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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ANDALIEN
나타샤의 숙소 거실 한켠에 있는 책장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은 주로 첩보나 범죄를 다룬 스릴러물이었는데, 시리즈를 줄지어서 세워놓았다. 그리고 일과 관련된 역사관련 서적이라던지 언어에 관련된 책들과 테이프들도 가득했다. 배너는 그녀의 책장을 눈으로 흘겨보다가 아랫줄에 자리잡은 DVD로 시선을 옮겼다. 꿇어앉아 바라보니 소설취향과 비슷하게 스릴러와 호러영화가 가득이었다. 히치콕의 고전 사이코라던지 미스트, 테이큰이나 제이슨 본 같은 시리즈도 있었다. 정말 스릴넘치는걸 좋아한다고 시선을 옮기려는 찰나, 피냄새가 나는 DVD무리속 이질적인 무엇이 그의 눈길을 빼앗았다."..오.""뭐해요, 안오면 그냥 넷플릭스에서 고를거에요."소파에 반쯤 누운 나타샤가 타박을 보내자 배너는 ..
완다 막시모프는 지금 곤경에 처해 있었다. 지금 그녀의 앞에는 살짝 짜증을 부리고 있는, 옛날 그녀가 인생을 또 한번 망쳐주었던 인물이 서 있었다. 브루스 배너, 그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완다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완다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타워 창 밖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거리에는 연인들이 손에 손마다 선물상자와 선물봉투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하트모양 탈을 쓴 사람도 보였다. 바깥의 날씨는 2월답게 쌀쌀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곧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까지 있었지만 연인들의 날에만큼은 전혀 방해가 되지 못할 사항이었다. 그랬다, 완다 막시모프가 쭈뼛거리며 배너의 '부탁'을 듣고 있던 날은 2월 14일, 연인들을 위..
굳이 집안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더운 공기를 뚫고 오두막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4WD의 바퀴자국이 젖은 땅바닥 위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에이프릴의 말로는 아마도 다시 돌아간 모양이라고 하였지만, 깊게 파인 자국은 페달을 밟는 배너의 심장에 박차를 가한 듯 했다. 오두막 근처에 도착하여 간신히 숨을 고르자 보인 것은 우선 엉망이 된 울타리와 마당이었다. 울타리는 이미 여러 조각으로 분해된 뒤였고, 마당에는 쓰레기와 유리조각이 난무했다. “...근처에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에이프릴은 급히 주변을 살피며 배너에게 말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방안의 풍경은 더욱 살벌했다. 노트에 정리된 그의 자료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고 그 위로 발자국이 가득했다. 비커니 샬레니 하는 유리로 된 실험도구들은 이미..
신년을 기념하는 파티였다. 평소 A타워에서 여는 파티와는 다르게 미국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말리부 저택에서 한해의 마지막을 보자는, 가히 토니 스타크답지 않게 낭만적인 기획이었다. 그는 주최자와 함께 미리 저택에 가 있었고,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퀸젯으로 말리부까지 이동했다. 그들은 져가는 해보다 먼저 저택에 도착하였다. 나타샤, 그녀를 보자마자 남자는 반갑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고서는 샴페인잔을 건네었다. 태양은 그 커다란 몸을 우아하게 천천히 바다속으로 눕혔다. 그 모습에 아름다운 자태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곧 해가 떨어지는군요.""네, 착한 어린이는 잘 시간이에요."그녀는 근처에서 꼬깔모자를 끼고서는 끼익거리며 기웃거리던 더미를 흘낏 쳐다보며 말하였다. 그 말에 그는 웃음을 터..
뉴욕의 바람이 점점 열기를 띄워가는 6월의 어느 하루, 브룩클린 외곽에 위치한 웨딩숍에서는 한참 난리통이 벌어져 있었다. 설립한지 50년이 다 되어간다는, 나름 미국에서도 고풍스러운 결혼 의상을 자랑하는 숍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이유는 며칠전 어느 부자가 전세를 냈기 때문이었다. 숍의 오너인 제니퍼는 40대를 넘긴듯한 중년의 남자가 30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슈가대디들과 그들의 어린 연인들을 지겹도록 보았으니 그정도 나이차는 애교였던데에다 둘은 진짜로 연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둘이 아이를 세명이나 데리고 온 것도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형과 누나가 유모차에서 곤히 자고 있는 동생을 보는 것이 꽤나 귀여웠던 데다가, 그녀의 숍에 오는 손님들 중에는..
