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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바튼 _ 차가운 지옥속에서 _ 요툰헤임연작 02 본문

AVGS/요툰헤임 연작

로키바튼 _ 차가운 지옥속에서 _ 요툰헤임연작 02

rabbitvaseline 2015. 8. 20. 04:14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클린트는 사고가 일어나고 몇달정도는 상당히 침울해져있었고 악몽에 시달리곤 하였다. 행여나 로키가 돌아올까 집의 문도 잠그지 못하고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그를 내 집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강제로 수면제를 먹이고 재웠다. 브루스는 내 행동에 꽤나 많은 반감을 드러냈지만, 그도 클린트의 상태를 보고는 곧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이제서야 클린트는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 예전에 생활대로-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가끔씩 커뮤니티 칼리지에 가서 수업을 듣곤 하면서 클린트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는 로키의 나라인 아스가르드의 언어를 배우고는 학생들 앞에서 몇글자 적어보기도 하였다. 뜻은 장난의 신이라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그 때 나는 알아차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마음은 속에서부터 시꺼멓게 썩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겉의 상처를 치료해봤자, 속은 곯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날따라 클린트는 술을 많이 마셨다. 예전의 동료들끼리 가진 모임은 꽤나 길어져, 새벽 3시를 넘기고 나서야 그는 귀가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 집 문 앞에 쓰러질 수 있었다. 나는 그날 그의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취기에 욕을 하면서 그의 집 문을 열었다. 클린트의 집은 몇달 전과 달리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집에 남아있던 로키의 물건들도 버렸으며, 가구 몇은 새로 장만하기도 했다. 칙칙한 커튼 대신 밝은 색의 커튼을 달았으며 카페트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그렇게 그를 그렇게나 괴롭혔던 연인을 잊어가는 듯 했다.

클린트를 침대에 눕히자 그는 나를 향해 목이 마르다고 하였다. 목이 말라, 차가운 물이 필요해. 나는 그런 술주정에 실없이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도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어서, 깔끔한 청년의 자취집 주방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나는 클린트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기 전까지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큰 소리를 내며 냉장실의 문을 닫았지만 여전히 코에는 엄청난 악취가 서려있었다. 너무나도 지독해서 마치 그리움과 같은 그런 악취가. 순간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고는 바튼이 누워있을 침대쪽을 바라보자, 어느새 일어났는지 그가 주방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뭐야? 클린트, 이게 뭐냐고?"

"냇, 그냥 모른척 해줘."

"어떻게 모른 척을 해? 너 다 알고 있었지? 냉장고가 이모양이라는거. 그동안 이러고 어떻게 살았어?"


냉장고 속에는 썩은 음식물로 가득 차 있었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음식물이었던 것들이 접시에 올려진채, 봉지에 담긴 채, 밀폐용기에 담긴 채 냉장고 속에서 그의 마음처럼 부패해가고 있었다. 바튼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넋이 나간, 당장에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그냥 놔두면 돼."

"그 새끼 때문이야?"

"냇,"

"설마, 그자식 사고난 뒤로 한번도 손 안댄거니? 씨발, 벌써 9개월은 지났어!"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의 초점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나는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팔에 있던, 아물어서 이제는 흔적만 남아있던 자해자국이 더욱 더 내 가슴을 쓰리게 했다.


"아니라고 해줘, 그냥 귀찮아서 그런거라고 해줘. 너 왜 그래? 그동안 잘 해가고 있었잖아. 클린트, 그 새끼 다 잊고 새로 시작하겠다고 그랬잖아."

"미안해 냇, 그런데 그게 안돼."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났어. 너도 가서 다 알잖아. 너도 가서 다 보고 왔잖아!"


내 눈가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바보같은 클린트, 바보같은 클린트 바튼. 개새끼 로키 오딘슨. 어째서 그는 클린트에게 그런 주박을 걸었던가.




로키 오딘슨의 사고소식이 전해진 건, 클린트가 그 개새끼가 청혼했다는 걸 알린 직후였다. 그의 영지 내에 있는 산에서의 눈사태, 다행히도 그의 형인 토르 오딘슨은 산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대로 차가운 눈더미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수색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수색도 사실은-


"그 자식은 죽었어. 죽었다고.... 찾아봤자 시체밖에 나오지 않을거야. 오, 클린트."


클린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순간 욕지기가 일었다. 나는 차마 욕을 내뱉지 못한채로 거칠게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이대로 가다가 클린트는 로키 오딘슨의 잔해에 파묻혀버릴 것이 뻔했다. 가운데에 있는 다 썩어빠진 고깃덩어리가 담긴 접시에 손을 댔을 때였다. 갑자기 클린트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안돼, 냇. 안돼."

"이거 놔! 지금 냉장고를 통채로 버려도 시원찮을 판에 이게 다 뭐야? 이것들 다 갖다 버려야 한다고!"

"냇, 제발!"


그는 기필코 그 고깃덩어리였을 무언가가 담긴 접시를 붙잡고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에는 진한 슬픔과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거 놔, 클린트!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그 자식은 죽었다고!"

"그건 로키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거야!!"


나는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냉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악취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문을 다시는 열 수 없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울고 있었다.



그는 연인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부터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는데.


"오, 클린트. 미안해, 미안해."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마치 풍선이 갑자기 터진것 같은 모양새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다시금 터져나왔다. 나는 그를 안고 정말로 머리가 아프도록, 눈물이 마를 정도로 울었다. 둘의 흐느끼는 소리가, 악취가 가득한 주방에서 격하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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