람들 열댓명이 화장실로 쳐들어왔다.
"앗... 부군전하!"
"네."
바튼은 당황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방금전 들어왔던 남자는 이 무리들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행여라도 이 무리들이 남자가 들어간 곳을 알아차릴까, 흘낏 보는 일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혹시 수상한 남자가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수상한 남자라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놈이 공작전하와 부군전하를 욕봤습니다. 개새끼, 어서 잡아다 족을 쳐야-"
"사지를 분해해버리자고!"
바튼이 듣기에도 상당히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왔다. 관객들은 정말이지 아스가르드 왕국의 충실한 국민들이었고, 그들은 제 왕자님을 욕보인 개새끼를 찾아 뒤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콘서트에서 그런 무례한 발언이 터져나온 것에 진노한 멤버들까지 화에 가득 찬 상태였다. 바튼은 만약 이대로 이 사람에게 남자를 넘기다가는, 정말이지 최악의 상황이 뉴스에 실릴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고보니, 아까 한명이 급하게 들어오더군요."
"그리고는요?"
아마 범인은 꽤나 심장이 떨려서 정신차리기로 힘들거라는, 로키나 할법한 잔인한 생각을 하면서 바튼은 살짝 시간을 끌었다. 벌써 남자들의 시선은 닫혀있는 화장실칸으로 향해있었다. 바튼은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반쯤 열려진 창문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서 뛰어내리던데요."
물론 그들이 위치한 화장실은 2층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혈기왕성한 남자들이었던 바, 그들은 자연스레 창문가로 몰려들었다가 범인이 바깥에 있다고 소리치는 소리와 동시에 화장실에서 빠져나갔다. 테스토스테론을 무장한 이들이 좁은 화장실에서 나오자 바튼은 심호흡을 하고서는 복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추격자는 이정도인 모양인지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기타소리와 드럼소리도 다시금 울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아요,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벌개진 얼굴로 화장실 칸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서 정말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바튼을 바라보았다.
"설마...당신이..."
"아직 예비입니다, 결혼식은 안했습니다."
부디 부군이라 부르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으로 말을 내뱉자 그의 표정이 더욱 더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정말로-이 방금전까지 자신이 욕했던 상대라는 것에 크나큰 치욕과 죄책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리고는 감사하다고 몇번이나 소리치고 일본식으로 도게자까지 하고나서야 급히 밖으로 도망쳤다.
"로키, 무슨 일- 정말로 무슨 일이야?"
"왜 이제야 온거야, 정말로 사람을 보내려고 했다고."
로키는 불안한 눈으로 바튼의 손을 거머쥐었다. 로키의 손은 상당히 차가워져있었다.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주었구나 싶어 바튼은 차마 손을 뺄 수 없었다. 둘은 천천히 좌석에 앉았다. 그때까지 로키는 한쪽 손을 바튼에게서 빼지 않았다.
"걱정마. 큰 일 없었어."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얘기잖아."
로키는 바튼이 총격을 받았던 그 날, 그리고 그가 자신을 그리워 자살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유난히 바튼을 아끼고 있었다. 가끔씩은 그게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나 이렇게 걱정과 애정을 받는다는걸 느끼면 그런 것도 풀리기 마련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막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그러던데."
"...어떤 개자식이 우릴 능멸했어."
로키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운 분노에 쌓여있었다. 바튼은 로키가 평상시에는 전혀 내뱉지 않는 욕설을 듣고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깨달았다. 지팡이를 붙잡은 한쪽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역시나, 방금 전 그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려주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다.
"그거 참 엄청났겠네."
"만약 잡히면 고소부터 때려줄거야."
바튼은 로키의 유능한 전담 변호사'들'을 떠올리며-그들은 로키와 바튼의 법적인 혼인관계성립여부를 조사했다.- 정말로, 정말로 그 남자를 무사히 도망치게 한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아직까지도 분노에 떨면서, 좋아하는 노래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남자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행여나 그 남자가 걸리더라도 훈방정도로 끝날 수 있게 말이다.
"그래서 이게 뭐야?"
콘서트가 끝나고 몇주일이 지난 뒤였다. 바튼은 갑작스레 로키가 들고온 상자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로키는 가볍게 걀라르호른의 신보라면서 거실에 들고오더니 곧바로 상자를 뜯었다. 과연 상자안에는 음악 CD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얼마나?"
"50장. 저번에 우리가 갔던게 마음에 들었던지, 특별히 아스가르드 왕실을 기념하는 노래들이 있대. 발더 탄생축하곡, 형 결혼축하기념곡, 우리 결혼식때 쓰라고 노래가 두개."
"두개?"
바튼은 CD하나를 들어올려 뒤의 곡목을 보았다. 아스가르드어 제목 뒤에 영어로 제목이 읊어져있었는데, 딱봐도 오글거리는 제목들이었다. 그나저나 이 많은 CD들을 도대체 어디에다 보낸담, 보낼 사람들을 떠올리며 다시 CD를 밀어넣었다.
"응. 맞아, 보여줄거란게 뭐야?"
아, 맞다. 바튼은 급히 거실 한켠에 있던 상자를 가지고와서 포장을 풀었다. 분명 자신에게 온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이 선물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보기에는 사탕같아보이는 포장지에 겉면에는 아스가르드어로 무언가가 적혀져있었다. 겉면의 사진에는 검은색의 마름모꼴 사탕이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
로키의 얼굴에 급히 화색이 돌았다. 그는 곧바로 주인의 허락도 없이 포장을 뜯고서는 안에서 사진 그대로의 모습을 한 사탕 두어개를 꺼내고는 곧바로 입에 집어넣었다. 케이스 안에서는 수상한 냄새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바튼은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로키의 입가가 사악하게 올라가자 곧바로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렸는지, 이 사악한 장난의 신은 곧바로 바튼의 뒷목을 잡더니 입술을 맞대었다. 분명 매우 로맨틱한 키스의 순간이건만, 혀와 함께 들어오는 짜고 매운 맛의 향연에 하마터면 약혼자의 혀를 씹을 뻔 했다. 그는 이 말도 안되는 맛에 기겁하며 생각했다. 이 기묘한 사탕은 사실 그가 콘서트장에서 구해주었던, 욕을 하였던 남자가 보내준 것이었다. 로키는 바튼이 사탕을 뱉지 못하게 계속해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바튼은 그 때, 그 남자를 구해준 것을 맹렬히 후회하였다.
시작은 메탈로 끝은 살미아키로, 그야말로 북유럽투어.
걀라르호른의 음악은 코르피클라니의 보드카정도로 생각하면 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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