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ANDALIEN
비전완다 _ 죽은 왕자를 위한 파반느 1. 본문
갈색머리에서 이어집니다.
하늘에는 잔뜩 구름이 끼어 잿빛이 되어 있었다. 비는 오지 않을거라는 예보는 실수였는지 빗방울도 아주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비전은 창 너머 활주로가 점점이 짙은 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일순 바람이 거세게 불어 활주로에 서 있던 나타샤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구름 사이에서 완다 막시모프를 태웠을 퀸젯이 천천히 내려왔다. 천천히 뒷문이 열리자 머리를 한쪽으로 가지런히 묶은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평상시 좋아하던 짧은 치마에 오버니삭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2달전, 휴가를 떠났을 때보다는 많이 처연해지고 차분해진 것 같았다. 그는 비를 맞으며 퀸젯에서 걸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당장에라도 달려가 우산이라도 씌워주고 싶었지만, 절대로 활주로에 나타나 완다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나타샤의 명령에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명령에 불만을 가지지 않은건 아니지만, 그로서도 그 명령이 상당히 탁월한 선택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완다 막시모프가 휴가를 떠났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그는 묘한 그리움이 뒤섞인 눈으로 완다가 환히 웃으며 나타샤를 반기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자신이 있을 컨트롤타워로 향했을 때, 그리고 수백미터 거리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어째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왼쪽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은 마치 송곳으로 그의 장기를 찌르는 듯했고, 그로서도 처음 느껴본 것이었기에 자칫하다가 신음을 내뱉을 뻔 했다.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쥐어매고선 그녀가 천천히 본건물로 들어오는 모습을 눈으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쫓았다.
그가 꿈을 꾼다는, 안드로이드로서는 이상한 일을 겪기 시작한 건 완다 막시모프가 뉴욕에 귀환한 바로 그날부터였다. 물론 그는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있는 생명이 꼭 해야 하는 수면이라는 행위를 굳이 그가 고집했던 것은, 그 역시 뇌에 쌓인 정보들을 따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딱히 그 시간에 깨어있어봤자 혼자 멀뚱히 침실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더 이해하고 싶었다. 비록 음식섭취는 하지 않겠다지만, 수면이라는 행위만큼은 따라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인간의 행위를 따라한다 하더라도 꿈에 대한 것만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가 꾸는 꿈이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그가 겪지 않은 일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악몽을 꾸는 경우는 없었다. 그는 늘 자신이 꾸고 싶은 내용만 머릿속에 나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왼쪽 가슴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과 함께 방금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반추하였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당황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꿈의 풍경들이 계속해서 펼쳐졌다.
"저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였는지는 모르나 자신이 완다에게 이별을 고할 때의 일들이 스크린에 영사되듯 제 앞에 펼쳐졌다. 완다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당황해하는 표정을 뒤로 하고 그는 다시금 기계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당신에 아닙니다, 정말로 당신에 대한 모든 사랑이 사라져버린 것 뿐입니다. 완다, 이 관계는 당신에게나 나나 그다지 좋은 관계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가장 좋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날,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파일이 삭제되듯 완다에 대한 사랑이 사라져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동료로서의 애정이었을 뿐, 연인으로서 느꼈던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애매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은 완다에게도 좋을 수 없었다. 그는 단번에 이 관계를 끝내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을 일방적으로 완다에게 통보하였다. 이때의 일들은 당시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펼쳐지는 영상이, 그로서는 꿈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너지는 완다를 뒤로 하고 복도로 나왔을 때, 심장을 강하게 쥐어매는듯한 통증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머리가 과부화되어 생각을 하기도 힘든 정도였다. 무언가 속에서 얹힌 것 같아서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숙소의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가 좋아하여 몇번이나 머리카락에 발라주었던 장미향유의 향기가 제 앞에 펼쳐졌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물론 그에겐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는 그날 완다에게 이별을 고하고, 살짝은 착잡하면서도 시원하고, 무너져내린 완다에게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고는 숙소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자신의 두통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 즉, 급격한 가슴통증이라던가 장미향유로 인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눈물을 쏟아내는 일은, 그의 머릿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일이었다. 절대로 없었을 일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것, 이것이 그에게 꿈이 아니면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그는 다시금 제 머릿속을 파고들어오는 향기를 애써 차단하고서는 빈 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심장의 통증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그동안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일들-꿈이라던지 가슴의 통증이라던지-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며 완다가 자고 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아 그는 눈을 감고 강제로 수면에 돌입했다.
▒ ▒ ▒
비전과 완다의, 정말로 오랜만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비전은 되도록이면 완다와 접촉하지 말하줬으면 한다는 나타샤의 진심어린 당부에 일부러 CCTV를 뒤져가면서 완다를 피해다녔다. 어벤져스 멤버들도 행여나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여 일부러 완다를 백업으로 빼놓고 둘이 만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움직였다. 완다의 곁에는 나타샤가 붙어있었다. 그녀는 완다의 곁에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누군가를 진정시키는 일은 이제 도가 텄다고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어려있었다. 그렇게나 애를 써서, 어떻게든 둘의 만남을 인위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이뤄지게 하려고 노력을 했건만 가끔씩 신도 변덕을 부릴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날도 그는 악몽을 꾸었다. 그는 완다와 헤어지기 전, 자신을 괴롭혔던 두통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는 계속해서 자신의 뇌를 파먹고 있던 개미떼의 정체는 울트론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그 사실에 매우 절망했다. 그걸 비전 자신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절망 뒤에 자리잡은 것은 그가 사랑해왔던 무수한 생명들이었다. 3년여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들에게서 감정을 배워왔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풍요롭게 자신을 내리쬐었던 햇빛이, 모두에게 웃음을 전해주던 꽃과 나비가, 그를 둘러싼 모든 자연 그 자체가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고 기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이상하게도 한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두꺼운 쌍커풀, 초록색 눈동자, 구불거리는 길다란 갈색 머리카락.