메리켈의 집 주변에 형성된 군중을 보자마자 배너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심장을 진정시켰다. 라브의 연락에 반신반의해하며 메리켈의 집에 도착한 것이 방금 전이었다. 처음 그녀의 연락을 받았을 때에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웃으며 넘어가려 했지만,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결코 농담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메리켈의 엄마, 즉 사비나씨와 외국인이 다쳤다, 라는 말에는 어딘가 이해가 가지 않은 점이 있었으나,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했을 때에는 도저히 그런 점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그는 왕진가방도 냅둔 채로 낡은 자전거에 올라탔다. 나타샤가 다쳤다는 소리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미친듯이 페달을 밟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은 집 주변에 밀집된 군중이었다. ..
기분이 더럽다못해 시궁창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단정하다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검은 정장을 벗어던지고는 속옷차림으로 보드카를 병채로 들이마셨다.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며 모든 일들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였던 그녀였지만, 이 숙소, 집 안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들을 던져버려야했다. 독한 보드카가 한모금 넘어가자 다시 한모금을 넘겼다. 알콜이 쓰라린 통증을 남기며 식도를 넘어갔지만 그녀에겐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멀쩡해지면서 자신의 실수가 머릿속에서 다시금 되새겨지다가 바스라졌다. 그 때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작전은 예상치 못한 요소들때문에 길게 늘어져갔다. 보다못한 나타샤의 후배는 자신이 상황을 보고 오겠다면서, 그녀가 채 만류를 하기도 전에 바깥으로 나..
비행기는 2시간이나 공항에 내리지 못했다. 고질적인 눈보라는 계속해서 남자가 탄 비행기를 상공에 잡아두고 있었다. 슬슬 위험할 것 같다는 기장의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말하였다. 그 말에 친구가 빌려주었다는 전용기는 다시금 하늘을 돌아야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자신들처럼 착륙하지 못하는 항공기들이 갈 곳을 잃은 채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구름 아래에서는 눈들이 이리저리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흐느끼고 있을 것이었다.“착륙허가가 났습니다. 이제 착륙하겠습니다.”방송이 끊겨진 것과 동시에 하강감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는 눈을 감고 손안에 쥐고 있던 종이쪽지에 힘을 주었다. 종이는 구겨지겠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무의미한 숫자와 글자의 조합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보..
정말로 오랫만의 늦잠이라고 협탁 위 시계를 확인했을 때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던 중이었다. 나타샤 로마노프, 아마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스파이로 불릴 그녀는 잠이 덜 깬 졸린 눈으로 낯익은 하얀색 천장을 바라보았다. 환기를 시켰는지 공기는 서늘하다못해 차가웠고 건조해서 얼굴의 피부가 당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벌써 11시가 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대에서 일어나려했지만 피곤에 삐걱대는 몸이 온열매트에 익숙해져 그것을 거부하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쉰 뒤, 어젯밤까지만 해도 옆에서 같이 자고 있던 사람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시간이 시간이니 지금은 연구실에서 연구라도 하고 있을 터였다. -똥땅-협탁 위에 올려져있던 휴대폰 액정에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알람이 뜨자,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
남자가 뒤집어쓴 모포는 흙투성이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는 그걸 아랑곳 않는다는듯, 그 속에 편안히 몸을 눕히고는 계속해서 헤드폰 너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굵직하게 자신의 사랑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반쯤 취해있을 즈음, 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그 헤드폰을 뺏어 자신의 머리에 씌웠다.“나타샤?”여자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남자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자가 듣던 음악은 재즈음악으로, 아주 옛날에 임무로 잠입했던 바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이렇게 음반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바에서 제일 잘 나간다던 흑인 여자가 부른 것을 직접 들었는데 색소폰 소리와 여자의 허스키한 목소리만 생각났을 뿐, 자세한 가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목조차 알지 못하는 노래는 어느새 클라이막스를 향해 ..