완다.
그의 가슴에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 솟아나오다 급기야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은색 어둠에 집어삼켜지자마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가슴에서 예전과 같은 저릿한 통증을 느끼고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매우 이해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말단신경 하나하나가 은색 어둠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느꼈던 그 추위와 고독, 두려움이 지금까지도 느껴져서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매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악몽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악몽이었던걸까.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일에 그는 도저히 느껴서는 안될 구역질마저 느꼈다. 애초에 먹는 것도 없는 안드로이드일 그가 이렇게나 극심한 스트레스에 집어삼켜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다시금 그 때의 두통이 도지는 것 같은 착각속에서 그는 CCTV를 확인할 새도 없이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도 익숙해졌던 장미향유의 냄새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놀란 눈으로, 잠옷차림의 완다 막시모프가 보고 있었다.
그는 순간 어떤 말을 내뱉어야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평소처럼 안녕하십니까, 라고 아니면 밤이니 이 늦은 시간에 무얼 하는거냐고 물어야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우연처럼 일어난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2달전, 일방적으로 완다에게 이별을 통보해 그녀를 절망시켰던 그 순간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완다는 놀란 비전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놀라다가, 이내 진정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마치 어딘가가 빠져버린 미소였지만 비전의 눈에는 그 미소마저 이상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안녕."
그는 순간 쉬지도 않는 숨을 격하게 내쉴뻔 했다. 왼쪽 가슴이 일순간 엄청난 기세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되는 심장박동에 당황해하면서도, 간신히 통각센서를 끄고 그녀에게 인사하였다.
"오랜만입니다, 완다."
애써 표정을 정리하자 완다의 입가에 얽혀져있던 미소가 이내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 한켠으로, 마치 유령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비전은 자신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뿜어져나오던 장미향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야 진정된 심장을 부여잡고는 그녀가 사라진 어둠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가 내뱉은 인삿말, 단 한마디에는 향기가 어려있었다. 그는 그 향기를 몇번이고 또 몇번이고 되새기다가 다시 정신을 되찾고서는 황망한 눈을 띄었다. 화장기없는 창백한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가, 얼굴이, 그 핏기없는 미소를, 장미향기를 계속해서 쫓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몇년 전, 그를 사로잡았던 그녀의 모든 것들이었으니까.
다음 날, 완다 막시모프는 정식으로 어벤져스에 복귀하였다. 예상대로라면 완다의 복귀식에는 비전도 참가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타샤는 비전에게 완다와 만나도 된다는-단 둘만이어서는 곤란하지만-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와의 만남을 거부한 것은 비전이었다. 비전은 급히 검사해야 할 항목이 있다는, 나타샤가 들어도 거짓말일게 뻔한 핑계를 대고는 그 자리를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나타샤는 혀를 찼다.
"그렇게 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야."
"네, 압니다, 나타샤. 하지만 저는 정말로 스타크 타워에 볼 일이 있는 것 뿐입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만간 완다와의 만남을 주선해볼테니 정신을 똑바로 잡으라는, 그야말로 안드로이드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말을 꺼내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사라졌다. 나타샤와 헤어지자마자 비전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 곧바로 건물을 나섰다. 행여나 어제처럼 완다와 마주칠까, 싶어 그는 아예 벽을 통과하여 타워로 향하기로 하였다. 그녀가 있을 본부 건물이 점차 점처럼 작아지는 와중에도, 그의 한쪽 머리에는 그녀가 모두와 악수를 하고 있을 복귀식의 CCTV 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토니가 만들어준 완다의 전투복은 나타샤의 평으로는 살짝 변태적인 취향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완다에게 어울렸다. 활동성과 심미성이 조화된 붉은 코트와 코르셋, 가죽바지는 그녀의 아름다운 체형을 드러내면서도 그녀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반장갑은 또 어떻던가, 비전은 그녀와 손깍지를 낄때마다 반장갑이 느껴지는게 아쉬우면서도 좋았었다. 어째서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걸까, 그는 이 혼란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견디기도 어려웠다. 계속해서 CCTV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완다의 모습을, 밤에 창백하게 미소짓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는 이런 감정들이,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의 이유에 크게 당황하였다. 예전에 매일 그녀의 뒤를 쫓고, 그녀의 모습이 그의 전부를 채웠던 적도 있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때가 있었다.
어느새 완다는 모두와의 악수를 마치고는 훈련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기묘하게 구부러지더니 붉은색 선들이 동그랗게 모이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비행도중 멈춰서서 그녀가 계속해서 훈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시 왼쪽 가슴이 저릿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분명히 단편으로 끝내려고 햇는데 화수가 늘어나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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